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포대기
공선옥 지음 / 삼신각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소설 읽기가 즐거운 건 그것이 현실과 무관하다는 이유도 있다. 오래된 상처나 기억, 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집요한 소설과 마주치면 천리 밖으로 도망갈 준비부터 한다. 공선옥의 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을 읽었을 때가 딱 그랬다. 아, 어찌나 싫은지 공선옥과 비슷한 이름만 봐도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흑과 백이 분명하고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도 한 몫을 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한번 싫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번복하는 법이 없었던 고집과 치기는 삶에서 결코 플러스 요소가 아니었다.


‘붉은 포대기’는 내가 읽은 공선옥의 두 번째 소설이다. 가족 이야기다. 상처를 주고받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다. 십년도 전에 품었던 작가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는 소설이다.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인혜는 엄마의 위암 발병과 수술 후의 병구완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다. 권위적이고 무신경한 아버지와 치매와 걸린 할머니 그리고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동생 수혜가 기다리는 고향이 죽도록 그리웠을 리도 없거니와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라곤 없는 고향집이지만 아픈 엄마를 외면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온 것이다.


인혜의 유년은 쓸쓸한 회색이다. 영매는 언제나 전처의 자식들인 태건과 명혜를 챙기느라 제 뱃속으로 난 태준과 인혜, 수혜는 뒷전이었다. 그것이 뱃속의 아기를 거두어준 희조에 대한 영매의 은혜갚음이었을 지는 몰라도 어린 자식들에게는 지독한 외면이고 상처가 되었다. 낳아준 엄마가 있고 길러 준 아버지가 있었지만 언제나 버림받은 듯 외롭게 자랐을 인혜가 가여워 무엇으로든 보상받기를 바라지만 소설은 현실만큼이나 정직하다. 궁핍했던 대학생활, 연애, 그리고 실연으로 점점 행복과는 멀어지더니, 도피처럼 유학을 결심하는 와중에 이번에는 덜컥 엄마가 앓아눕는다. 여기서 제 자신만 아는 딸이라면 그걸 왜 내가 하면서 잽싸게 도망을 갔을까. 그런 선택이 가능할까.


이 소설 속에서 남자들이란 참 비루하고도 졸렬한 존재들이다. 연애가 끝났을 뿐이라며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뻔뻔한 윤호가 그렇고, 제 탓인 줄은 모르고 일생을 아버지 탓, 엄마 탓, 마누라 탓을 하는 태준이 그렇고, 권위적이고 이기적일 뿐 아내와 자식들에게 진심을 다한 애정과 이해를 주지 않는 희조가 그렇다. 또, 꽃 같은 수혜를 임신시키고 책임짐 없이 사라진 남자가 그렇다. 이런 남자들을 낳아 놓고도 어머니들은 미역국을 먹었으려나.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도 늘 할 말이 많은 게 가족 그리고 상처에 대한 거다. 원망이 푸념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참았다가 어느 순간 작정한 듯 쏟아내고는 또 한동안은 죽은 듯이 사는 거. 아무리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돌아서면 부모고 형제라고 가슴 아파하는 가족이란 굴레는 평생 짊어지고 가는 굴레다. 누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이 사치일 것만 같은 절박함과 곤궁함으로 둘러싸인 황씨네의 가족사를 들여다봐도 저마다의 선택과 행동은 당시에는  최선을 다함 결과였음을 알 수가 있다. 결국 미운 건 죄지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영매의 죽음과 화해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떠올렸다. 거짓 곡을 하는 낭창한 소리에 섞여 한 쪽에서는 해묵은 말싸움으로 점점 언성이 높아가고, 다른 쪽에서는 간만에 만나는 사촌이며 오촌들이 주고받는 인사와 걸쭉한 농담으로 질펀한 웃음판이 벌어졌던,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권하고, 음식을 내오고,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다는 근원이 모호한 충고와 서운함이 오갔던 곳. 그러면서 곡소리는 계속 들려와 누군가 죽었다는 걸 간간히 확인 시키는 곳. 거기에 죽은 사람이 낄 자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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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7-1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할머니의 장례식이 생각나네요.
서울에서 후배가 봉투 몇 개를 걷어 조문을 왔는데
엄청 취해버렸지요.
긴 이야기 생략.;;

겨울 2005-07-11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로드무비님의 소개로 알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