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20세기 철학사를 공부하는데 실패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1
발리 뒤 지음, 남도현 옮김 / 개마고원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내 손으로 어렵사리 밥벌이를 해결하게 된 뒤부터 적금 붓고,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돈을 거의 모두, 보고 싶었던 영화 비디오 테잎이나 음반, 책을 구입하는데 사용했었다. 지금은 비디오 테입 대신에 DVD염가판(명작 영화 중 상당수는 재발매되고 있다)을 구입하는데 열을 올리지만, 사람이 한 달에 벌어들일 수 있는 재화의 양엔 한계가 있는 법이고, 영화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DVD를 구입하는 것은 낭비일 수도 있다. 돈이 있든 없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가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문화에 대한 욕구란 많이 소비해본 사람이 더 많은 욕망을 재생산하므로 적당한 선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얕은 수로 타협하게 되는 것이 소비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과 DVD, 음반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를 정하는데, 그럴 경우 나는 거의 무조건 책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영화이고, 맨 마지막이 음반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집에서나 차에서나 음악 듣는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고, 영화는 어떻게든 봐야 할 일들이 좀 있으므로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책이란 것이 예전보다 시장에 노출되는 기간이 대폭 축소되어 당장 필요하지 않으므로 나중으로 미루다간 절판이나 품절이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는 일이 왕왕 있다. 그런 까닭에 우선 순위를 책에 둘 수밖에 없다. 하나는 나의 갈급함이 책에 있는 것이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가장 인기없는 상품이 책이란 말이다. 어쨌든 그러다보니 뭔가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망을 손쉽게 충족시키기 위해 본의 아니게 컴필레이션 음반을 종종 구입하게 된다.

아마도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과 같은 류의 책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이와 흡사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처음엔 '발리스 듀스(Valis Deux)'라는 개인 저자가 존재하는 줄 알았다가 나중에서야 오오시마 히로시, 사카모토 마사히코, 소메야 마사요시라는 비교적 젊은 일본인 저자들의 그룹명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이 책의 제목이 '철학'이 아니고 '사상'인 점도 제법 이채롭다. 이유야 무엇이든 음악을 좀 즐긴다는 사람들은 컴필레이션 음반을 듣는 이들을 약간이나마 눈 아래로 깔고 보려는 편이다(솔직히 이건 남 흉 볼 일도 아니다). "요약하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놈들"이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컴필레이션이란 일단 남의 시선을 통해 한 번 걸러진 것을 듣고 본다는 측면에서 세부적인 부분들(그것을 뉘앙스라 하든, 아우라라 하든)에 숨겨진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진실을 곡해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책들이라면 제 아무리 유명하고, 권위있는 저자의 저술이라 할지라도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 왜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이런 류의 간추린 다이제스트 책들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일까. 그 가장 확실한 해답은 첫째. 유용하기 때문이고, 둘째. 손쉽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장점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그와 같은 책이나 음반이 지탄받을 이유는 없다. 아마도 우리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라면 누구나 그 같은 추억 한 가지쯤은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동네 어귀에 자리한 레코드 가게(이 얼마나 정겨운 명칭인가)에 곡목을 적은 메모를 전달해주고 얼마의 값을 지불하고 나면 자신이 원하는 곡들로만 이루어진 편집판 테잎 하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테잎 하나는 늘어질 때까지 우리 귓가를 줄기차게 울려대었다.

집안 어른 가운데 누군가가 특별히 음악에 취미가 있다거나 조예가 있지 않은 한 가만히 되돌아보면 우리의 수준높은 음악감상 길잡이는 그처럼 손쉬운 도둑질(저작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로 시작되었다. 물론 그와 같은 손쉬움으로 인해 쥬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모든 음악이 "Before the Dawn"같은 메탈 발라드일 것이란 착각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같은 시행 착오 없이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서 이 책의 제목이 어째서 철학이 아니라 구태여 사상이라 했을지에 대해 궁금했는데 그렇다면 철학은 또 뭘까? 우습게 들릴 수도 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류는 오랜 세월 궁리해 온 셈이기도 하다. 언젠가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거의 최초로 철학이란 것에 대해 글을 써본 적이 있다. 그 글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어느 때부터인가 철학은 ‘철학함’이 아니라 ‘철학사’나 ‘철학에 대한 지식’과 혼돈되어 왔다. 우리가 어떤 철학(자)으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세상을 해석하고 깨우치는 지식의 총체(진리)를 전수받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철학이 아니라 아마 종교의 범주에 들어야 할 것이다(물론, 때때로 이 둘은 구분하기 힘들지만). 대개의 철학자들은 이전의 철학을 반박하여 그들의 체계를 세우지만 동시에 언제나 다음 대에 가서 자신들도 반박 당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안다. 더 이상 철학할 필요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 설령 그들, 철학하는 자들의 목표일지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 역시 철학자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철학자들이 도출한 결론보다 그들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행했던 방법론 ‘철학함’을 통해 더 많을 것을 배운다.

칸트“배울 수 있는 철학은 없다. 단지 철학하는 것만을 배울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다시 말해 철학은 안수기도가 아니라서 영험한 영매(목사)의 힘으로 괴력난신을 불러들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스스로 깨우쳐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無用之用”이라 해서 사람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用)만을 알고 무용(無用)의 용을 모른다.”고 말했는데, 철학만큼 이에 잘 들어맞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삶은 앎(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앎의 배경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는 분의 말씀을 가만히 궁리해보면 삶이란 얼어붙은 강의 물고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갈릴리 호수의 어부 베드로에게 예수는 사람 낚는 어부를 약속했다. 세속적인 삶의 이익을 얻는데 있어 철학은 경영학이나 여타 다른 유용한 학문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철학자들은 여전히 어구(漁具)를 준비한다.

만약 철학적 진리가 탐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소유할 수 있는 것(대상)이라면, 그리하여 철학 혹은 철학적 깨달음(진리)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옮겨줄 수도 있다는 유혹에 사로잡히게 된다(나는 이것을 계몽과는 다소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같은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철학은 겸허함을 잃게 되고, 진리를 강요하게 된다. 진리의 강요는 광신자의 개종과 흡사한 것이 된다. 철학은 무엇보다 반성의 학문이어야 하는데, 그 중요한 미덕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철학하는 이유 혹은 철학의 존재 의의는 역설적으로 삶과 앎의 불일치에 있다. 이 둘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반성하는 학문인 철학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두 가지를 일치시킨 사람을 일러 우리가 성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서문 격인 "20세기 철학사의 대략적인 스케치와 이 책의 사용법"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20세기의 여러 사상에는 한 가지의 공통된 성립 계기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기준으로 충분히 20세기 철학의 변천을 개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성립 계기는 다른 아닌 과학이다. 과학을 직접 흡수하지 않은 경우라도 20세기 철학은 과학과의 관련없이는 성립할 수가 없다, 과학과의 관계 속에서 20세기 철학은 여러가지의 '생각되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해 냈던 것이다.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이 부분은 20세기 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점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연결되어 이해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더 있다.

근대과학은 천체운행을 오차 없이 해명하고, 수식에 의거해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사실을 도출해내고, 계산을 통해 달에 인간을 보내고, 원자의 분할을 가능케 했다. 과학에는 과학의 정당성 유무를 거론할 수 없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내부(관념)와 외부(연장)의 일치라는, 철학이 지속시켜온 사고형식의 '정당성'은 과학이 보여준 위렵 앞에서 무기력하게 손을 들었다. 철학은 이런 새로운 '정당성'에 대해 무엇인가 대응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이런 요구야말로 20세기 철학이 새로운 '생각되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는 원동력이 됐다.

사실 이 책은 '그림으로 이해하는'이란 앞의 제목 때문에 대체로 쉽다는 평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막상 초심자가 읽었을 때, 대체로 이와 같은 책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 도대체 뭐가 쉽다는 거냐라는 반문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모든 입문서 혹은 요약본이 그러하듯 가장 친절한 입문서는 해당 저자가 쓴 글을 직접 읽는 것이고, 그것을 쉽게 풀이한다는 것은 자칫 더 어렵고 복잡한 길 안내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은 밑도 끝도 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손에 잡으면 도리어 미로처럼 복잡한 절망 속에 발을 담그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방면이라도 좋으니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사상가들을 잡고, 고민해본 이라면 이 책의 정리가 정말 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입문서가 아니라 비평서이기도 하다. 20세기 철학사를 공부하고 싶은데 다른 책들로 실패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기는 하다.

다만, 한 가지 알려두고 싶은 건, 과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컴필레이션 테잎을 늘어질 때까지 들은 것처럼  그런 분들은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 이 책을 한 10번 정도 반복해서 읽으면 좋겠다. 다 읽고 난 뒤에 "무화과나무의 북토피아(http://my.aladin.co.kr/booktopia)"에 무화과나무님이 퍼 나른 이승종(연세대 철학과) 교수의 <비트겐슈타인의 절망(http://www.aladin.co.kr/blog/mypaper/1100547)>을 읽어보시라. 이승종 교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에 쏙쏙 들어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흐뭇해 할 것이 틀림없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장점은 우리가 종종 그건 이미 시대에 뒤처졌다고 말하는 철학들이 사실은 그리 쉽게 용도폐기되어도 좋을, 만만한 것들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저자들이 말미에 꼭꼭 씹어 지적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든 고민없이 쉽게 받고 내던져 버리는 우리 사회의 경박함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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