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교수의 양자역학 동영상 시청 과제가 주어졌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초극의 단위가 반드시 존재해, 물질 세계를 규정하는 고정불변의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적어도 양성자 중성자는 고정된 것인 줄 알았는데, 마이너스 전자를 띈 중간자가 발견되어,  중간자가 빠져나와 양성자에 붙기도 하고 중성자에 붙기도 하는 상태가 10에 마이너스 23/초 의 속도로 반복되면서 중성자 따로 양성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성자가 양성자가 되기도 하고, 양성자가 중성자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즉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예측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양자 역학의 핵심이다. 따라서 모든 정보가 늘 오차를 수반할 수 밖에 없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확률적으로 해석하라는 것.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원리의 영향하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과학자가 불교의 일체무위법, 공 개념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비논리적, 비과학적이라고 종교를 폄하하던 과학이 오히려 종교, 불교 논리의 근거가 된 이 구도가, 참여하지도 않았던 대결 속 약자 측에 이입되어 역전의 짜릿함을 느꼈다.

우리가 추측하는 우주의 크기가 - 2007년 관측 은하계 천 억 개, 2015년 1 조 개 - 과학 발전에 따른 망원경 성능에 따라 달라지는 것만 보아도 과학의 결과치라는 것들이 천동설이 뒤집히는 것처럼 극히 한계가 전제된 사실일 뿐이다. 이러한 태생적 결함은 공식화 된 지 오래인데, 여전히 과학에 부여된 절대성은, 가능성이 잠재된 다양한 해법들을 비과학으로 몰아가는 편협한 횡포를 멈추지 않는다. 특히 현대 의학 분야에서 기술의 오만은 생명을, 전인류를 능욕하는 지경으로까지 보인다.

보이지 않고,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들은 분명히 있고, 우리는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




단지 근사치일 뿐이며 필연적으로 부정확하다... 모든 과학적 모형과 이론들은 근사치밖에 안되고 그것의 언어적 해석도 우리의 언어가 지닌 애매 모호성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생각은 금세기 초 새롭고 전형 예기치 않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널리 받아 들여졌다. p69



양자론은 이렇게 견고한 물체와 자연 법칙이라는 고전적인 개념들을 말소 시켰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고전 물리학의 견고한 물체는 파동과 같은 확률 모형들로 분해되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 연관의 확률을 나타낸다....원자 물리학에 있어서 아원자적 입자는 독립된 실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험의 준비와 그 다음 측정 사이에 있는 상호 연관으로써만 단지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P97





유클리드 기하학, 데카르트, 칸트, 뉴턴 등, 수학, 물리학, 철학, 예술 등 도대체 이런 골치 아픈 걸 왜 배워야하나...그 당시엔 너무 어려웠고 공부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것들의 필요를 핑계삼아 게을렀는데, 나이가 드니 세계를 해석하는 정보들에 관대해진 걸까. 매우 흥미롭다. 한 시간의 강의로, 나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영역의 기초가 지금의 세계를 구축했으며 편리와 효율로 연결되고 있다는 맥락을 조금 알게 되었다. 진작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일회성으로 듣고 버리는 시험용 암기 대신에 좀 더 고결한(😂) 자세로 인류의 축적된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텐데.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엔 과학, 수학, 철학, 예술로 구분지어 놓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된 인류사적 지식들이 현실 세계에 어떻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실존하는지를 과학자를 통해 - 연기법을- 안내 받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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