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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 애장판 1~8(완결) 세트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년에 한두번은 반드시 챙겨 보는 만화가 있다. <기생수>도 그 중의 하나다. 특히, 무더운 여름날 흐르는 땀을 선풍기 바람 앞에서 식히며 읽어 치우는 <기생수>의 묘미는 흥미진진은 기본이고 오싹, 살벌,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처음 읽는 것도 아니고, 수년에 걸쳐 몇 번이나 읽는 만화에 대해 매번 이다지도 진지하게 열광하는 것은 왜일까.
우주로부터 정체모를 씨앗에서 꼬물거리는 지렁이를 닮은 생물체가 태어나 무방비 상태로 잠자는 인간을 습격하는 설정은 마치 SF 영화 같다. 전혀 귀엽지 않게 생긴 녀석들은 곧장 인간의 뇌를 향해 침투한다. 유전자 속에 잠재된 명령어에 따른 이 침투작전의 성공은 인간의 기생수화이다. 인간의 겉모습을 유지하지만 인간을 먹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공포스런 괴물의 탄생이다. 침투한 인간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사지를 갈갈이 찢어발기듯 먹어치우고 다음 목표의 먹이를 찾아가는 가공할 생물들의 존재는 곧 정체불명의 엽기적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등등의 이름표를 달고 표면 위로 부상한다. 이 만화의 히어로 신이치가 없었다면 그렇게 대책없이 세상은 무법지대가 되어 시체와 피로 범벅이 될 듯 하다.
이어폰을 끼고 잠든 신이를 노린 기생수는 불행히도 머릿속으로도, 콧구멍 속으로도 침입하지 못하고 신이치의 오른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실패했다고 분개하는 기생수와 달리 오른손에 들어간 황당한 생물의 정체를 몰라 우왕좌왕 하는 신이치의 일상은 적당히 유하고 여유롭고 무료했다. 그의 오른팔을 점령하고 소유자라 칭하며 더불어 살자고 제안하는 오른쪽이의 존재와 만나기 전까지는.
어찌보면 오른쪽이와 신이치는 닮은꼴이다. 적당히 시니컬하고 이기적이고 방관하는 기질이 처음엔 오른쪽이의 전형이라 생각되지만 공생관계인 신이치의 드러나지 않았던 일면이기도 한 것이다. 기생수들의 가공할 살인과 식인, 위협에 점차 노출되며 괴이한 감각과 능력을 발휘하여 방관자, 구경꾼으로서 흔적을 감추는 사이 발생한 학생으로 위장한 A의 폭주 사건에도 흔들림이 없던 신이치가 전면에 나서는 계기는 당연하게도 살해당한 어머니, 즉 어머니의 몸을 가진 기생수로부터 심장을 공격당해 일시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면서다. 어머니는 신이치의 우주다. 성장하는 내내 사랑과 희생으로 점철된 곧고 헌신적인 애정을 아낌없이 주었던 존재로서 어머니를 빼앗아간 기생수는 신이치가 반드시 처치, 죽여야만 하는 악이요 적인 것이다.
오른쪽이는 신이치의 단순한 일부였던 처음과 달리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간다. 죽어가는 신이치를 살리는 과정에서 조각난 오른쪽이의 일부는 신이치의 혈관으로 전신에 흩어진다. 그 영향으로 신이치의 체력, 시력, 청력은 엄청나게 업그레이드 된다. 인간 신이치는 기생수 오른쪽이의 냉정하고 무심한 판단력까지도 공유한다. 인간과 기생수의 중간이라는,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기생수가 보기에도 특별한, 희귀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상승이 된 것이다. 영웅의 탄생이다.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의 비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히어로의 이야기다.
영웅은 고독하다. 세상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고뇌하며 언제라도 목숨 따위는 가차없이 던질 각오로 싸워야 한다. 대중 앞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홀로 외롭게 싸움을 준비하며 눈물 흘리는 영웅이라니 감동적이기 않은가. 신이치는 그런 영웅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적, 고토와의 대적에서 오른쪽이를 잃고 슬퍼하는 신이치, 오른팔이 잘린 불구의 몸으로 다시 악을 찾아 나서는 신이치, 고토의 일부로 흡수된 오른쪽이와의 재회, 그리고 고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은 처절하다.
기생수의 존재 이유. 오염되고 파괴된 환경과 과잉된 인구로 인해 멸망의 길로 가는 지구를 구원하라는 절대자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역설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아기를 품에 안고 죽어간 타무라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절대적인 모정? 생명의 소중함? 그녀의 희생은 단지 신이치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굴레에서 구원하기 위한 도구였을까. 연쇄살인마 인간의 무자비하고도 잔혹한 모습 앞에 나타난 오른쪽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웅의 재탄생인가.
읽을 때마다 다른 맛이 나서 전에 읽은 그 책이 맞은 건가 싶은 특별하고도 특별한 만화다. 여름이 이렇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