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카네이션 조화 한 송이를 들고서 할머니에게 다녀왔다. 어여쁜 생화들이 지천에 널려 시선을 끌었지만, 굳이 문구점을 찾아가 조화를 산 까닭은 할머니께서 기꺼워하시기 때문이다. 생화를 준비했던 작년 재작년에 아깝고 쓸모없다고 어찌나 지청을 하시던지, 그래서 올해는 기어이 조화로 결정했다. 할머니는 오늘 하루가 아닌 다음 해 어버이날이 오기까지 시들지 않는 저 조화를 보고 또 보실 것이다.


어버이날 아침, 시골에서는 흘러간 유행가가 귀청을 두드려 잠을 깨웠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어버이날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마을 이장이 선별한 노래란다. 그렇다는데, 시끄럽다고 불평을 할 수도 없는 일. 노래는 오전 내내 왕왕 울리며 청승을 떨었다. 마을의 청년들이 주관하여 어른들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한다고, 이웃에 사시는 친구 분 손에 이끌려 할머니는 마을 회관으로 가시고, 나는 온 집안의 문이란 문은 다 열어놓고 대청소를 한 뒤에 볕드는 온돌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소설을 읽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낮잠을 자다가, 뒹굴뒹굴 무료하고 긴 시간을 보냈다. 아니, 오랜만에 다니러 왔는데 놀아주는 사람도 없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하면서.


호밀과 보리와 마늘이 온통 파랬다. 아니 정확히는 짙은 초록인데 파랗다고 해야 그 의미가 통할 것 같다. 집 앞에는 도라지 밭이 있는데, 역시나 파랬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단순한 동작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아주 잠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