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로 화내고 운다. 웃지를 않는다. 새벽에 전화해서 지갑을 찾는다. 반지도 어디다 빼 버리셨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낯설음이 확 밀려든다. 가여워서 눈물을 쏟아내다가도 소리를 버럭 지른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어디에 있어!! 바라보면 기가 막히고 돌아서면 실감이 안 난다. 모두가 이것이 꿈이었으면 바란다. 절망이란 비극이란 이런 거였다. 하지만 이 끝이 어디건 놓아버린 정신이 어디서 길을 잃었건 간에 비록 육신의 껍데기일지언정 놓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 그리고 우리들은.

 

뉴스를 보다가 문득, 지나가는 말처럼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는 억울해서 일까, 아님 치욕이나 수치심 때문일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옆에 있던 그녀는 사는 동안에 그런 충동을 한번도 느낀 적이 없느냐고 한다. 삶 자체의 우울과 회의 고달픔에 의욕을 잃고 달콤한 죽음을 꿈꾼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마음 속의 시나리오일 뿐. 대부분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했더니 참, 무난한 삶이라고 한다.


확실히 그런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놓고 계신 할머니만 하더라도 감히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셨으니.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도 흥분하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소릴 지르곤 했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차라리 죽었지 안 살았다고 쉽게 대꾸했다. 마치 할머니의 생존이 크나큰 잘못인 것처럼.


그렇다면 굴곡 많은 인생이 참 인생인가. 남편 자식 앞세우고, 모진 시집살이에, 전쟁터를 지나 맨 손으로 땅을 일구는 그런 격동의 세월을 지낸 할머니는 위대하다 못해 독하고도 독하다. 할머니를 보면 생의 질김에 몸서리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살아서 얻은 것이 뭐냐고 소리쳐 묻고 싶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를 읽었을 때도 그랬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봤을 때도 그랬다.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는 농사처럼 한 인간의 피를 토하는 고통을 바탕으로 누군가는 기름진 땅에서 거둔 양식을 맛나게 먹어치운다.


숭고한 희생, 불굴의 인내심과 강인함을 밑거름으로 누리는 번영, 그런 드라마틱한 삶을 관조하며 울고 웃는 인간들 속에 내가 있다. 할머니를 인생을 듣고 바라보는 것으로 다 안다는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다. 이해는 하지만 감당 못할 얘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할머니 자신이 스스로의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을 그동안은 잊고 사셨던 걸까. 어째서 지금 그것들이 생생한 거냐고, 좋은 것, 기쁘고 행복했던 것들은 다 어디다 두었느냐고 몇 번이나 소리쳐 묻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