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김수영의 시집과 산문집을 꺼내 읽는다. 시인이란 태생이 천형을 짊어진 죄인인가, 어쩌면 이렇게 비감하고 여린가. 시를 반역하는 생활을 한탄하고 또 한탄하는 시인을 떠올리자니 가슴이 아리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 사람의 시에는 유난히 ‘설움’이라는 단어가 많다. 삶에, 생활에, 현실에 자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비루함, 구차함, 불만족을 토로하는데 철부지 아이 같기도 하고, 이렇게 순수하고 결백하니 시인이지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슬며시 웃음도 난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거미>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나는 구태여 생각하여본다

그리고 비교하여본다

나는 모자와 함께 나의 마음의 한 모퉁이를 모자 속에 놓고 온 것이라고

설운 마음의 한 모퉁이를. <시골 선물>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긍지의 날>


영사판 양편에 하나씩 서있는

설움이 합쳐지는 내 마음 우에. <영사판>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헬리콥터>


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

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   <휴식>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

누구나 어른들은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우열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고

구태여 달관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

샘솟아 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 <국립도서관>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덧없이 앉았으면 비로소 설워진다

어떻게 하리

어떻게 하리.   <사무실>


질서와 무질서와의 사이에

움직이는 나의 생활은

섧지가 않아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름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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