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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
안동림 지음 / 현암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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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일주일의 사흘은 시골에 내려가 산다. 오디오가 있을 리 없다. 강의실에서 강의실로 낮 동안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연구실 창밖 바로 눈앞에 다가드는 산 그림자를 희부옇게 저녁 안개가 가릴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내 시간을 찾는다. 이 때 문득 책상 위에 놓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귀에 익은 음악. 어떤 값진 오디오 장치가 이때의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책에서)

안동림 교수님을 무어라 일컬으면 좋을까요? 음악애호가? 평론가? 시인? 교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수님께서 '레코드 수집가'나 '레코드 비평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 때 철학교수로 재직하시면서 '장자'를 향기롭게 번역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지금은 음반에 대한 책들이 저술, 번역, 편집을 통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몇 년 전 이 책이 3권 짜리로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이러한 시도 자체가 무모하게 여겨지리만치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학생 때 비싼 가격 때문에 사지 못하고 늘 서점에 가서 힐끔힐끔 보고 오는 제가 안스러웠는지 동기들이 돈을 모아 통합본을 선물로 사주었을 때의 감격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선물받은 지 몇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책을 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기 때문에 저는 되도록 제 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고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은 같은 내용의 구판입니다만 신판이 나왔다니 반가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 하나의 음악 작품이 탄생되기 위하여 작곡가가 어떤 인생의 행로를 거쳐서 어떤 노고를 통해 작곡하였는지, 그리고 그런 작곡가 못지 않게 연주자와 지휘자는 또 얼마마한 공로를 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들여 녹음된 음반을 이리 찢고 저리 분해하여 날카로운 비평의 칼날을 들이댑니다만(물론 이 작업도 필요한 일이겠으나) 교수님은 하나의 음반을 마치 그분들의 혼이 담겨있듯 소중하게 다룹니다.

한 때는 비평보다 칭찬 일변도의 말씀인 것 같고, 또 고전적인 녹음만을 다루신 것 같아 다른 책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만 다시금 이 책의 향기로 되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아! 음악은 이렇게 듣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음악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과 철학, 사람과 삶이 녹아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분이라면, 음반 몇 장 값을 아껴서 꼭 읽으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또한 반드시 음악이나 음반과 연관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자잔한 수필집처럼 두고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녹음에 대한 교수님의 감상도 첨부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솟기는 합니다만, 20세기의 베스트 셀러라는 책도 1000년전에 씌어진 단테의 신곡만 못하듯, 고전음악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의 향수에 젖어든 교수님의 글은 무엇이 우리의 감성을 풍요롭게 만드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클래식 음악은 이론적인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만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입문 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체계적인 공부에 식상하시다면 맑은 감성의 소유자이신 안동림 교수님의 이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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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
바스 카스트 지음, 조경수 옮김 / 이레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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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주위에는 일명 ‘작업의 달인’들이 있다. 수시로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연애도 하고 싸움도 하고 화해도 하고 이별도 하고, 그리고 또 사랑에 빠지고... 한마디로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연애에 소질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 나에게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릴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좌절에 빠진 수백만 솔로들에게 희망을 주는 책이 있다. 독일 《타게스슈피겔》지의 과학전문 기자 바스 카스트는 수십 년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연구해온 과학자들의 실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과학’에 대한 책인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를 썼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은 누구나 연애를 잘 할 수 있도록 타고났으며, “본능에 충실”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남자/여자를 내 방식대로 꼬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문제는 그 ‘본능’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는 커플 심리학과 연애행동 연구의 핵심 성과들을 통해 ‘사랑의 본능’을 과학적으로 파헤친다. 책에 소개된 과학 실험과 그 결과들 중에는 우리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뒤통수를 후려치고, 아하 그렇구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는 내용들이 많다.


 

 

실험 1.  남자는 쳐다보기만 해도 넘어온다

 

연애를 걸 때 칼자루를 쥐는 쪽은 누구일까?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험을 실시했다. 심리학자 데브라 윌시와 제이 휴이트는 매력적인 여성이 매일 저녁 8시에서 9시까지 칵테일 라운지에 앉아 있으면서 남자들에게 각기 다른 세 가지 태도를 취하도록 하고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1) 매우 도발적인 태도: 바에 있는 특정 남자를 반복해서 쳐다보고 그와 눈을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

2) 도발적인 태도: 1과 같은 행동을 취하지만 미소는 짓지 않는다.

3) 새침한 태도: 남자에게 시선을 한 번도 주지 않는다.


결과는 매우 명백했다. 1)의 경우 60퍼센트의 남자가 실험 도우미의 테이블로 왔다. 2)의 경우는 다가오는 확률이 20퍼센트로 떨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여성에게 다다가는 남성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단 한 명도 없었다.

 

결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쳐다봐주어야만 다가온다.

 


 

실험 2.  눈길을 주는 데도 요령이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보다 구체적으로 시선의 효과를 실험해보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행동학 연구소의 트라미츠 연구원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도우미 에스테르는 아름다운 여배우다. 뮌헨의 잘나가는 술집으로 가서, 연구자는 사전에 유혹하는 요령을 훈련받은 에스테르를 바에 앉히고 카메라로 그녀의 모습을 촬영했다. 에스테르는 정해진 시간 간격에 따라 카메라가 남자인 양 유혹했다.

 

연구자는 촬영한 필름을 가지고 연구소로 돌아와 일군의 남성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남자들은 화면 속에 있는 여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수록 준비된 레버를 세게 밀도록 했다. 레버 옆에는 버튼이 있는데, 이것은 미모의 여배우가 자기와 사귀고 싶어 한다고 100퍼센트 확신할 때 누르도록 했다. 그 결과는?



-미모의 여배우가 맨 처음으로 수줍은 듯한 시선을 한 번 보내는 것만으로도 8퍼센트의 남성이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확신하고 레버를 밀었다. 영상이 시작된 지 고작 29초만이었다.

 

-여배우가 두 번째로 잠깐 눈길을 주자 다시 11퍼센트의 남성들이 ‘이 여자는 나를 원해’라고 생각했다. 36초만이다.

 


-48초에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자 세 번째로 ‘누르기 물결’이 몰아쳤다. 그중 몇몇 남성들은 다른, 더 미묘한 유혹 신호에 반응했는데, 바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행동이었다.

 

-77초째에 다시 네 번째 시선을 보내자 남자들의 50퍼센트가 화면 속의 낯선 여자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2분이 지날 무렵,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자 남자들의 71퍼센트가 여배우가 자신을 사귀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신중한 남성 한 명도 5분이 지나자 버튼을 눌렀다.


결론: 여자가 딱 한 번만 쳐다봐도 그녀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믿는 남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몇 번의 도발이 필요하다.


이때 버튼을 빨리 누르는 남성과 늦게 누르는 남성의 차이는, 남성 본인이 이성 교제에 대해 갖고 있는 자신감과, 상대 여성에 대한 그의 취향의 차이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적인 점은 남성들은 일단 어떤 여성이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이런 확신을 절대로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성 실험 도우미가 거절의 신호로 등을 돌렸을 때도, 남자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험 3.   원하는 남자를 꼬시려면 위기 상황을 만들어라

 

두 명의 캐나다의 심리학자들은 유혹에서 장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캐나다 밴쿠버의 자연공원 캐필라노 캐니언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보행자용 현수교가 있다. 이 다리는 폭이 1미터 남짓한데 비해 길이는 140미터나 된다. 거대한 삼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좔좔 소리를 내며 흐르는 캐필라노 강 위로 70미터 높이에 매달려 있다. 난간은 낮고 다리는 끊임없이 기우뚱거리고 흔들린다.

 

강 상류에는 다리가 하나 더 있다. 단단한 삼나무 목재로 되어 있고 강 위로 3미터 높이에 있으며 흔들거리거나 기우뚱하는 위험 요소는 없다.

 

연구자들이 고용한 예쁜 여성이 간단한 설문지를 들고 공원에 가서 각각 두 개의 다리 위에서 남자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해달라고 부탁한다. 대부분의 남성은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다. 실험 도우미는 자연 풍광이 창조적 표현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중이라고 하면서 연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궁금하면 ‘시간이 더 있을 때’ 전화하라며 설문지를 다 작성한 남자들에게 종이 한 귀퉁이에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실험 결과, 현수교 위에서 설문에 응한 남성 18명 가운데 절반인 9명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 반면, 나무다리에서 설문에 응한 남성 16명 중 단 2명만이 프로젝트가 궁금하다는 핑계로 수화기를 들었다. (참고로, 남성 도우미가 설문지를 나눠준 경우는, 단 한 통의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다.)


결론: 높고 흔들리는 현수교는 우리 뇌에 ‘조심해, 위험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위험을 감지한 뇌는 몸에게 경계 태세를 취하도록 신장 위에 위치한 부신에 신호를 보낸다. 부신은 아드레날린을 저장하고 있으며 신경계가 명령하면 이 흥분 호르몬을 분비해, 눈 깜짝할 사이에 신체의 힘이 활성화된다. 그러면 뇌는 이러한 각성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이유를 찾는데,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엉뚱한 원인을 선택하기 쉽다. “이 여자가 내 무릎이 후들거리고 배 속이 울렁거리게 만드는 걸 보면, 내가 이 여자를 아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엉뚱한 결론이라고? 천만의 말씀. 이러한 생각을 확실히 입증해주는 또 다른 실험이 있다.


 

 

실험 4. 사랑에 빠져서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뛰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젊은 남자들에게 《플레이보이》지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슬라이드 속 여성의 매력을 평가하도록 했다. 이때 연구자는 사전에 피실험자들의 가슴에 마이크를 부착하고 그것을 오디오 기기에 연결해서, 피실험자들은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남자들은 자기 심장박동이 아니라 미리 녹음해둔 박동 소리를 듣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특정 슬라이드에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소리를 듣도록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남자들은 자신의 심장을 더 쿵쾅거리게 만들었다고 믿은 여성에게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결론: 상대를 원해서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뛰면 상대를 원하게 된다. 고로, 원하는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무조건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장소,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는 곳으로 가라! 시끌벅적한 바, 낯선 얼굴들로 가득한 컴컴한 댄스클럽, 어스름한 조명의 술집, 시끄러운 음악이 있는 곳 등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실험 5. 여자는 어떤 남자를 좋아하나?

 

남성에게 주로 분비되는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흥분했거나 화가 나거나 공격적이 되었을 때 분비되지만, 극도로 기쁠 때도 수치가 높아진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외모를 더욱 남성적으로 만들어준다. 즉 턱이 각지고 턱 끝이 두드러지며 눈썹 뼈가 커져서 눈이 작아 보이게 된다. 눈썹은 숱이 많아지고 입술은 얇아진다.

 

한편 테스토스테론은 면역 체계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신체 방어력이 높을수록 더 높은 농도의 테스토스테론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결국 근육질 외모의 남성이 신체적으로 더 강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우위에 있는 “돌쇠형”이 여성들에게 훨씬 더 인기가 높아야 옳다.

 

그러나 피실험자 여성들에게 컴퓨터 모니터 속에 주어진 얼굴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보라고 하자, 많은 여성들이 주어진 남성을 보다 여성적인 외모, 즉 “꽃미남형”으로 바꾸었다. 또한 다양한 “돌쇠형”과 “꽃미남형” 얼굴들을 보여주고 점수를 매기게 하자, 남성미 넘치는 얼굴형은 저조한 점수를 받았으며, 아버지로서의 평가에서도 매우 낮은 성적을 보였다.

 

결론: 여자들은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근육질 과다형 남성에게 본능적인 혐오감이 있는 듯하다.

 

 

실험 6. 여자들은 다정한 남자를 원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들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건강하고 면역력이 강한 남성, 즉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은 남성을 선호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여성들은 근육질형 남성보다는 여성적인 꽃미남형을 더 좋아했다. 생물학적 우성이 적자생존(자연선택)에서 밀려나는 이러한 결과의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학자들이 미국의 퇴역군인 4462명의 결혼생활을 관찰한 실험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상대적으로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은 군인들은

1) 결혼한 비율이 낮다.

2) 결혼을 했더라도 바람을 피우는 비율이 더 높다.

3)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더 많다.

4) 이혼율도 더 높다.


즉 테스토스테론이 많은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인자를 갖고 있지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위험의 소지가 높기 때문에 오히려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낮은 남성, 보다 다정다감하고 충실하며 자상한 남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실험 7. 여자의 마음은 오락가락한다


비엔나의 과학자 칼 그라머는 290명의 여성에게 안드로스테논의 냄새를 평가하게 하는 조사를 했다. 안드로스테논은 남성의 겨드랑이 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냄새 인자로 테스토스테론의 분해물이다.

 

실험 결과, 여자들은 평상시에는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배란 직전의 여자들은 관대한 점수를 주었다. 즉 테스토스테론은 가임기의 여성에게는 매력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악취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여자들도 유전적으로는 강한 남성, 우성 인자를 많이 가진 남성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만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에서는 문화적 사회적 이득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적 본능이 영향력을 덜 발휘한다는 것이다. 

 

결론: 여자들은 평소에는 부드러운 남자를 원한다. 그러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강한 남자를 원한다. 즉 여자는 갈팡질팡한다. 그러니 여자들은 자기 마음을 잘 살펴본 다음 판단하고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실험 8.  잘 싸우고 잘 사는 비결― 5 대 1을 지켜라

 

워싱턴 대학 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존 고트맨의 애정연구소는 커플들의 싸움의 유형을 분석했다. 고트맨과 그의 연구팀은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결혼 햇수의 130쌍의 기혼자들에게 일상의 문제거리들을 주제로 15분간 의논하도록 하고 그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때 싸움을 진정시키거나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등의 긍정적인 행동 유형에는 플러스 점수를, 상대의 화를 돋우고 자극적인 말을 하는 부정적인 행동 유형에는 마이너스 점수를 주었다. 


관찰 결과, 행복한 커플과 불행한 커플의 싸움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행복한 커플들은 갈등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행동 유형을 보여주는 반면, 불행한 커플들은 싸움에서 지속적으로 부정적 행동 유형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실험을 바탕으로 고트맨은 부부 한 쌍이 대화하는 모습을 2분만 관찰하고서, 장차 그 부부가 이혼할지 안 할지를 예측할 수 있었는데, 그 정확도가 83퍼센트에 달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행동 유형의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비율’이 더 결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긍정적 행동과 부정적 행동의 비율이 5 대 1일 때 가장 애정 어린 파트너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싸움만 잘 하면 행복한 커플이 될까? 싸우면서도 계속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 진짜 사이좋은 커플이 되기 위한 다른 비결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줄 실험이 있다.

 

 

 

실험 9. 싸움의 쟁점에 충실하라

 

심리학자 실라스는 다양한 문제로 싸우는 커플들을 보다 자세하게 관찰했는데, 그 결과 행복한 커플들은 대부분 말다툼의 주제, 즉 본론에 훨씬 잘 집중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싸움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우자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싸움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반면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무조건 상대를 비난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레 포기하거나, 상대의 말을 아예 귀담아 듣지 않는 경우에는 결혼생활의 만족도가 매우 떨어졌다.

 

결론: 싸울 때는 항상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를 잊어버리지 말것.

 

 

 

실험 10. 남의 떡보다 내 떡이 최고

 

행복한 커플은 자신의 파트너가 이상형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어떻게 극복할까?

 

미국의 심리학자 샌드라 머레이는 여러 커플들에게 지성, 유머, 관용, 사회적 능력, 인내심, 개방성, 온정 등의 특성을 열거한 긴 목록을 주고 자기 자신과 배우자의 점수를 매겨보라고 했다. 그 결과 행복한 커플들은 자기 자신보다 배우자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었다.

 

반대로 불행한 커플은 파트너에게 친한 친구들이 매기는 점수보다 더 낮은 점수를 주었다.

 

결론: 행복한 커플은 자신의 파트너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두 사람이 서로를 더 미화할수록 더 금실이 좋았다.

 

 

출처: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   이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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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별점 다섯개로는 부족한 책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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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상의 홈페이지 방문자들로 인한 영화정보는 거의 홍수가 날 지경이다. 홈페이지 주인장이 어떤 영화 평을 한 편 올리고 나면 거기에 덧글로 달리는 각종 영화에 관한 여담이나, 정보는 또 하나의 평론으로 묶을만한 분량이다. 그만큼 영화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셈이다. 매체의 발전이 영화제작에만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유의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이제 영화정보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우스 한 번 클릭 하는 일로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필름으로 양산되는 영화는 언젠가 생명의 소멸을 가져온다. 보관의 용이함이 영화 열정을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쓰게 되었다는 철학과 교수님의 영화와 철학적 혼합의 관계, 그 연애관계를 담아낸 책이다.

“영화와 사귀기 위해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글쓰기다. 여기서 글쓰기란 비유컨대 사라지는 영화들이 남기는 안타까운 흔적들로 무늬를 짜는 것이다. 무늬로 뭔가를 만들어내어 추억의 증거로 삼아보라. 추억이 있는 동안은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이 책은 내가 영화 텍스트들과 함께 놀면서 만들어낸 무늬들이다. 나를 홀리고 꼬시며 에로틱하게 자극하는 저 멋진 여인 같은 영화들과 만나 사귄 흔적, 추억, 앙금들을 조금은 주저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여기에 남긴다.”-(7쪽);지은이의 말


로마에 올인 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을 때, 옛날이 그리워질 때,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 나는 영화를 본다.”고 한다. 종합적 의견으로 치면 삶이 그렁그렁해지면 영화를 보신다는 말 아니냐. 저자 이왕주의 말은 삶의 무늬를 만드는 과정에 추억이 있고 추억은 영화가 포함된다는. 그래서 영화와 연애를 한 판 하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가 ‘특별’접두사로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그 머리 아픈 철학과 연결을 한 영화평론집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맞다. 이 특별한 영화 평론집은 영화소개->철학적 분석, 해석이 후편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와호장룡/장자의 무위)해석은 철학과 영화의 만남 극점을 보여준다. 유위(억지스러움, 인위적인 것, 틀에 박힌 것)은 무위(자연스러움, 순리적인 것, 자유로운 것)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장자의 무위사상을 두 명의 인물(용과 리무바이)로 이분법적인 구도를 이룬다.


그것을 소 잡는 ‘소백장의 칼’로 앞부분에서 의미심장한 어필을 해 준다. 29편의 영화소개에서 하도 니체의 철학이 여러 번 응용되고 니체를 칭송하는 듯한 발언도 여러 군데 보였던지라 동양의 철학은 배제한 서양철학과의 접목만 시도했다고 오해한다면 독자의 무지다. 책에는 공자님의 말씀이 근엄하게 등장하기도 하고 가장 많은 출연을 한 철학자는 단연코 서양철학의 거두 니체씨이지만 장자(그의 스승인 노자)도 조연급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소백장의 칼=청명검=리무바이의 무예=노자의 도덕경. 이 흐름의 공통점은 ‘이름과 명분에 매달리지 말자’다. 섭리까지 거스르며 이기려 들지 말자. 그러면 나중에 꼭 벌을 받는다?는 구도. <도덕경>은 이래서 도덕 교과서이시다. 재미없는 도덕 선생님의 기억을 간직한 독자는 하품이 나올 수도 있다. 예의 없이 반론을 불쑥하나 들이밀면, 도덕적인 삶이 뭐가 나쁘냐!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도덕적인 여인 ‘수련’보다는 철없는 여인 ‘용’이 더 매력적인 삶을 산다. 삶은 어차피 한 편의 드라마다. 발단과 전개, 절정, 결말로 이어지면서 숨가쁘게 변신하는 삶이 매혹적인 풍경으로 보이는 것은 철없는 나만의 시각일까. 열정이 매번 옳은 것도 아니고, 매번 섹시한 것도 아니지만 한번뿐인 삶. 깨우치는데 뭔가 자극은 있어야지 수고스러움의 쾌감이 배가되는 것 아니겠어? 책에서도 인생에서 과정을 향유하라고 하지 않더냐!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쾌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김에 이 책의 최다 출연자인 니체씨에 관하여 한 마디를 하기로 한다. 춤을 배우며 인생을 알아가는 스기야마씨의 춤 이야기(Shall we dance)에도 니체씨의 열광적인 예술론이 대두된다.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아폴론은 밝음, 질서, 조화, 균형을 뜻하고 디오니소스는 어둠, 혼돈, 도취, 광란을 뜻한다. 물론 장르에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고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다. 가령, 조각이나 그림은 전자에 속하고 음악과 춤은 후자에 속한다. 특히 춤은 디오니소스적인 정열과 광기 그리고 힘의 요소가 다른 아폴론적인 요소들을 완연히 압도하는 강렬한 예술이다.”-(229쪽)


“춤이 없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랴?”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을 향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니체. 다른 곳에서는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그들을 일컬어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이라고까지 호도하셨단다. 요즘 수녀원의 육중하게 무거운 문을 박차고 나와 종교학자로 거듭 난 영국여성의 이야기책을 한 권 읽고 있는데, 그 분도 세상과 즐겁게 연애하는 춤을 추고 싶어 수녀복을 벗으신 것일까 싶다. 영화와 철학의 만남인 이 책은 일단 영화를 텍스트로 만나는 것을 부담 없이 전해준다. 삶이 한 판 벌어지는 춤마당이라면 영화는 그 속에서 장단을 맞추는 가락이다. 거기에 철학자들의 육감적인 분석이 가미된다면 이거 너무 에로틱한 춤 아니겠어? 철학을 영화로 해석할지,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석할지는 자유에 맡긴다. 순서가 바뀌면 어떠한들. 그래, 너 영화와 철학 둘 다 좋아하는 거 맞지?


부기)

탄탄하면서도 쉬운 철학적 연결 해석이 명문장을 여러 군데서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보다 품격 면에서도(나나미 여사의 품격 치중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훨씬 높다고 본다. 그 증거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면서 동, 서양의 유명하신 철학자들을 두루 모신 점이다. 한 장르의 영화에 기울지 않았던 점도 이 책의 눈부신 보편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가장 큰 점수는 20년만의 제주도 여행지에서 인연을 맺은 책이라는 점이다. 새벽 다섯 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책을 읽었다. 여행지의 아늑한 호텔방에서 새벽 미사 종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덮는 기분이란, 동녘하늘의 아침태양을 만나는 천지창조다.(과장법에 속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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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우리에게도 절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
황해문화 50호 - 2006.봄
황해문화 편집부 엮음 / 새얼문화재단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일본 SF소설의 첫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개인적으로 나는 미야자와 겐지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작품 수로 밀리니까) 호시 신이치의 짧은 소설 <기묘한 이야기>에 수록된 <옷을 입은 코끼리>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최면술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는 한 남자가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에게 말한다. "넌 코끼리가 아니야. 인간이야.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생각해. 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어. 알겠지? 넌 인간이야." 그는 그저 장난으로 말한 것이지만, 이게 왠일인가. 코끼리는 동물원을 빠져나와 자기가 알몸임을 깨닫고 옷을 찾는다. 기성복은 맞는 게 없어 특별히 제작하고 아차,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습니다. 일해서 번 다음 드려도 될까요?" 그 덩치로 도망쳐도 숨을 곳도 없으니 그렇게 하시라고 주인은 말한다. 코끼리는 연예프로덕션을 찾아가 '코끼리 흉내를 내며' 탤런트가 된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유원지를 경영하고 과자회사, 장난감 회사로 사세를 확장한다. 그리고 틈틈이 독서도 하고 불우이웃도 돕는다. 그리던 어느 날, 그의 '인격'에 감동받은 한 사람이 묻는다. "당신은 엄청 성공하셨군요. 도대체 그 비결은..." 도대체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성공하고 싶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2005년 8월을 기준으로 서울시에는 약 506만 명의 인원이 살고 있다. 이는 정부가 발표한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 548만 3000명과 맞먹는 숫자다. 그냥 서울시에 사는 인원이 대한민국에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치자. 그들 중 특수고용 노동자는 약 63만 7천 명이다. 특수고용직을 다시 쪼개서 여성이 98%를 차지하는 생활설계사는 29만 6천 명(1998년 기준), 학습지 교사는 작년에만 3만 명이 추가되었다는 발표만 있고 정확한 통계도 없다. 통계가 없는 게 이뿐인가.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01년 국내 택배 실태조사'에서는 전국 오토바이 레이서들인 택배인원이 몇 명인지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어떻게 알겠는가. 노동자가 아닌데). 비정규직은 아니지만 전국의 길거리 음식점인 노점상은 3천 524포(2004년 기준)이고 아예 최저생계비인 113만 6천 원(2004년 기준 4인 가족)도 벌 능력이 없는 도시 빈민의 숫자는 파악도 안 된다.

다시 돌아가서 2005년 기준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20만 원이다. (이럴 수가!) 이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12만 원. 딱 반값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더 짧은가? 지난해 '레이버 투데이' 에 실린 기사만 놓고 볼 때 정규직은 주당 43.5시간, 비정규직은 44.9시간을 일하고 있다. 그런데 내년 1월 1일부터 종업원 300명 이상 회사의 기간제(계약직) 근로자가 2년 이상 계약직으로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법안'이 27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름 고심한 법안이다. 근데 왜 노동자들은 시민의 발인 지하철까지 운행 중간해가며 이를 반대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사업주라면 비정규직 노동인력을 채용하여 일을 시키고 2년 지난 후에는 두 배의 월급(위의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을 주고 그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바에야 그냥 짤라버리고 다시 비정규직 인원을 모집하는 것이 당연히 낫지 않겠나. 조금 양심적인 사업주의 경우에는 그들 중 몇 명은 구제해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몸으로, 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전국의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요식업 종사자, 청소용역 파견근로자, 택배직원, 설문지 조사자, 텔레마케터... 등등은 외려 기존에 자신이 쌓았던 노동기간조차 말소시키는(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이라는 내용에는 이전 근무기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개악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2년마다 다른 사람 찾는 데 비용을 쓰는 것보다 기간제라 해도 2년 동안 숙련된 사람을 쓰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기업들도 만만찮게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헤헤,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앞서 전제했던 저러한 수치들은 사실 우리에게 그 실상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548만 3000명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하루 똑같이 일하고도 차별받는 모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담화에서 밝혔듯이 우리 사회가 현재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양극화' 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실재를 담보로 한 말인지는 저 '비정규직 노동 개악안' 통과를 통해 다시 읽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작년 11월 국회에서 통과된 '쌀협상 비준안' 또한 대한민국 자영농민은 국민으로 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한미FTA에서 뜨거운 감자로 언급되는 '스크린 퀘터제' 폐지 또한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메이저 영화나 일인시위에 나선 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를 하겠다는 싹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정부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시대적 대세'를 이야기하려면 그 전에 정부가 앞서서 그 대세에 맞설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했어야 옳다. 앞으로 다가올 출판시장의 개방이나 교육 분야의 개방, 의료 분야의 개방...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개방압력'으로부터 무엇을 지키고,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육성하고 있는가는 시민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가 해야 할 임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금을 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을 정부가 못했을 때 정부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파업을 하는 것은 세금을 내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편파적인 기사나 대세론에 힘을 실어주는 '대학교수'들의 공정한 듯 보이는 전문적인 글들을 파고들면 실제로는 전혀 현실을 담아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너무 지배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는 언론이 공정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나의 '알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알았다 하더라도 전문성을 앞세워 기를 죽여놓는 대학교수들의 글발에 의해 나의  '반대할 권리'가 차단되는 것이라고 나는 지금의 나를 진단한다.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 그러는 와중에 만난 <황해문화 50호>는 내가 올해 만난 무척 값진 책이다. 계간호라는 잡지의 특성상 대체로 출간된 계절에만 잠깐 읽히고 마는 것이 출판현실인데 올 봄 이 책에 실린 내용은 파격적이다 못해 아프다.

첫번째로 파격적이라는 것은 그 기획의도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존의 잡지 구성 체계를 과감히 버렸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대개의 잡지 체제가 특집으로 다루는 부분에 대한 전문가들의 글,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인들의 글, 지역사회나 생활인의 글, 주목하는 책이나 동향 들로 '다양한' 소리를 담아내고 있지만 실상은 한 얘기를 또 하거나 너무 전문적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잡지가 가지고 있었던 권위적인 부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따라 잡지의 체제를 과감히 버릴 수 있다는 것은 그 내용을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며, 이는 잡지가 갖고 있는 기존의 기성, 권위, 체제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예를 들어 한 신문사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양극화'로 보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과학 모든 지면에서 각 분야의 전문인이 아닌 다양한 계층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딱 한 달간만이라도 담아낸다고 치자. 이어서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확실한 언론기관이자 홍보실인 텔레비전에서 매일 같은 시간 딱 한 달 동안  '사회 양극화'에 관해 시민들(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사업가, 교육가, 상공업자, 학생, 주부...)이 맘껏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문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방영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자기 목소리를 한 번도 담아내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서 농토가 갈아엎어지는 막막한 현실에 처한 농부들이 공권력을 앞세운 전경들과 폭력시위를 해야만 하는 아픈 현실이 조금은 개선되지 않을까. 그들과 함께 하는 것도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껴안을 수도 없는 도시 월급쟁이들도 '당신들만 아픈 게 아니'라고 속을 긁기 전에 '나도 살기 힘들다'고 한번이라도 정부를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봤다면 농부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라고 느끼지는 않지 않겠나~ 요.

두번째로, 이 잡지를 보며 내가 아팠던 것은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을 이 땅의 50인에게 듣는다'는 표제처럼 대한민국이 이렇게 아픈 나라구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묻자 마라 갑자생이 단지 그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군에 징병되어 원폭피해자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고, 민족 반역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온갖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이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울분, 친일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부모 세대가 누린 권력으로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을 접하며 자란 이가 동시대를 걸어온 같은 세대에게서 느낄 수밖에 없는 단절된 역사, 대한민국 군대(국군)의 총칼에 의해 한 날 한 시에 부모형제를 잃은 석달동 양민 집단대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증언과 그간의 노력, 대한민국 사법부의 치욕으로 인용되곤 하는 인혁당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한 맺힌 반세기, 군의문사로 자식을 잃은 자의 요구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 은폐의 문제들, 베트남 참전 용사가 들려주는 고엽제 피해의 실상과 대책, 빨갱이 자식이 자신의 출신성분을 숨기고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고통의 삶, 그리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문제, 문제들, 상처들...

1부 '풀리지 않은 미완의 과제, 역사'만을 들쳐봐도 그들 각자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 여전히 풀리지 않고 정당한 요구마저 짓밝히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 때문에 아프다. 아픈데 2부 '노동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에서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떼고 미얀마로 돌아가는 뚜라의 한 마디 '"안녕히"라는 말이 나를 더 깊숙이 찌른다. 나중에 자신의 아이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까봐 겁이 난다는 학습지 교사직에서 해직된 한 여성의 말이 또 나를 찌른다. 어느 청년 백수가 들려주는 일상과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우리 옆집 총각의 이야기여서 또 찔끔거린다. 지방대학을 나온 대학원생의 이야기가 내 친구의 이야기여서 못 본 척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 장애인이 희망이 아닌, 배려가 아닌, "우리에게도 절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고 외칠 때는 가슴이 먹먹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볼 수 없었던 것들, 보지 않았던 것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책이야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게 일러주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상처들은 곪고 곪아서 아픈 것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는 평범한 기업인의 이야기나, 386세대의 전진을 '자유화, 세계화'를 통해 주장한다거나, 자유민주주의가 시장경제의 진보의 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유기업원 연구원의 목소리도 포함된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 현실과 함께 실림으로써 어느 것이 허위이고, 가식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우리 사회 50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느 전문가의 글보다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게 길을 터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모른 체하는 거대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다 얘기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안은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옷을 입은 코끼리에게 찾아가 "도대체 그 비결은..."이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코끼리는 말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너는 인간이야'라고 항상 속삭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라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죠. 항상 배우고 생각하며 그대로 실천해왔을 뿐입니다. 제가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 때문인 듯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한 권의 단행본으로 읽어도 괜찮은 책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펴낸 <길에서 만난 세상>, 이준희의 <세상 속으로> 등의 책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들려주는, 즉 날것의 적나라함(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글도 포함해서)은 직격탄을 날린다. 일독을 권한다. 단, 원고를 늦게 주는 필자가 꼭 있기 마련이고 마감에 쫒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교정자의 실수가 꽤 많다.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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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어올 때...
수호 유령이 내게로 왔어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글,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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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굴러다니는 책 중에 헌책방에서 구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책 "그해 봄은 빨리 왔다"란 책이 있다. 원제는 "날아라 풍뎅이" 1988년에 출간된 동서문화사의 "에이스88" 아동문학전집 중 44번째 책이다. 그리고 엊그제 집에 굴러다니는 뇌스틀링거의 책 한 권을 새로 읽었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원제는 "Rosa Riedl Schutzgespenst"로 "수호유령 로자 리들" 정도가 되겠다) 였다. "이거 무슨 책이야?" 하고 책을 집어드니 집사람이 "누가 좋아하는 누구 책이야"하며 놀린다. 흐흐... 웃어주고 낼름 책을 들고 나와 버렸다.

책을 읽는 동안 너댓 번 정도는 소리내서 웃고, 대여섯 번 정도는 미소 지었다. 나중에 아내의 설명으로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뇌스틀링거는 굉장히 유명한, 거장 대접을 받는 동화 작가였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36년 10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다. 193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대입시키기는 곤란하겠지만,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세대의 경험과 흡사한 삶의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1945년 뇌스트링거의 나이는 대략 10세 가량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7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200여 종의 책을 써냈고, 1984년엔 아동문학 분야의 노벨문학상이라 한다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과 명성을 쌓았다. 국내에도 20종 가량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중에 단지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다. 시계공 아버지와 빈의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국내 모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살펴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 삼아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년기 영향이라면 나치와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다는 사실뿐이고, 그것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라고 말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실제 체험을 결부시키려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 저항하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뇌스틀링거의 경우엔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란 유년기의 역사적 체험이 작가의 시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한 모든 독일인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좌파가 된 것이 아니듯 뇌스틀링거를 좌파적 이념을 지닌 작가로 몰고가려는 시도는 위험한 규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뇌스틀링거는 "자유와 연대(혹은 평등)"라는 서로 상충될 수도 있는 두 가치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젊은 부모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고 그녀는 "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어른들의 꾸중과 칭찬을 통해 아이들은 깨닫지 않는다. 경험과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자란다."고 말한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지난 1998년 출간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뇌스틀링거의 최근작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로자 리들", 검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몇 개 섞여있고, 코에는 둥근 니켈 안경이 얹혀져 있고, 뺨이 늘어진,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뚱뚱보 아줌마 유령이다. 그녀가 유령이 된 것은 1938년 나치에 의해 부당한 처벌을 당하는 유대인을 도와주러 달려가다가 전차에 치인 사건 때문이다. 이 책의 독자층이 주로 초등 5-6학년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1938년 무렵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이 해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탄압, 이른바 "제국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 11. 9)"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이 이전에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탄압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이고 대규모 탄압은 이 해를 기점으로 종전되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아줌마 유령 "로자 리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는 건 이 작품의 재미를 반감하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런 선입견을 염려한 탓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머리에 '이 이야기를 1944년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은 까닭' 이란 소제목의 글을 배치해두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가까운 과거인 1978년부터 시작한다. 1938년 전차에 치어 죽은 로자 리들은 1978년 열한살짜리 어린 소녀 나스티에게 나타나 말을 건다. 나스티는 공부는 잘하지만  겁도 많고, 외동 아이로 자라 소심한 데다가 아주 이기적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개인주의적이긴 한 소녀다. 한 마디로 말해 친구들보다 몇몇 과목에서 좀더 성적이 좋다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나스티가 티나에겐 있는데 자신에겐 없는 존재를 부러워한단 사실 한 가지만 빼놓고...

티나에겐 있지만 나스티에겐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건 어느날 체육 시간 티나의 목에 걸려 있는 작은 펜던트였다. "작은 금빛 원판인데 한쪽 면은 에나멜"로 된 펜던트에는 볼이 포동포동하고, 날개가 달린 어린 아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티나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수호천사"라고 말한다. 나스티는 짐짓 관심없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그런 나스티에게 어느날 갑자기 유령 로자 리들이 나타난다. 볼이 포동포동한 천사는 커녕 뺨이 축 늘어진 데다 날개도 없고, 게다가 날지도 못하는 유령의 출현은, 마치 나비를 꿈꾼 소녀에게 갑자기 나방이 날아든 격이었다. 하지만 로자 리들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스티를 사로잡았다. 나스티에겐 수호유령이 생겼고, 로자 리들에겐 좋은 말벗이 생겼다.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유령과 한 명의 소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유령 친구가 생긴 나스티에게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는 "다른 아이들과 잘 놀지도 않을 뿐더러 친했던 여자 친구와 사이가 나빠지고, 파티에 가지 않고, 대신 홀로 외로이 오후를 다락방에서 선인장과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물론 나스티가 혼자인 건 아니었다. 로자 리들과 함께 하지만 엄마 안네마리의 눈엔 유령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엄마는 나스티를 다그치지만 나스티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고, 엄마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생길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 엄마는 우연히 나스티와 유령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때부터 나스티와 로자의 관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나스티의 엄마, 아빠를 포함한 나스티 가족과 로자, 그리고 관계가 점차점차 확대되어 가는 내용을 다룬다.

아빠인 좀머 씨가 유령 로자와 관계 맺는 과정을 살펴보자. 로자 리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빠는 깜짝놀라 말한다.

"다만, 제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걸 아시는지!"
로자 리들이 외쳤다.
"난 누구의 세계관도 뒤집은 일은 없어! 그렇고 말고! 유령이 있는 걸 알아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지! 그래, 자네가 나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비열한 것, 선한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자네가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가능해졌다고, 다음 번 선거 때 다른 정당을 뽑을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네는 분명 올바른 선택을 할 걸세!"
<본문 145쪽>

다행히도 아빠 좀머 씨는 로자 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엄마 안네마리 역시 나스티와 로자를 이해하며 한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이렇듯 로자 리들은 처음엔 나스티만의 수호유령이었으나 점차 나스티 가족의 친구로 옮겨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스티는 영어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한 친구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우리하고는 교육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나로서는 잘 체감할 수 없지만). 나스티로서는 영어에 자신없어 하는 게롤트에게 미리 준비도 없이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일이 부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어 선생에게 항의하다 교실 밖으로 뛰쳐나온 나스티는 역사 선생을 만나 아이들이 동조해주지 않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사람은 자기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해요!"
나스티가 훌쩍이며 말했다. 역사 선생이 말했다.
"얘야, 내가 보니 너는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울고 있다!"
 .....< 중략 >.....
"반 아이들 모두에게 반장을 잘못 뽑았다고 납득시키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리는 걸요! 걔들은 영어 선생님이 얼마나 비열한지도 모르고 있어요!"
"투쟁이란 대부분 지루하고 힘든 일이란다, 얘야!"
역사 선생이 말했다.
"그렇지만 반 아이들 대부분은 다른 아이가 어떻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고요!"
<본문 165쪽>

영어 선생은 평소 공부를 잘하는 나스티를 귀여워했는데, 나스티가 영어 선생에게 대든 것은 분명 자기만 생각한 행동은 아니었다. 역사 선생의 말대로 반장을 교체하려는 나스티의 시도는 나스티네 반 아이들을 반장 토미 패거리와 나스티 패거리로 양분시켜 버렸고, 싸움까지 벌어졌다. 나스티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 달려가 말한다. 로자는 뭔가를 이루려면 단결해야 한다며 나스티를 설득하지만, 나스티는 토미 패거리를 멍청하고, 비열한 바보 천치들이라고 비난한다.

"나스티, 설마 너도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멍청하고 바보 천치고 비열하다고 믿지는 않겠지! 너와 몇몇 아이들만 얌전하고 친절할까! 네가 티나랑 하는 말을 들었다. 토미는 돼지야! 가브리엘레는 사팔뜨기야! 후버트는 아버지가 부자니까 밥맛이야! 요하나는 정신병자야! 잉게는 다리가 X자야! 너희들 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런 게 대체 예고 시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 중략 >....
"로자, 어쩔 수 없이 서로 욕을 하게 돼요!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야 할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깡그리 잊어먹게 된단다."
<본문 188-189쪽>

수호유령 로자 리들은 비록 날지도 못하고, 열쇠 구멍 같이 작은 구멍으로 몸을 빼내는 재주는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아니 무엇보다 오래 산 사람의 지혜와 균형잡힌 시선을 지닌 양심적인 유령이었다. 그런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평발이라 오래 걸어다니지 못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지하실에 묻혀 있었던 경험으로 생긴 폐쇄공포증이었다.

이제 나스티와 가족으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로자 리들이 불의의(로자 리들이 파출리향이  나는 궤짝에 갇혀 궤짝째 필츠마이어 씨 집으로 팔려가는) 사고로 행방불명 되어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나스티와 티나, 온가족의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로자 리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과연 나스티의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겐 어떤 일이 생긴 걸까?(아쉽지만 그건 책으로 읽으시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이렇듯 재미와 교훈이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이다. 착하지만 외동딸로 자라 개인적인 나스티, 남을 배려해줄 줄 알지만 엘리트적인 면도 있는 나스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다. 자식이 7남매, 8남매 되는 대가족은 이제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이 되었다. 과거의 아이들은 넘쳐나는 가족, 형제들 틈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공동체의 미덕과 사회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가족이란 그저 사회 교과서에서 배우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중요한 학교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에게 가족은 늘 부모라는 어른이고, 그나마 동년배 가족은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가족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건 1978년을 경험하며 어른이 된(그 이후에 태어난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우리의 80년대라 할 수 있는 유럽의 68혁명과 동구 현실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다. 그런 까닭일까. "70년대만 해도 나는 문학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은 독자들을 웃고 울릴 뿐, 세상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높여 주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 경험했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문학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로부터 벗어나버린 현시대의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되풀이되는 질문이지만, 문학은 단지 그것을 읽고, 표현함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작가는 수호유령 로자 리들을 만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는 덜 편협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일깨워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불과 200여쪽이 조금 넘는 이야기임에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로자 리들이 나스티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게 단지 그것뿐은 아닐 거다. 훌륭한 작품들의 미덕은 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이 책을 읽고 혹시 내게도 수호유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가슴 속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기 바란다. 거기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기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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