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책"과 "예술," 아니면 그냥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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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스미스의 북아트 - Structure of the Visual Book (2003)
키스 스미스 지음, 김나래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예술에 대해 생각하면 문득 머리가 복잡해진다. 언젠가 예술을 "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내게 있어 예술이란 가급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저 멀리 구름 속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예술"이요,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구분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니 문득 나 자신이 늙은이 같단 생각이 든다. 흔히 "보수적"이라고 욕을 먹는 까닭도 이 때문이려나? 그렇다. 나는 변화를 싫어하고 오히려 현상 유지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나 철학이나 문학에 있어서 "진보"가 항상 "보수"보다도 낫다는 법이 있을까? 솔직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내 취향을 "보수적"이라든 "고답적"이라든 그것은 이름붙이는 사람 마음대로이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이나 사상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에 와 닿는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그것을 "감동"이라 하든, 혹은 무엇이라 하든 간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내가 배격하는 것은 "진보"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른바 "진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온갖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인 셈이다. 즉 나로선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현대음악보다는 차라리 훨씬 단순하고도 아름답게 들리는 바흐와 모차르트가 반갑고,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현대회화보다는 차라리 렘브란트와 들라크루아가 즐겁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뒤바꿔 보면, 아마 이런 질문이 될 것이다. "어째서 20세기 현대 음악은 우리 귀에 그렇게 낯설은가? 그리고 어째서 20세기 현대 미술은 우리 눈에 그렇게 낯설은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에프라임 키숀이 이른바 "피카소"로 대표되는 현대미술에 대해 한 비판이다. 즉 피카소 자체는 엄숙함과 숭고함이라는 수천 년에 걸친 예술사의 이데올로기를 박살낸 위대한 혁명가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 피카소의 정신이나 맥락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 형식만을 따라한 아류들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좀 가혹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언젠가 달리가 피카소에게 "우리를 따라하는 아류들과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는 언제든지 원한다면 사물을 생긴 그대로 똑같이 묘사할 수 있는 그림 실력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 말과도 상통한다고 생각된다. 피카소는 결코 실력도 없으면서 되는 대로 찍찍 후려갈긴 그림을 "작품"이라고 주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혼자서 그렇게 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파격"이고 "진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젠 어느 누구도 "파격"이고 "진보" 아닌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파격"이고 "진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다 현대음악이랍시고 12음계를 중심으로 해서 갖가지 "파격"과 "진보"적인 기법을 사용한 작곡을 하는 상황에서는, 과연 무엇이 진정한 "파격"이고 "진보"일 수가 있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지닌 일종의 예술관이랄까, 내 "취향"인 셈이다. 각설하고, 이런 내가 보기에 이 <북 아트> 책은 어디까지나 <북 "아트" >였다고 생각된다. 즉 이 책은 어디까지나 책을 "오브제"로 삼은 이른바 "예술"에 대한 것일 뿐, 책 자체에 대한 배려는 없거나, 혹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말하는 나 스스로 자기검열이 없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현존하는 "책"의 개념과 형태를 삽시간에 "절대적인" 위치로까지 격상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우리가 보는 양장본과 페이퍼백의 "코덱스" 형태의 역사라고 해야 기껏 1천 년을 전후했을 뿐이 아닌가. 게다가 인쇄본의 역사라면 거기서 또 반타작을 해야 하는 짧은 역사밖에 없다. 파피루스나 양피지, 혹은 죽간에 기록한 "책"에 익숙한 옛날 사람이었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책"을 "책"이라고 인정해 줄 것인가? 결국 2천여 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세월 동안 이른바 "책"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상상해 보면, 키스 스미스의 책에서 제시된 여러 가지 "가능성"을 향해 "이것은 책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배짱은 내게 없다. 파피루스와 죽간에서 양피지 코덱스와 종이 인쇄물을 거쳐 현재의 전자책과 씨디롬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분명히 "책"이라는, 즉 대중의 "소비"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상품"이라는 점에 비해, 키스 스미스가 제시하는 "책"들은 오히려 "예술"이고 "작품"의 한계에만 머물러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가 만드는 작품이 대개 한정본이거나 "유일본"인 것처럼, 결국 그는 "모색은 가능하지만, 생산은 불가능한" 책의 세계를 노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따라서 그가 상상하고, 또 우리 앞에 펼쳐보이는 "책"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불만을 접기도 했다. 결국 그가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건 간에, 결국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리고 우리 손에 들고 다닐 책은 어디까지나 종이로 된 신국판의 인쇄본 코덱스가 한동안 그대로 유지될 것이기에.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내내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 "책을 사용한 파격적인 예술"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책등이 벌겋게 드러난 책도 있고, 아예 열어볼 수 없는 책도 있고, 책인지 앨범인지 걸레인지 구분이 안 가는 책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여기에 대해선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아니 못 하는게 아니라 판단하고 싶지가 않은 거다. 무엇 때문에? 위에서 장황하게 언급한 이야기 때문이라고 하자. 아니 이 책의 한 섹션에 드러난 충격적인 사진, 즉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변형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완전 "난도질" 해 놓은 장면에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책 페티시즘이나, 책을 신성시한다는 태도로 생각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다만 언젠가 두툼한 문학전집의 속을 파낸 다음, 거기다 시계를 박아 넣는 이른바 "책 시계"가 한동안 유행하던 시절에 그걸 보면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몰취미함"과 "무의미함"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시계가 필요하면 시계를 하나 사면 그만이고, 책이 필요없으면 헌책방에 내다 팔거나 그냥 버리면 그만이다. 굳이 책을 훼손해 가면서 시계를 구겨 집어넣고, 그걸 보면서 만족한다는 것은 또 무슨 몰취미한 일인가. 잰슨의 <서양미술사>가 상징하는 고답적인 미술사적 이데올로기나, 뭐 기존의 권위 같은 것에 도전한다는 저자의 설명을 못 알아들을 만큼 내가 바보는 아니다. 필요하다면 성경이라도 불태울 수도 있긴 하는 거다. 하지만 과연 그런 방법 밖에는 어떤 "예술적 표현"이 불가능했던가? 편협한 생각이고, 모자란 취향이라 비웃음을 받아도 그만이겠지만, 아무래도 북아트라는 것이 나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겠다는, 그리고 예술이란 것, 혹은 이른바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지는 듯한 체험을 이 책 한 권을 통해 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