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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흘러야 한다 - 106일간 이라크 희망의 기록
윤정은 지음 / 즐거운상상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사원앞 공터를 까마득히 채운 사람들이 일제히 ‘총대신 하늘에 손을 내밀고 땅의 평화를’ 구한다. 아이 하나가 버려진 돌판으로 비석을 세운 공동묘지의 작은 무덤에 물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커다랗게 구멍이 난 2층 건물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윤정은을, 아니 이제 막 새로 산 책의 서너 페이지를 펼쳐보았을 뿐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들의 눈을 볼 때가 가장 슬프다. 전쟁을 목격하고 사막을 넘어 죽음을 본 그 영혼이 입었을 상처를 생각하면 너무도 슬프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너무나 맑아 그 아이러니한 풍경에 가끔 넋을 잃는다.”
(115쪽)
침공 1년, 이라크를 성공적으로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던 미군이 팔루자에서 엄청난 학살을 벌이던 와중인 지난 2004년 봄. 당시 3월부터 6월 사이 정확히 106일간 이라크에 머물며 그곳의 소식을 전했던 윤정은이 자신이 기록한 사진과 글을 모아 책을 펴냈다. 이름하여 “슬픔은 흘러야 한다 - 106일간 이라크 희망의 기록”이다.
기꺼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아주 솔직히는 의무감으로 책을 구입했다. 두권을 사서 한권은 동행했던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기자기한 글씨와 그림이 표지를 가득 메운 참 예쁜 책이었는데, 그걸 사든 내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2년 전 ‘정의’의 이름으로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던 날, 뒤이어 재건의 명분으로 한국 군대가 그 땅에 쫓아들어가던 날, 그리고 침공 1년 후, 이라크에 정녕 평화를 주겠다던 미군이 팔루자에서 학살을 벌여 한 학교 운동장이 그대로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듣던 날, 그날들의 북받치고 떨리는 마음을 또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해 두해 전쟁의 소식도 지난하고, 반전평화라는 거창한 구호와 달리 뾰족이 뭘 해야겠다는 의지도 생기지 않고, 당장 닥치는 급하고 중요한 일들도 많고... 그러니 그냥 어서어서 잊혀지기를, 아마도 오십년쯤 전에 우리 사회에도 닥쳤을 그런 괴로움과 아픔이 이제는 수겹의 장막과 망각의 세월을 거쳐 ‘마치 흔적도 남지 않은 듯’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냥그냥 상처가 아물기를 바랬다.
집으로 돌아와서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 예쁜 책을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눈을 떴는데 바로 머리맡에 놓여있는 책. 안타깝게도 그날은 휴일이고 별다른 약속도 없었다. 밥을 한다 청소를 한다 티비를 본다 이리저리 딴청을 부려보다가는 결국 얼마 못가서 책을 집어들고 말았다.
거기, 윤정은의 사진과 글 속에서 이라크의 남자들은 모스크 앞에 그득히 모여 하늘을 우러러 평화를 기원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잃어버린 남편과 자식들의 소식을 찾아 모스크로, 아부그라이브로, 팔루자의 공동묘지로 눈물 흘리며 떠돌고 있었다. 아이들은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이른 아침부터 뙤약볕 아래 좌판을 펼쳤다. 청년들은 먼저 신의 뜻에 따라 목숨을 버리고 천국에 간 이들을 부러워하며 마음 속으로 칼을 갈고 두 팔로 총과 폭탄을 움켜쥐었다.
그 한사람 한사람을 매일매일 일상에서 마주하고, 찾아가 만나고, 눈물없이는 도저히 들을 수 없을것만 같은 기막힌 이야기들을 마른 눈으로 담담하게 듣고 기록하고 뉴스와 보고서를 작성해낸 윤정은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궁금증이 스믈스믈 피어날 때 쯤 그 대답을 직접 듣는다.
“세르민... 사실 나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어요. 타인의 고통을, 심지어 내 맘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걸 발견하곤 했지요. 당신과 다닌 그 숱한 곳에서도 나는 감정의 흔들림없이 일을 해치우곤 했죠... 당신이 내 앞에서 울 때도, 같이 울어주지 못하는 내가 두려웠어요. 당신을 무감각하게 쳐다보는 내 눈빛을 들킬까봐 무서웠어요... 왜 나는 울지 못하지요?... 나는 정말 사랑했던 것일까요?”
(244쪽 -247쪽)
그건 마치 이 많은 사진과 글을 무심히, 때론 잠깐씩 눈물 글썽이며 넘겨보고 있는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인 듯 느껴진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듯 그렇게 남의 아픔을 보며 펑펑 눈물 흘리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기록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넘치는 슬픔을 눌러 담으며 명료한 눈빛으로 그 아픔을 마주하는 일은 매섭고 두려운 일일 수밖에. 어느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고통의 증언들이 날것으로 내 가슴에서 파닥거릴까봐, 살아서 펄쩍펄쩍 뛰어다닐까봐” 두렵고 두려울 수밖에. 하지만 윤정은은 기록이 모두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과감히 걸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많은 두려움과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한권의 책으로 갈무리해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나처럼 ‘그냥그냥 잊혀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도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흔히 ‘전쟁보도’라 하면 누가 이기고 졌으며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 온갖 전쟁의 풍광이 수치와 분석자료로 환산되어 전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윤정은은 자신의 이라크 방문을 “취재”가 아니라 “여행”이라 이름붙이며 “뉴스에는 단 한줄도 나오지 않는” 권력과 전쟁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른바 피스 저널리즘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이미 우리 앞에 드러나 있었다.
가슴에 고인 슬픔이 녹아내일 수 있도록,
흘러내려 지켜보는 너도 울 수 있도록,
지금은 조용히 그들을 내버려두어라. 조용히 두어라.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