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한 묘약

모든 사물에는 법칙이 있듯 부부가 살아가는 일에도
법칙이 없을 수 없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해 이런 법칙을 따라 볼 일이다.

1. 산울림의 법칙
한 소년이 엄마 품에 안겨 울먹거리며 말했다.
"엄마, 산이 날 보고 자꾸 바보라 그래요."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물었다.
"너가 뭐라고 했는데?" 아이가 대답했다.
"야, 이 바보야!" 순간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면 내일은 산에 가서
"‘야, 이 천재야!!!’하고 외쳐보렴"
그러자 정말로 산이 소리쳐 주었다.
"야, 이 천재야!!!"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대접하는 것이야말로
부부의 황금율이라 할 수 있다.

2. 실과 바늘의 법칙
부부란 실과 바늘의 악장이라 할 수 있다.
바늘이 너무 빨리 가면 실이 끊어지고
바늘이 너무 느리면 실은 엉키고 만다.
그렇다고 바늘대신 실을 잡아당기면
실과 바늘은 따로 놀게 된다.
더구나 실과 바늘은 자신의 역할을 바꿀 수도 없고
바꾸어서도 안 된다.
실과 바늘의 조화, 여기에 부부화합의 비밀이 있다.

3. 수영의 법칙
수영을 배워 물속에 뛰어드는 사람 없다.
모두들 물 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익힌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이치를 다 배워
결혼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사랑의
이치를 깨우쳐 가게 된다.
그러므로 피차 미숙함을 전제하고 살아갈 때
서로 인내할 수 있게 된다.

4. 타이어의 법칙
사막의 모래에서 차가 빠져 나오는 방법은
타이어의 바람을 빼는 일이다.
공기를 빼면 타이어가 평평해져서 바퀴 표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부부가 갈등의 모래사막에 빠져 헤멜 때
즉시 자존심과 자신의 고집이라는 바람을 빼는 일이다.
그러면 둘 다 살 수 있다.

5. 김치의 법칙
배추는 5번 이상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땅에서 뽑힐 때,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소금에 절일 때, 매운 고추와
젓갈과 마늘의 양념에 버무러질 때,
그리고 입 안에서 씹힐 때.
그래서 입안에서
김치라는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
행복이란 맛을 내기 위해 부부도 죽고 죽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이 피어난다.

6. 고객의 법칙
고객에게는 절대 화를 낼 수 없다.
항상 미소로 맞이해야 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재빨리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부부란 서로를 고객으로 여겨 살 때만
멋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배우자를 나의 마지막 고객이라 여겨라.
거기에 부부관계를 이어가는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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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에로이카 > [레디앙] 우석훈, [한미 FTA 관련 발언 비판] 투자자소송제도 청문회감

한미FTA를 충격과 적응 요법으로 부르면서, 지금처럼 버퍼가 약해진 상황에서는 양극화는 커녕 국민경제가 망하고 말거라는 주장... 국민경제의 충격완충장치가 얇아졌다... 호... 그럴듯한 주장이다.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날테고, 끝이 가까워졌는데... 보고 있으려니 불안하기만 하다.
> 뉴스 > 경제
나는 대통령의 인식과 다르다
[한미 FTA 관련 발언 비판] 투자자소송제도 청문회감
2007년 02월 28일 (수) 16:15:17 우석훈 / 성공회대 외래교수

"한미 FTA로 추가적인 양극화는 없다."

이것이 인터넷 신문협회의 합동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제시한 자신의 한미 FTA 인식인 것 같다. 명제로 전환하면, 이미 양극화는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힘이고, 이걸 BAU(Business-As-Usual. 당연한 현상)로 놓았을 때, 추가적인 것(additionality)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양극화'라는 요소는 대통령에게 일종의 기준선(baseline)이 되는 셈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얘기들을 전부 빼고 대통령이 표현한 '메카니즘'이라는 용어만 놓고 볼 때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4주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한국인터넷신문협회 소속16개사와 합동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청와대 브리핑)
 
질문자가 '양극화'라는 단어로 질문을 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질문자는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다고 물어보았는데, 대통령이 양극화라는 단어로 말머리를 풀었던 셈이다.

정리해보면, 양극화라는 현상은 존재하지만 어차피 한미 FTA로 인하여 추가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미국의 개방폭이 줄어든만큼 우리나라의 개방폭이 줄어들었고, 게다가 일본과 중국이 미국과의 FT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오지 않는 만큼 우리에게는 더 좋은 상황이다... 이 정도가 아닐까 한다.

1. 양극화만이 부작용은 아니다

이건 아주 나의 개인적인 편향 때문이지만, 나는 양극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양극화라는 용어를 썼던 것은 15년 전의 일인데, 수출산업과 내수시장에서의 재벌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라는 의미로 썼다. 그리고 중남미 경제와 아프리카 경제에 대해서 글을 쓸 때 수출을 하기 위한 커피나 플랜테이션 농장과 쌀과 같은 내수용 곡물 생산의 농업 분야에서 양극화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양극화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양극화가 문제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양극화는 통계적 현상일 뿐 본질 아니다

국민경제의 기본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의 결과로 양극화 같은 것들이 등장하게 되지만, 이것은 통계적인 '현상'이지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나의 졸저를 읽으신 분이 있다면 그곳에서 내가 양극화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아실 수 있을 것이다.

한미 FTA가 양극화를 가중시킬 것인가? 만약 '양극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분명히 그런데, 문제는 양극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시스템이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한미 FTA를 경제모델로 얘기한다면, 미국 경제와 한국 경제 사이의 관계가 워낙 포괄적이고 중층적이라서 현재의 정부 모델은 '충격과 적응(shock and adaptation)'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일단 충격을 주고, 그 충격을 버텨나가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혁신(innov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아주 상식적인 눈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 FTA를 보면, 이 적응 과정에서 무엇인가 벌어질 수 있다라는 것이 긍정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예전처럼 관세율이 20~30% 되던 시기에는 관세율 저하가 개방이 주요 변수가 된다. 그런데 미국 시장의 관세율은 2% 정도이기 때문에 한미 FTA는 관세율 협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8% 정도라서 실제로 이 정도 관세율은 농업의 아주 예민한 일부를 제외하면 개방해도 대체적으로 버틸 수 있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농업 부문의 충격이 큰 것은 평균 관세율이 8%라도 농산물에는 보호관세가 더 높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2% 관세율, 특히 우리나라가 미국에 수출하는 주력 품목들인 전자제품과 IT 관련 상품의 경우는 이보다 더 낮기 때문에 관세율 하락이 실물경제에서 그렇게 중요한 목표가 되기는 어렵다.

"그거라도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해보는 말이다. 원화와 달러화 사이의 교환비율인 원화환율의 분기별 등락폭도 이 관세율 폭보다는 크다. 정말로 한국 상품의 2% 경쟁력이 문제가 된다면, 1차적으로 경제당국이 해야할 일은 한미 FTA가 아니라 환율방어를 위한 거시경제의 종합적 운용이다. 물론 환율에 개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세계 10위권인 현재 한국경제 규모에서 2% 환율변동은 충분히 거시경제 운용목표 정도로 할 수 있는 범위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국민경제 운영 방안의 변화

쉽게 표현한다면, 전통적인 개방에 대한 한미 FTA에 대한 경제적 효과는 관세 효과는 아니다. 만약 정말로 그게 목표였다면 한미 FTA 보다 훨씬 쉽게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책수단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2%가 중요하다... 정말 이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경제주체가 하루에 5분씩 일을 더 하자면 된다. 이해영 교수가 계산한 것에 의하면 그 정도라고 한다(나는 이 계산은 안 해봤다). 5분씩 일을 더 하면 이 정도의 효과가 국민경제에서 발생한다.

개방해야 산다... 대통령도 주장하듯이 이미 거의 다 개방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를 특수부문들을 개방하는 것은 한미 FTA가 아니더라도 개별적으로 개방하면 된다. 농업의 일부가 남아있지만, WTO 개방에서 예외로 남은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국민들이 경제라고 알고 있는 것은 이미 다 개방되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한미 FTA의 실제 효과는 국민경제에 일시에 불어닥치는 '충격'의 효과를 갖는 것이다. 관세효과, 개방효과... 이런 것들은 개별적으로 따지면 미미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는가? 거시경제를 포함해서 개별 산업에 대한 운용방안과 복지에 대한 시각 그리고 노동과 자본의 관계와 같은 국민경제의 운용방안이 바뀌는 것이 가장 크다. 개별 시장에서의 소소한 - 그러나 농업에는 결정적인 - 변화와 함께 경제에 대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충격이 없다면? 그렇다면 뭐하러 한미 FTA를 하느냐는 문제가 정말 심각하게 남는다.

이런 적응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국민경제의 구조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충격을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 견뎌낼 수 있느냐 아니면 견뎌낼 수 없느냐가 사실이 한미 FTA의 관건이다. 양극화 같은 통계상의 지표는 이런 것에 의한 종속변수이다.

2. 국민들이 버텨낼 수 있는가?

"정부가 주도하는 '충격'을 국민들이 버틸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국민경제'가 버틸 수 있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이 사실상 한미 FTA 논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는 조금 다르다. '버퍼(buffer)'라고 하는 개념은 국민경제를 설명할 때 자주 쓰는 개념은 아니지만, 제3지대라고 표현하면 될 것 같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농업이 이 역할을 해왔고, 70년대에는 구로동으로 상징되는 수출기업들이, 그리고 80년대에는 중소기업이 그리고 IMF 경제위기 이후에는 자영업이 이러한 역할을 했다.

한미 FTA 논쟁의 두 가지 핵심

정 안되면 "뭐라도" 한다고 할 때 이 "뭐"가 바로 버퍼라고 할 수 있다. 충격이 닥치면 한 부문에서 대량의 실업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혹은 여러 분야에서 조금씩 나올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갈 데가 없다면 거시경제 지표가 괜찮아도 국민경제는 붕괴하게 된다. 예전의 '버퍼'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농사라도 지으면 된다"고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올 때에만 해도 평당 2만원 정도 하던 농지가 지금은 전국적 개발붐을 타고 어지간하면 10만원은 다 넘어갔고, 아산이나 원주 같이 비교적 서울에서 가까운 곳은 비교적 초기에 20만원을 다 넘어섰다. 접경지대인 철원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땅끝에 가까운 구례 같은 곳도 다 이 정도이다. "농사라도"가 아니다.

98년 환란 때에는 자영업이 '버퍼' 역할을 해줬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대한민국 경제라는 특별한 국민경제 시스템이 10년 전에 이미 중남미형으로 전환되었을 것이지만, 당시에 대량 발생한 정리해고 감원자들을 동네 구멍가게에서 빵가게 그리고 프랜치이징 업소까지 상당수를 흡수해줬다. 물론 개인들의 소득수준은 줄어들었고, 대기업에 종사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한심하겠지만, 길바닥에 나앉는 것보다 낫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한미 FTA로 인해서 매우 작거나 혹은 매우 큰 구조조정이 거의 전부문에서 조금씩 발생할텐데, 이걸 '대기실업자'라는 전체의 눈으로 보면 1차 충격기에 적지않게 발생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경제에 버퍼가 있는가?

대통령은 이걸 "우리 국민은 강하다"라고 표현한다. 물론 대기업 부장 정도 하다가 명퇴금 받고 식당할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이 강하기는 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문이 닫힌 상태이다.

외부 충격에 대한 완충 지역이 없다

예를 들면, '가정형 창업 기금'이나 혹은 소형 자영업에 대한 종합적 지원방안 같은 것들이 한미 FTA 추진과 함께 동시에 진행되었어야 할 일이다. 가난해도 뭔가 소득이 있다는 것과 국민경제 체계에서 아예 쫓겨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농업은 심각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기는 한데, 이 충격을 조금 분산시켜서 10년만에 망하는가 혹은 5년만에 망하는가 아니면 지금 망하는가가 해당 부문에서는 별 얘기가 아닐지 모르지만, 국민경제 전체에서는 그 시기가 중요하다.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고 나면 영화에서도 규모가 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일부와 '왕의 남자 시리즈' 일부가 버티겠지만, 전체 고용의 규모가 줄어들 것은 뻔하다. 여기에서도 대기실업자 일부가 발생하게 된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국내 시장에 결국 미국 승용차의 진출이 늘어나면 국내 조립라인에서 대기실업자가 발생하게 된다.

방송개방을 하고 나면, 가장 약한 고리, 즉 지금도 비정규직인 방송작가를 비롯해서 외주업체들 중심으로 대기실업자가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각 부문을 따져보면 한미 FTA 이후에 버틸 수 있는 산업과 농업을 중심으로 충격을 그대로 흡수할 산업들이 발생할 터인데, 원사 원산지 조항으로 인하여 섬유산업의 미국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지 않을 것이므로, 거의 대부분의 산업에서 약간씩 고용이 줄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갈 수 있는 버퍼는 지금 우리에게 아주 협소하고, 좁다.

"언젠가 올 충격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10년에 걸쳐서 종합적인 안목으로 시기를 조정하는 것과 한꺼번에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국민경제는 버텨낼지 몰라도 국민들은 지금 이 충격을 버티기가 어렵다. 이유는 '버퍼'에 해당하는 제3부문이 국민경제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실적 대안은 이민밖에 없다? 

   
  ▲ (사진=청와대 브리핑)
 
현실적으로 이러한 버퍼는 '이민' 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 있는가? 그래서 대통령이 강하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그 국민들 중 상당수가 지금 이민을 검토하고 있고, 진짜로 문이 열린다면 나가겠다고 마음을 먹는 중이다.

국민들은 충성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개인들은 대통령 말대로 '현명'하다. 국민경제라는 눈을 버리고 나면, 대통령이 흐믓하게 바라보는 바로 그 "국민들" 중 상당수는 "이민 밖에는 답이 없다"고 고민하는 중이다. 아닌가? 20대의 절반 이상이 이민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국민들은 한미 FTA 충격을 못 버텨낸다.

다만 이민이 무서운 것은 "양질의 중산층"이 주로 이 방법을 선택할 것이라는 점이다. 멕시코의 경우는 저소득층이 미국 국경을 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다로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중산층이 비행기 티켓을 들고 자식들의 손을 잡고 인천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부문별로 구조조정과 산업간 조정 시기를 조절하면서 하지 않고, 외부 충격에 의하여 일시에 한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

"기왕 할 것이라면 한 번에 하면 좋지 않겠는가?"

기왕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어설픈 방식으로 임기 내에 기반을 만든다고 하면, 비록 그 방향이 좋더라도 그 충격파를 일시에 지금의 '버퍼없는 국민경제'라고 하는 한국 경제가 버텨내기가 어렵다.

3. 국민경제는 버텨낼 수 있는가?

투자자 직접 소송제는 아직도 신비에 쌓여있는 모호한 제도이다. 이것은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의 권력과 국민경제라는 모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를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힘의 관계이다.

나는 "모든 집합을 포함하는 부분 집합"이라는 버트렌드 러셀의 역설로 이 제도를 설명하고 싶다.

한미 FTA를 지금 형태로 그리고 대통령 집권 내에 한다고 하더라도, 제발이지 이것 하나만큼은 뺀다면 국민경제에 대한 논의를 비로소 할 수 있게 된다. 멕시코와 캐나다가 진짜로 당하게 된 제도가 이 제도이다. 호주는 이 문제를 호주와 미국 정부가 추천하는 패널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으로 유일하게 이 문제의 해법을 제시한 경우이다.

부동산, 환경, 노동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모든 공공정책과 정부의 정책 전부가 이 제도 하나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게 된다. 세계 10위의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기 때문에 이 제도가 더 무서운 것이다. 어려운 국민경제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정부와 노동자가 그야말로 피땀으로 지난 50년간 만든 '알토란' 같은 실체들이 존재한다.

이 실체가 없다면 한미 FTA는 무서울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투자자 직접소송제 받아들이면 임기 후 청문회 설 것

한미 FTA의 최후 마지노선은 개성공단도, 쌀시장 방어도,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과 덤핑관세로부터 수출시장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투자자직접소송제이다.

대통령이 변호사 출신이라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이걸 다음 정부에게 '업적'으로 넘겨준다면 다음 정부는 누가 되더라도 임기 내내 미국의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소송 아닌 소송에 시달리게 된다.

국민경제의 효과분석 시나리오를 구성할 때, 이 제도가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두 가지의 결과가 너무 다를 것이다. 이 제도라도 뺀다면 비로소 우리나라 경제가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 분석이 가능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충격파의 범위가 가늠하기 어려워서 어떤 경제학자라도 신빙성 있는 기술적 분석을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캐나다 경우의 연장선에서 우리나라 우체국 택배에서 정부가 철수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충격을 가늠하기 어렵다. 하나로 마트는 정부의 보조금이 들어가므로 철수해야 한다. 농협과 농업에 미치는 영향만 큰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식생활의 패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방과 후 옥상'이라고 가끔 사람들이 농담하는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학교를 중심으로 사교육을 흡수하고자 하는 일련의 프로그램들 역시 미국 사설업체가 영어학원에 진출하기로 생각하는 순간 국가 프로그램 전체가 소송 대상이 된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프로그램도 전체적으로 소송 대상에 놓이게 되고, 심지어 양도소득세도 미국 건설업체가 국내에 진출하는 순간에 "부당하게 거래를 제약"하는 소송 대상일뿐인 정책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뿐인가? 마포의 당인리 화력발전부터 분당의 지역난방공사와 화력발전소에 이르기까지 부당하게 "청정연료"를 강요해서 경제성 있는 벙커 C유를 미국 발전업체가 사용할 수 없게 한다고 하면?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울산 지역에 부과한 대기보전특별대책지역 정책으로 인해서 미국 업체가 연료사용과 '정상적인 생산활동'에 받게 된 손실에 대해서 정부가 보상을 해야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은가?

장담하건데, 5년 내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정부가 물어주는 배상금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 국민세금인데, 미국발 다국적기업들에게 이런 돈들 물어주라고 지금 죽어라고 국민들이 세금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투자자직접소송제를 그대로 두고 "가능한 시나리오를 전부 검토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청문회로 스타가 된 대통령이지만, 이 제도를 그대로 두면 장담컨데 임기 후에 반드시 청문회장에 서게 된다.

공무원들도 청문회 자료 준비하고 있다?

공무원들? 외교부를 제외하면 법무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정부 부처가 이 제도에 대해서 이의 혹은 반대의견을 제출했다는 증거를 확보하는 중이다. 왜냐고? 그들도 나중에 청문회에 서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근거자료를 만드는 중이다. 지금 이 근거자료를 만들지 않는 유일한 정부 부처는 외교부와 청와대 밖에 없다.

3년 후를 상상해보자. "대통령은 왜 그때 그 건의를 무시했는가요?" 이 질문이 나오게 될 것이다.

전두환은 청문회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쏟아지는 욕설을 참아냈다. 장세동을 비롯한 측근들이 전부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고, 광주의 발포는 결국 최종명령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투자자직접소송제는 누가 받아들이도록 했는가요?" 외교부는 대통령의 지시였다고 할 것이고, 다른 모든 부처들은 "우리는 반대했다"고 할 것이다.

현재 상태로는 임기 후에 한미 FTA는 분명히 청문회에 올라가게 될 것인데, 만약 투자자직접소송제를 현 정부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 분과가 열리게 된다면, 이건 온전히 "대통령 지시사항"이 될 것이다. 물론 다른 공개되지 않는 것들의 일부도 청문회에서 공개될 것이지만, 1차로 대통령이 코너에 몰리게 될 것이 바로 이 제도이다.

국민경제도 못 버티지만, 대통령도 못 버틴다. 대통령이 못 버틸 것에 대해서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국민경제가 못 버틸 것에 대해서는 걱정이 앞선다.

   
 
 
4. 어떤 메카니즘으로 양극화가 발생하는가?

"충격과 적응" 모델은 원래 기업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국민경제에는 이런 모델 안 쓴다. 한미 FTA를 통해서 협상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몇 업종만이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직접소송제는 전 부문에 충격을 주고, 예기치 않는 소송 대상이 될 전 정책과 전 부문에 충격을 준다.

지금 정부기관과 정부출연기관에서 하는 모든 경제활동과 기금 그리고 허가사항 전 부문이 그 대상이 된다. 첫 소송 사례가 2년 후에 나올지 3년 후에 나올지를 현실적으로 가늠하기는 어렵다. 하나마나한 기금들에는 소송이 없겠지만, 지금 국민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다양한 제도들이 만약 실효성이 있다면, 거꾸로 미국 기업들에게는 불리한 것이 된다.

한미 FTA 투자 부문 조항 한 페이지 혹은 어렵다면 '투자자'와 소송범위에 대해서 몇 조항만 바꾸더라도 지금보다 상황은 훨씬 나아질 것이지만, "우린 할만큼 했다"고 지금처럼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시장과 국민 사이에서 중재를 섰던 독특한 국민경제 모델의 밑바닥이 그냥 붕괴하게 된다.

농업은 어차피 망하는 것 아니냐... 농업의 문제가 아니다.

개방은 어차피 해야하는 것 아니냐...

누가 반대한 적 있나? 다만 투자자직접소송제를 포함한 몇 개의 제도들은 시급히 손질해야 하고, 그러한 충격을 국민과 국민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보완제도들을 지금 만들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한미 FTA로 인한 양극화 메카니즘은 이렇다.

내가 생각하는 한미 FTA와 양극화 메카니즘

'정부 주도' 시장으로 출발한 유신경제가 IMF 경제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정부 매개' 시장으로 바뀌었다가, 노무현 경제 시절에 완벽하게 '정부 토목경제' 시장으로 전환되어 무정부 상태를 거치다가, 결국 한미 FTA로 붕괴하게 된다...

한미 FTA로 인한 긍정적 효과는 없는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대통령이 지금부터 삼성, 현대, LG를 포함한 재벌사를 포함해 노동계 각 부문, 농업계 각 부문 그리고 사립학교와 국립학교 등 우리나라 경제의 전 부문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중에서 자신이 한미 FTA로 이익을 볼 것이라고 전망하는 부문이 있을까?

삼성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서 양극화를 걱정하고, 현대자동차도 이미 공장은 미국으로 이전했고, 국내 시장만 내어주게 생겼다고 하는 이 마당에 도대체 누가 이익을 본다는 얘기인지 모르겠다.

손해는 직접적이고, 이익은 간접적이라고? 그런 협상을 뭐하러 하나? 이익은 직접적이고, 손해가 간접적인 것들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2% 관세철폐를 위해서 8% 국내 관세를 내어주는 것이 직접 효과인데, 간접효과는 투자자직접소송제를 포함해서 대체적으로 무한대의 피해가 예상되는 것이 내 눈에 비친 한미 FTA이다.

국정홍보처의 그녀는 오늘도 "무한대의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무한대가 아니라 1,700조짜리 시장이다. 우리나라 국민경제는 대충 900조짜리 시장이다. 저 쪽에 무한대의 시장이 열린다면, 이쪽에 무한대의 피해가 열린다. 투자자직접소송제 때문에 그렇다.

국민경제 양극화는 발생하지 않는다. 국민경제 붕괴가 발생하기 때문에, 붕괴로 향하는 단일한 흐름이 발생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5. 누가 제일 큰 피해를 보는가?

정부에서 전혀 검토하지 않은 것들은 투자자직접소송제 외에도 많지만, 정말로 해보지 않은 중요한 일들이 존재한다.

세대간 형평성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세대간 분배라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한미 FTA가 50대, 40대, 30대 그리고 20대에 미칠 영향들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하지 않은 것 같다. 균일하게 영향을 미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미 FTA와 세대별 영향

이미 정규직 체계에 편입된 40대와 30대 그리고 은퇴를 앞두고 있는 50대에 비해서, 아직 정규직 체계는 물론이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편입되지 않은 20대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대통령은 한미 FTA를 해야 청년실업이 구제된다고 말했다. 이건 희망사항이겠지만, 그 구체적 메카니즘이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미 FTA는 지금의 노동시장 악화를 통해서 20대를 강타할 것 같은데, 거꾸로 이게 청년실업의 해결책이라고 하는데, 알다가도 모르겠다.

의학계와 법률은 개방에서 제외될 것 같은데, 그럼 전부 의사와 변호사를 하면 된다는 말인가? 버퍼 없는 국민경제에서 대부분의 전통 부문이 몰락하는데, 대통령이 생각하는 서비스업은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가?

졸저의 결론 한 부분을 인용하고 싶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방식과 일정 그대로 한미 FTA 협상이 종료하고 나면, 길거리에서 인사하는 일을 생계수단으로 가지게 될 젊은이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은 물론 미풍양속이지만, 인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는 '서비스'는 약간 개선될지 몰라도 잘 사는 사회가 되기는 만무하다." (졸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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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고종석의 연재칼럼이 마무리되면서 어제 읽어본 수요일자 한국일보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그런저런 기사들은 인터넷에서도 읽을 수 있기에). 그간에 목요일자 신문은 주로 경향신문을 봐온 터에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우리시대의 명저50'은 목요일에 연재되는 모양이다.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가 다루어진 걸 보고 편의점에서 가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왔다. 글쓰기는 온라인 공간을 많이 활용하는 편이지만 나는 사실 'e-북'이나 'e-저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그런 경우에도 대개는 프린트해서 읽는다. 물론 서비스되는 거야 편리하고 또 고마운 일이지만) '신문지 세대'이다. 보관상의 난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긴 하지만 글/책은 '만질 수 있어야' 제맛이고 제격이다(그러니까 눈으로 본다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안 그래도 필요 때문에 한국문학사, 특히 현대문학사를 다룬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시대의 명저' <한국문학사>는 내 경우 박스보관도서이다(거의 징크스가 되고 있는데, 박스에 집어넣은 책이나 주제에 대해서만 강의나 일거리를 맡게 된다.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 책들 가운데는 '일없이' 놀고 있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자니 멋쩍고, 다시 구매하자니 부담스럽다. 책보다 비싼 건 책을 꽂아놓을 공간이다. 그나마 이런 류의 기사는 온라인에 보관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한국일보(07. 03. 01) [우리 시대의 명저 50] <9> 김윤식·김현 공저 '한국문학사'

모자이크화는 작고도 이질적인 단위의 점으로 구성돼 있다. 감상자의 시야가 넓어질수록 그 화소(畵素)들은 한 편의 그림에 충실히 복무한다.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한국문학사>(민음사)는 견실한 모자이크화다. 김윤식과 김현이라는 빼어난 화가들이 함께 모사해 낸 한국 문학 전도(全圖)다. 그 두 사람이 각각 어느 대목을 서술했는지, 절(節) 단위까지 서문에 명시돼 있긴 하다. 그러나 독자는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두 사람이 교직해 가며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우리 학술사가 일궈낸 아름다운 풍경이다.

1973년 1판이 선보인 뒤 96년 29쇄로 1판은 마감하고, 다시 그 해에 개정판의 시대로 돌입했다. 여느 개정 작업처럼 내용에 대한 수정이 아니라, 한문 투의 문장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이었다. ‘초판이 곧 정본’이라는 완벽주의적 신념 혹은 염결성(廉潔性) 덕에 책은 전국 대학의 국문과 120여 곳에서 여전히 교재로 쓰이는 등 그 의미를 확인해 왔다. 임화 -백철 - 박영희 - 조연현 등 선구적 학자들의 맥을 잇되, 여전히 현장 교육에서 애용된다는 점에서 새삼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책은 대단한 자의식, 또는 자긍심의 소산이다. 우리 역사의 운명 혹은 질곡이었던 주변 문화성을 문학적으로 극복한다는 목적의 소산이었다. 한국 문학사 고유의 개별적 추진력을 모색하는 한편 한국 근대사의 추진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철학적 면에서 바라보자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자칫 생각만 웃자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수많은 토론과 세미나가 빈 틈을 촘촘히 메워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굳건한 합치점 덕택이었다. 문학사란 역사와 다르게 예외적 개인에 관심을 쏟지만, 결국 당대 특정 계급의 무의식적 기반을 보여주는 상상적ㆍ풍속적 전거라는 것이다.

책은 서세동점의 위기의식이 그와 짝을 이루던 당시, 의식을 혁파하고자 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김삿갓의 시를 통해 혁명까지 나아가지 못한 그들의 한계부터 논한다. 권력 구조의 밖에 서 있는 지식인의 쓰디쓴 자기 반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직접적으로는 19세기말 조선이 서구의 충격에 의해 국가 상실의 위기에 직면할 때, 부자 중심의 가족 관계가 역기능일 따름이었으며, 이후 이광수의 자유연애론과 이상의 가족 콤플렉스 등으로 연결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적극적 의미가 있다면 시조, 판소리, 가면극 등 민중적 예술 양식이었다. 개화기의 표면적 혹은 포괄적 현상을 풍속 혹은 유행의 차원에서 가장 잘 드러낸 양식, 연극은 그 적자였다.

책의 문제 의식은 철저하다. 난세 혹은 전환기에서 진정한 역량은 어디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권의 말단 주변인가 혹은 중간 문화권인가 하는 논란, 문화 수용에서 나타나는 엘리트와 민중 간의 편차 등 역사의 동인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이 문학 작품의 형식을 통해 간단 없이 확인된다.

유길준이 탁월한 언어 감각에도 불구, 국한문 혼용체에 머문 것은 신분 사상과 평등 사상이 공존해 있었던 내적 갈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 역사 의식이 결여돼 있던 이광수는 작품상에서 혁신적 개념과 보수적 사고 관례가 무반성적으로 공서(共棲)하는 우를 피하지 못했다. 소월은 창가 리듬에서 벗어나 새 운율을 찾는 노력을 보여주었으나, 절대에의 탐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민요 이상이 되지 못했다.

개인과 사회를 발견한 것은 염상섭 최서해 김동인 현진건에 이르러서 였다. 서울 중류 계급의 어휘량. 중인층의 현실 감각을 섬세하게 용해한 염상섭은 계급 해방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조선적인 것의 탐구(궁극적으로는 해방)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묘사는 한국 소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탁월하며, 특히 <삼대>는 채만식의 <태평천하>와 함께 식민치하 작품 중 최상급에 속한다. 자신은 개량주의적 입장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다같이 흡수하려 했지만, 그러한 태도가 실제 문학화 하지 못한 점은 염상섭의 유일한 한계다. 이와 반대로 김동인은 계급 문학이 있다면 계급 빵, 계급 음료수도 있는 것이냐며 치기 어린 절규를 해보았지만 퇴폐적 정서로 자신의 이상주의를 오염시키고 말았다.

한편 이상은 ‘태도의 희극’이라는 문학적 주제를 극한에 이르기까지 몰고 간 식민지 시대 유일의 작가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 체계, 그 금기 체계 내에서 생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상인들을 그는 다같이 부정했다. 그의 주인공들은 결사적인 자기 폐쇄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무리 폐쇄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는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잔인한 관계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은 부정적인 자기 폐쇄를 통해 정당하게 사회와의 통로를 차단당한 인간의 파산을 여실히 보여준다.

격한 직설체, 센티멘털한 열정의 작가 임화는 한국 문학사를 서구 문학이나 일본 문학과의 연관 아래 비교문학적으로 다루려 했으나 방법적으로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이상 채만식 박태원 김유정 같은 탁월한 작가들은 현실과의 치열한 투쟁을 작품화했고 이태준 김남천 등은 페이소스, 시니시즘, 유머 등의 수단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박태원이, 식민 치하의 가난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자유 연애를 은근히 주장하는 것은 서울 서민층의 폐쇄성과 칩거성을 그것으로나마 극복해 보려는 조그만 의지의 소산으로 읽힌다. 단, 콤마의 적절한 사용으로 감각적 탄력성을 획득했다는 점, 지적인 재치와 심리주의로 요약되는 다양한 실험 정신은 높이 살만한 작가다.

한국어 훈련이란 관점에서 주목되는 시인들이 있다.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해 본 한국 최초의 시인 정지용, 일제 식민 치하 후반기에 민족주의적 시를 당당히 쓴 ‘기적’을 보여준 윤동주, 일본 리듬인 7ㆍ5조로 기울기 일쑤인 정형시를 새 차원으로 격상해 시조를 현대시의 한 장르로 확고히 자리잡게 한 이병기, 시에 회화성을 도입해 끝까지 밀고 간 김광균, 자폐적 리리시즘의 김영랑 등.

해방 공간과 그 이후의 한국 소설은 만주의 대서사시를 쓴 안수길, 낭만주의적 현실 인식의 황순원, 휴머니즘의 기수 김동리, 도회 취미를 띤 과장적 자기 고백의 손창섭, 뿌리 뽑힌 인간을 탐구한 소외 문학의 최인훈 등으로 요약된다.

시로는 진실 탐구로서의 언어와 불교적 인생관을 천착한 서정주, 메시아를 열망한 박두진, 무의미의 미학을 추구한 김춘수, 소시민의 자기 확인과 항의의 김수영. 소멸의 시학을 추구한 고은, 실험의 작가 박목월 등을 주목한다.

조선조 후기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한국 문학을 조감한 책의 말미. 책은 해방 공간의 이데올로기 문제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다시 상기시키고, 대미 관계와 4ㆍ19의 재해석, 작가들의 전기 연구, 나아가 지성사와 병행하는 문학 연구를 갈망하며 화룡점정에 대신한다.(장병욱 기자)

"내가 지금 읽어봐도 명문이네. (지금껏 판을 바꿔 오면서도) 한 자도 안 고쳤네…." 서문을 읽어 가던 김윤식(71ㆍ서울대 명예 교수) 씨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웃음기가 감돈다. 34년 세월을 변함없이 이어 온 초판의 서문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 시대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비장미마저 감돈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백수(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 작업에서 국사ㆍ국문학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어요. 독립 운동한다는 심정이었으니까." 당시 김현씨와 밤 새가며 토론했던 문건이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던 양안(量案ㆍ토지 대장)이었다. 사조나 문단의 흐름이 아니라 사회경제사에 토대를 둔 '과학적 문학사'라는, 미증유의 길은 그렇게 트였다.

"이 책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에요.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고찰이 없다는 게 최대의 약점이랄 수 있을 정도로." 일제와 미군정하 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와, 4ㆍ19 세대인 김현에게 근대화라는 화두는 지고의 이슈였다. 시대 정신에 충실했던 책에 대한 수요는 출간 2, 3년 만에 급상승했다.

내용뿐 아니라, 인세도 한 해씩 번갈아 지급 받을 정도로 이 책을 정확히 공동 소유하는 김현씨. 집필 당시 그와 함께 펼쳤던 풍경은 우리 지성사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연구실, 술집 가리지 않고 벌어졌던 토론이었죠. 문학은 물론 경제학, 사회학자들까지 참석했던."

그러나 책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 김현의 부재는 그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 "후배지만 배울 게 많았어요. 아주 작은 원고지에다 늘 글을 쓰고 있었죠. 풍부한 인간성에, 섬세하면서 자상했었는데…." 공조자 김현은 그의 의식 속에 현존하는 듯 했다. "지금껏 얘기들은 김현의 말이 빠진, 내 개인의 생각이므로 부분에 불과해요. 사실 나로서도 그의 의견이 매우 궁금합니다."

김윤식

1936년 경남 진영 출생, 서울대 국어과 졸업
1975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2001년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
주요 저작 <한국 근대 문예 비평사 연구>, <한국 근대 문학 사상사>, <황홀경의 사상> 등

김현

1942년 전남 진도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86년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
1990년 작고
주요 저작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 <시인을 찾아서>, <한국 문학의 위상>,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 등

07. 03. 01.

P.S. 마침 오늘이 3.1절이어서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 작업에서 국사ㆍ국문학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어요. 독립 운동한다는 심정이었으니까."라는 멘트가 인상적이다(오래전 강의실에서 자주 듣던 회고조의 말씀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사>의 초판이 나오던 시점에(도서관소장본은 1974년판이다) 두 저자는 30대 중반의 '청년' 국문학자와 불문학자였다. 누군가 현대는 '에피고넨의 시대'라고도 불렀지만 그만한 패기와 열정으로 무장된 '청년들'을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조숙한 원로들은 차고 넘친다). 인류의 지성은 혹 진화하는지 모르겠지만(적어도 축적되는지 모르겠지만) 패기/열정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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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8) : 도올과 허혁

저녁 약속이 있어서 집사람까지 해서 셋이 식당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도올의 요한복음 강연" 이야기가 나왔다. 그 강연에서 도올이 뭐라뭐라 말한 것에 대해 보수 기독교 단체 쪽에서 이의를 제기했고, 또 거기에 대해 오늘자 신문에 한신대 김경재 교수가 일종의 중재인지 평가인지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집사람은 김용옥이 비록 신학자는 아니지만, 양식비평이라는 성서 해석학의 한 분야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웠을 사람이니, 한국 보수 교단의 어설픈 논리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로 이야기했다. 아닌 게 아니라, <논어>나 <노자>나 요한복음 강의로 인해 전국민적인 명사가 되기 이전의 도올, 그러니까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와 <절차탁마 대기만성>의 저자 도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뒤의 책은 얼핏 보기에는 "동양학" 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독교에 대한 도올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해 놓은 것이며, 그 책에서 도올이 내세우는 자신의 "한문해석학"이란 것이야말로 실제로는 불트만의 "성서해석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책의 제2부는 "독서법과 판본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본 기독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내게는 영지주의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던 글로 더욱 인상적이었고, 이 글의 말미에 "예수는 무당이라"고 주장해서 무식한 보수 기독교 단체 측에서 일종의 "테러"(?) 시도까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어쩌면 기독교에 관한 도올의 입장이랄까, 견해랄까 하는 것은 이 책을 참조하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이른바 보수 기독교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마귀 사탄"과 동일시되는 인물인데, 사실 기독교 신학사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인물이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를 꼽는다면 아마 수위 다툼을 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다. 그의 성서 해석학은 그 "과격함" 때문에 보수 신학자들이나 십일조 강요하는 무식한 목사들, 그리고 무지몽매한 일반 신도들(흔히 말해서 웬만한 젊은 목사나 전도사들을 "찜쪄먹는" 할머니 권사님들) 모두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미움을 받지만, 사실 신학도 학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토록 "과격하다"는 평가를 들을 만한 그의 학문적 태도야말로 성서를 대하는 가장 "정직한" 태도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 불트만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그가 과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성실성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적 성실성을 어떻게 조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무식한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는 성서의 권위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성서란 축자영감도 절대권위도 아닌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소스로부터 "편집"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성서의 "일점일획"까지도 고스란히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는 무식한 기독교를 숭앙하는 사람들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학문적으로야 나무랄 데 없는 주장이고, 실제로도 우리나라에서 신학 하는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한 번씩은 들춰봐야 할 책의 저자이지만(하긴 그의 책은 좀 많이 번역되었던가!) 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신앙" 적인 측면에서는 독약과도 같은 인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천하의 "불트만"조차도 우리나라에서는 졸지에 "마귀사탄"으로 여겨지는 셈인데, 여기서 가장 크게 손해를 본 사람은 아마도 그의 동포인 또 다른 신학자 "몰트만"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불트만과 몰트만의 생각이나 주장은 크게 달랐지만, 꽤 오래 전부터 단지 이름이 비슷한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불트만인지 몰트만인지"라는 식으로 나란히 매도당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불트만과 도올,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다리" 노릇을 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혁이다. 허혁이란 사람은 아마 기독교인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신학에 대해 관심이 있고, 그중에서도 교회 권사님들이 무척 싫어하는 "자유주의 신학" 쪽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불트만인지 몰트만인지"로 대표되는 양식비평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야 그의 이름을 알듯 말듯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나온 불트만의 책은 거의 모두가 허혁의 번역이고, 우리에게는 "밀림의 성자"로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천재 신학자이기도 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대작 <예수의 생애 연구사> 역시 허혁의 번역이다. 생전에 이런저런 논문을 발표했는지 모르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없는 듯하고, 말년에 제자들이 일종의 기념문집이랄까 하는 것을 한 권 펴냈는데, 두껍긴 하지만 번역 말고 평생 쓴 것이 그 정도라면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다. 오히려 허혁이란 이름은 불트만, 슈바이처, 로핑크, 예레미아스, 본회퍼 등의 이름과 나란히 기억되고, 문장이 아주 유려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번역은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통용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그 분야에 있어서는 한국 내에서 가장 독보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불트만의 책을 통해 허혁과 만나게 되었는데, 정작 허혁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거꾸로 도올 때문이었다. 도올의 큰형인 김용준의 글 모음인 <사람의 과학>이란 책을 보면 서문에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도올의 발문이 붙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좀 길지만 매우 흥미로운 일화이기 때문에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

  • 내가 다녔던 보성중, 고등학교에는 서원출이라는 걸출한 교장의 리더십 때문에 당대 보기드문 석학들이 교사로 은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쯤인가? 우리 보성학교로 키가 껑충 크고 허우대가 멀쑥한 독일어 선생님 한 분이 새로 오셨다. 그는 상초가 심히 발달하여 몸무게의 중심이 몽땅 어깨로 이동하여 있는 느낌이었다. 키가 큰 반면 어깨는 앞으로 굽어 있었고, 두상은 백운대의 바위만큼이나 큰데 머리는 헝크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고난의 성상이 서린 좀 신성한 기운이 감돌았다. 귀밑에는 석학의 회색빈발이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주었으나, 두 눈은 썩은 동태눈처럼 맥아리없이 저 먼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의 느낌은 한없이 착하게 보였고,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심오한 프로페조르의 느낌을 주었다. 그의 이름은 허혁이었다. 그가 독일의 뮌스터 대학에서 박사를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박사까지 한 사람이 고등학교에 와서 독일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좀 이해가 가기 힘들었다. 허나 독일에서 온 독일어 선생이라는 신선한 충격은 당시 보성의 학우들에게는 커다란 화제였다. 허나 허혁은 매우 졸린 사람이었다. 말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퍽 씨알맹이 있는 얘기가 많은데, 그것을 매우 졸리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독일 얘기를 하거나 독일어 교과서에 나오는 일화에 얽힌 얘기를 할 때도 뭔가 고등학교 선생에게서는 들어보기 힘든 심오하고 매서운 언사가 툭툭 던져지곤 하는데, 매우 졸린 분위기를 깔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민주적인 사람이래서 통솔력이 없었다. 주변의 기를 압도하는 허세나 과장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독일어 시간은 아이들이 졸고 떠드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순한 것 같아도, 그의 말 속에는 항상 단호함과 지적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매우 난처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고 1 2학기 때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 "선생님은 겨우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실려고 그 어려운 독일유학을 하셨습니까? 무언가 선생님이 공부하신 것에 비해 지금 하시고 계신 일이 너무 시시한 것이 아닙니까?"
  • 나는 지난 일이지만 이 나의 질문을 명료하게 한 자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허혁 선생은 이러한 나의 질문에 뚜렷한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맨 앞줄에 앉어있는 (2번인가? 3번인가?) 나를 꿰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난처한 몸짓으로 빙그레 미소를 짓고 말아버렸다. 넌 아직 나를 알 수 없는데, 내가 무엇을 변명하리요? 하는 눈치였다. 나는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 허혁 선생은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교단에서 배척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교계나 학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공이 또 큰 문제였다. 허혁 선생은 불트만을 전공했는데, 불트만이야말로 당대 교단에서는 최대의 이단자였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화적 허구 속에 안주하기를 희망했던 당대 교계의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의 존재의 근원을 허물어버리는 매우 무서운 이단의 칼날이었다. 그러저러한 연유로 허혁 선생은 교단이나 신학계로 복귀를 못하고 독일어 선생이라는 간판을 잠시 빌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완벽히 불트만의 해석에만 몰두하는 완벽한 학자였다. 학문의 전일성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허혁만한 인물을 만난 적이 없다. (40-42쪽)

이후 허혁은 감신대 교수가 되어 학교를 떠났지만, 도올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허혁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허혁은 성실한 답장을 써 보내주었고, 도올은 허혁으로부터 받은 여러 통의 답장을 근거로 삼아 부모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 나는 이 석학의 편지들을 우리 부모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나의 신학대학 행이 결코 우발적 발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 돌팔이 목사가 되어 신도 돈 긁어 떼쳐먹고 사는 주님 종 노릇 할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분히 설득해 들어갔다. 그리고 허혁 선생의 연루로 부모님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단계에서 나는 큰형의 중재를 요청했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허혁 선생이 대변할 수 있으니깐 큰형이 허혁 선생을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큰형은 나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큰형 자신이 불트만 신학에 감명을 받고 있었던 터이라 허혁 박사를 만나고 싶어 했다.(큰형은 미국 유학 시절에 Jesus Christ and Mythology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라는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미국에 가자마자 이 책을 사서 읽었다.)
  • 과학자 김용준과 신학자 허혁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나를 매체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 나는 이듬해 한국신학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또 부모님의 축복을 받았다. 그렇게 어렵게 따낸 한국신학대학 입학이었지만 결국 나는 일 년 후에 신학대학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것도 순전히 자발적 의사에 의하여. 그리고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로 다시 입학한다. 내가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 큰형은 고려대학교에서 명강의를 하고 있었던 교수였다. 그리고 그는 고려대학교 기독교 학생회의 지도교수였다. 고려대학교 지금 학생회관과 홍보관 사이에 즐비하게 펼쳐져 있었던 당시의 판자촌 학생 써클실에는 지도교수인 김용"준"과 기독교 학생회 회원인 고려대학생 김용옥이 같이 앉어있었다. 바이블 클라스였다. 그 바이블클라스에는 허혁 박사가 불트만의 <신약성서신학>을 독일어로 강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큰형과 나 도올 김용옥이 살아간 인생의 한 단면이었다. (43-44쪽)

이후 허혁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신학과"가 아니다)로 자리를 옮겨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신학대학이 아닌 일반대학에, 그것도 여자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실제보다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그가 감신대나 한신대 같은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신학교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지금쯤은 작지만 버젓한 "허트만" (허혁의 별명이었다고) 학파가 하나 생겨났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대학의 경우에는 신학을 전공해도 교계로 진출하기가 어렵고 (가령 지금 연세대나 이화여대 같은 일반대학의 신학/기독교학 전공자들도 교계로 진출하려면 특정 교단 산하의 대학원을 나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유주의" 교단을 찾는 수밖에 없으니까) 더군다나 여자대학의 경우에는 제자를 배출하기도 쉽지 않았을테니 말이다.(물론 여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혁이 활동하던 시대에만 해도 우리나라처럼 남성위주로 된 사회에서, 그것도 신학이라는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은 여성신학이라는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쉽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나마 이화여대 정도 역량이 되었으니 허혁 같은 "내놓은 이단자"조차도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허혁 선생은 1990년대 중반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물론 나도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은 없다. 이제 와서는 기억하는 사람도 아주 없어지나 싶었는데, 어쩌면 도올이 이번에 요한복음을 이야기하면서 혹시나 허혁을 뒤늦게라도 유명인사로 만들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옛 기억이 떠올라 끄적여 보았다. 혹시나 도올의 강연 때문에 새삼스레 불트만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와중에 허혁이라는 이름(두 글자니까 쉽기도 하다)을 기억해 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겠다.

사실 불트만은 그렇게 읽기 쉬운 저자는 아니다. 일단은 기독교를 충분히 알아야 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를 충분히 "내던질" 또는 객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어쩌면 "때가 무르익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런저런 고민 많던 시절에 불트만의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를 읽고 그야말로 "짜릿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니까.) 그렇지 않고 여전히 "무식이 자랑"인 우리나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마인드로 읽어보면 불트만은 여전히 "사탄마귀"에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신앙은 제대로 된 지식에서 나온다. 나야 솔직히 도올의 "굿판"에는 질릴 대로 질린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덕분에 뭔가 신선한 충격을 받을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물론 그거,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일 거다. 도올이 언제는 뭐 신선한 이야기 한 적 있었나. 자기도 다 여기저기서 듣고 보고 배운 거지.)

 

 

 

*** 도올은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할 말은 많은데 참으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내가 좋아하던 도올은 <동양학> 시절의 도올이지 <노자>나 <논어> 시절의 도올은 아니다. 도올은 80년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90년대 내내 갈팡질팡하다가, 00년대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엔터테이너"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라 아쉽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용두사미"라고 할 수 있는데 뭔가 거창하고도 대단하고도 훌륭한 것을 내놓을 것처럼 폼은 엄청나게 잡지만 막상 이룬 것은 거의 없다.(항상 "다음에 쓰겠다"고 해놓고 소식이 없다.) 또 한편으로는 대만대학, 동경대학, 심지어 하바드대학의 졸업장까지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서울대" 졸업장이 없다는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컴플렉스를 과시하는 특이한 인물이면서(하긴 그 기묘한 컴플렉스야말로 그가 벌이는 온갖 일의 원동력인지 모르지만), 대학교수도 마다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문기자는 자청하고 들어가기까지 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말빨 하나는 탁월하고, 그건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요즘의 이런저런 "허섭스레기" 교양서 저자들과 다른 까닭은 비록 주워들은 이야기나마 아는 게 무척 "많다"는 점이다. 솔직히 나는 <동양학>을 꽤 오랫동안 들춰보고 또 들춰보았는데, 하도 여기저기 손 안 댄 것 없이 아는 척을 해 놓아서 그런지 나중에 펼쳐보고 또 펼쳐볼수록 재미가 있었다.(나중에는 아예 본문은 안 읽고 각주 --- 그것도 본문 못지 않게 길고 자빠졌다 --- 만 골라 읽으며 킥킥거리기도 했다.) 솔직히 요즘 나오는 온갖 "허섭"한 교양서들은 도올 책의 "각주"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정보의 양이나 질은 물론이고, 문장력도 그만큼이 되지 못한다. 도올의 한 가지 칭찬할 만한 점은 괜히 이것저것 갖다 늘어놓아 정신을 쏙 빼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알맹이 없이 구라로만 책 한 권을 때우려는 잔머리를 굴리지는 않는다는 점이고, 가끔은 그런 구라조차도 꽤나 재미있다. 다만 현실인식이랄까 하는 점에는 망통인 것이, 과거 <도올세설>에서 노태우 앞에 알랑방귀 뀌었던 글이 얼마 전에 재발굴(?)되어 망신살이 뻗치고, 베스트셀러인 <대화>에서 김우중을 "군자" 운운 한 것 때문에도 두고두고 쪽팔림을 당하는 것처럼 권력과 재력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약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재미있는 양반"이긴 한데, 인간적으로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나 할까. 요즘의 대중적인 활동을 보면 과거 <동양학>이나 <불교> 시절 정도의 수준보다도 한참 아래로 내려간 것 같아 아쉬움이 든다. 그만한 머리에 그만한 말빨을 가지고도 뭔가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걸 보면, 어쩌면 낭비인 듯도 싶고, 결국 인생 별 것 없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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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에로이카 > [레디앙] 인터뷰-민병두 의원

들어줄만한 발언 두 가지. (1) 사회투자국가 대 신개발주의를 민주 / 독재를 대체할 수 있는 범여권과 한나라당 간의 대척점으로 설정하고 있는 점. (2) 노무현의 진보 컴플렉스.
> 뉴스 > 정치
"진보논쟁에 대통령이 왜 끼어드나"
[인터뷰-민병두 의원] '유연 진보' 이해 안돼…진보-개혁 연대 가능
2007년 02월 22일 (목) 20:35:46 정제혁 기자

- 최장집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과 관련된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나.

= 최장집 교수와 손호철 교수 공히 그런 발언을 하는데, 둘은 발언의 포인트가 조금 다르다. 손 교수는 한나라당이 집권해야 진보세력의 정치적 존재와 의미를 진보대중이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다. 최 교수는 민주사회에서 정권교체는 당연한 것이고, 자신은 그런 일반론을 말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정권교체를 도와줘야 한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진보진영 관념론 못 벗어나"

   
  ▲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 (사진=민병두 의원 홈페이지)
 

손 교수와 최 교수의 발언은 다른 맥락에 있지만 나는 결국 두 사람이 같은 얘기를 한 것이라고 본다. 최 교수는 정치적 학자이지 순수한 학자가 아니다.

한 때 정부에 몸담았던 사람이다. 자신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파장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고 설혹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는 보수와 진보와 개혁이 있다. 보수는 자유를 말한다. 시장의 자유, 강자의 자유다. 개혁은 공정성을 말한다. 과정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이다. 좌파는 결과의 평등까지 목표로 한다.

진보진영은 개혁과 보수를 다 보수라고 규정한다. 이런 규정이 현실의 물적토대를 반영하는 건가? 난 아니라고 본다. 관념론이다.

또 볼셰비즘 같은 것이다. 열린우리당 같은 쁘띠부르조아 세력을 무력화하고 형해화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아와 양대 진영을 이룰 수 있다는 관념의 연장이라고 본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인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열린우리당을 주로 공격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음에, 혹은 그 다음에 자신들이 열린우리당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난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의 대체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보완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난 열린우리당의 보완재로서 계급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의 대체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의 물적 토대를 반영하지 않은 관념론에 불과하다. 최 교수나 손 교수의 주장도 그런 정치적 맥락 속에 있다. 민주노동당이 그동안 주장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오류다.

"노 대통령이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유연한 진보'로 규정했다.

= 그런 식의 자기규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진보에 대한 일종의 컴플렉스가 아닌가 싶다. 지금껏 그런 것이 혼선을 가져왔다. 보수주의, 개혁주의, 진보주의의 3정립 구도가 한국의 정치적 스펙트럼이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로 칭하지 않고 유연한 진보로 규정하는 것은 논쟁의 초점을 분산시키고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다.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개혁주의는 중도노선과 다른가.

= 세력에서는 같다. 그러나 중도라는 표현은 혼선을 불러 일으킨다. 중도는 이념과 관계없는 '중간'으로 받아들여진다.

참여정부의 지역균형발전은 과정과 기회의 평등을 진작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정운찬 교수의 지역균형 선발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그런 면에서 개혁은 보수, 진보와 구분된다. 보수정당은 대학의 완전한 자유를 얘기한다. 지역균형 선발에 대해 경쟁력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보진영은 서울대 폐지론을 말한다. 개혁주의는 미국 민주당 정도의 이념적 색채를 갖는다.

그렇다고 개혁과 진보의 연대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은 개혁진영과의 연대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 결선투표제는 민주노동당의 당론이다. 그건 개혁정당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터놓는 것 아닌가. 결선투표제를 말하는 정당이 개혁진영을 무력화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개혁과 진보는 각자 연대와 차별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결선투표제에 상호 합의한다면 연립정부와 연합공천으로 가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겐 지역구 진출을 훨씬 위력적으로 달성하는 수단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결선투표제라는 당론은 열린우리당을 무력화하려는 스탠스와 어긋나는 것 아닌가. 결선투표제를 해서 한나라당과 연대하겠다는 생각은 아닐 것 아닌가.

"노 대통령은 '자기성공의 희생자'"

- 개혁은 지난 대선의 시대정신 아니었나.

= 그렇다. 노 대통령이 개혁의 화신으로 비춰졌고 그래서 당선됐다. 정치학에는 '자기성공의 희생자'라는 개념이 있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결과로 정치적 존재이유를 상실했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부시 대통령도 같은 이유에서 클린턴에 밀려났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변곡점에 있다.

노무현의 개혁은 정치적 개혁이었다. 지금 요구되는 개혁은 주택, 보육, 일자리, 교육, 노후, 의료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에서의 개혁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인적투자와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사다. 한나라당은 성장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노선의 차이가 향후 20년 우리사회의 정치적 대치선이 될텐데, 여기서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고, 설혹 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 개혁은 아무래도 지난 시절의 깃발 같은 느낌이 있다.

= 사람들이 이명박을 왜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보나. 청계천을 뜯어고쳐 개혁했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여전하다는 반증이다. 개혁의 내용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이런 게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 경제정책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차이가 뭔가.

= 재벌개혁이나 노동의 유연성에 대한 태도에서 우리가 일관성 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우리의 노선은 생산적 복지 이후 사회투자국가라는 방향으로 점차 정립되고 있다. 한나라당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한나라당은 개발주의 세력이다. 최근 한나라당이 내놓고 있는 대지임대부 분양제, 대학등록금 절반 정책 등은 자기들의 기본적 노선과는 어긋나는 포퓰리즘일 뿐이다.

지난 20년간 우리 정치는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였다. 그러나 앞으로 20년은 다르다. 농어민, 한계자영업자, 비정규직, 실업자 등 낙오자 없는 세계화를 하겠다는 집단과 신개발주의의 대립이 앞으로 20년간 주요 대치선이 될 것이다. 다른 한 축에서는 평화냐 대결이냐의 문제가 있다. 이들 부문에서 어떻게 담론을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하다.

"최 교수의 발언은 정략적이거나 무의미"

- 정권교체 수용론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의 역진 불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있다.

= 역진성 문제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최 교수는 객관적 평론가로서 얘기한 것인가, 정파의 입장에 서 있는 학자의 입장에서 얘기한 것인가. 난 후자로 본다. 평론가로서의 발언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상식적인 것 아니냐.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정파의 이데올로그로서 한 말이라면 거기에는 볼셰비즘적인 어떤 흐름이 있다. 쁘띠부르조아 무용론이라고 하는.

예를 들어 지금 민주노동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99.99% 없는 게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 정치인이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우리에겐 집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정치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론이 뭔가를 강조하고 반복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지세력을 단결시키는 것이 정치인의 본령이고 의무다.

최 교수의 발언이 일반적인 평론가로서의 발언이라면 평론의 무의미성에 대해 지적해야 한다. 정파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 대해 지적하는 게 당연하다.

다음은 민주주의의 역진성 문제다. 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주의가 빠른 속도로 역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사람들에겐 그들이 살아온 고유의 문화나 체질이란 게 있다. 강고한 기득권 지키기, 연고문화에 대한 숭배같은 것이 있다.

물론 제도를 후퇴시키는 건 어려울 것이다. 검찰, 국정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놓아준 것은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문화의 문제다. 이런 문화의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퇴보할 가능성이 크다. 시위 문화에 대한 관용의 차이도 클 것으로 본다. 지금의 경찰은 중도중립적인 '폴리스맨'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한나라당은 정치적 폴리스맨 역할을 강요할 수도 있다고 본다.

"진보 논쟁은 이데올로그들의 논쟁, 대통령이 왜 끼어드나"

-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논쟁에 뛰어들었다.

= 정치적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최 교수의 발언 같은 것이 불쾌할 수는 있다. 또 개혁적 지식인이 그런 발언에 대해 침묵하는 게 더더욱 불쾌할 수 있다. 개헌문제만 봐도 그렇다. 다들 개헌해야 한다고 하다가 대통령이 제안하니까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됐다. 이런 게 불쾌할 수 있다. 정권을 희롱하는 사람들의 논거와 그런 상황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개혁적 지식인에 대해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적들은 지식사회에서의 자연스런 유통과 생산을 통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왜 개혁적 지식인들이 침묵하는가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 진보진영의 논쟁이 순수한 학문적 논쟁은 아니다. 이데올로그들의 논쟁이다. 이데올로그의 논쟁에 직접적 권력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득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개혁파 이데올로그도 가세해 논쟁 다양화됐으면"

- 노 대통령은 왜 그렇게 진보라는 자기 규정에 집착할까.

= 잘 모르겠다. 우리당 일부 의원들 가운데도 진보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탈당한 분들 가운데도 진보라고 하는 레떼르에 집착하는 분이 있다.

노 대통령은 우등생 진보주의자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난 개혁이다, 진보는 낡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낫지 '난 유연한 진보다' 이렇게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 조희연 교수는 "최근의 논쟁을 거치면서 진보 혹은 민주세력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논쟁에 대한 평가와 생산적 논쟁을 위한 제안을 한다면.

= 지금의 논쟁은 진보적 이데올로그들의 논쟁이다. 이 논쟁이 범개혁진보 진영 전반의 논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개혁파 이데올로그도 가세해서 논쟁이 다양화됐으면 좋겠다. 개혁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걸 정치권에서 하기는 힘들다. 이데올로그의 몫이다. 이런 계기를 통해 진보와 개혁의 차별성도 분명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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