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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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바이러스니 해킹이니 사이버 전쟁이니 하는 소재들이 인기를 끌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단어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세기말적인 감성을 느끼게 된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신비스러우며, 알 수 없는 흐릿함. 가장 최신의 기술과 선구적인 영역을 소재로 삼고 있었지만 나는 그랬다. 하긴 천재 해커와 인공지능이든 초바이러스든 양자간에 펼쳐지는 이진법의 치열한 수 싸움 따위를 아무리 글로 표현해보았자,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의 눈엔 그리 비칠 수 밖에. 그러니 분위기라도 양껏 있어보이게, 아예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ㅡ뭐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실제 IT(Information Technology) 전문가인 저자가 '가장 현실적이게' 그려냈다는 사이버 테러를 소재로 한 종말 소설에 대한 소개를 읽었을 때 조금 두근거렸다. 그간 나에게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짧게나마 IT 정보를 다루는 일을 했던 경험! 어쩌면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대, 뭐 그런 거. 그리고 이 소설, '사이버 스톰'은 그런 내 기대를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충족시켜 주었다. 

 

이 글은 평범한 가족의 추수감사절 풍경을 그리며 시작한다. 주인공인 마이클은 철저한 생활밀착형 음모론자인 친구 척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다를 떨면서도 한켠으론 자신의 아내인 로렌의 부모를 마주할 걱정을 하고 있다.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이름난 명문가의 존재들. 그리고 그런 장인 장모 옆에서 로렌과 함께 서 있는 잘생긴 호남형 이웃 리처드도 신경이 쓰인다. 두살 난 아들 루크는 오늘도 천진난만하게 분위기를 밝히지만 마이클의 속내는 영 어둡기만 하다. 흔히 있는 평범하지만 평온하지만은 않은 가족.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슬슬 눈에 보이는 그런 시기. 그리고 재앙은 늘 그렇듯이 순식간에 찾아온다. 시작은 계산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 줄이 줄어들지 않는 슈퍼의 계산대였고, 조류독감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뉴스였다. 갑자기 고열을 내며 앓는 아들 루크와 접속이 완전히 끊겨버린 인터넷. 평소 철저하게 '이런 사태'를 대비해오던 척은 마이클에게 마스크를 건네고, 이웃들은 걱정해주면서도 멀찍이 물러선다.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중국의 사이버 테러. 모든 것이 컴퓨터로 중앙통제되고 있는 거대도시는 순식간에 마비 상태에 놓여버린다. '마치 뉴욕이 이 행성의 다른 곳들로부터 분리되어 회색 눈구름 속에 홀로 소리없이 떠다니는' 상황이 된 것이다. (p. 139)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CNN이며 온갖 라디오 방송과도 점점 거리가 멀어져간다. 전기가 끊기고, 수도가 끊겨버린 아파트, 아니 도시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어딘지 모를 지구 상의 누군가가 고작 키보드 몇 번 두드린 일 때문에! '아무도 자기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무언가가 세상을 공황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p. 115)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서, 추워서, 씻지 못해서 괴로웠던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흥미로웠다. 분명 시작은 누군가의 사이버 테러였지만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들은 그저 본능적 욕구의 해소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편리함의 그림자에 가려 인식하지 않았던, 아니 굳이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의 위험성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마저도 무의미하다. 당장의 생존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이클이 살던 아파트라는 작은 공동체를 통해 그러한 사태에 이르렀을 때 행동하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다. 극한 상황에서 때로는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주변을 생각하기도 하는 이중적이어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거기에 있다. 물론 한 쪽으로 격하게 치우친 이들도 있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며 무심하게 방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엮이고 엮이며 이야기는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마냥 원시시대처럼 먹을 것을 찾고 불을 구하고 물을 구하는 극한생존투쟁만이 있는 건 아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근거리 네트워크를 만들어 서로 간에 소통을 하고, 무법지대처럼 변해버린 주변을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 스스로 자정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우연히 병원에 자원봉사를 갔다 인연을 쌓게 된 경관도, 거리를 헤매다 기적처럼 아파트로 흘러들어온 영민한 청년도 다 같이 그들의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어둠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악몽도 결국은 꿈일 뿐이다. 끝내는 깨기 마련이고, 저자는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의 매듭을 풀어낸다. 물론 더 나은 방향으로. 

 

* * *

사실 마지막의 마지막 장은 제법 인상적인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을 보는 기분이 들더라.

어쩐지 그랬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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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진달래꽃 - 김소월 시집, 1925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김소월 지음 / 소와다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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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 시집을 사서 보게 되는 일이 생길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는데,

구매했다. 초판본 진달래꽃.

표지나 패키지에 낚이는 일도 거의 없는 편인데,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경성에서 김정식이란 사람이 보냈다.

물론 컨셉이지만 당시 디자인의 우표와 소인 등을 디테일하게 재현.

구깃구깃해진 갈색 봉투마저 마치 진짜 소포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엔 좀 다른 사정이 있긴 했지만.


*


사실 패키지가 찢어진 채로 와서 교환 받았는데도 구깃구깃했다. 

알라딘이 책덕후들 마음 헤아리는 서점이란 이미지가 있어 하는 얘기지만,

앞으로도 조금 더 신경 써줬으면 하는 바람.




당시에 그랬듯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씌여진 제목.

앞서 이 소포를 보내줬던 김정식은 시인 김소월의 본명이다.

책 자체의 디자인이나 컨셉, 인쇄 상태까지도 옛 느낌이 가득난다.



처음 김소월 시인이 썼던 진달래꽃은 이러했구나. 처음 알았다.

사실 나는 시라는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시들 중 가장 좋아했던 시 중에 하나가 이 진달래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을 사기로 마음 먹었던 것 같고. 



그리고 특전으로 들어있던 엽서 한 장.

나도 모르게 울컥.


***


사실 난 어린왕자 책을 수집하는 사람이라 

이 출판사의 초판본 시리즈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이 첫 구매가 된 건 역시 우리나라 문학작품이라서다.

아무래도 번역서의 초판본보단 원서 초판본이 더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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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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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뉴올리언스, 연쇄 살인마 그리고 재즈. 뉴올리언스는 달랐다. 이곳은 미국의 어두운 면이었다. (p.105) 사실 그랬다. 이십세기 초의 미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금주법이지만, 또 다른 하나는 인종차별이다. 노예해방선언이 무색하게, 수십년이 흐른 그 시기에도 태연하게 인종차별이 자행되던 그런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민속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재즈가 인기가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런 시대적 배경과 1918년부터 실제로 발생했던 도끼 연쇄 살인 사건을 결합시켜 독특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작품을 읽는 중간중간 문득 음울한 재즈 음악을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거 말이다.

 

작가의 데뷔작인 액스맨의 재즈는 도끼살인마의 연쇄살인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세 방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뉴올리언스 지역의 이탈리아 마피아, 즉 흑수단과 협력하다 감옥에 수감된 전직 형사 루카와 그 루카의 사제이자 그를 고발한 장본인인 현직 형사 마이클, 그리고 핑커턴 탐정 사무소 뉴올리언스 지부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다와 그녀의 친구인 루이스가 각각의 줄기를 타고 하나의 중심점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너무 다르고, 다른가 싶으면서도 비슷한 그들이 각각 전혀 다른 방향에서 때로는 얽히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기도 하며 거대하고 흐릿하며 음울한 밑그림에 채색을 해나가는 과정이 조급하지 않게 이어진다. 제법 오랫동안 마치 각기 다른 이야기인양 흘러가던 그들의 여정은 당연히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결코 통쾌하거나 시원스런 정답이 아니다. 그들 각자에게 서로 완전히 다른 의미와 결과를 안겨주게 되는 결말은 독자인 나에게도 역시 씁쓸함과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이건 결코 이 작품 자체에 대한 감정이 아니다. 결국 드러나게 된 사건의 전말이, 이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풀어놓은 그 이야기가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려 지나치게 그럴 듯 했기 때문이다.

 

한편 연쇄살인마를 쫒는 여정과 별개로 주인공들이 끌어안고 있는 이야기들 또한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다. 1960년대 러빙 부부가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한 법에 대한 위헌 소송에서 승소하기 전까지 미국의 수많은 부부들이 그랬었던 것처럼 백인 남성인 마이클은 흑인 여성인 아내와 비밀리에 결혼 생활을 하고 있고, 일반적인 흑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밝은 피부톤을 지닌 탓에 불편한 시선과 대접을 받아야 했던 아이다와 흑인이라는 이유로 불공정한 처벌을 받아야 했던 루이스는 일방적인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악의가 자리 잡은 사회 속에서 수년간 살아 온 그들은 증오를 곱씹으며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p.361) 그들ㅡ아이다와 루이스, 그리고 마이클의 아내인 아네트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흑인들의 체념과 포기가 작품 곳곳에 배어있다. 또한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며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기에 자신 역시 그들을 도와야했던 루카는 어떠한가. 그 시대를 살던 다양한 인간 군상이 담담하게 그려져있는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스릴 외의 재미ㅡ혹자에겐 희망과 미래를 준다. 난 이 작품의 그런 부분들이 참 흥미로웠다. 도끼를 사용하고 범죄현장에 타로카드를 남기는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끊임없이 추적하면서도 개개인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끈질김이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자 액스맨의 도끼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 * *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유혈이 낭자하고 피 냄새만 폴폴 나는 그런 작품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일정 부분 그런 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 그것만은 아닌 작품임에 분명하다.

묵직한 무언가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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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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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이 가까워올수록 이렇게 끝이 난다고? 하는 생각에 조바심이 들었고, 기어이 책장을 덮게 되었을 때 부리나케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책의 제목을 검색했다. 다행스럽게도 삼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나라엔 출간되지 않았더라. 피어스 브라운의 미래 화성을 배경으로 한 이 디스토피아 삼부작의 첫번째 이야기, 레드 라이징은 그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계속 읽고 싶은 작품이었다.


미래 화성의 깊은 땅 속. 주인공인 대로우는 헬다이버다. 거대하게 진화한 살무사와 곳곳에 산재한 가스 포켓을 피해 민첩하고 재빠르게 작업을 해낼 수 있는 뛰어난 헬다이버이자 척박한 화성을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헬륨-3을 채취하기 위한 사명을 안고 있는 레드이다. 헬륨-3의 채취량으로 가장 뛰어난 클랜을 정해 포상을 주는 시스템 속에서 헬다이버인 자신의 힘으로 그 상징인 '월계관'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레드, 대로우. 하지만 물론 월계관은 이번에도 대로우의 클랜이 아닌 감마 클랜에게 돌아간다. 그는 깨닫는다. 이것이 '그들의 권력이다. 그들이 승리자를 결정한다. 태어날 때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하는 게임'이며, '이것이 계급을 유지시킨다'는 사실을. (p. 57)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던 대로우에게는 이오라는 반려자가 있다. 그녀는 꿈을 꾸는 소녀였고, 대로우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말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레드로 태어나 레드로 살아가는 대로우에게 있어서 사슬을 끊으라는 이오의 말은 미친 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겐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어, 저 사람은 이미 마음을 굳혔구나, 거기에 반대하는 건 저 사람을 모욕하는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 (p. 92)


대로우. 레드 중에서도 로우레드였던 그는 자신이 로우레드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껏 자기가 알고 있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허구였으며 환상이었고, 지배계층인 골드의 철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록 '월계관'은 한 번도 받은 적 없지만, 가장 뛰어난 헬다이버였던 대로우는 골드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단순한 겉모습 위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뼈 하나하나,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철저하게 골드의 것으로 교체하고 구축하는 방식으로 그는 골드가 되고 골드의 삶 속에 뛰어든다. 그리고 또 깨닫는다. 이 역시 치열한 삶이라는 사실을.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수긍하기도 한다. 어째서 그들이 지배하는 가를. 하지만 그는 자신이 레드임을 잊지 않는다. 실패할 수도, 실수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골드로서 걸어나갈 수 있는 문 앞에. 하지만 어떨까. 골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겨냈다고 믿고 있는 그에게 권력자는 말한다. 네가 처음이 아니라고. 이는 이 이야기의 다음을 하루라도 빨리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대로우가 믿고 있는 가치와 신념은 과연 그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


레드 라이징 속 컬러 계급 사회와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제정 로마 시대에서 모티브를 따와 미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클래식한 느낌을 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지만, 골드 계급이 철저하게 자신들을 단련코자 하는 이유와 그 방식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하다. 특권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골드들 역시 호전적이고 강렬하다. 그 속에 뛰어든 레드, 대로우가 어떻게 바뀌어 갈 지 앞으로가 더더욱 기대되는 작품이다. 치열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도 틈틈히 자신이 레드들을 이끌 먼 미래를 떠올리곤 했던 대로우에게 축복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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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선생님 1 세미콜론 코믹스
다케토미 겐지 지음, 홍성필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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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별 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그 때는 그 나름대로 흥미로운 작품일 거란 기대를 했었겠지만, 1권부터 4권까지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게 틀림없다. 일본의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즈키 선생님이 그간 보아온 일본 드라마나 영화 속 열혈 교사들의 또 다른 복제품일 거라는 생각만 빼면 말이다. 정말로 나는 이 작품이 그런 일본 특유의 교훈과 해피엔딩을 품은 만화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런 내 얄팍한 기대는 1권을 채 반도 보지 않은 시점에 와르르 무너졌고,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던 손이 빨라졌다. 그만큼 스즈키 선생님이란 작품은 다소 자극적이었고, 생소했으며, 당황스러웠다. 다루고 있는 소재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날 가장 당황하게 만든 건 주인공인 스즈키 선생님이다. 그는 여지껏 내가 가져왔던 당연한 상식들, 교사의 모습이 과연 옳았던 걸까, 란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비록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스즈키 선생님이지만 그가 가르치는 중학교 2학년 아이들 또한 주인공이다. 때로는 아이들이, 때로는 스즈키 본인이 혹은 동료교사가 중심에 서 있는 가지각색의 에피소드를 통해 내가 가볍게 지나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예를 들면 1권의 에피소드 중 '탕수육'을 보자. 학교의 급식 메인 메뉴에서 늘 절반 가까이 남는 탕수육을 제외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스즈키가 담임을 맡고 있는 클래스의 한 학생인 가바야마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된다. 그녀는 탕수육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사소한 일이 교직회의는 물론, 스즈키로 하여금 전교적으로 탕수육을 빼느냐 마느냐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나 많은 탕수육이 남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한 반에 4명 정도만 탕수육을 못 먹는다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가 밝혀졌을 때, 난 무심코 '아, 못먹는 애들이 많은 건 아니니까 탕수육은 사라지지 않겠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비록 4명 뿐일지라도 그 아이들이 먹지 못하는 메인메뉴를 급식으로 제공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라는 논의를 시작한다. 아차, 싶었다. 탕수육을 좋아하는 아이가 그 메뉴가 제외된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안타깝지만, 앞으로도 계속 탕수육이 나온다면 전혀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다수결의 맹점이다. 다수가 찬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알고 있던 것이지만 무심코 잊기 쉬운 그 사실을 뼈저리게 지적당한 기분이 들었다. 한 반에 네 명이나 먹지 못하는 메뉴보단 모두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당연히 더 나은 메뉴다. 또 4권 거의 전부를 할애한 중학생 간의 성관계에 관한 에피소드 역시 인상적이었다. 작중 다케치의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일반론에 나도 모르게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에 칼로 자르듯 스즈키가 그녀를 부정하고 나섰을 때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스즈키가 꺼낸 말들이 초반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을 끝까지 읽고나서, 그리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작품을 읽고난 후에야 처음 읽었을 땐 보이지 않던 디테일한 묘사들이 눈에 들어오고 스즈키의 주장이 전혀 말이 안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가 옳다고 배워왔던 것들과 조금 다를 뿐. 사실 만화책을 보면서 내 사고방식의 근간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느끼는 당혹스러움 아닐까.   

 

     한편으로 이 작품은 스즈키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 스스로는 성인 남자가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을 상대로 그런 마음을 갖고 상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했기에 스즈키를 보는 마음도 줄곧 곱지 않았다는 걸 고백한다. 사실은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선 스즈키를 이해한다거나 공감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는 스스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흔들리고, 흔들리지만 그는 꿋꿋하게 아이들을 지도하고 자신을 추스른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교사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되려 그런 스즈키의 모습을 통해 교사 역시 또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곤 하는, 그런 평범한 인간. 무조건 안된다고만 배웠던 내 중학교 2학년 시절에 만약 스즈키와 같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사소한 투정 같은 일이라도 진심으로 마주해주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주는 완벽하지 않은 어른. 사실 중학교 2학년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다양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랬었으니, 지금의 그들도, 앞으로의 그들도 그렇지 않을까. 부디 무조건 안된다고 하지 않고, 자격과 책임을 설명해주는 스즈키 같은 교사가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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