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게는 길이 있다. 그 길에서 거센 바람이 회오리를 일으키고 머문다. 나뭇잎, 먼지, 전단지 등의 쓰레기가 만나는 장소가 그 길이다. 거리의 청소 하는 이들은 안다. 매일 아무리 쓸고 치워도 어김없이 쓰레기가 소복히 쌓이는 이유는, 바람이 머물다 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무더위가 덮친 날, 우연히 땀을 식히려 멈춘 편의점 앞에서 얼음골이 연상되는 차가운 기세를 느꼈다. 하늘로 솟구친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 사이였다. 생경하고 청랑한 공기 냄새가 났다. 대형 빌딩 사이의 작은 휴식공간에 대리석 석판이 있어 잠깐 쉬어가기에 좋았다. 녹음 짙은 나무 때문인가 보다 했다. 차갑고 낯선 공기에 스미는 촉촉한 바람 냄새의 이유를. 

 

올 들어 최고 기온을 찍은 날이었다. 아이스커피의 시린 맛 같은 바람이 공중을 휘감았다. 서늘하다 못해 춥고, 나무 줄기들이 요동을 쳤다. 하늘은 시퍼렇게 쨍쨍하고 그늘 밖은 따가운 햇살이 눈부셨다. 단지, 알 수 없는 징조처럼 거기만 그랬다.  

 

이 나무 꼭대기 어딘가에 요괴가 살 것 같아.” 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요괴? 넌 만화책을 너무 많이 봤어.”

아냐, 여기 분위기를 봐. 뭔가 으스스 하잖아. 보통 이런 공간에 요괴가 산대.”

그녀는 픽픽 웃어댔다. 더 이상의 부정도 없이, 네가 하는 말은 다 그렇지 뭐. 라는 듯.

 

한때 열렬히 일본 만화책을 보던 시절, 세상 모든 요괴가 등장하는 그 책이 나오는 날만을 기다리곤 했다. 보통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 보여도 안 본척 지나쳐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불 수 있는 눈을 가진 인간이 있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인간이 아닌 것들은 보여도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 누누히 가르친다. 하지만 어리고 미숙한 소년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척 하기 어려웠고, 결국엔 요괴들에게 정체를 들킨다.

 

오래되고 키 큰 나무 위,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요괴 한 마리를 상상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상상에서는 현실이 보여주지 않고 말해주지 못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 다음에는 소나기 오는 날에 여기 앉아 있을까?”

그러던지. 나쁘진 않겠네.”

여기, 정말 특별한 공간 같아. 아주 재미있는 곳이야.”

나도 그래. 도심 속 숲속 같달 까. 계절마다 와서 앉아 보고 싶네.”

 

일기예보와도 무관하게 불가사의한 날, 악동 요괴 한 마리를 꿈꾸는 것은 꿈꾸는 자의 자유였다. 물론 현실은 이가 시린 커피 한 잔과 몽상을 좋아하는 여자 옆에 적당히 비현실적인 사고의 동행이 있었다. 어쩌면 바람 때문일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말도 안 된다는 말을 아끼고, 닮은 곳은 전혀 없는 타인이지만 별 것 아닌 소소한 것들에 웃어주고 대꾸를 해주는 그녀와는 길 위의 동지가 되었다. 멋진 어느 날, 바람에게 고마웠다고 편지를 써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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