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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평점 :
인생을 참으로 쉽게 풀어가는 이들도 있구나 싶다. 확률같은 건 안중에 없이 무조건 들이대고 보자는 그들의 인생 속엔 절망적인 상황이란 발붙일 수 없는 듯하다. 분노가 휘발된 배신들, 밋밋하게 희화되고 희석된 사랑들, 발 빼고 싶으나 휘말리는 인연의 고리들. 작가가 가볍게 꼬인 필터를 들고 그들을 통과시키고 있다.
몇 학년 몇 반 아무개가 여학생하고 소보로 빵과 모찌를 나눠 먹던 중 학생주임에게 뺨을 맞고 개처럼 낑낑대며 끌려 나왔다고 교내 방송으로 전교에 그 사실이 알려져 창피를 당하기 마련이었다. p28
어쩜 여학생들은 '진짜 진짜 좋아해'의 임예진처럼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p59
그들은 사회정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삼청교육대로 붙잡아갈 인간 불량품을 색출하는 중이었다. p107
해외 펜팔,문예반,국상, 대통령 유고,문민 정부 등 70,80년대 그 시대의 마디를 짚어갈 때마다 각 시기의 나를 회상해 보는 보너스를 받았다. 만수산 4인방과 꼭 들어맞는 시대를 살아낸 것은 아니지만 등장하는 소재들이 변두리 기억을 건들일만큼은 내 성장와 근접해 있다.
신문에 연재했던 중편을 장편으로 고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작가의 말을 읽어서인지 중간 중간 추가된 부분이 혹 이곳일까 라는 점검을 수시로 하게 되었다. 3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분석하지 못했는데 다시 읽게 되니 비로소 눈에 들어 왔다. 243 페이지로 장편이라하기엔 좀 짧은 것 같고 '태평성대'부분은 급하게 마무리짓고자 한 것인지 작가의 다른 의도였는지 생략하듯 서술되어 그 전까지의 서술과 속도,문체 등이 많이 달랐다. 짧은 지면에 많은 시간을 우겨넣은 듯한 아쉬움이 고였다. 전체적으로 희화됐어도 냉소적인 목소리로 자분자분 설명되었건만 마지막 부분엔 왠지 급했다.
형준의 신중함과 완벽주의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매사에 부정적이고 진취성이 부족하다는 주변의 평가는 내가 느끼는 관계의 서늘함과 흡사했다. 내가 가장 조바심 났던 것은 누군가의 야반도주도 느닷없는 죽음도, 두 눈 버젓이 뜨고 내 밥그릇을 갈취 당하는 것도 아닌 그들에게 엮여 드는 형준의 인생이었다. 운명을 만들지 못하고 운명에 말려드는 지난한 우리네 삶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