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뒤의 부드러운 땅을 파고 청양고추모를 심었다. 잡풀과 돌, 낙엽으로 지저분했던 곳이라 잘 자랄지는 의문이지만 일곱 포기를 비뚤비뚤하게 심어 놓고 바라보니 뿌듯하다. 저 곳이 원래가 채소가 풍성하게 자랄 양지 바른 장소가 아니지만 뭐든 처음은 있다라고 믿기로 했다. 파릇하게 살아주면 좋은데 왠지 불길한 것이 영.....

내일은 옥상에 올라가서 할머니가 가꾸던 화분들을 정리해야 한다. 미루고 미루던 일이라 산더미다. 할머니는 그 가파른 철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셨다. 고추, 상추, 가지, 토마토가 여름, 가을에 걸쳐 풍성하게 식탁에 오르곤 했다. 할머니가 안 계신 지금의 옥상은 살풍경하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얼마나 게으르고 부지런한가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진다. 온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한 할머니의 실한 고추를 다시 볼 날은 아마도 없으리라. 나는? 무엇을 키우고 살리는 일에 서툴다. 금붕어도 화초도 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죽어나간다. 부족한 관심과 열정이 문제겠지만, 원래가 나란 존재 외에는 무관심한 천성 탓이다.

궂은 날을 유난히 밝히지만, 이렇게 막 개인 직후의 청명함에 비할 바는 아니다. 비 오는 날 외출을 하면 할머니는 날궂이를 한다고 타박을 하셨다. 날궂이가 즐거웠던 까닭은 그 후의 맑음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닐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당연한 믿음이 눅눅하고 써늘한 흐린 날에도 하하 소리내어 웃게 만드는 것이다.

고추모가 뿌리를 잘 내리면 토마토도 심어볼 생각이다. 만약 실패하면 어쩌지? 성공할 때까지 시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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