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출처 : 파란여우 > 별점 다섯개로는 부족한 책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터넷상의 홈페이지 방문자들로 인한 영화정보는 거의 홍수가 날 지경이다. 홈페이지 주인장이 어떤 영화 평을 한 편 올리고 나면 거기에 덧글로 달리는 각종 영화에 관한 여담이나, 정보는 또 하나의 평론으로 묶을만한 분량이다. 그만큼 영화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셈이다. 매체의 발전이 영화제작에만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유의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이제 영화정보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우스 한 번 클릭 하는 일로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필름으로 양산되는 영화는 언젠가 생명의 소멸을 가져온다. 보관의 용이함이 영화 열정을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쓰게 되었다는 철학과 교수님의 영화와 철학적 혼합의 관계, 그 연애관계를 담아낸 책이다.

“영화와 사귀기 위해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글쓰기다. 여기서 글쓰기란 비유컨대 사라지는 영화들이 남기는 안타까운 흔적들로 무늬를 짜는 것이다. 무늬로 뭔가를 만들어내어 추억의 증거로 삼아보라. 추억이 있는 동안은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이 책은 내가 영화 텍스트들과 함께 놀면서 만들어낸 무늬들이다. 나를 홀리고 꼬시며 에로틱하게 자극하는 저 멋진 여인 같은 영화들과 만나 사귄 흔적, 추억, 앙금들을 조금은 주저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여기에 남긴다.”-(7쪽);지은이의 말


로마에 올인 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을 때, 옛날이 그리워질 때,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 나는 영화를 본다.”고 한다. 종합적 의견으로 치면 삶이 그렁그렁해지면 영화를 보신다는 말 아니냐. 저자 이왕주의 말은 삶의 무늬를 만드는 과정에 추억이 있고 추억은 영화가 포함된다는. 그래서 영화와 연애를 한 판 하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가 ‘특별’접두사로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그 머리 아픈 철학과 연결을 한 영화평론집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맞다. 이 특별한 영화 평론집은 영화소개->철학적 분석, 해석이 후편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와호장룡/장자의 무위)해석은 철학과 영화의 만남 극점을 보여준다. 유위(억지스러움, 인위적인 것, 틀에 박힌 것)은 무위(자연스러움, 순리적인 것, 자유로운 것)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장자의 무위사상을 두 명의 인물(용과 리무바이)로 이분법적인 구도를 이룬다.


그것을 소 잡는 ‘소백장의 칼’로 앞부분에서 의미심장한 어필을 해 준다. 29편의 영화소개에서 하도 니체의 철학이 여러 번 응용되고 니체를 칭송하는 듯한 발언도 여러 군데 보였던지라 동양의 철학은 배제한 서양철학과의 접목만 시도했다고 오해한다면 독자의 무지다. 책에는 공자님의 말씀이 근엄하게 등장하기도 하고 가장 많은 출연을 한 철학자는 단연코 서양철학의 거두 니체씨이지만 장자(그의 스승인 노자)도 조연급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소백장의 칼=청명검=리무바이의 무예=노자의 도덕경. 이 흐름의 공통점은 ‘이름과 명분에 매달리지 말자’다. 섭리까지 거스르며 이기려 들지 말자. 그러면 나중에 꼭 벌을 받는다?는 구도. <도덕경>은 이래서 도덕 교과서이시다. 재미없는 도덕 선생님의 기억을 간직한 독자는 하품이 나올 수도 있다. 예의 없이 반론을 불쑥하나 들이밀면, 도덕적인 삶이 뭐가 나쁘냐!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도덕적인 여인 ‘수련’보다는 철없는 여인 ‘용’이 더 매력적인 삶을 산다. 삶은 어차피 한 편의 드라마다. 발단과 전개, 절정, 결말로 이어지면서 숨가쁘게 변신하는 삶이 매혹적인 풍경으로 보이는 것은 철없는 나만의 시각일까. 열정이 매번 옳은 것도 아니고, 매번 섹시한 것도 아니지만 한번뿐인 삶. 깨우치는데 뭔가 자극은 있어야지 수고스러움의 쾌감이 배가되는 것 아니겠어? 책에서도 인생에서 과정을 향유하라고 하지 않더냐!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쾌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김에 이 책의 최다 출연자인 니체씨에 관하여 한 마디를 하기로 한다. 춤을 배우며 인생을 알아가는 스기야마씨의 춤 이야기(Shall we dance)에도 니체씨의 열광적인 예술론이 대두된다.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아폴론은 밝음, 질서, 조화, 균형을 뜻하고 디오니소스는 어둠, 혼돈, 도취, 광란을 뜻한다. 물론 장르에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고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다. 가령, 조각이나 그림은 전자에 속하고 음악과 춤은 후자에 속한다. 특히 춤은 디오니소스적인 정열과 광기 그리고 힘의 요소가 다른 아폴론적인 요소들을 완연히 압도하는 강렬한 예술이다.”-(229쪽)


“춤이 없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랴?”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을 향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니체. 다른 곳에서는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그들을 일컬어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이라고까지 호도하셨단다. 요즘 수녀원의 육중하게 무거운 문을 박차고 나와 종교학자로 거듭 난 영국여성의 이야기책을 한 권 읽고 있는데, 그 분도 세상과 즐겁게 연애하는 춤을 추고 싶어 수녀복을 벗으신 것일까 싶다. 영화와 철학의 만남인 이 책은 일단 영화를 텍스트로 만나는 것을 부담 없이 전해준다. 삶이 한 판 벌어지는 춤마당이라면 영화는 그 속에서 장단을 맞추는 가락이다. 거기에 철학자들의 육감적인 분석이 가미된다면 이거 너무 에로틱한 춤 아니겠어? 철학을 영화로 해석할지,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석할지는 자유에 맡긴다. 순서가 바뀌면 어떠한들. 그래, 너 영화와 철학 둘 다 좋아하는 거 맞지?


부기)

탄탄하면서도 쉬운 철학적 연결 해석이 명문장을 여러 군데서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보다 품격 면에서도(나나미 여사의 품격 치중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훨씬 높다고 본다. 그 증거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면서 동, 서양의 유명하신 철학자들을 두루 모신 점이다. 한 장르의 영화에 기울지 않았던 점도 이 책의 눈부신 보편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가장 큰 점수는 20년만의 제주도 여행지에서 인연을 맺은 책이라는 점이다. 새벽 다섯 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책을 읽었다. 여행지의 아늑한 호텔방에서 새벽 미사 종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덮는 기분이란, 동녘하늘의 아침태양을 만나는 천지창조다.(과장법에 속아 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돌바람 > 우리에게도 절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
황해문화 50호 - 2006.봄
황해문화 편집부 엮음 / 새얼문화재단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일본 SF소설의 첫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개인적으로 나는 미야자와 겐지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작품 수로 밀리니까) 호시 신이치의 짧은 소설 <기묘한 이야기>에 수록된 <옷을 입은 코끼리>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최면술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는 한 남자가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에게 말한다. "넌 코끼리가 아니야. 인간이야.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생각해. 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어. 알겠지? 넌 인간이야." 그는 그저 장난으로 말한 것이지만, 이게 왠일인가. 코끼리는 동물원을 빠져나와 자기가 알몸임을 깨닫고 옷을 찾는다. 기성복은 맞는 게 없어 특별히 제작하고 아차,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습니다. 일해서 번 다음 드려도 될까요?" 그 덩치로 도망쳐도 숨을 곳도 없으니 그렇게 하시라고 주인은 말한다. 코끼리는 연예프로덕션을 찾아가 '코끼리 흉내를 내며' 탤런트가 된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유원지를 경영하고 과자회사, 장난감 회사로 사세를 확장한다. 그리고 틈틈이 독서도 하고 불우이웃도 돕는다. 그리던 어느 날, 그의 '인격'에 감동받은 한 사람이 묻는다. "당신은 엄청 성공하셨군요. 도대체 그 비결은..." 도대체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성공하고 싶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2005년 8월을 기준으로 서울시에는 약 506만 명의 인원이 살고 있다. 이는 정부가 발표한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 548만 3000명과 맞먹는 숫자다. 그냥 서울시에 사는 인원이 대한민국에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치자. 그들 중 특수고용 노동자는 약 63만 7천 명이다. 특수고용직을 다시 쪼개서 여성이 98%를 차지하는 생활설계사는 29만 6천 명(1998년 기준), 학습지 교사는 작년에만 3만 명이 추가되었다는 발표만 있고 정확한 통계도 없다. 통계가 없는 게 이뿐인가.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01년 국내 택배 실태조사'에서는 전국 오토바이 레이서들인 택배인원이 몇 명인지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어떻게 알겠는가. 노동자가 아닌데). 비정규직은 아니지만 전국의 길거리 음식점인 노점상은 3천 524포(2004년 기준)이고 아예 최저생계비인 113만 6천 원(2004년 기준 4인 가족)도 벌 능력이 없는 도시 빈민의 숫자는 파악도 안 된다.

다시 돌아가서 2005년 기준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20만 원이다. (이럴 수가!) 이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12만 원. 딱 반값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더 짧은가? 지난해 '레이버 투데이' 에 실린 기사만 놓고 볼 때 정규직은 주당 43.5시간, 비정규직은 44.9시간을 일하고 있다. 그런데 내년 1월 1일부터 종업원 300명 이상 회사의 기간제(계약직) 근로자가 2년 이상 계약직으로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법안'이 27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름 고심한 법안이다. 근데 왜 노동자들은 시민의 발인 지하철까지 운행 중간해가며 이를 반대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사업주라면 비정규직 노동인력을 채용하여 일을 시키고 2년 지난 후에는 두 배의 월급(위의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을 주고 그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바에야 그냥 짤라버리고 다시 비정규직 인원을 모집하는 것이 당연히 낫지 않겠나. 조금 양심적인 사업주의 경우에는 그들 중 몇 명은 구제해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몸으로, 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전국의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요식업 종사자, 청소용역 파견근로자, 택배직원, 설문지 조사자, 텔레마케터... 등등은 외려 기존에 자신이 쌓았던 노동기간조차 말소시키는(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이라는 내용에는 이전 근무기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개악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2년마다 다른 사람 찾는 데 비용을 쓰는 것보다 기간제라 해도 2년 동안 숙련된 사람을 쓰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기업들도 만만찮게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헤헤,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앞서 전제했던 저러한 수치들은 사실 우리에게 그 실상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548만 3000명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하루 똑같이 일하고도 차별받는 모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담화에서 밝혔듯이 우리 사회가 현재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양극화' 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실재를 담보로 한 말인지는 저 '비정규직 노동 개악안' 통과를 통해 다시 읽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작년 11월 국회에서 통과된 '쌀협상 비준안' 또한 대한민국 자영농민은 국민으로 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한미FTA에서 뜨거운 감자로 언급되는 '스크린 퀘터제' 폐지 또한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메이저 영화나 일인시위에 나선 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를 하겠다는 싹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정부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시대적 대세'를 이야기하려면 그 전에 정부가 앞서서 그 대세에 맞설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했어야 옳다. 앞으로 다가올 출판시장의 개방이나 교육 분야의 개방, 의료 분야의 개방...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개방압력'으로부터 무엇을 지키고,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육성하고 있는가는 시민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가 해야 할 임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금을 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을 정부가 못했을 때 정부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파업을 하는 것은 세금을 내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편파적인 기사나 대세론에 힘을 실어주는 '대학교수'들의 공정한 듯 보이는 전문적인 글들을 파고들면 실제로는 전혀 현실을 담아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너무 지배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는 언론이 공정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나의 '알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알았다 하더라도 전문성을 앞세워 기를 죽여놓는 대학교수들의 글발에 의해 나의  '반대할 권리'가 차단되는 것이라고 나는 지금의 나를 진단한다.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 그러는 와중에 만난 <황해문화 50호>는 내가 올해 만난 무척 값진 책이다. 계간호라는 잡지의 특성상 대체로 출간된 계절에만 잠깐 읽히고 마는 것이 출판현실인데 올 봄 이 책에 실린 내용은 파격적이다 못해 아프다.

첫번째로 파격적이라는 것은 그 기획의도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존의 잡지 구성 체계를 과감히 버렸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대개의 잡지 체제가 특집으로 다루는 부분에 대한 전문가들의 글,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인들의 글, 지역사회나 생활인의 글, 주목하는 책이나 동향 들로 '다양한' 소리를 담아내고 있지만 실상은 한 얘기를 또 하거나 너무 전문적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잡지가 가지고 있었던 권위적인 부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따라 잡지의 체제를 과감히 버릴 수 있다는 것은 그 내용을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며, 이는 잡지가 갖고 있는 기존의 기성, 권위, 체제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예를 들어 한 신문사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양극화'로 보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과학 모든 지면에서 각 분야의 전문인이 아닌 다양한 계층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딱 한 달간만이라도 담아낸다고 치자. 이어서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확실한 언론기관이자 홍보실인 텔레비전에서 매일 같은 시간 딱 한 달 동안  '사회 양극화'에 관해 시민들(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사업가, 교육가, 상공업자, 학생, 주부...)이 맘껏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문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방영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자기 목소리를 한 번도 담아내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서 농토가 갈아엎어지는 막막한 현실에 처한 농부들이 공권력을 앞세운 전경들과 폭력시위를 해야만 하는 아픈 현실이 조금은 개선되지 않을까. 그들과 함께 하는 것도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껴안을 수도 없는 도시 월급쟁이들도 '당신들만 아픈 게 아니'라고 속을 긁기 전에 '나도 살기 힘들다'고 한번이라도 정부를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봤다면 농부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라고 느끼지는 않지 않겠나~ 요.

두번째로, 이 잡지를 보며 내가 아팠던 것은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을 이 땅의 50인에게 듣는다'는 표제처럼 대한민국이 이렇게 아픈 나라구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묻자 마라 갑자생이 단지 그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군에 징병되어 원폭피해자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고, 민족 반역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온갖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이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울분, 친일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부모 세대가 누린 권력으로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을 접하며 자란 이가 동시대를 걸어온 같은 세대에게서 느낄 수밖에 없는 단절된 역사, 대한민국 군대(국군)의 총칼에 의해 한 날 한 시에 부모형제를 잃은 석달동 양민 집단대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증언과 그간의 노력, 대한민국 사법부의 치욕으로 인용되곤 하는 인혁당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한 맺힌 반세기, 군의문사로 자식을 잃은 자의 요구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 은폐의 문제들, 베트남 참전 용사가 들려주는 고엽제 피해의 실상과 대책, 빨갱이 자식이 자신의 출신성분을 숨기고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고통의 삶, 그리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문제, 문제들, 상처들...

1부 '풀리지 않은 미완의 과제, 역사'만을 들쳐봐도 그들 각자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 여전히 풀리지 않고 정당한 요구마저 짓밝히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 때문에 아프다. 아픈데 2부 '노동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에서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떼고 미얀마로 돌아가는 뚜라의 한 마디 '"안녕히"라는 말이 나를 더 깊숙이 찌른다. 나중에 자신의 아이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까봐 겁이 난다는 학습지 교사직에서 해직된 한 여성의 말이 또 나를 찌른다. 어느 청년 백수가 들려주는 일상과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우리 옆집 총각의 이야기여서 또 찔끔거린다. 지방대학을 나온 대학원생의 이야기가 내 친구의 이야기여서 못 본 척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 장애인이 희망이 아닌, 배려가 아닌, "우리에게도 절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고 외칠 때는 가슴이 먹먹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볼 수 없었던 것들, 보지 않았던 것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책이야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게 일러주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상처들은 곪고 곪아서 아픈 것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는 평범한 기업인의 이야기나, 386세대의 전진을 '자유화, 세계화'를 통해 주장한다거나, 자유민주주의가 시장경제의 진보의 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유기업원 연구원의 목소리도 포함된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 현실과 함께 실림으로써 어느 것이 허위이고, 가식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우리 사회 50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느 전문가의 글보다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게 길을 터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모른 체하는 거대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다 얘기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안은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옷을 입은 코끼리에게 찾아가 "도대체 그 비결은..."이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코끼리는 말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너는 인간이야'라고 항상 속삭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라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죠. 항상 배우고 생각하며 그대로 실천해왔을 뿐입니다. 제가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 때문인 듯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한 권의 단행본으로 읽어도 괜찮은 책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펴낸 <길에서 만난 세상>, 이준희의 <세상 속으로> 등의 책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들려주는, 즉 날것의 적나라함(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글도 포함해서)은 직격탄을 날린다. 일독을 권한다. 단, 원고를 늦게 주는 필자가 꼭 있기 마련이고 마감에 쫒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교정자의 실수가 꽤 많다. 반성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나는 똑똑한 아이였던 적이 없다. 어느집 애가 똑똑하다고 소문이 나는 근원지는 학교 선생님, 일가친척, 동네 아줌마, 만화방이나 점방 아저씨 아줌마 들인데 단 한번도 똑똑한 아이라는 평을 받은 기억이 없다. 생일이 빠른 사촌언니랑 4학년 때부터 계속 한반이 되면서 매사 야물딱진 언니하고 어찌나 비교가 되는지 나는 결국 세상에 멍청한 아이의 이미지로 굳어져버린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 유년의 상처까지는 아니지만 지금도 종종 씁쓸한 미소를 짓게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아, 나는 원래부터 좀 멍청한 인간이지’하는 기분이 훌쩍 들 때라든가…….


그래선가 한 직장에 근무하는 대단히 박식하며 대단히 철학적 깊이가 느껴지는 혜안으로 세상을 헤아릴 줄 아는 K선배가 주변사람들한테는 어딘지 좀 멍(청)한 사람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는 걸 보면 크나큰 위로가 된다. 똑똑한 인간과 멍청한 인간의 차이가 능력이나 재능이나 열정 내지 의욕의 차이는 다행히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어서일 거다. 그 사람이 가진 성향이랄지 세상을 감지하는 주파수랄지 암튼 시선의 끝이 가닿는 데가 현실의 세상인지 안으로 감싸인 비현실의 세상인지가 그를 똑똑해 보이거나 멍청해 보이게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멍청해 보였던 나를 이래 뒤늦게 변호하는 건 오늘 내 손에 들려있던 책, ‘자유의 감옥’이 환기한 세계의 기시감이 어린 내 모습위로 어른거려서이다. 아니 그보다는 사실 이 책 서문에서 미하엘 엔데가 '우리의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려 했다’고 (남들한텐 몰라도 나한테는) 머리를 꽝 울리는 소릴 해놓고 있어서이다. 실로 나는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을 동화와 만화 같은 형태로 바람직하게 만나기 전, 판타지에 아주 깊이 중독되었던 아이였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우리집은 개구리산이라 불리던 동네에서 남문구 굴다리 안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어찌된 건지 그 동네 창신국민학교로 전학을 안하고 거제국민학교에 계속 다녔다. 등하굣길을 합하면 무려 두 시간을 혼자 공장골목과 철길과 찻길을 따라 걸어다녀야 했는데, 힘들거나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았고 정말 좋았다. 나는 날마다 마음껏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날아다녔다. 월례고사 90점 밑으로 틀린 개수만큼 맞아야 하는 일도 잊고, 미술준비물을 챙기지 못한 걱정도 잊고, 낱말뜻풀이 숙제를 세 바닥 다 못채운 것도 잊고, 칠판 앞에 서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그날의 산수시간 같은 것도 까맣게 잊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갖가지 캐릭터와 동식물과 흉가와 무덤과 해적선과 귀신도깨비와 함께 마법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엮어나가며 그 속에서 완전히 행복했다.


당시 나는 나만의 현실이라는 것이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몰랐지만, 내가 재창조한 현실세계의 은유로 눈앞의 현실을 덮을 수도 있다는 판타지의 원리를 본능적으로 눈치챘던 듯싶다. 다만 그런 판타지로 눈앞의 현실을 영원히 덮을 수는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감지하기 위해 조율한 주파수와 그 주파수에 잡히는 현실을 살기위해 터득한 방식이 등하교 두 시간에서 공부시간과 쉬는 시간으로 연장되었을 때, 급기야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엄마 댕기가시라 해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내가 펴낸(?) 몇 편의 만화(공책 한 페이지를 6칸 내지 8칸이 되게 해서 한권에 한 작품을 담았다. 진짜 만화책처럼 애들이 돌려보고 재밌다고 했는데 내가 왜 대성한 만화가가 못되었는지……)는 말 그대로 날아다녔던 내 공상과 상상의 판타지물이었다. 이러니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에 맞는 특별한 목소리를 내야만 그 말은 진실이 된다'는 미하엘 엔데의 말은 내 경우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장르론을 넘어서는 탁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의 속도에 쫒기는 현대인의 삶을 그린 그 유명한 동화 ‘모모’의 작가이기도 한 미하엘 엔데는 ‘자유의 감옥’이라는 이 소설집에서 (어린 내가 그랬듯) 그의 주파수로 감지한 여덟 세상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표제작 ‘자유의 감옥'을 비롯해 8편의 중단편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는 선택 앞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며, 시공간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세상에 대한 사유이다. 그리고 그 사유를 기발하고 자유롭게 풀어놓는 공상과 상상의 유희인 동시에 그 유희를 통해 끌어내는 삶의 근원에 대한 천착과 미로찾기와도 같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고민과 모색이다.


이 가운데 ‘미스라임의 동굴’은 판타지소설의 출발점이 어때야 하는지를 자문케 하여 대어를 포획한 기분에 젖게 한 소설이다. 지하묘지 동굴에 사는 그림자들의 이야기라는 설정자체가 독자를 한순간 사로잡는 판타지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쓴 게 엔데가 일흔이 넘어서라고 하는데 ‘누구나 달고다니는 그림자는 육신이 죽을 때 따로 떨어져 나와 어딘가로 가지않을까’라는 상상력에서 소설이 빚어졌다고 하니 그 나이에 어떻게 저런 착상을 했을까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인공 이브리의 동선을 쫓아간다. 이브리는 미스라임 경계 너머를 꿈꾼다는 점에서 동굴에 사는 그림자와는 다른 존재이다. 미스라임 동굴의 가장 큰 규칙은 지하묘지인 동굴만을 유일한 현실세계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 너머에 호기심을 가지거나 상상을 하는 건 어리석고 불온한 생각이다. 사실 그림자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을 지배하는 보스의 목소리가 그들의 ‘생각’을 대신해서 지시해 주고 있으니까 그들은 “너는 지금 일어나서 너의 일터로 가길 원하고 있어.” “너는 자기를 원하고 있어” “너는 왼쪽으로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려고 해” 식으로 내려지는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경계 너머를 꿈꾸는 이브리는 자신의 생각을 대신하는 보스의 목소리를 거부한 끝에 그림 한 장을 완성하고, 그 완성된 그림이 ‘창문’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생각’처럼 무언가를 ‘기억’해 내는 것 또한 동굴안 그림자들에게는 낯설고 불온한 행동이다. 동굴의 지배자가 그림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일체의 의문을 지우고 경계너머를 기억하게 할 기억을 지우고 노예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일상의 고통을 지우는 약을 복용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의 출발점인 창문을 기억해 내면서 동굴의 출구를 찾는 이브리의 탐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길찾기에서 레프요탄이라는 여자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브리는 그녀에게 속아 유리온실의 정비를 맡게된다. 그곳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던 어느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브리는 동굴의 설계자인 노인을 만나게 되고 보스인 베히모트와 여의사 레프요탄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분노한 이브리는 기억과 고통을 잊게하는 약의 생산장인 유리온실을 때려부순다. 그리고 그림자들에게 베히모트와 레프요탄이 어떻게 그들을 통치해 왔는지를 알리고 바깥세상으로 탈출하자고 설득한다.


마침내 이브리는 위대한 모세처럼 노예상태이던 그림자들을 이끌고 엑소도스를 감행하는데, 소설이라는 게 그렇듯 도중에 베히모트와 레프요탄 일당과 딱 마주친다. 거기서 베히모트가 늘어놓는 연설이 가관이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전신에 스멀거리는 가려움을 불러일으키다 못해 아주 우스워지는 지경에 이른다.


“……결정해. 쟤(이브리)는 이상체질로 약이 듣지 않는 거야. 저 혼자 고통을 당하는 게 억울해서 너희 그림자들을 이끌고 탈출하려는 거지. 너희들, 저 별종같이 신세망치는 길로 들어설래? 너희들의 유일한 은신처인 이 세계에 남아 지금의 상처를 치료하며 모두 잘사는 길로 들어설래?”


한국 독자의 귀에는 낯설래야 낯설 수 없는 연설을 들은 뒤 그림자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약을 공급받지 못하자 슬금슬금 되살아나는 기억과 스스로의 선택을 강요하는 생각과 그리고 죽은 듯이 빠져드는 잠으로 인해 잊을 수 있었던 고통을 경험한 그림자들의 선택은 뜻밖에도(혹은, 아니나 다를까) 베히모트의 지배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동굴에 남는 거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에 겁을 먹고서 진실을 위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이브리의 말에 의혹과 증오를 되돌려 보낸다. 그림자들이 보스의 지시를 따르는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옮겨본다.


결정을 내린 그림자들은 각목과 쇠망치를 들고 이브리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돌린 채 빛이 들어오는 구멍 안으로 이브리를 밀어넣었다. 그의 몸이 구멍을 넘는 순간 터져나오는 날카로운 외침을 모든 그림자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황홀해서 내지른 기쁨의 탄성이었는지 최종적인 절망감 때문에 내뱉은 슬픔의 탄식이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책을 덮으면서 궁금하긴 했다. 어차피 기존사회에 청진기를 갖다대고 권력욕과 기득권이 강요하는 규율에 펜을 휘두르려고 했다면 미하엘 엔데는 왜 하필 판타지소설을 고집했을까. 진짜 인생을, 진짜 현실을 비판하고 메스를 가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게 아니라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에 맞는 특별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그에게 있어 판타지의 세상이야말로 진짜 세상이고 진짜 현실이어서는 아니었을까.


판타지란 결국 실제 존재하는 세상과 차원이 다른 공상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각자의 주파수를 통해 감지되거나 잡히는 세계 사이에 놓인 통로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 통로의 존재를 의식하든 망각하든 혹은 고의로 무시하든 시공간적으로 묶인 한 존재가 비밀스럽게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의 슬픈 이면 같은 것, 또한 현실의 존재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고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우리의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이 바로 판타지일수도 있다는 거다.


그나저나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동안의 나는 실제의 현실에 존재하는 나일 것이며 동시에 시공간의 제약에서 한 끗 정도 비껴앉아 나의 판타지를 보고있는 나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무래도 나 이거 판타지 중독 증상은 아닐까 슬며시 걱정된다. 작년 한해 생활설계사란 직업에 종사하며 내 연봉의 서너 배를 너끈히 벌어들인 사촌언니와 비교한다 쳐도, 멍청한 애로 낙인찍혔던 어린 시절의 나와 달리 현재의 나는 제대로 멍청한 방식으로 살 엄두조차 못내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말난 김에 덧붙이자면 레프요탄이 유리온실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연봉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처럼 다른 곳에 존재할 나를 잊게하는 묘약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나자 어쩜 그럴 수 없이 맞아떨어지는 게 묘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약을 만드는 유리온실 출근을 위해 이제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있으니 이제야말로 제대로 멍청해진 건지, 대략 난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6-06-08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하엘 엔대의 "누구나 달고다니는 그림자는 육신이 죽을 때 따로 떨어져 나와 어딘가로 가지않을까" 라는 글을 보고 음, 나도 저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던것도 같다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처음 뵙네요. 판타지같은 리뷰라고 해도 좋겠군요.^^

비연 2006-06-18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석란1 2006-06-19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추천하고 갑니다.

글샘 2006-06-2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문구... 이런 지명을 들으니 왠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리뷰를 읽었군요. ㅎㅎ 그게 각자의 주파수를 통해 감지하는 통로이니 말입니다. 남문구, 거제리, 철길... 이런 거 말입니다. 정말 '소고'가 될 만 하네요. 저는 이 책 좀 지루했는데...
 
 전출처 : 바람구두 >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어올 때...
수호 유령이 내게로 왔어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글,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 집에 굴러다니는 책 중에 헌책방에서 구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책 "그해 봄은 빨리 왔다"란 책이 있다. 원제는 "날아라 풍뎅이" 1988년에 출간된 동서문화사의 "에이스88" 아동문학전집 중 44번째 책이다. 그리고 엊그제 집에 굴러다니는 뇌스틀링거의 책 한 권을 새로 읽었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원제는 "Rosa Riedl Schutzgespenst"로 "수호유령 로자 리들" 정도가 되겠다) 였다. "이거 무슨 책이야?" 하고 책을 집어드니 집사람이 "누가 좋아하는 누구 책이야"하며 놀린다. 흐흐... 웃어주고 낼름 책을 들고 나와 버렸다.

책을 읽는 동안 너댓 번 정도는 소리내서 웃고, 대여섯 번 정도는 미소 지었다. 나중에 아내의 설명으로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뇌스틀링거는 굉장히 유명한, 거장 대접을 받는 동화 작가였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36년 10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다. 193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대입시키기는 곤란하겠지만,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세대의 경험과 흡사한 삶의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1945년 뇌스트링거의 나이는 대략 10세 가량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7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200여 종의 책을 써냈고, 1984년엔 아동문학 분야의 노벨문학상이라 한다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과 명성을 쌓았다. 국내에도 20종 가량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중에 단지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다. 시계공 아버지와 빈의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국내 모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살펴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 삼아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년기 영향이라면 나치와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다는 사실뿐이고, 그것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라고 말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실제 체험을 결부시키려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 저항하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뇌스틀링거의 경우엔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란 유년기의 역사적 체험이 작가의 시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한 모든 독일인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좌파가 된 것이 아니듯 뇌스틀링거를 좌파적 이념을 지닌 작가로 몰고가려는 시도는 위험한 규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뇌스틀링거는 "자유와 연대(혹은 평등)"라는 서로 상충될 수도 있는 두 가치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젊은 부모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고 그녀는 "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어른들의 꾸중과 칭찬을 통해 아이들은 깨닫지 않는다. 경험과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자란다."고 말한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지난 1998년 출간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뇌스틀링거의 최근작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로자 리들", 검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몇 개 섞여있고, 코에는 둥근 니켈 안경이 얹혀져 있고, 뺨이 늘어진,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뚱뚱보 아줌마 유령이다. 그녀가 유령이 된 것은 1938년 나치에 의해 부당한 처벌을 당하는 유대인을 도와주러 달려가다가 전차에 치인 사건 때문이다. 이 책의 독자층이 주로 초등 5-6학년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1938년 무렵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이 해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탄압, 이른바 "제국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 11. 9)"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이 이전에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탄압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이고 대규모 탄압은 이 해를 기점으로 종전되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아줌마 유령 "로자 리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는 건 이 작품의 재미를 반감하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런 선입견을 염려한 탓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머리에 '이 이야기를 1944년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은 까닭' 이란 소제목의 글을 배치해두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가까운 과거인 1978년부터 시작한다. 1938년 전차에 치어 죽은 로자 리들은 1978년 열한살짜리 어린 소녀 나스티에게 나타나 말을 건다. 나스티는 공부는 잘하지만  겁도 많고, 외동 아이로 자라 소심한 데다가 아주 이기적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개인주의적이긴 한 소녀다. 한 마디로 말해 친구들보다 몇몇 과목에서 좀더 성적이 좋다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나스티가 티나에겐 있는데 자신에겐 없는 존재를 부러워한단 사실 한 가지만 빼놓고...

티나에겐 있지만 나스티에겐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건 어느날 체육 시간 티나의 목에 걸려 있는 작은 펜던트였다. "작은 금빛 원판인데 한쪽 면은 에나멜"로 된 펜던트에는 볼이 포동포동하고, 날개가 달린 어린 아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티나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수호천사"라고 말한다. 나스티는 짐짓 관심없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그런 나스티에게 어느날 갑자기 유령 로자 리들이 나타난다. 볼이 포동포동한 천사는 커녕 뺨이 축 늘어진 데다 날개도 없고, 게다가 날지도 못하는 유령의 출현은, 마치 나비를 꿈꾼 소녀에게 갑자기 나방이 날아든 격이었다. 하지만 로자 리들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스티를 사로잡았다. 나스티에겐 수호유령이 생겼고, 로자 리들에겐 좋은 말벗이 생겼다.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유령과 한 명의 소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유령 친구가 생긴 나스티에게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는 "다른 아이들과 잘 놀지도 않을 뿐더러 친했던 여자 친구와 사이가 나빠지고, 파티에 가지 않고, 대신 홀로 외로이 오후를 다락방에서 선인장과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물론 나스티가 혼자인 건 아니었다. 로자 리들과 함께 하지만 엄마 안네마리의 눈엔 유령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엄마는 나스티를 다그치지만 나스티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고, 엄마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생길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 엄마는 우연히 나스티와 유령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때부터 나스티와 로자의 관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나스티의 엄마, 아빠를 포함한 나스티 가족과 로자, 그리고 관계가 점차점차 확대되어 가는 내용을 다룬다.

아빠인 좀머 씨가 유령 로자와 관계 맺는 과정을 살펴보자. 로자 리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빠는 깜짝놀라 말한다.

"다만, 제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걸 아시는지!"
로자 리들이 외쳤다.
"난 누구의 세계관도 뒤집은 일은 없어! 그렇고 말고! 유령이 있는 걸 알아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지! 그래, 자네가 나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비열한 것, 선한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자네가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가능해졌다고, 다음 번 선거 때 다른 정당을 뽑을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네는 분명 올바른 선택을 할 걸세!"
<본문 145쪽>

다행히도 아빠 좀머 씨는 로자 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엄마 안네마리 역시 나스티와 로자를 이해하며 한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이렇듯 로자 리들은 처음엔 나스티만의 수호유령이었으나 점차 나스티 가족의 친구로 옮겨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스티는 영어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한 친구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우리하고는 교육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나로서는 잘 체감할 수 없지만). 나스티로서는 영어에 자신없어 하는 게롤트에게 미리 준비도 없이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일이 부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어 선생에게 항의하다 교실 밖으로 뛰쳐나온 나스티는 역사 선생을 만나 아이들이 동조해주지 않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사람은 자기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해요!"
나스티가 훌쩍이며 말했다. 역사 선생이 말했다.
"얘야, 내가 보니 너는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울고 있다!"
 .....< 중략 >.....
"반 아이들 모두에게 반장을 잘못 뽑았다고 납득시키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리는 걸요! 걔들은 영어 선생님이 얼마나 비열한지도 모르고 있어요!"
"투쟁이란 대부분 지루하고 힘든 일이란다, 얘야!"
역사 선생이 말했다.
"그렇지만 반 아이들 대부분은 다른 아이가 어떻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고요!"
<본문 165쪽>

영어 선생은 평소 공부를 잘하는 나스티를 귀여워했는데, 나스티가 영어 선생에게 대든 것은 분명 자기만 생각한 행동은 아니었다. 역사 선생의 말대로 반장을 교체하려는 나스티의 시도는 나스티네 반 아이들을 반장 토미 패거리와 나스티 패거리로 양분시켜 버렸고, 싸움까지 벌어졌다. 나스티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 달려가 말한다. 로자는 뭔가를 이루려면 단결해야 한다며 나스티를 설득하지만, 나스티는 토미 패거리를 멍청하고, 비열한 바보 천치들이라고 비난한다.

"나스티, 설마 너도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멍청하고 바보 천치고 비열하다고 믿지는 않겠지! 너와 몇몇 아이들만 얌전하고 친절할까! 네가 티나랑 하는 말을 들었다. 토미는 돼지야! 가브리엘레는 사팔뜨기야! 후버트는 아버지가 부자니까 밥맛이야! 요하나는 정신병자야! 잉게는 다리가 X자야! 너희들 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런 게 대체 예고 시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 중략 >....
"로자, 어쩔 수 없이 서로 욕을 하게 돼요!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야 할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깡그리 잊어먹게 된단다."
<본문 188-189쪽>

수호유령 로자 리들은 비록 날지도 못하고, 열쇠 구멍 같이 작은 구멍으로 몸을 빼내는 재주는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아니 무엇보다 오래 산 사람의 지혜와 균형잡힌 시선을 지닌 양심적인 유령이었다. 그런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평발이라 오래 걸어다니지 못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지하실에 묻혀 있었던 경험으로 생긴 폐쇄공포증이었다.

이제 나스티와 가족으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로자 리들이 불의의(로자 리들이 파출리향이  나는 궤짝에 갇혀 궤짝째 필츠마이어 씨 집으로 팔려가는) 사고로 행방불명 되어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나스티와 티나, 온가족의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로자 리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과연 나스티의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겐 어떤 일이 생긴 걸까?(아쉽지만 그건 책으로 읽으시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이렇듯 재미와 교훈이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이다. 착하지만 외동딸로 자라 개인적인 나스티, 남을 배려해줄 줄 알지만 엘리트적인 면도 있는 나스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다. 자식이 7남매, 8남매 되는 대가족은 이제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이 되었다. 과거의 아이들은 넘쳐나는 가족, 형제들 틈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공동체의 미덕과 사회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가족이란 그저 사회 교과서에서 배우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중요한 학교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에게 가족은 늘 부모라는 어른이고, 그나마 동년배 가족은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가족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건 1978년을 경험하며 어른이 된(그 이후에 태어난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우리의 80년대라 할 수 있는 유럽의 68혁명과 동구 현실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다. 그런 까닭일까. "70년대만 해도 나는 문학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은 독자들을 웃고 울릴 뿐, 세상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높여 주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 경험했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문학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로부터 벗어나버린 현시대의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되풀이되는 질문이지만, 문학은 단지 그것을 읽고, 표현함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작가는 수호유령 로자 리들을 만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는 덜 편협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일깨워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불과 200여쪽이 조금 넘는 이야기임에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로자 리들이 나스티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게 단지 그것뿐은 아닐 거다. 훌륭한 작품들의 미덕은 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이 책을 읽고 혹시 내게도 수호유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가슴 속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기 바란다. 거기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기 시작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