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8월. 일때문에 만나게 된 어떤 친구로부터 불쑥, 도움 고맙단 인사와 함께 받게 된 이 책. 그다지 내가 해 준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되려 무언가 더 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까지 느끼게 해 주었던 선물이다. 그런데 참, 쑥스럽게도 되었다. 괜시리 제목에 의미를 두겠다고 9월에 맞춰 읽어봐야지 하고 미루다가 11월 가량 되어서야 부라부랴 책을 집어들더니, 마지막 장을 덮은지 서너달 지난 지금에야 겨우 독후감이랍시고 몇글자 끄적이고 있지 뭔가.
"1999년 3월 나는 나르마다 강 계곡으로 갔다. 나는 나르마다 강 계곡이 한 사람의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돌아왔다. 단순히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가 필요하였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소설의 소재로서는 지나치게 품격이 없는 것으로 보여도, 소설가다운 솜씨와 열정으로 여러 분리된 부분들을 통합하여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소설가 말이다. 나는 나르마다 강의 이야기는 바로 현대 인도의 이야기라고 믿는다." (7쪽)
재생지로 만들어진 작고 가벼운 이 책의 표지에는 가녀려보이면서도 도전적인 눈빛으로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로이의 사진이 있다. 조심스레 내놓은 첫 소설 한 편으로 하루아침에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 사람. 하지만 폭발적인 찬사속에 세계 곳곳으로 강연여행을 다니며, 불어나는 저축예금에 어리둥절하는 생활에 파묻혀가는 이 신예작가를 번뜩 깨어나게 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인도 나르마다 강 유역에서 벌어진 "나르마다 바차오 안돌란" 즉, 나르마다 지키기 운동이다.
지역개발을 명목으로 추진된 엄청난 댐건설 계획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수십만 주민들이 스스로 전개한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메다 파트카와 같은 걸출한 활동가를 배출하며 뿌리를 내려 온 이 나르마다 운동과 만나면서 로이는 '인도에서 매우 인기없는 인물'이자 동시에 '국가가 아니라 강과 계곡에서 사랑을 받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나르마다의 이야기는 인도 뿐 아니라 전세계를 휘어감고 있는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이의제기이자 생명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무엇을 위한 개발이며 누구를 위한 이익인가? 장기적인 이익이라는 허울속에 단기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 아래 힘없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이는 누구인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사회는 결코 일정한 보상금과 이주정책으로 복제, 이동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모든 진실을 숫자와 그래프로 치환시키고 있는 관리와 자본가들이, 바로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도 결코 그 허름한 집을 포기하지 못하는 지역주민의 현실을 어떻게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아룬다티 로이는 생계를 위한 투쟁을 벌이는 지역주민 뿐 아니라 이렇듯 감수성도 진실을 보는 눈도 갖지 못한 이들을 변화시키는 데에 현시대 작가의 역할이 있음을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으로 옮긴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작가에서 하루아침에 지식인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는 돌연변이로, 순수한 작가정신을 상실한 정치적 야심가로 낙인찍혀 급기야는 재판정을 들락거리는 상황에 처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진정한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문제'가 아니고, 우리들 중 일부가 제기하고 있는 쟁점들은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엄청난 정치적/사회적 격변입니다. 이런 사태에 누군가 관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작가나 활동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상황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에 대한 공적 논쟁의 비전문화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전문가'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다시 낚아채와야 할 때입니다. 공적 문제를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언어로 질문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또한 일상적인 언어로 하라고 요구할 때입니다." (38쪽)
이것을 과연 무어라 해야할까? 마음의 울림, 생명의 환희로부터 분출되는 저항의 욕구.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신뢰에서 출발하는 비판과 대안. 팔레스타인, 칠레, 미국, 이라크... 그 많은 아픈 기억을 담은 우리 시대의 9월에 당당히 손을 내미는 로이의 강렬한 눈빛 속에 담긴 바로 '이것'. 이것을 무어라 하든 오늘 우리가 가진 생명력은 모두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며, 다시 이것으로 귀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