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내 삶은 그동안 잠재력을 쌓아왔으나 그 잠재력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정말 많은 걸 계획했고, 그 계획이 곧 성사될 참이었다. 내 몸은 쇠약해졌고, 내가 꿈꿨던 미래와 나 자신의 정체성은 붕괴되었으며, 내 환자들이 대면했던 실존적 문제를 나 역시 마주하게 되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마치 모래 폭풍이 그동안 친숙했던 모든 흔적을 쓸어간 것처럼 (148-149페이지)

 

청년 의사 폴은 성공과 명예를 눈앞에 두고 폐암을 선고 받는다.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며 버틴 레지던트 최고참으로 머잖아 모교 스탠퍼드에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위대한 의사이자 과학자의 반열에 오르리란 걸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이제 겨우 서른여섯 살이다. 꿈이, 미래가 산산조각이 났다. 돌아갈 길이 없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최대한 느리게 천천히 읽어갔다. 단번에 읽어치울 수가 없다. 그동안 읽어온 흥미진진한 여타의 소설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경외과 의사로서 전도유망하던 청년의 실제 상황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을 모습을 상상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읽는 것도 이렇듯 고통스러운데,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정리하는 마음은 얼마나 비장했을까.

 

그럼에도 문체는 유려하다. 막힘없이 흐르고 성찰하고 통찰한다. 건강하던 시절의 생을 향한 의지와 열정은 불처럼 뜨겁고 먼 바다의 심연처럼 깊다. 건강을 잃고 병과 마주하는 순간조차 반성하고 회고하며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한다. 죽음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계속해서 슬플 정도로 들여다본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숨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142페이지)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지만, 죽음 없는 삶이라는 것 없다(161페이지)

 

폴은 죽음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한다. 계속 나아가야할지, 멈춰서 다른 설계도를 그려야할지 실존적 진정성과 마주한다. 그는 늘 치료과정의 고통에 대해 환자에게 설명했지만 그 고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의사였던 그는 역시 의사인 아내와 함께 끊임없이 암과 수많은 치료법들, 수반되는 고통과 망가지는 육체와 정신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 한다. 삶에는 죽음이 필연으로 따르므로 어떤 상황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의사이자 과학자, 문학도를 꿈꾸었던 그는 자신의 짧은 생을 기록하고 정리하면서 점점 죽음에 이르지만, 한순간도 무너지진 않는다. 슬픔에 잠겨 통곡은 할지언정 불안에 떨진 않는다. 그는 가족들 동료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아내가 있고 8개월 어린 딸이 있어 완벽한 삶이었노라 말한다. 마지막 순간, 호흡이 불안정할 때에도 삽관 대신에 존엄한 의미 있는 이별을 위해 산소마스크를 벗고 가족들과 마주한다.

 

안타깝고 슬픈 그리고 아름다운 죽음 앞에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져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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