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해방 후 한국 민중의 수난사에 대한 한 판의 씻김굿
백년여관
임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읽었던 혹은 읽어야했던 소설들이 광주의 5.18과 제주도의 4.3에 관한 소설들이었다. 선배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면서, ‘국가’라는 것이 항상 우리 편(?)만은 아니라는 것에 큰 충격을 얻었고, 국가와 군인‘아저씨’야말로 가장 끔찍한 괴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분노했고, 그 때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변해갔다. 어린 시절 외국에서 생활을 했고 고등학교는 강남에서 다녔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경상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충청도 출신이라서 나는 대학 새내기 시절까지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실존하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에 관한 소설과 책들을 읽고, 광주에 다녀온 이후 이러한 생각이 많이 변하게 되었다. 이는 실재였다. 이런저런 선거 때마다 도경계에 따라서 확연히 구별되는 당선 정당들. 그리고 이에는 뚜렷한 역사적 배경이 존재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많이 변하게 해 준 소설 중 하나가 임철우의 <<봄날>>이다. 읽은 지 5년도 넘은 지금에야 읽었을 때의 충격 외에는 별반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문학’이란 무엇이다라는 것에 대한 기존 내 생각들을 산산이 부서져 내리게 한 경험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고등학교 때는 나름 ‘문학소년’ 비슷한 존재라서, 시도 쓰고 소설도 꽤나 읽었다. 언젠가는 ‘내가 필요한 것은 나를 속여 줄 시나 소설 뿐’이라고 일기에 끄적인 적도 있다. 내가 문학은 나를 속여 줄, 지겨운 일상을 잊게 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임철우의 소설은 어떠한가, 또 박완서의 전쟁 관련 소설들, 방현석의 소설은? 이는 끊임없이 ‘망각’에 저항하고, ‘현실’을 점유하려는 지배 해석들에 저항한다. 그들은 잊혀지면 안되는 과거에 대해서 고백하고, 그 과거를 잊으려는 사람들과 잊게 만드려는 지배 세력들에게 저항한다.


임철우가 <<봄날>> 이후에 쓴 이 소설 또한 한국전쟁, 제주도 4.3, 광주항쟁에 관한 기억에 대한 소설이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다고 한다. 동구권의 몰락, 대학생 사회 운동진영들의 쇠퇴, 그리고 남한의 ‘민주화’. 임철우 또한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한 자의식을 털어놓는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까놓고 말해서, 한국 소설은 역사나 정치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 고질병이 문제야. 전쟁이니 분단 따위 민족 내부의 지엽적 소재만 가지고 지난 수십 년간 어지간히 우려먹었잖아. 외국 독자들한테 그런 시효 지난 케케묵은 소재 치켜들고 나가봤자 어디 씨알이나 먹힐 거 같아? 문학도 어차피 상품인데. (19면)


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


시효? 유효기간이라고? 그 따위 폐품들을 이제 와서 어디에다 쓰겠느냐고? 야, 짜식들아. 함부로 지껄이지들 마. 세상엔 그것이 자신의 ‘전 생애’ 이거나 평생의 족쇄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것이 끝내 벗겨낼 수 없는 굴레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래서 그 저주받은 시간에 사로잡혀 평생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삶들 말이다. 그들은 지금도 이 땅 어디에나 있어. 너희들이 시효 지난 폐품이라고 부르는 그 시간들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과 감각의 구체적 실체야. 살아 있는 한, 고통이 여전히 지속되는 한, 그건 과거가 아니라 그들에겐 엄연한 현재야. (21-22면)


그렇다면, 문제는 이를 어떻게 ‘다시’ ‘새롭게’ 풀어나가느냐이다. 기존의 <<봄날>>을 뛰어넘어, 다른 여타의 역사적, 민족적 문제를 형상화한 기존 작품들을 일신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민석은 알레고리와 폭력으로서 광주를 재현하고 (헤이, 우리 소풍간다), 심윤경은 소년의 성장과 통과의례의 배경으로서의 광주를 삽입하기도 한다(나의 아름다운 정원). 물론 임철우는 이들과 다르고,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는 전라도인이며, 광주항쟁 ‘속’에 있었음으로.


‘새로움’은 세대와 지역적 확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광주에 대한 기억과 정작 투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설가 ‘당신’(임철우의 자전적인 자아), 제주4.3 사건 때문에 일가족이 몰살당한 경험을 갖고 있는 강복수와 김요안, 베트남 전쟁에서 팔을 잃고 그 때 미군들이 살포했던 고엽제와 전쟁 때 살해 경험으로 괴로움을 겪는 문태, 그리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과 ‘국군’ 사이의 처절한 보복에 의해 학살당한 일반 시민들을 내세워 이 소설은 ‘한국’의 역사를 일종의 상처의 구술사처럼 짜내려가고 있다. 이는 해방 후 한국 민중의 수난사를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


예전에 한 술자리에서, 1930년대 전라도 출생 남성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80년대 말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한 분의 이야기였는데, 일제시대 초등교육을 받고, 청소년기에는 태평양전쟁과 병참기지화로 인해 고통을 받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싸움터에 휩싸이고, 분단 후에 조금 안정이 되나 싶으니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와중에 엄청난 고통을 받고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고, 장년층이 되어 사회에서 한창 활동할 시기에는 광주 5.18이 터지고, 끝내는 한국을 등지게 되었다는 것.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그 분, 그 세대의 생각이 났다. 왜 우리가 끊임없이 그 기억들을 망각의 저편에서 떠올려야 하는지를, 왜 우리는 끊임없이 국가의 폭력이 일정 선을 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역사에서 밖에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세대적ㆍ지역적 확장을 통해, 해방 후 한국 민중의 아픔을 복원시키는데 성공했다. 소설의 말미에 이러한 아픔으로 인한 수천의 원혼들이 한 판 굿에 의해서 승천하게 된다. 이러한 씻김굿 배경 속에서의 개기월식과 검은 바다 이미지는 장관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부자연스러운 대사를 너무 많이 하고, 결말의 화해도 너무 급작스러운 느낌이 든다. 물론, 임철우에게 이 소설은 한 판 씻김굿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결말 부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조금 맥이 빠진다.


그래. 결코 지난 날들을 잊어서는 안 돼. 망각하는 자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아. 기억해. 기억해야만 해. 하지만 친구야. 그 기억 때문에 네 영혼을 피 흘리게 하지는 마. (336)


너무 구태의연하게 내가 사고하는 듯하지만, 임철우에게 개인을 넘어서는 전망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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