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을 떠올리는 바보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늘 생각했는데, 그것은 노력과는 무관하게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때로는 농담처럼 웃어 넘기고 먼 타인의 가십처럼 안주 삼던 어린 시절의 일화, 추억 조각들이 갑자기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 중앙을 쿡쿡 찌르는 경험을 했다.
그동안 아프지 않아서 멀쩡했던 게 아니었다. 아프지 않은 척 했던 거였다.
드러내고 말하기가 창피했던 모양이다. 대범하게 이해하고 용서하고 극복했다는 믿음이 있었다.
오늘처럼.
햇살은 따스하고 어쩐지 훈훈한 바람이 코 끝에 오래 머무는 날에 갑자기 찾아온 그것이다.
어두운 상실의 기억들과 부재로 인한 헐벗음과 눈과 귀가 닫혀 있었던 시간들, 집이었지만 집이라고 부르기가 난감하던 때다. 무언가 애틋하고 사랑스런 기억은 한 조각도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지금, 오늘이란 얼마나 안온한지. 태어나서 살아있어서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ᄄᅠᇂ게 태어나 살아왔는가 는 중요하지 않다고. 귓가에 속삭인다. 너가 너여서 너무 좋았노라고.
나는 목소리의 태어남을 결별이라는 말로 부르기를 제안한다. 갓난아기를 호흡하게 만드는 울음 소리는 호흡하지 않던 세계에 영원한 결별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 서약 위반이 최초의 고통이다. 태어남은 집없음이다. 혹은 실향이다. 첫울음이 그러하듯, 최초의 사라짐은 호흡 및 폐의 새로운 리듬 –폐의 리듬에 앞서는 심장의 리듬과 언제 까지나 협력해야만 한다—을 작동시킨다. 버림받음은 언제나 기억의 바탕을 이룬다. (은밀한 생/파스칼 키냐르)
모든 강물은 끊임없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간다. 나의 삶은 침묵으로 흘러든다. 연기가 하늘로 빨려들 듯 모든 나이는 과거로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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