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춤이다
김선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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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선우의 첫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는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의 삶을 다루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최승희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남북 분단의 질곡을 관통하며 화려한 삶과 남루한 삶을 수없이 교차하며 반복한 무용 예술가이다. 그녀는 가난한 환경에서 조선 최고의 무용수, 혹은 동양 최고의 무용 예술가로 수직 상승하는 모던 여성이자 늘 수직 하강의 위험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정치적 감시 대상 혹은 대중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충족시켜 줘야 하는 시선과 응시의 대상이었다. 더해 남북 분단 이후에도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알력에 의해 그녀의 거취는 늘 불안했으며 안온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까닭에 그녀는 자동적으로 개인이 아닌 조선 피식민의 삶을 대표하는 여성 혹은 조선 민중이었으며 해방 이후까지 시간을 뛰어 넘어 늘 소비되는 상품이었다.


그녀의 삶에 유난히 정치적 덧칠이 많이 가해지는 까닭은 권력 혹은 국가가 예술을 통해 정치를 전유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이 투사된 결과이다. 소설 속에도 잘 드러나 있듯 최승희는 일평생 위태로운 삶을 살았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 이상으로 그녀의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춤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예술가의 욕망과 제국을 넘어서려는 식민지 조선의 욕망, 그녀를 온전히 품고 제국의 정치적 꼭두각시로 세우려는 제국의 욕망 등등.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다층적이고도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감옥에서도 자신의 춤을 늘 발전시켰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일단 소설 속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갈등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 사이에서 그녀를 두고 벌이는 경합 관계이다. 한편에선 무기가 되어 초월하길 바라고 한편에선 점유하여 방어하려는 이 다툼 속에서 최승희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보다 양쪽을 봉합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일본의 이시이 선생의 충실하면서도 발칙한 제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제국 일본 권력의 집요한 견제와 감시 속에서도 때로는 ‘샤이쇼키’로, 때로는 세계적 무용가로 얼굴을 바꾸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일정 부분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제는 최승희가 식민지 조선의 표상이 되는 경우이다. 자기 검열을 통해 절대 금기시 했던 조선춤을 결국 내지의 조선인 집단 거주지에서 배운다거나 조선인 관객들의 열띤 호응에 반응하며 따뜻하게 응대해주는 모습 등은 최승희에 대한 평가를 복잡하고도 어렵게 만든다. 사실 이런 효과는 작가 김선우가 최승희의 삶을 소설에 충실하게 반영했다기 보다 일종의 판타지로 성공적으로 재구성해낸 결과에서 기인한다.


 

  물론 김선우가 오랜 시간 동안 방대한 자료조사와 검증 작업을 통해 최승희를 확인 가능한 적재적소에 위치시킨 노력의 흔적은 충분히 엿보인다. 그러니까 이것은 김선우가 실존 인물을 다루는데 있어 역사와 허구 사이의 간격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전혀 아니며 그녀의 소설적 감각이 이미 대중독자들의 기호를 예민하게 간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놀라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 최고의 근대 무용가 최승희라는 판타지는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야만)된다. 사실 이 같은 봉합의 판타지는 대중들이 가장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식민지적 주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대중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절대 윤리의 감각을 보여주는 역사 속의 인물은 늘 너무 무겁다. 또한 날것으로 드러나는 비루한 굴종과 협력의 역사는 너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결국 식민지 조선의 아이덴티티와 제국 일본의 시민권 사이에게 분열하고 갈등하며 개인의 욕망을 통해 그것을 슬기롭게 조정하는 현명한 근대 여성 최승희의 삶이야말로 공교롭게도 가장 리얼한 판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낙차 큰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위태로운 예술가의 삶은 그녀야말로 진정 ‘근대의 여성’이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그녀의 삶이 참조하는 단위명제 즉 “나는 춤이다”라는 선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존재를 삭제한 듯 붙들고 있는 최승희의 삶은 식민지적 주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 규율이며 윤리가 아니었을까. 스스로 춤이 되어 살아가는 하나의 예술의 완성은 정치적 영향력에서 놓여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춤에 대한 욕망은 정치, 경제적 부침의 결과에 따른 조건과 처지를 항상 초월하기 때문에 그녀는 진정한 예술가 혹은 근대의 춤꾼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이른다. 김선우의 소설 속에도 가장 잘 표현된 것이 바로 이러한 최승희의 욕망일 것이다. 

  식민 지배자가 부과하는 규제와 규율 속에 있었던 피식민지 마이너리티 인간들은 자신을 정치적인 주체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다. 이들이 주체가 되는 방식은 역설적이지만 세계사의 보편이자 주체로 정립되어 간다고 판단된 식민 모국의 담론을 내면화하는 방식, 달리 말하면 제국의 충실한 신민이 되는 것이 곧 주체를 형성하는 방식이 되는 역설이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용어가 허용된다면 우리는 이 역설적인 주체성을 ‘식민지적 주체성(colonial subjectivity)’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최승희는 이러한 식민지적 주체의 고투를 온 삶으로 보여준 인물인 셈이다.


  사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도 좀 특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시간을 분절하여 순행과 역순행을 반복 교차시키는 방식은 소설의 말미가 앞머리와 이어져 최승희를 둘러싼 각 인물들의 욕망이 계속해서 뒤바뀌고 갱신되며 덧보태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 작가는 최승희가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그녀를 3인칭으로 돌려 세우고 그녀 주변의 인물들에게 각 챕터별로 1인칭 ‘나’의 시점을 골고루 배분해 소설속의 형식만으로도 그녀를 무대 위의 춤꾼으로 세우는 효과를 발휘한다. 최승희는 언제나 ‘내’가 아닌 채 늘 관찰되고 소비되는 대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욕망을 견실하게 지켜내는 여성이다.그녀를 놓고 벌이는 온갖 ‘나’들의 다툼은 최승희 자신의 욕망을 늘 초과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분열된 채 1인칭의 직접적 감정 토로로 서술되어 있다. 때문에 이런 용어가 가능하다면 이 작품의 시점은 한국 소설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1-3인칭 혼합 주인공 시점’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시인인 그녀의 산문 문장은 그녀의 시만큼 조촐하면서도 미려하다. 또박또박한 단문과 감각적 쉼표의 배치는 줄글의 서사감과 운문의 속도감을 모두 획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또한 거의 모든 감각이 공감각으로 처리될 만큼 그녀의 감각 활용은 단연 돋보인다. 시인 출신의 소설가들이 줄곧 범하기 쉬운 유장한(?) 장문의 유혹을 이겨낸 작가에게 다음 작품에서는 좀 더 현대적인 청신함을 기대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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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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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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