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즈키가 노리코가 이상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그 해 가을 축제 때 발생했다.

 

축제는 중학교 때와는 달리 규모도 컸고 본격적으로 갖추어진 먹거리 부스, 댄스 퍼포먼스, 밴드의 라이브 공연 등으로 가즈키의 그룹도 한창 들떠 있었다.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로 축제는 마무리되었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들 축제의 여운이 남아 들뜬 상태로 서로 장난치면서 정리와 청소를 시작했다. 뒷정리 중에도 학교 안팎에서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활기가 넘쳐흘렀다.

 

가즈키와 노리코는 일반 쓰레기를 정리하는 일을 맡았었다. 당시는 아직 재활용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타는 것타지 않는 것두 종류로만 나누었다. 그리고 다이옥신의 심각성이 문제되기 전에는 학교에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다. 가즈키와 노리코는 풀장 옆에 있는 소각장으로 골판지 상자에 가득 담은 쓰레기를 손수레에 실어서 날랐다.

 

학교 건물 밖의 구석에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외등 한 개만 서 있어서 음침한 분위기였다.

 

빨리 끝내고 가자.”

 

가즈키는 기분 나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재촉했다.

 

무심코 어두운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둠 속에 반딧불이 같은 것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정체가 궁금해진 가즈키는 눈에 힘을 주며 자세히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몇 명인가 학생복을 입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담뱃불이었다.

 

노리코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소각로의 문을 열어 둔 상태로 손을 멈춘 채 바라보고 있었다.

 

2학년, 아니면 3학년일까.

 

불량한 분위기도 아닌 것 같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지 가끔씩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축제 분위기에 젖어 해방감도 느끼고 싶고 허세도 부려 보고 싶어서 잠깐 일탈적인 행동을 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됐지만 잘못 걸렸어, 라고 가즈키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노리코가 봤으니까 즉시 선생님을 부르러 가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등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이 녀석들!”

 

아차! 걸렸다, 하며 남학생들이 황급히 담배를 밟아 끄고 있을 때 나타난 것은 체육 담당인 야자와 선생님이었다.

 

다음 해에 정년퇴직을 앞둔 그는 머리도 눈썹도 새하얀 할아버지 선생님이었지만 유도의 고수로 매년마다 전국 대회에 출전하고 있었다. 엄하지만 따뜻해서 학교에 안 오는 학생이 있으면 끈질기게 집까지 찾아가 상담해 주는 등 부모님들에게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야자와 선생님은 달아나는 남학생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렸다. 우락부락한 야자와 선생님으로부터 언제 주먹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야자와 선생님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 한번 피워 보고 싶었지?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을 테고. 선생님도 너희들 나이 때 그랬단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각로 앞에 있던 가즈키도 무심코 몸을 쑥 내밀고 귀를 기울였다.

 

스무 살이 돼서 피우는 것이나 열일고여덟 살에 피우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너희들의 몸은 아직 성장하는 중이라 어릴 때부터 담배를 피우면 여러 가지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단다.”

 

선생님은 온화한 말투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병에 걸린다는 말이 아직 젊은 너희들에는 별로 실감이 안 나겠구나. 하지만 분명히 여드름은 늘어날 거야. 키도 안 크고, 입에서 담배 냄새도 지독하게 날 거야. 그러면 여자애들이 싫어할 걸. 그렇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야자와 선생님은 난처해하는 남학생들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인생은 길잖아. 몇 년만 참아 봐. 할 수 있겠지?”

 

야자와 선생님이 양쪽 손바닥을 위로 향해 내밀었다. 그 위에 한 학생이 머뭇거리다가 담뱃갑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도 차례차례 담뱃갑을 올렸다.

 

좋아좋아. 다들 착한 애들이구나.”

 

야자와 선생님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넘겨받은 담배를 체육복 주머니에 넣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맡아 둘 테니 어른이 되면 내가 있은 곳으로 찾으러 와라. 그때는 술도 같이 한잔하자. 어때?”

 

그렇게 말하면서 야자와 선생님이 그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학생들이 훌쩍거렸다.

 

죄송합니다.”

 

남학생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한 후 머리를 숙였다. 무조건 혼내기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을 것이다. 가즈키는 그런 야자와 선생님의 행동을 보고 감탄했다.

 

 

 

가즈키와 노리코는 소각로에 나머지 쓰레기를 던져 넣고 교정으로 돌아갔다. 노리코가 이르기 전에 야자와 선생님이 와서 다행이라고 가즈키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은 생각처럼 순조롭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경찰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온 것이다.

 

미성년자가 흡연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왔는데요.”

 

정리도 어느 정도 끝나서 이제 막 해산하려는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노리코가 당당한 태도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야자와 선생님과 담배를 피우던 학생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찰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가즈키는 아연실색했다.

 

장난도 아니고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 그랬구나.”

 

젊은 경찰은 야자와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하고도 얘기를 나눈 후 남학생들에게도 다시 확인하면서 주의를 주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들었겠지. 또다시 담배 피우다 걸리는 일은 없는 거다?”

 

남학생들이 온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관은 야자와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향해 돌아섰다.

 

담배는 선생님이 압수하셨고 본인들도 반성하는 것 같네요. 학교 일은 학교에서 처리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저희가 하면 경찰에 기록이 남아 버려서 학생들의 장래에 좋지 않을 테니.”

 

마음씨 좋은 경찰은 재치 있는 말투로 이제 절대 안 하기로 한 거다.” 하고 타르기만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가즈키는 안심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갑자기 경찰에 신고해 버린 노리코가 어쩐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날 더 큰 문제가 되어 있었다.

 

노리코가 현의 지역 교육 위원회에도 다음과 같이 알리고 언론사에도 팩스를 보낸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교사인 야자와 모토노리가 학생들의 흡연 사실을 숨겨 주었고, 경관인 마츠시타 코지는 그들의 불량 행위를 방치했습니다. , 죄를 저지른 학생을 학교와 경찰이 합심해서 은폐한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비열한 행위이므로 저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2반 다가키 노리코

 

신문에도 크게 다루어져서 야자와 선생님은 철저하게 비난받았다. 정직 석 달 처분을 받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런 솜방망이 처분이 교사를 타락시키고 교육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여론 때문에 결국에 야자와 선생님은 정년을 바로 앞에 두고 사표를 내고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게 되었다. 게다가 교사로서 재취업하는 길도 끊겨 버렸다.

 

여론의 압력 때문에 교장과 교감도 현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문제의 남학생들은 정학 처분을 받았고, 그들이 야구부와 농구부에 소속됐었다는 이유로 이들 동아리는 고시엔이나 인터 하이의 출전권을 잃었다. 해당 경찰도 징계를 받았다.

 

노리코.”

 

일이 이 정도로 커진 것을 알게 된 가즈키가 따져 물었다.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든 거야? 야자와 선생님이 그 정도로 잘못을 한 건 아니잖아. 퇴직금으로 학교에 안 나오려는 아이들을 위한 보습 학교를 만들려고 하셨는데, 그것도 못 하게 되셨단 말이야.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나는 옳은 일을 한 것뿐이야.”

 

노리코는 또 그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할까…….”

 

융통성?”

 

노리코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것이 정의보다 중요한 거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즈키는 말문이 막혔다.

 

어쨌든 나는 옳은 일에만 관심이 있어. 잘못된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단 말이야.”

 

그렇게 잘라 말한 노리코는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에는 억양이 없었고 목소리도 인공 음성 같았다.

 

마치 사이보그 같았다.

 

사이보그는 인간다운 미묘한 감정이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올바른 것에 대해 프로그램 된 일만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상처를 받든 파멸되든 사이보그는 관심이 없다.

 

노리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언젠가 가즈키는 큰마음 먹고 유미코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축제 때 흡연 적발 건이라든가…….”

 

아아, 역시 대단한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어.” 유미코는 감탄한 듯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모두 굉장히 성실하고 정직해졌잖아. 난 정말 깜짝 놀랐어. 마치 정의의 히어로 같지 않니?”

 

역시 항상 옳은 건 노리코란 말인가. 노리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잘못된 건가.

 

그 이후로도 가즈키는 노리코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여 둘 수밖에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그룹에서 고립되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3년을 지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즈키는 큐슈의 국립 대학에 진학했다. 유미코와 노리코는 각각 그 지역 단기 대학과 4년제 대학에 들어갔으며, 리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레이카는 상경해서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떠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의 교류는 끊어졌다. 새로운 친구, 동아리 활동 등에 열중하다 보니 규범그 자체였던 이상한 친구에 대해서 가즈키는 한동안 잊고 살았다.

 

 

~ 6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미코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낫칭이 노리코한테 뭔가 안 좋은 짓을 한 거 아니야?”

 

,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가즈키는 생각했다. 일종의 복수였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노리코는 여전히 변화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걔한테 당한 거 아무것도 없어. 아까부터 왜 이상한 질문만 하는 거야?”

 

그게 그렇잖아.”

 

레이카가 결심한 듯 말했다. “같은 반 친구를 배신하는 짓을 한 거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네. 어떻게 수업을 본래 있어야 할 상태로 되돌리려고 한 것보다 복수를 위해 한 짓이라고 해야 이해가 가능하다는 거지? 그건 좀 삐뚤어진 생각 아니야?”

 

노리코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가즈키, 유미코, 리호, 레이카의 얼굴을 둘러봤다. 밥풀이 입가에 붙어 있는 그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본 네 사람은 노리코에게 전혀 악의가 없었음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노리코의 말은 옳았다. 수업 중에 쪽지를 쓰거나 돌리는 등 딴짓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그것을 제대로 지적한 노리코를 탓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래, 맞아. 노리코가 말한 대로야.”

 

가즈키가 그렇게 말하자 리호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 보니 모두의 앞에서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동 같아.”

 

유미코의 말에 레이카도 덧붙였다. “역시 노리코는 용기가 있어.”

 

가즈키는 정론에 눈을 뜨게 된 기분이었다.

 

노리코는 학교는 우정을 키우는 장소이고 수업보다는 친구들과의 교류가 소중하다, 고 여겨 왔던 안일한 내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해 주었어. 역시 노리코는 어른 같고 훌륭한 아이야.

 

가즈키는 노리코를 옹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낫칭과 토모코, 그리고 그 애들의 그룹이 노리코를 강하게 비난할 거야. 노리코는 나를 치한으로부터 구해 줬어. 이번에는 내가 노키코를 지켜야 할 차례야. 노리코가 고지식하고 정의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약간 도가 지나쳐서 조금 어긋나 버린 것일 뿐이야.

 

그때 가즈키는 정말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쪽지 사건이 조금씩 잊혀 가면서 6월이 되었다. 교복이 원피스형의 하복으로 바뀌자마자 교칙대로 제대로 입고 있는지 확인하는 불시 복장 검사가 있었다.

 

 

 

귀가 전의 롱홈룸 시간에 체육관에 집합해서 남학생은 넥타이나 벨트를 제대로 착용하고 있는지와 바지의 폭이 적절한지 등을 검사했고, 여학생은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치맛자락이 매트에 닿는지, 그러니까 충분히 무릎을 덮는 길이인지 등을 검사했다.

 

가즈키는 원래 보이시한 스타일에 자신의 다리를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기는커녕 숨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른 여학생들처럼 치마를 일부러 짧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입학 전에 잰 치수로 맞춘 하복을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입고 있었다.

 

주위의 여자애들이 불시 검사에 걸렸다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열심히 스커트 끝을 끌어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며 가즈키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무릎을 꿇었다.

 

선도 위원인 가미카와 마이코가 가즈키가 있는 줄로 다가왔다. 치맛자락이 확실하게 짧은 여학생에게는 주의를 주며 명부에 체크를 했다.

 

이윽고 가즈키의 차례가 되었다.

 

마이코가 다가서면서 가즈키의 스커트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으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가즈키는 자신의 스커트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약간이었지만 스커트 끝이 매트에서 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가즈키는 당황하면서 스커트가 이렇게 짧아진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가슴이 커졌다. 그전까지는 A컵이라 고민이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9년 동안 계속했던 육상을 그만둔 것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D컵까지 성장했다. 그렇게 가슴이 커지는 바람에 원피스의 스커트 끝부분이 올라가 버린 것이다.

 

이를 어째. 2cm 이상 짧으면 반성문도 써야 하고 부모님에게 연락도 가겠지. 일부러 스커트를 짧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가즈키가 어떻게 변명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마이코가 말했다.

, 문제없어. 확인했으니 일어나도 돼, 이마무라 가즈키.”

 

마이코는 가즈키와 평소에 같은 그룹으로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일부러 치마를 짧게 한 것이 아님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라서 그냥 봐주기로 한 것이었다.

 

가즈키가 안도의 숨을 쉬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가즈키의 스커트는 짧은 것 같은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즈키가 돌아보니 뒷줄에 있던 노리코였다.

 

, 글쎄…….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데.”

 

마이코는 그렇게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아니, 짧아.” 노리코가 자신의 줄에서 나와 가즈키의 옆에 섰다.

 

가즈키, 다시 무릎 꿇어 봐 줄래?”

 

가즈키는 갑자기 노리코가 태클을 걸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구부려서 겨우 끝자락이 바닥에 닿도록 했다.

 

이것 봐, 문제없잖아.”

 

마이코가 안심했다는 듯 말했다.

 

가즈키, 등을 펴고 자세를 제대로 해야지.”

 

노리코가 그녀의 등을 쭉 펴게 했다. 가즈키는 굴욕감을 느꼈다. 스커트 끝이 약간 올라갔다. 노리코는 매트 위에 납죽 엎드려서 마이코의 자로 정확하게 매트에서 스커트까지의 높이를 쟀다.

 

그래, 2cm.”

 

노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리코, 자 좀 줘 볼래?”

 

노리코로부터 자를 돌려받은 마이코가 다시 재 봤다.

 

에이, 2cm는 안 되네. 그러니까 반성문은 안 써도 돼.”

 

마이코, 자를 매트에 딱 붙이지 않으면 정확히 잴 수 없어. , 이렇게 하면 2cm 맞잖아.”

 

매트 위에 자를 꽂고 노리코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때와 같은 미소였다. 정의를 위해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고 말하면서 지었던 그 미소. 그것은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엔가 취해 있는 듯한, 황홀한 표정이었다.

 

악감정을 가지고 일부러 몰아세우려는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즈키는 충격을 받았다. 마이코는 눈감아 주려 했다. 그런데 어째서 선도 위원도 아닌 노리코가 끼어들어서 그녀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며, 그러는 것이 뭐가 재미있다는 말인가. 부모님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는데…….

 

도대체 왜 그래?”

 

가즈키는 노리코에게 따졌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일부러 스커트를 짧게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친구잖아.”

 

그 말을 들은 노리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든가 친구 사이라든가 그런 건 교칙하고 상관없잖아.”

 

그래도…….”

 

가즈키는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 교칙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는 노리코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 알았어.”

 

더 이상 따질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옥신각신하면 눈감아 주려고 했던 마이코에게 폐가 될 것 같았다. 가즈키는 그대로 교칙 위반자의 줄로 이동한 다음 선도 교사에게 주의를 듣고 반성문용 원고지를 세 장 받았다.

 

집에 돌아와 혼자서 교복의 끝자락을 풀어서 더 길게 해 보려 했지만 옷감이 2이상 늘릴 정도의 넓이는 안 되었다. 가즈키의 키는 중학교 1학년 때 168cm가 된 후 3년 동안 더 크지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복을 맞출 때도 딱 맞는 사이즈로 했다. 물론 여전히 키는 그대로였다. 가슴둘레가 늘어나게 되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을 접어서 실밥이 보이지 않게 바느질해 놓은 끝부분까지 풀어서 늘려 봤지만 역시 약간 부족했다. 그 차이는 겨우 5mm 정도였지만, 노리코는 분명히 또 자로 꼼꼼하게 확인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가즈키는 교복을 새로 살 수밖에 없었다. 새 하복을 입은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다시 3만 엔의 지출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다.

 

노리코만 그냥 넘어가 줬다면…….

 

가즈키는 너무 분해서 유미코, 리호, 레이카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었다.

 

여자애들 그룹에서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험담은 그 자체가 배신행위이며,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결국 험담한 사람이 고립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들 제 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노리코야말로 배신자니까 이제 노리코와 함께 도시락도 먹지 않을 거야. 교외 학습 팀에서도 제외하겠어.

 

가즈키는 그렇게 결심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다른 반의 선도 위원이 친한 친구의 위반을 눈감아 주었다가 큰 문제가 된 것이다. 3학년의 열여덟 개 반 가운데 문제가 된 건 열두 개 반이었다. 그러니까 절반 이상이 부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엄하게 주의를 받고 연대 책임으로 학급 전원이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가즈키의 반은 해당되지 않았다.

 

노리코 덕분이야.”

 

교장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마이코가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아침 홈룸에서 담임 선생님도 기쁜 목소리로 자랑스러워하셨다. “우정이란 친구의 부정을 감춰 주는 것이 아니야. 이 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어.”

 

부정이라니. 내가 무슨 부정을 했단 말이지?

 

가즈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리코는 역시 대단해.”

 

홈룸이 끝나고 1교시 수업을 위해 과학실로 이동하면서 유미코가 감탄한 듯 말했다.

 

으응, 그래. 정말 대단한 거 같아.”

 

가즈키는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절대로 노리코에 대한 험담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리코는 모범적인 아이야.” 레이카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게, 노리코가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모두 반성문을 썼겠지. 노리코처럼 싫은 소리도 할 수 있는 아이는 반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야.”

 

리호 역시 맞장구를 쳤다.

 

필요한 존재라…….

 

정말 그런 걸까? 노리코는 무조건 옳고 잘못한 건 불만을 품은 사람이란 말인가?

 

가즈키는 그나마 노리코의 험담을 하기 전에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털어놨다면 그룹에서 제명되는 건 가즈키 쪽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거 오히려 잘된 일이야.

 

낫칭이나 토모코, 그리고 나. 노리코는 친한 사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공평하게 바른 소리를 했어. 그렇게 우정에 휩쓸리지 않고 분별력 있는 행동을 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역시 노리코는 우리들의 자랑거리였어.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가즈키는 새로 맞춘 교복의 대금 3만 엔을 내러 교무실로 갔다.

 

교직원실에 들어가니 벽에 붙어 있는 낡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단발머리에 교복 차림을 한 여학생의 흑백 전신상이었다. 그림 옆에 앞머리의 길이와 머리카락의 색, 스커트의 길이, 양말의 길이와 색 등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모범 학생의 그림이었다. 학생 수첩에도 그 그림의 축소판이 실려 있었다.

 

가즈키는 포스터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 그렇구나. 노리코를 어디서 봤는지 이제 겨우 알겠네. 노리코는 이 모범 학생의 그림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

 

 

~ 5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 안에 노리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년 남자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성 승객이 많았던 차 안에서 박수와 갈채가 터졌고, 노리코는 치한이 성추행하는 현장을 찍은 카메라와 함께 남자를 경찰에 넘겼다.

 

이 이야기는 금방 학교 안에 퍼졌다. 그녀는 교장으로부터 표창도 받고 경찰로부터 감사장도 받았다. 물론 누구보다도 감사했던 사람은 가즈키였다.

 

정말 고마워.”

 

가즈키는 어머니와 함께 노리코의 집에 방문해 과자가 든 선물 상자를 전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노리코는 의연한 태도로 절대 선물 상자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던 가즈키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성실한 공무원 인상을 가지고 있는 노리코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내가, 그러니까 노리코의 엄마가 잘못된 것을 무척 싫어했어요. 언제나 옳은 일을 해야 한다며 엄격하게 훈육을 해 왔습니다. 예전에는 노리코가 반발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2년 전에 통금 시간이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노리코를 찾으러 나간 아내가 차에 치여서 그만…….”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불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영정 사진 속엔 노리코를 똑 빼닮은 단발머리의 중년 여성이 있었다.

 

음주 운전에 의한 사고였지만, 통금 시간을 어긴 자신 때문이라고 후회도 했었겠죠. 그 이후 노리코 역시 잘못된 것을 철저하게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항상 바르지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한이라는 비열한 범죄 행위를 적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에 대한 사례를 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재차 권해 봤지만 노리코가 역시 거절했기 때문에 억지로 선물을 떠넘길 수도 없고 해서 가즈키와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선물을 도로 집어넣었다.

 

어쨌든 노리코는 정말 강직한 학생이네. 카메라도 가지고 있었다니 역시 대단해.”

 

가즈키 어머니가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당시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아직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도 없던 시절이니 그런 사진을 찍는다는 것 역시 특별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카메라를 몇 개 정도 가지고 다닙니다. 주로 일회용 카메라예요. 치한뿐 아니라 도둑질을 하거나 학대하는 경우에 증거가 중요하니까요. 정의를 위해서 저는 절대 그들이 빠져나가게 두지 않습니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노리코가 그때만은 미소를 보였다. 갑자기 생생한 표정과 함께 뺨이 상기되면서 눈이 반짝였다. 가즈키는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만큼 노리코가 정의에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 감탄했다.

 

정말 훌륭한 아이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즈키의 어머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노리코를 칭찬했다.

 

그렇죠? 정말 존경스러운 친구예요.”

 

노리코는 정말 대단하고 우리의 훌륭한 자랑거리야.

 

가즈키는 그녀와 친구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깡충깡충 뛰며 걸었다.

 

가즈키가 그런 노리코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SNS나 핸드폰도 없던 그 당시,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수업 시간에 쪽지 돌리기를 했다. 선생님 말씀을 듣는 척하면서 연애 상담이나 가족에 대한 푸념, 노래방에 같이 갈 사람 모집 등 쉬는 시간에 해도 되는 얘기들을 쪽지에 적어서 몰래 돌리며 스릴을 느끼는 재미에 열중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쪽지나 일기를 교환하는 것이 우정을 쌓는 방법 중 하나여서 여학생들에게는 나름 소중한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지 두 달이 조금 넘어 첫 중간고사를 치르면서 친구 관계가 한층 긴밀해지게 되었다. 그날도 수업 중에 몇 명이 노트 필기를 하는 척하면서 쓴 쪽지를 귀여운 모양으로 접어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가즈키도 뒤에서 쪽지가 넘어오면 전달해 주기도 했고 유미코로부터 온 쪽지에 답장을 써서 넘기기도 했다.

 

때마침 수학 시간이라 담당 여자 선생님이 지루한 설명을 하면서 칠판에 공식을 쓰고 있었다.

 

선생님!”

 

수업이 중간 정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노리코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우등생인 노리코가 모를 리 없는 수학 공식을 보고 질문을 하다니 이상하네, 라고 생각하던 가즈키는 유미코에게서 온 쪽지의 답장을 쓰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노리코의 행동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몰래 쪽지 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수업 중인데 쪽지가 돌아다닙니다.”

 

?

 

가즈키는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리코는 손에 흰색 종이쪽지를 들고 있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노리코에게 집중했다.

 

, 쪽지?”

 

수학 선생님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러더니 노리코의 자리로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던 리포트 용지를 네 번 접은 쪽지를 건네받았다.

 

누구지, 수업 시간에 이런 짓 한 사람이?”

 

쪽지를 높이 들고 교실 안의 학생들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시치미 떼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가즈키와 유미코, 리호, 레이카는 멍한 표정으로 노리코를 바라보았다.

 

잠깐, 잠깐만……, 왜 그러는 거야, 노리코?

 

선생님.”

 

노리코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봤자 자백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반 학생들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건 압수야. 누군지 짐작이 가는 사람은 나중에…….”

 

거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노리코가 선생님의 손에서 쪽지를 잽싸게 낚아채 갔다.

 

낫칭, 무라모토는 아직 솔로가 맞는 거 같아. 걔는 여성스러운 아이를 좋아한대. 낫칭, 머리를 길러 보는 게 어때? 오늘, 그 애 동아리 활동이 끝나는 거 같이 기다려 보자! 토모코가 보냄.”

 

노리코가 멋대로 쪽지를 펼쳐 낭독해 버리자 교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노리코, 너무해!”

 

낫칭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미야하라 나치가 울음을 터뜨리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낫칭, 기다려!”

 

쪽지를 썼던 시라키 토모코가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갔다. 리놀륨 바닥의 복도 위를 뛰어가는 실내화 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쪽지의 내용에 나온 남학생인 무라모토 히로시는 자기 자리에서 얼굴이 벌겋게 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리코는 쪽지를 다시 접으면서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수업 시간에 쪽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 수업 거부라는 죄도 추가되었습니다. 적절한 처분을 부탁드립니다. 이제 수업을 계속 진행해 주세요.”

 

노리코가 자리에 앉자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던 수학 선생님도 평정을 되찾고 헛기침을 했다. 순찰 중이던 다른 선생님과 마주쳤는지, 교실 밖에서 미야하라의 우는 소리와 함께 양호실에 가는 길입니다.”라고 하는 토모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럼 수업을 계속하자.”

 

수학 선생님은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 칠판에 공식을 이어서 썼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노리코의 등 뒤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노리코가 뒤돌아보자 모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에 같은 반 애들이 노리코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이 불편해서 가즈키 그룹은 옥상으로 이동했다. 같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지만 유미코, 리호, 레이카까지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대로 두면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이들 그룹은 붕괴될 것 같았다. 일단 노리코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가즈키는 과감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왜라니? 쪽지가 나한테 와서 적절하게 대처한 것뿐인데.”

 

노리코는 밥을 먹으면서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꼭 선생님한테 일러바치지 않아도 됐잖아.”

 

일러바치다니, 선생님에게 보고하는 것은 당연 일 아니야?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게 그러니까…….”

 

가즈키는 당혹스러웠다.

 

쪽지를 돌리는 건, 누구나 하는 거잖아.”

 

그래? 가즈키도 해? 설마, 유미코하고 너희들도?”

 

노리코가 눈살을 찌푸리자 당황한 네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그런 거 안 해.” “그래, 맞아.” “물론 안 하지.”

 

사실은 모두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녀들은 부정하는 자신들이 멋쩍은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쪽지를 모두들 앞에서 읽는 것은 좀 그랬지 않니?”

 

조심스럽게 말하는 리호를 노리코는 의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잘못을 한 쪽이 나쁜 거 아니야? 게다가 내용을 읽어 보지 않으면 쪽지가 누구 건지 알 수 없잖아.”

 

하지만…… 결국 낫칭을 울리고 말았잖아.”

 

유미코도 머뭇머뭇하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울 정도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지.”

 

잘못된 것을 따지자면, 마음대로 편지를 읽은 쪽은 어때? 사생활 침해 아니야?”

 

가즈키의 단호한 말에 리호와 레이카도 그래그래, 하고 맞장구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봉함된 편지가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 둘이 고소를 해도 사생활 침해죄에 해당되지 않아. 게다가 그때는 나에게 전달돼 있었으니까 나는 그것을 읽을 권리가 있었어. 나는 옳은 일을 한 거야.”

 

노리코의 말은 빈틈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더 이상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 맞다. 혹시…….”

 

 

~ 4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리코는 야마나시현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가즈키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유미코와 리호, 레이카 등의 세 친구와 자주 어울렸다. 함께 진학한 남자애들이 갑자기 멋있어 보인다거나 젊은 남자 선생님만 보면 설레는 등, 사춘기의 그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신선하게 느껴질 때였다.

 

그처럼 반 전체가 새로운 학교생활에 들떠 있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다른 현의 중학교에서 온 다가키 노리코였다.

 

단발머리의 그 아이는 등 뒤에 잣대라도 찔러 넣은 것처럼 항상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친구를 만들려 기를 쓰고 있는 아이들과는 달리, 혼자서도 침착하게 학교를 다니는 노리코의 첫인상은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늠름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쟤는 맨날 저렇게 혼자서 밥을 먹는 것 같지 않니?”

 

어느 날 평소처럼 넷이 모여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유미코가 교실 구석에서 혼자 먹고 있는 노리코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유미코는 자신도 중학교 2학년 때 고베에서 이사 온 전학생이었기 때문에 가즈키와 다른 친구들이 먼저 말을 걸어 주기 전까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외롭게 있는 아이를 보자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조금도 고쳐지지 않은 간사이 사투리로 말을 하는 유미코는 항상 밝은 목소리에 상냥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여자아이였다.

 

. 혼자서 점심 먹고 나서 도서관에 가는 것 같더라.”

 

계란말이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던 리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리호는 침착한 성격에 머리도 좋아서 중학생 때는 학급 위원을 맡기도 했었다. 노리코가 밥 먹고 나서 뭐 하는지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개학하고 2주가 지나도록 아직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노리코가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아아, 아버지가 전근해서 이사 왔다는 아이 맞지? 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했나 봐.”

 

드라마 출연이 결정되면서 다이어트 중인 레이카는 조그마한 샌드위치를 벌써 다 먹고 종이 팩에 든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아역 스타였던 그녀는 예전에는 TV 드라마나 영화에 곧잘 나왔었다. 하지만 성장기가 되어 출연 섭외가 줄면서 거의 활동 정지 상태가 되었던 중학교 때는 철없는 동급생들에게 한물간 애라는 험담을 듣기도 했다. 그것이 상처가 되었는지 레이카는 험담이나 왕따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었다. 혼혈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뚜렷한 생김새에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마음은 남보다 훨씬 섬세한 아이였다.

 

가즈키가 가서 말 좀 걸어 보는 게 어때?”

 

리호가 말하자 유미코나 레이카도 동감이라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도 잘하고 몸도 목소리도 큰 편인 가즈키는 이럴 때는 왠지 앞장서야 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그래그래, 내가 가 볼게.”

 

가즈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또 나구나,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사실은 그녀도 혼자 있는 노리코가 신경 쓰이긴 했다.

 

다가키 노리코 맞지?”

 

가즈키가 말을 걸자 식사 중이던 노리코가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둥근 얼굴은 특징이 별로 없었다. 일본인답게 쌍꺼풀 없는 눈에 아주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미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극히 평균적인 얼굴이었다. 앞머리는 숏뱅에 뒷머리는 귀 아래에서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었다. 교복의 옷맵시는 촌스러운 느낌으로, 새하얀 하이 삭스가 종아리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

 

정면으로 노리코를 보고 있으려니 가즈키는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애 누구랑 닮았는데. 맞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 혹시 괜찮다면 우리들과 같이 먹을래?”

 

가즈키는 등 뒤에 있는 유미코, 리호, 레이카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래, 좋아.”

 

노리코는 살짝 미소 짓더니 먹고 있던 도시락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그들의 자리로 이동했다.

 

우와~ 반찬이 충실하네.”

 

노리코의 도시락을 들여다본 레이카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 일단 30개 재가 들어가게 식단을 생각하거든.”

 

직접 만드는 거야? 대단하다.”

 

위아래 2단에 꽉 차게 밥과 반찬이 담긴 도시락은 빛깔도 예쁜 데다 고기와 야채의 균형도 좋아서 가정 과목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가즈키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리 책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보기도 좋고 모범적인 도시락이었다.

 

그들은 밥을 먹으면서 서로 자기소개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노리코의 아버지는 농림수산성에서 근무하는 국가 공무원으로 고치와 야마구치, 도쿄 등을 몇 년마다 옮겨 다녔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집에 가는 길이 같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다섯이 함께 하교했다.

 

그때부터 노리코와 친해진 그들은 그녀가 성실하고 좋은 아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유미코와 레이카의 끊임없는 아이돌 얘기에 가즈키와 리호는 대놓고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노리코는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 줬다. 게다가 가족 여행을 갔다 오면 꼭 네 명에게 줄 선물까지 사 오기도 했으며, 친구들 중 결석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노트 필기까지 대신 해서 전해 주기도 했다.

 

 

 

평소에 노리코가 하는 말과 행동은 전부 빈틈없고 똑 부러진 것이었다. 그것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처음으로 노리코를 가즈키의 집에 초대했을 때였다. 가즈키의 방에서 유미코와 리호, 레이카와 노리코는 함께 케이크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어느새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만화책이나 잡지가 가지런히 책장에 꽂혀 있고 벗어 놓았던 옷이 잘 개어져 있었다. 함께 얘기도 하고 간식을 먹으면서도 노리코의 손은 바지런히 움직였던 것이다.

 

집에 가기 전에는 다 먹은 케이크 접시와 컵을 씻은 다음 건조대에 있던 컵이나 접시는 닦아서 찬장에 넣고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서 버려 주기까지 했다.

 

저 애 고등학생 맞니?”

 

그녀의 행동을 본 가즈키의 어머니는 감탄했다.

 

노리코의 주가는 첫 중간시험에서 더욱 상승했다. 노리코가 학년에서 1등을 한 것이다.

 

노리코는 공부도 잘하는구나. 그런 친구하고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이좋게 지내렴.”

 

부모들은 모두 노리코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에 무척 기뻐했다. 그래서 가즈키의 가족뿐만 아니라 유미코, 리호, 레이카의 가족에게도 노리코는 언제나 환영 받았다.

 

성적도 좋고 머리 모양과 복장도 검소하고 예의도 바르다. 노리코는 부모들에게 이상적인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 맞다. ‘규범(規範)’.

다가키 노리코(高規範子)’의 가운데 한자 두 자가 바로 그 글자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린 가즈키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노리코는 그야말로 모두에게 규범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년에서 상위권 성적을 놓치지 않았던 노리코는 다른 반 애들에게까지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가즈키 그룹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때는 도시락을 먹으며 노리코에게 배웠다. 그다지 머리가 좋다고 할 수 없었던 유미코나 연예계 활동으로 툭하면 결석을 했던 레이카도 요점을 잘 정리한 노리코의 지도로 성적이 올랐고, 원래부터 성적이 좋았던 리호나 가즈키도 학기 말에 5등 이내까지 넘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노리코를 존경하게 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아침, 가즈키는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직장인들과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만원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엉덩이 쪽에서 뭔가 스멀스멀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즈키는 몸을 틀어 피했지만, 또다시 무언가가 엉덩이를 스쳤다.

 

그것은 아무리 둔감한 가즈키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치한이었다.

 

단발머리에 덩치가 큰 가즈키는 그때까지 한 번도 치한을 만난 적이 없었다. 얌전한 인상의 유미코가 또 당했어.” 하고 울먹이며 학교에 왔을 때, “왜 치한이라고 소리치지 않았어!”라고 화를 냈던 그녀였다.

 

나였으면 바로 남자의 손을 붙잡아 비튼 다음 여기 치한 있어요!’ 하고 사람들 보라고 소리쳤을 거야.”라며 호언장담했던 가즈키였지만 정작 자신이 그 입장이 되자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깊은 죄책감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 상태에서 소리 지르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즈키는 자신 또는 상대방이 내릴 때까지 참고 버텨 보자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사람들이 꽉 차게 타고 있어서 거리를 두기 힘든 상태에서, 아무리 몸을 피해 봐도 남자는 집요하게 손을 뻗어 왔다. 아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하는 생각이 들며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때였다.

 

번쩍하고 플래시 불빛이 터졌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갑작스러운 섬광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가즈키의 엉덩이에 닿았던 손이 떨어졌다. 가즈키가 돌아보니 일회용 카메라를 한 손에 든 노리코가 다른 손으로 중년 남자의 팔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기사님, 치한을 잡았으니까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주세요.”

 

 

~ 3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의 봉투는 우편함에 있던 다른 우편물들과 함께 배달되어 있었다.

 

그것은 봉투라는 단순한 단어가 아닌, 젠체하며 영어로 엔빌로프(envelope)’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연보라색의 종이에는 펄의 광택이 있었고, 두껍고 단단한 종이로 만들어져서 고급스러웠다. 크기는 양형 1호로 업체의 인사장이나 초대장 등으로 사용되는 크기였다.

 

결혼식 청첩장인가?

 

아파트 공동 현관에 있는 우편함에 잔뜩 쌓여 있던 광고 우편물이나 전단지들을 꺼내 비우던 이마무라 가즈키는 이 봉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다.

 

잠시 후 그녀는 양손에 우편물을 가득 든 채 여행 가방을 밀면서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인 8층의 버튼을 누른 후, 도착할 때까지 출장 간 사이에 쌓여 있던 우편물을 대충 확인해 보았다. 왜 이렇게 무겁나 했더니 백화점이나 통신 판매 업체의 카탈로그가 상당히 많았다.

 

집을 비운 사이에 우편함에 이런 것들로 가득 차 버리면 곤란한데. 그만 좀 보냈으면.

중원(中元) 이나 연말뿐만 아니라 절분(節分)은 물론이고 밸런타인데이에 할로윈까지, 1년 내내 이렇게 카탈로그가 오는 것은 가즈키가 우수 고객이기 때문이다.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녀는 관련된 출판사와 동료 작가, 사진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 취재 협조자에게 줄 선물은 꼭 챙겼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져 있어도 자신은 이 업계에서 음식의 향신료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중요한 식재료는 그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려면 여러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중원을 지낸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10월 초순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로그는 벌써 연말 선물을 안내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계절에 한숨을 내쉬면서, 가즈키는 카탈로그 사이에 끼어 있는 봉투들을 후루룩 넘기며 확인했다. 신용 카드 회사, 출판사, 은행…….

 

문득, 손이 멈췄다. 아까 살짝 보였던 연보라색 봉투의 한쪽 면에는 꽃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받는 사람 이름은 붓이나 볼펜이 아닌 잉크와 펜으로 썼는지 유려한 맛이 느껴졌다. 글자색은 봉투보다 세 단계 정도 진한 보라색이었다.

 

받는 사람의 주소나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외국에서 온 편지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보낸 거지 하고 봉투를 뒤집어 보려고 한 순간,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것은 봉랍(封蠟)이었다. 봉투를 접착제로 붙이고 봉랍을 녹여 떨어뜨린 다음, 그 위에 인새(印璽) 같은 것을 양각으로 찍은 것이었다.

 

이렇게 멋지게 장식되어 있는 봉투는 청첩장밖에 없겠지.

 

결혼과 인연이 없는 상태로 40대가 되어 버린 가즈키는 난감함에 고개를 저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윽고 현관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주일 만이다. 그녀가 사는 곳은 세워진 지 10년 된 2DK의 아파트였다. 도심에서 대중교통으로 40분 정도 걸리며, 제일 가까운 역으로부터 도보로 13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즈키는 5년 전에 이 집을 샀다. 방의 배치나 채광이 특별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둘러봤던 집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가방을 현관에 놓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갈증이 나서 들고 있던 우편물들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 캔을 하나 꺼냈다.

 

이 시기의 홋카이도는 이미 추운 계절이었다. 북방 영토 문제에 관한 취재를 하느라 그곳에서 1주일 동안 머물렀던 가즈키는 오래된 민박집에서 매일 밤 난로를 켜고 추위에 떨었었다. 도저히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캔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맥주를 마신 가즈키는 ~.” 하고 소리를 냈다. 이거 완전히 아저씨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두 번째 맥주 캔을 꺼내 들고 소파에 앉으면서, 더 귀찮아지기 전에 영수증을 정리해 둘까 하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취재비가 선금으로 50만 엔이 지급되었다. 취재에는 여비, 식비, 취재 대상에게 주는 사례비 등의 경비가 소요되지만 대체로 원고를 다 쓴 다음에 정산하면 된다. 가즈키가 이런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5년 전에 권위 있는 다케시타 요이치 논픽션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논픽션이란 장르는 이 업계에서 결코 메이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다케시타 요이치라는 이름은 일반인에게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상의 이름을 명함에 박아 두면 취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이 상을 수상했던 책,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연회나 에세이 집필의 의뢰도 잇따랐고, 아주 가끔은 해설자로서 보도 프로그램 등에 나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수상 경력으로 가즈키의 인생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가즈키는 바쁜 삶 때문에 전부터 간신히 가지고 있었던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새가 없어서, 새치 머리를 염색하는 것도 포기했고 화장도 별로 안 하게 되었다. 콘택트렌즈도 귀찮아서 두꺼운 안경을 끼고 지냈으며, 복장도 언제나 편한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키가 컸었고 중학생 때는 육상 선수도 했기 때문에 체격도 탄탄한 편이었다.

 

물론 전에는 남자를 사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취재로 며칠이고 집을 비우거나 밤새 원고를 쓰고 낮에는 소파에 뻗어 있는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남들처럼 결혼을 동경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맥주를 마시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리던 가즈키의 시야에 우편물 더미 사이에 끼어 있는 연보라색 봉투가 들어왔다.

 

  

이렇게 청첩장 같은 것을 받을 때면, 아무리 포기하고 살았지만 마음이 조금은 씁쓸했다. 아직도 내게 여자의 부분이 남아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든 가즈키는 자조적인 기분에 살짝 코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어떤 청첩장이라도 뜯어서 열어 보면 악의가 느껴지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것 때문에 주말이나 공휴일은 물론, 연휴도 제대로 쉴 수 없잖아. 돈이 나가는 것도 그렇고……. 그녀에게 청첩장은 그 자체가 독이 포함된 것이었다.

 

두 번째 맥주를 다 마시고 세 번째로 마실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낸 가즈키는 답답했던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테이블 앞에 앉았다. 집게손가락으로 봉투의 가장자리를 스윽 훑었다.

 

이번에 대체 누가 결혼을 한다는 거지? 출판사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지인일까? 결혼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는 걸까?

 

행복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까지 참석해서 행복을 나누어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결코 적지 않는 축의금에 남들에게는 전혀 재미없는 그들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의 주례사나 연설에 감동한 척하다가 여흥에 맞춰 억지웃음을 짜내고, 감회에 젖어 눈물 짓는 신부와 그 어머니가 웨딩드레스나 전통 혼례복을 입은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쉬워하는 게 흔한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지.

 

신세를 진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청첩장을 보낸다고 하지만, 정말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면 부르지 않는 것이 돈도 시간도 허비하지 않게 해 주는 거잖아.

 

노처녀 히스테리로 인상을 쓰고 있던 가즈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내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그때는 보란 듯이 호화스럽게, 행복한 듯 동네방네 자랑하며 결혼 피로연을 해야지, 라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가즈키는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었다.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는 오래된 담배꽁초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가즈키는 개의치 않고 그 위에 담뱃재를 떨구었다.

 

그녀는 드디어 그 봉투를 우편물 더미에서 꺼내 눈앞에 들고 싸움이라도 걸 것처럼 노려보았다. 꽃 모양의 우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더욱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트가 그려진 우표보다 나으려나. 그런데 도대체 누가 보낸 거지?

 

자판을 치기 좋게 항상 짧게 깎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손톱 끝으로 봉투를 집고 딱지치기를 하듯이 힘 있게 뒤집었다. 그리고 발신인의 이름을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다가키 노리코

 

가즈키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연보라색 봉랍에는 N의 이니셜이 찍혀 있었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노리코가…….

머리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이 차가워지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얕아졌다.

산소가 옅어진 가즈키의 뇌리에 노리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제 손으로 죽였던 노리코의 얼굴이.

 

~ 2회에 계속 ~


*출간 전 연재는 총 10회까지 진행 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