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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ㅣ 다빈치 art 11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화가의 삶이 극적이면 극적일 수록 읽기의 속도는 빨라진다는 사실. 클림트와 프리다 칼로를 느리게 읽은 후라 그런지 에곤 실레의 짧은 생애를 다룬 이 책은 너무 빨리 책장이 넘어가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 시선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림들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일찍 성공의 대열에 올라섰고 계절에 피고 지는 꽃처럼 죽었다는 것 때문에?
일그러지고 뒤틀린 자화상은 보는 이를 가슴 아프게 하고 저 것을 그린 이의 가슴을 들여다보고싶다는 충동을 갖게 한다. 구로이 센지는 그것을 자아도취의 미학이라고 불렀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에곤 실레가 자신에게서 찾고자 한 것이 유토피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관찰하고 감시하는 눈동자는 고뇌와 우울, 욕망으로 넘치고 때로는 연민과 안타까움, 자학도 엿보인다. 세상과 우주와 맞서는 자아를 가진 인간의 나약하고 가벼운 육체를 발겨벗겨 놓고 응시하는 화가의 눈은 적나라하고 춥다. 캔버스에 옮겨지기 전의 비루한 육체와 맞서는 화가의 시선을 범인은 알 수가 없다. 내가 보는 것은 캔버스다. 불순물이 걸러지고 걸러진 예술로서의 육체는 아름답기 보다는 슬프다.
저자는 에곤 실레의 인생 역정을 다루면서 모델 발리와의 이별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가 그린 발리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행복하다. 함께 먹고 자며 생활한 4년의 시간을 단지 화가와 태생이 비루한 모델의 관계로만 단정짓는 시각은 저급하다. 미성숙된 남자의 이기심과 인간성을 운운하는 것은 화가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어이가 없는 일이다.
독감에 운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에곤 실레의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속된 궁금증이 고개를 든다. 천재의 요절은 수없는 아쉬움과 만나지 못한 미지의 작품에 대한 미련을 남긴다. 발리와의 이별과 결혼은 동시에 이뤄졌고 그 사건이 에곤 실레의 영혼과 삶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안정된 결혼과 임신이라는 축복을 앞에 두고 신의 부름을 받았다.
어째서인가, 라는 생각이 맴돈다. 너무 이른 가정에의 안주와 성공은 그의 요절의 댓가가 아니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는 혼란스런 전장이었다. 예술가라는 축복된 삶을 살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육체를 벗기는 일은 요원한 시기였다. 극적인 삶과 죽음을 누리고 가족 옆에 나란히 누운 청년 에곤 실레는 그가 그린 그림들 만큼이나 초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