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8) : 도올과 허혁
저녁 약속이 있어서 집사람까지 해서 셋이 식당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도올의 요한복음 강연" 이야기가 나왔다. 그 강연에서 도올이 뭐라뭐라 말한 것에 대해 보수 기독교 단체 쪽에서 이의를 제기했고, 또 거기에 대해 오늘자 신문에 한신대 김경재 교수가 일종의 중재인지 평가인지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집사람은 김용옥이 비록 신학자는 아니지만, 양식비평이라는 성서 해석학의 한 분야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웠을 사람이니, 한국 보수 교단의 어설픈 논리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로 이야기했다. 아닌 게 아니라, <논어>나 <노자>나 요한복음 강의로 인해 전국민적인 명사가 되기 이전의 도올, 그러니까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와 <절차탁마 대기만성>의 저자 도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뒤의 책은 얼핏 보기에는 "동양학" 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독교에 대한 도올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해 놓은 것이며, 그 책에서 도올이 내세우는 자신의 "한문해석학"이란 것이야말로 실제로는 불트만의 "성서해석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책의 제2부는 "독서법과 판본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본 기독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내게는 영지주의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던 글로 더욱 인상적이었고, 이 글의 말미에 "예수는 무당이라"고 주장해서 무식한 보수 기독교 단체 측에서 일종의 "테러"(?) 시도까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어쩌면 기독교에 관한 도올의 입장이랄까, 견해랄까 하는 것은 이 책을 참조하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이른바 보수 기독교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마귀 사탄"과 동일시되는 인물인데, 사실 기독교 신학사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인물이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를 꼽는다면 아마 수위 다툼을 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다. 그의 성서 해석학은 그 "과격함" 때문에 보수 신학자들이나 십일조 강요하는 무식한 목사들, 그리고 무지몽매한 일반 신도들(흔히 말해서 웬만한 젊은 목사나 전도사들을 "찜쪄먹는" 할머니 권사님들) 모두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미움을 받지만, 사실 신학도 학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토록 "과격하다"는 평가를 들을 만한 그의 학문적 태도야말로 성서를 대하는 가장 "정직한" 태도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 불트만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그가 과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성실성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적 성실성을 어떻게 조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무식한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는 성서의 권위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성서란 축자영감도 절대권위도 아닌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소스로부터 "편집"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성서의 "일점일획"까지도 고스란히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는 무식한 기독교를 숭앙하는 사람들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학문적으로야 나무랄 데 없는 주장이고, 실제로도 우리나라에서 신학 하는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한 번씩은 들춰봐야 할 책의 저자이지만(하긴 그의 책은 좀 많이 번역되었던가!) 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신앙" 적인 측면에서는 독약과도 같은 인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천하의 "불트만"조차도 우리나라에서는 졸지에 "마귀사탄"으로 여겨지는 셈인데, 여기서 가장 크게 손해를 본 사람은 아마도 그의 동포인 또 다른 신학자 "몰트만"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불트만과 몰트만의 생각이나 주장은 크게 달랐지만, 꽤 오래 전부터 단지 이름이 비슷한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불트만인지 몰트만인지"라는 식으로 나란히 매도당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불트만과 도올,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다리" 노릇을 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혁이다. 허혁이란 사람은 아마 기독교인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신학에 대해 관심이 있고, 그중에서도 교회 권사님들이 무척 싫어하는 "자유주의 신학" 쪽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불트만인지 몰트만인지"로 대표되는 양식비평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야 그의 이름을 알듯 말듯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나온 불트만의 책은 거의 모두가 허혁의 번역이고, 우리에게는 "밀림의 성자"로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천재 신학자이기도 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대작 <예수의 생애 연구사> 역시 허혁의 번역이다. 생전에 이런저런 논문을 발표했는지 모르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없는 듯하고, 말년에 제자들이 일종의 기념문집이랄까 하는 것을 한 권 펴냈는데, 두껍긴 하지만 번역 말고 평생 쓴 것이 그 정도라면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다. 오히려 허혁이란 이름은 불트만, 슈바이처, 로핑크, 예레미아스, 본회퍼 등의 이름과 나란히 기억되고, 문장이 아주 유려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번역은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통용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그 분야에 있어서는 한국 내에서 가장 독보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불트만의 책을 통해 허혁과 만나게 되었는데, 정작 허혁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거꾸로 도올 때문이었다. 도올의 큰형인 김용준의 글 모음인 <사람의 과학>이란 책을 보면 서문에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도올의 발문이 붙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좀 길지만 매우 흥미로운 일화이기 때문에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
- 내가 다녔던 보성중, 고등학교에는 서원출이라는 걸출한 교장의 리더십 때문에 당대 보기드문 석학들이 교사로 은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쯤인가? 우리 보성학교로 키가 껑충 크고 허우대가 멀쑥한 독일어 선생님 한 분이 새로 오셨다. 그는 상초가 심히 발달하여 몸무게의 중심이 몽땅 어깨로 이동하여 있는 느낌이었다. 키가 큰 반면 어깨는 앞으로 굽어 있었고, 두상은 백운대의 바위만큼이나 큰데 머리는 헝크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고난의 성상이 서린 좀 신성한 기운이 감돌았다. 귀밑에는 석학의 회색빈발이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주었으나, 두 눈은 썩은 동태눈처럼 맥아리없이 저 먼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의 느낌은 한없이 착하게 보였고,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심오한 프로페조르의 느낌을 주었다. 그의 이름은 허혁이었다. 그가 독일의 뮌스터 대학에서 박사를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박사까지 한 사람이 고등학교에 와서 독일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좀 이해가 가기 힘들었다. 허나 독일에서 온 독일어 선생이라는 신선한 충격은 당시 보성의 학우들에게는 커다란 화제였다. 허나 허혁은 매우 졸린 사람이었다. 말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퍽 씨알맹이 있는 얘기가 많은데, 그것을 매우 졸리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독일 얘기를 하거나 독일어 교과서에 나오는 일화에 얽힌 얘기를 할 때도 뭔가 고등학교 선생에게서는 들어보기 힘든 심오하고 매서운 언사가 툭툭 던져지곤 하는데, 매우 졸린 분위기를 깔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민주적인 사람이래서 통솔력이 없었다. 주변의 기를 압도하는 허세나 과장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독일어 시간은 아이들이 졸고 떠드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순한 것 같아도, 그의 말 속에는 항상 단호함과 지적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매우 난처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고 1 2학기 때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 "선생님은 겨우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실려고 그 어려운 독일유학을 하셨습니까? 무언가 선생님이 공부하신 것에 비해 지금 하시고 계신 일이 너무 시시한 것이 아닙니까?"
- 나는 지난 일이지만 이 나의 질문을 명료하게 한 자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허혁 선생은 이러한 나의 질문에 뚜렷한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맨 앞줄에 앉어있는 (2번인가? 3번인가?) 나를 꿰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난처한 몸짓으로 빙그레 미소를 짓고 말아버렸다. 넌 아직 나를 알 수 없는데, 내가 무엇을 변명하리요? 하는 눈치였다. 나는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 허혁 선생은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교단에서 배척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교계나 학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공이 또 큰 문제였다. 허혁 선생은 불트만을 전공했는데, 불트만이야말로 당대 교단에서는 최대의 이단자였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화적 허구 속에 안주하기를 희망했던 당대 교계의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의 존재의 근원을 허물어버리는 매우 무서운 이단의 칼날이었다. 그러저러한 연유로 허혁 선생은 교단이나 신학계로 복귀를 못하고 독일어 선생이라는 간판을 잠시 빌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완벽히 불트만의 해석에만 몰두하는 완벽한 학자였다. 학문의 전일성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허혁만한 인물을 만난 적이 없다. (40-42쪽)
이후 허혁은 감신대 교수가 되어 학교를 떠났지만, 도올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허혁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허혁은 성실한 답장을 써 보내주었고, 도올은 허혁으로부터 받은 여러 통의 답장을 근거로 삼아 부모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 나는 이 석학의 편지들을 우리 부모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나의 신학대학 행이 결코 우발적 발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 돌팔이 목사가 되어 신도 돈 긁어 떼쳐먹고 사는 주님 종 노릇 할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분히 설득해 들어갔다. 그리고 허혁 선생의 연루로 부모님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단계에서 나는 큰형의 중재를 요청했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허혁 선생이 대변할 수 있으니깐 큰형이 허혁 선생을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큰형은 나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큰형 자신이 불트만 신학에 감명을 받고 있었던 터이라 허혁 박사를 만나고 싶어 했다.(큰형은 미국 유학 시절에 Jesus Christ and Mythology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라는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미국에 가자마자 이 책을 사서 읽었다.)
- 과학자 김용준과 신학자 허혁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나를 매체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 나는 이듬해 한국신학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또 부모님의 축복을 받았다. 그렇게 어렵게 따낸 한국신학대학 입학이었지만 결국 나는 일 년 후에 신학대학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것도 순전히 자발적 의사에 의하여. 그리고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로 다시 입학한다. 내가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 큰형은 고려대학교에서 명강의를 하고 있었던 교수였다. 그리고 그는 고려대학교 기독교 학생회의 지도교수였다. 고려대학교 지금 학생회관과 홍보관 사이에 즐비하게 펼쳐져 있었던 당시의 판자촌 학생 써클실에는 지도교수인 김용"준"과 기독교 학생회 회원인 고려대학생 김용옥이 같이 앉어있었다. 바이블 클라스였다. 그 바이블클라스에는 허혁 박사가 불트만의 <신약성서신학>을 독일어로 강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큰형과 나 도올 김용옥이 살아간 인생의 한 단면이었다. (43-44쪽)
이후 허혁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신학과"가 아니다)로 자리를 옮겨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신학대학이 아닌 일반대학에, 그것도 여자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실제보다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그가 감신대나 한신대 같은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신학교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지금쯤은 작지만 버젓한 "허트만" (허혁의 별명이었다고) 학파가 하나 생겨났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대학의 경우에는 신학을 전공해도 교계로 진출하기가 어렵고 (가령 지금 연세대나 이화여대 같은 일반대학의 신학/기독교학 전공자들도 교계로 진출하려면 특정 교단 산하의 대학원을 나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유주의" 교단을 찾는 수밖에 없으니까) 더군다나 여자대학의 경우에는 제자를 배출하기도 쉽지 않았을테니 말이다.(물론 여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혁이 활동하던 시대에만 해도 우리나라처럼 남성위주로 된 사회에서, 그것도 신학이라는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은 여성신학이라는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쉽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나마 이화여대 정도 역량이 되었으니 허혁 같은 "내놓은 이단자"조차도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허혁 선생은 1990년대 중반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물론 나도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은 없다. 이제 와서는 기억하는 사람도 아주 없어지나 싶었는데, 어쩌면 도올이 이번에 요한복음을 이야기하면서 혹시나 허혁을 뒤늦게라도 유명인사로 만들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옛 기억이 떠올라 끄적여 보았다. 혹시나 도올의 강연 때문에 새삼스레 불트만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와중에 허혁이라는 이름(두 글자니까 쉽기도 하다)을 기억해 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겠다.
사실 불트만은 그렇게 읽기 쉬운 저자는 아니다. 일단은 기독교를 충분히 알아야 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를 충분히 "내던질" 또는 객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어쩌면 "때가 무르익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런저런 고민 많던 시절에 불트만의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를 읽고 그야말로 "짜릿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니까.) 그렇지 않고 여전히 "무식이 자랑"인 우리나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마인드로 읽어보면 불트만은 여전히 "사탄마귀"에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신앙은 제대로 된 지식에서 나온다. 나야 솔직히 도올의 "굿판"에는 질릴 대로 질린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덕분에 뭔가 신선한 충격을 받을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물론 그거,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일 거다. 도올이 언제는 뭐 신선한 이야기 한 적 있었나. 자기도 다 여기저기서 듣고 보고 배운 거지.)
*** 도올은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할 말은 많은데 참으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내가 좋아하던 도올은 <동양학> 시절의 도올이지 <노자>나 <논어> 시절의 도올은 아니다. 도올은 80년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90년대 내내 갈팡질팡하다가, 00년대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엔터테이너"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라 아쉽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용두사미"라고 할 수 있는데 뭔가 거창하고도 대단하고도 훌륭한 것을 내놓을 것처럼 폼은 엄청나게 잡지만 막상 이룬 것은 거의 없다.(항상 "다음에 쓰겠다"고 해놓고 소식이 없다.) 또 한편으로는 대만대학, 동경대학, 심지어 하바드대학의 졸업장까지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서울대" 졸업장이 없다는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컴플렉스를 과시하는 특이한 인물이면서(하긴 그 기묘한 컴플렉스야말로 그가 벌이는 온갖 일의 원동력인지 모르지만), 대학교수도 마다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문기자는 자청하고 들어가기까지 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말빨 하나는 탁월하고, 그건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요즘의 이런저런 "허섭스레기" 교양서 저자들과 다른 까닭은 비록 주워들은 이야기나마 아는 게 무척 "많다"는 점이다. 솔직히 나는 <동양학>을 꽤 오랫동안 들춰보고 또 들춰보았는데, 하도 여기저기 손 안 댄 것 없이 아는 척을 해 놓아서 그런지 나중에 펼쳐보고 또 펼쳐볼수록 재미가 있었다.(나중에는 아예 본문은 안 읽고 각주 --- 그것도 본문 못지 않게 길고 자빠졌다 --- 만 골라 읽으며 킥킥거리기도 했다.) 솔직히 요즘 나오는 온갖 "허섭"한 교양서들은 도올 책의 "각주"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정보의 양이나 질은 물론이고, 문장력도 그만큼이 되지 못한다. 도올의 한 가지 칭찬할 만한 점은 괜히 이것저것 갖다 늘어놓아 정신을 쏙 빼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알맹이 없이 구라로만 책 한 권을 때우려는 잔머리를 굴리지는 않는다는 점이고, 가끔은 그런 구라조차도 꽤나 재미있다. 다만 현실인식이랄까 하는 점에는 망통인 것이, 과거 <도올세설>에서 노태우 앞에 알랑방귀 뀌었던 글이 얼마 전에 재발굴(?)되어 망신살이 뻗치고, 베스트셀러인 <대화>에서 김우중을 "군자" 운운 한 것 때문에도 두고두고 쪽팔림을 당하는 것처럼 권력과 재력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약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재미있는 양반"이긴 한데, 인간적으로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나 할까. 요즘의 대중적인 활동을 보면 과거 <동양학>이나 <불교> 시절 정도의 수준보다도 한참 아래로 내려간 것 같아 아쉬움이 든다. 그만한 머리에 그만한 말빨을 가지고도 뭔가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걸 보면, 어쩌면 낭비인 듯도 싶고, 결국 인생 별 것 없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