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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글을 쓴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 얼마나 아팠을까를 걱정하고 연민하며 소설을 읽은 적이 여태껏 있었던가. 아니, 한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은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나는 소설 속에 풍덩 몸을 던져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휘몰아치듯 읽어나갔다. 한 글자, 한 문장의 의미가 눈에 마음에 못 박히듯 절절하고 구체적이었던 적은 요 근래엔 없었던 일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소설에 중독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가를 만끽했다. 김형경, 당신과 당신의 이야기에 정말 감탄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고 실은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지언정, 읽고 있는 순간만큼 나는 온전히 당신 소설의 일부로 있었다.
소설 속의 두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 질풍노도의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또 다른 연애를 하는 인혜와 성의 불능은 사랑의 불능이며 삶 자체의 불능이라는 고통스런 자학과 분석을 거듭하는 세진은 여자들의 속에 있는 사랑을 선택하는 두 가지의 기준이다. 자유연애냐 성불능이냐는 독신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에서의 성은 안정적인 반면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은 박탈당하기 일쑤니까. 남자의 기대감 어린 눈빛에서 도망치는 인혜의 상처가 치유가 가능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대담성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연애방식에는 수긍이 간다.
내 안에 세진이 있었다는 어떤 독자의 글처럼, 세진은 누구에게나 부분으로 혹은 전부로써 존재한다. 얼핏 대수롭지 않을 유년의 상처들과 기억을 고집스럽게 끌어안고 끊임없이 분석하고 분열하며 응시하고 분노하는 세진은 비정상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똑같은 상처라도 누구는 쉽게 잊거나 극복을 하는데, 어째서 그녀의 자의식은 그처럼 명료한 것일까. 부모의 이혼, 냉정하고 엄격한 엄마라는 존재는 특별하거나 대단한 건 아니다. 최소한 학대하거나 버리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어디에나 있을 법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오직 나뿐이라는 상처는 있다. 그리고 대개는 그 상처를 죽는 날까지 품고 살아갈 것이다. 세진처럼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는 않는다. 상처가 상처인줄도 모르고 억압이 억압인줄도 미처 모르고 일생을 산다고 해서 불행은 아니다. 왜, 너만 유별나게 구냐는 인혜의 의문처럼 세진 같은 부류의 여자는 끊임없이 허물을 벗어놓고 떠났다가 돌아오고 또 떠나기를 반복할 것이다.
이런저런 불신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세진의 정신분석을 따라가는 동안에도 내 안의 어떤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할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면서 무뎌졌던 감성의 날을 벼리는 계기가 됐다. 정신분석에의 매혹은 한번도 꺼진 적이 없는 호기심이지만 한번도 충분히 채워진 적이 없다. 그것은 늘 삶의 언저리를 맴돌고 봉인된 기억 앞에서 서성인다. 멀고도 가깝고, 지식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지만 의미는 모호하고 거대해서 손을 담글 용기가 없다.
아직도 책의 무거움이 온몸과 정신을 짓누른다. 단지 한 권의 책일 뿐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깊이 침몰했다. 책의, 소설의, 인혜 혹은 세진의 심연에 닿았기 때문인가. 천천히 숨을 내쉬지만 여전히 숨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