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마태우스님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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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댓글의 핵심은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을 외쳐온 노빠들이 승리 지상주의, 그것도 본질의 변화 없는 껍데기에 대한 숭상, 눈가리고 아옹으로 다시 한 번 속아달라고 호소하는 데 있습니다. 이미지정치에 대한 흐름의 지적은 인정하다 치더라도 그 이미지를 뒷받침할 정책집 자체가 전문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차이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단언컨데, 둘은 오로지 카메라 앞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있다면 대한민국 1%의 집단과 10%의 집단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90%에게는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디테일하게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감세 정책 하나만 논해봅시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TV토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에게 법인세 인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이회창의 적극 찬성에 반하여, 한국 최상위층 대기업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법인세 감세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시간을 1년 뒤로 돌려보겠습니다. 2003년 8월  한나라당은 '27%~15%'였던 당시 법인세율을 '26~13%'로 각각 1%P, 2%P씩 인하하는 법인세법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 저 비율을 나누는 기준이 아마 1억일겁니다.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해도 모자랄 판에, 그해 12월 재경부 출신 여당 의원들의 적극적인 공세로 25~13%로 법인세율을 인하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과세표준 1억 이상 대상에 있어 한나라당보다 1%더 나아간 안건입니다. 노통은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감세된 돈의 대부분은 대기업의 호주머니 속으로 돌아갔고 2조가 넘는 그 돈은 서민들 삥 뜯어 채웠습니다.

2004년의 소득세와 특소세 감세를 이야기해볼까요? 다시 감소된 소득세 1%를 뜯어보면 자영업자 상위 10%가 세금 감면액의 70%이상을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소세 물품 24개 종목, 골프채나 PDP같은 제품들 특소세 감면과 월소득 200 ~ 300만원의 서민 경제 활성화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부동산 대책도 한 번 이야기해봅시다. 아파트에 규제를 하면 주상복합을 풀어주고 주상복합을 규제하면 재개발을 풀어주는 등, 투기처 잃은 돈의 사용처를 정책으로 지적해 가며 풀어준 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참여정부입니다.

외평채 문제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대기업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팔아치울때마다 떨어지는 환율을 방어하려고 원화 풀어놓고, 그렇게 달러가 방어되면 다시 대기업들이 달러 팔아치워 자사주 매입하고, 그렇게 떨어진 환율 다시 원화 풀고... 이런 악순환을 계속 하는 동안 현재 외평채가 30조원인 걸로 압니다. 2000년의 자그만치 다섯 배인가 여섯 배인가 그럴겁니다. 감이 잘 안오실지 모르니 쉽게 이야기해서, 국민들 세금 빨아내서 대기업 수익 채워주는 보조로 쓰인 돈이 2000년에 비해 다섯 배인가 여섯 배가 늘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렇다고 대기업의 고용 효과가 그렇게 늘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기술집약적 사업, 비용 절감 등을 통해 고용창출 효과는 전시대에 비해 미미한 수준입니다.

FTA? 자신감 운운하며 재경부 관료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귀 막고 있습니다.

국보법 폐지 못했습니다.

사학법 절름발이 만들어놓고 그나마도 못하겠다고 '협의의 가능성'을 열어놓겠다고 합니다.

민주노동당과 협의해서 처리한 것이라고는 최근의 국민소환제 뿐입니다. 그나마도 하다하다 막판에 울며 겨자먹기로 생색낸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래서 저는 입만 열면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한나라당과 손을 잡거나, 그보다 더한 일을 벌이는 열린우리당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대놓고 자신들의 욕망을 부르짖는 한나라당보다, 개혁과 정의를 부르짖으며 뒤에서 저런 짓을 벌이는 데 한나라당보다 더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태우스님께 감히 여쭙습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정치적 차이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개별 정책과 노선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신문지상에 오르고내리는 말잔치 말고, 실질적으로 다른 결과를 보인 행보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결과가 없는 수사란 정치적 책임의 소재일 뿐입니다.

 

제가 열린우리당과 강금실을 비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개혁 팔아 자신들의 권력과 잇속 챙기는 것 말고는 철저한 무능력과 구태를 보인 집단이, 반성 없이 얼굴마담 내세워서 면피해보려는 모양새를 또 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강금실의 비정치적 장점은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선거 승리를 위해 모인 비한나라당 잡색군)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결과를 되새겨보고도 얻는 게 없다면, 다시 한 번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일단 제 댓글의 핵심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정치적 결과에 대해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제 주장에 대해 충분히 논증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쟁점에 대해서는 퇴근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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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2006년 3월에 읽은 책들...

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 고백컨대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난 늘 반성하고 있다. 혹자는 시오노 나나미를 두고 우파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다는 생각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냥 민족주의적 우파가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적인 우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기를 넘어 대한민국에서도 먹히는 까닭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 담론에 젖어든 우리의 풍토에 너무나 적합한 이데올로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탈이념의 시대, 우리 사회의 담론은 더이상 좌파적 성실성과 봉사, 희생과 대의로 표상되는 것들이 아니라 성과주의, 능력주의 등에 근거한 새로운 평가체계를 받아들인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의 저서들로 재현해내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다는 담론 자체를 무시해버린다. 대신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국제질서란 원래 그런 것이다. 먹고 먹히는 것, 실력있는 자가 그렇지 않은 다수를 지배한다. 한 명의 능력있는 인재가 그렇지 못한 다수의 무능한 인간들을 벌여 먹여 살리는 것" 그것이 세상의 질서라고 말한다. 억울한가? 억울하면 그대도 노력해서 출세하라! 실력을 양성하라! 타인의 의지에 강제(권력)되지 말고, 네 자신이 규범을 정하고 타율적인 명령을 통해 자신이 행사하는 대신 네 자신이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내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몰입하도록 만드는 주체가 되라고 강조한다. 스스로 변형하도록 요구하고 유혹한다.는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삼국지"를 대체하는 새로운 처세술서, 경영전략서, 자기계발서다. 그러니 지적인, 감정적 타락이 미시적 일상의 곳곳에 스며있는 이 시대에 어찌 시오노 나나미의 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저항할 수 있단 말이냐.

 

 

한권으로 읽는 드러커 100년의 철학  
피터 드러커 지음, 남상진 옮김 / 청림출판 / 2004년 2월

- "한권으로 읽는 드러커 100년의 철학"을 구입한 데 대해서 후회는 없다. 그의 명성에 비해 내가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이나 지식이 워낙 형편없기 때문이다. 문화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 가장 고통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가 예전 같았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읽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을 먹게 된 일이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인물, 피터 드러커. 가만히 살펴보니 그는 외국 이론들이나 수입해서 팔아먹으면서 난 척하는 인문학자들, 현재에 대한 쥐꼬리만한 통찰도 없이 잘난 척 하는 미래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한, 그리고 그들보다 더 적확하게 세상의 변화동향을 읽어내고 선도해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권으로 읽는 드러커 100년의 철학"은 너무 비싼 책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드러커의 철학을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이 옳다면 이 책의 지은이가 비록 드러커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드러커 자신이 자신의 철학이 어떤 것이었음을 조목조목 들여다볼 수 있도록 다듬은 책이라기 보다는 그간 자신이 해온 이야기들, 여러 저서들 가운데서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전후 맥락 없이 일종의 아포리즘 형태로 토막내 짜집기한 책이란 혐의를 둘 수밖에 없다. 기대한 바와 다른 책일 때, 다소간의 후회가 드는 건 효율적인 소비에 실패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쉬엄쉬엄 바이블 읽듯 하며 드러커의 다른 책으로 들어가기 전의 워밍업으로 생각하기로 자위해본다.

 


클라시커 50 만화 - 종이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꿈과 환상, 세계 걸작 만화 50 
안드레아스 크니게 지음, 김원익 옮김 / 해냄(네오북) / 2005년 10월

- 클라시커 시리즈를 나름대로 좋아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의 목적이 깊이의 획득에 있다기 보다는 다양한 지식을 충족시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책마다 사용 목적이 다를 터인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본래 의도한 바에 매우 충실한 양식을 따르고, 그 양식에 적합한 난이도와 다양성을 두루 아우른다. 물론 이 책에서 동양 만화들까지 다채롭게 아우르고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쨌거나 "세계 걸작 만화 50"을 하나로 본다는 거, 나름대로 그들의 역사를 '일목요연(이런 책의 장점이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하게 살필 수 있다는 점은 기대해도 괜찮다.

 

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은이), 신준용 (옮긴이) | 애니북스

- 이 책 "아버지"는 "개를 기르다"로 나와 처음 만난 다니구치 지로의 장편 만화책이다. 억지로 짜낸 감동, 자극적인 감동이 아니라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 쇼트가 그러하듯 일상적이고, 평범한 시선 속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밍숭밍숭하기론 숭늉맛을 따를 수 있는 음식이 있을까만은 아마 이 만화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숭늉만한 맛을 내는 음식이 또 어디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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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월

- 이 책을 강준만 교수의 문화에세이라고 해야하나, 문화비평집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문화연구, 그도 아니면 문화칼럼? 글쎄 무슨 책이다라고 단언하기 곤란한 수준의 책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본격적인 학문서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신문 칼럼도 아닌 것이니까. 이전의 책들이 지닌 문제의식의 연장 선상에 놓인 책으로, 나는 이 책들의 주제 선별을 높이사는 편이다. "겉과 속" 시리즈라고 해서 어떤 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강준만 교수의 다채로운 관심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당대의 여런 문화현상들을 접하고 생각해보도록 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학기 학회의 세미나 교재 중 하나로 택했다. 이 책의 비어있는 나머지 공간들은 다른 학회원들의 고민으로 채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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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공간의 경제 - 현대문화론선 16 
스코트 래쉬 외 지음, 박형준 옮김 / 현대미학사 / 1998년 3월

 

 

 

 

 

고삐 풀린 현대성 
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차원현.채호석.배개화 옮김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2004년 3월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 젠더, 인종, 계층의 경계를 넘어, 문화현장총서 
김현미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5년 11월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데이비드 몰리, 발레리 워커딘, 제임스 커런 (지은이), 백선기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위의 네 권은 최근에 강의를 쫓아가기 위해 읽은 책들이다. "대중문화와 문화연구"는 사실 지난해에 읽은 책인데, 이번 학기에 수업 교재로 채택되어서 다시 읽은 책이다. 처음 읽을 당시에도 번역 때문에 무척이나 골머리를 썩였던 책인데, 다시 읽어보니 사람들이 어째서 "영어만 좀 잘 한다면 원서로 읽는 것이 낫겠다"는 푸념을 늘어놓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의 세 권은 올 초에 읽은 것들인데, 나름대로 정리가 될 때까지 묵혀두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또 뭘 읽었더라? 아침에 생각해내려니 머리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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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황해문화2006년 여름호(통권51호)

황해문화2006년 여름호(통권51호)
 
지금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이번 호의 특집 <지금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는 근래에 하나의 지적 유행처럼 대두되었던 국가, 혹은 국가주의와 관련된 담론들에 내재된 생산적 문제제기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한 모색의 소산이다. 그동안의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탈근대담론들의 경우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적 민족국가에 대한 완강한 집착을 이완·해체시키는 성찰적 기능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 ‘국가’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한 구체적인 문제제기였는가 하는 점에서는 회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서의 ‘국가’는 그러한 탈국가(주의)담론과 무관하게 이미 급격하게 이완되고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민주화와 권위주의 국가체제의 붕괴, 신자유주의적 시장헤게모니의 지배화 과정에서 우리의 ‘국가’는 목하 ‘축소재조정’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번 호의 특집은 이런 조건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국가와 민족, 국가와 사회, 국가와 계급, 국가와 젠더, 국가와 시장, 국가와 개인 등 근대적 맥락에서의 국가와 관련된 사유들을 제대로 시작해야 하는 국면을 맞았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 특집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에서의 국민국가의 약화는 그 구성원의 삶의 질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도 전제하고 있다. 이점에서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호의 특집은 유행하는 탈근대담론과는 다른 차원에서, 구성원의 심상세계 속에 혼돈스럽게 각인된 국가이미지 및 국가에 대한 욕망과 실재하는 현실의 국가, 혹은 바람직한 이념적 국가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 보이고, 그 간극에서 국가에 관한 논의들을 새로 시작해 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한국사회의 위기에 대하여 정열적으로 ‘복지국가’적 대안을 주장해 온 고세훈 선생의 「조각난 공동체, 먼 복지국가」는, 먼 이념으로서의 복지국가적 대안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면서, 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복지국가적 실천을 거부하고, 이에 저항하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분열된 의식과 모순된 담론을 문제 삼음으로써 우리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국가를 한번도 제대로 내적으로 전유해 본 적이 없음을 반증하고 있다.

김진호 선생의 「성화된 양심은 없다」는,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해체적 벡터의 작용에 의해 국가-가족-개인을 잇는 전체(주의)적 가치의 구현인 도덕공동체가 와해된 상황에서 허약해진 주체가 한편으로는 다시금 ‘마음의 아비’를 갈구하는 것이 현재 고개를 들고 있는 국가주의적 경향으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규율의 진공상태에 대응하여 ‘양심의 도구화’를 선택하는 것이 오늘날 팽배하는 자기중심주의적 경향으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 역시 국가-사회-개인을 아우르는 균형감각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구성원들의 취약한 심상세계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은실 선생의 「여성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는 산아제한정책에서 출산장려정책으로 이동해 온 196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의 국가의 여성의 신체에 대한 관리정책의 변화과정을 근대화과정에서 여성들이 국민국가 프로젝트에 인구재생산의 도구로 동원되어 온 과정으로 보고, 임신과 출산하는 신체-모성을 시민권적 공적 영역에 포함시켜 하나의 근대적 시민권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가와 젠더의 관계 역시 탈근대적 성격과 함께 근대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논문은 젠더의 문제가 근대국민국가체제의 가부장적 성격을 폭로하고 균열을 가져오는 측면이 있는 반면, 근대국민국가체제 내에서 ‘시민권’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건수 선생의 「민족은 국가를 넘을 수 있는가」는 한국, 혹은 한반도라는 민족국가 영역을 넘어 존재하면서 다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전혀 다른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다양한 ‘재외한민족’의 사례와, 한국사회 구성원의 다민족화의 실례를 통해 ‘국가를 넘어서는 민족’의 현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음을 주장한다. 그는 이를 위해 국민nation과 민족ethnic group을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별하고 민족과 국가를 구별할 것을 제안한다. 이 글은 ‘단일민족 신화의 해체’를 하나의 현실적 추세로 파악하여 근자에 고개를 드는 순혈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시대착오성을 입증하고 있다.
 
특집 좌담 「한국과 일본-두 개의 국가, 차이와 연대」
 
특집 좌담 「한국과 일본-두 개의 국가, 차이와 연대」는 한국의 『황해문화』와 일본의 『전야』 두 계간지가 공동으로 마련한 기획으로서 두 나라의 지식인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일본-다카하시 데츠야, 나카니시 신타로, 한국-정근식, 김명인) 일본‘국가’와 한국‘국가’의 문제들을 심도 있게 논의하여 공동의 문제의식을 확인한 귀중하고도 특별한 자리였다. 이 좌담에서는 최근 아시아의 근심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일본의 신국가주의적 변화양상들―공격적 내셔널리즘, 신자유주의, 반민주적 국가운영 등―과, 이를 방조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일본 시민사회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를 나누고, 그와 반대로 탈국가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현상을 대비하면서 이런 차이가 사실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재편성 과정에서의 아시아 전략의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며, 결국 아시아의 평화와 탈미국화, 한반도에서의 분단극복과 일본사회의 민주화가 동시에 추구되고 동시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국가문제는 일견 일국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계체제의 문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그 현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의 길은 같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자리로서 이 좌담은 의미 깊은 것이었다.
 
이번 호 <통일을 준비한다>에서는 최근 중국-북한의 급격한 밀월적 접근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가까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주제로 이남주 선생의 글 「북중관계의 진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준비했다. 필자는 북중관계의 진전에 대한 위협론적 시각의 과잉논리를 비판하고 이것이 오히려 지금 일종의 교착적 위기상태에 빠져 있는 한반도 문제를 진전시키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번 호 <황해리포트>는 최원식 변호사의 「상해와 인천-인천은 과연 동북아의 허브인가」를 싣는다. 이 글은 인천시민 상해시찰단의 일원으로 최근 급속도로 아시아 중심항구로 발돋움하고 있는 상해를 시찰하여 그 실상을 보고함으로써 정부의 낡은 투포트 전략Two-Port Policy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인천의 아시아 허브항으로서의 획기적 리모델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두 편의 시평, 홍성태 선생의 「월드컵 응원의 상업화」와 정희준 선생의 「골프의 대중사회학」은 스포츠가 어떻게 자본과 정치의 논리에 의해 포섭되어 그 순수성과 본질을 잃게 되는가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좋은 글들이다. 특히 다가오는 월드컵의 계절에 우리가 한국 축구팀의 승리를 향한 감성적 몰입만큼이나 월드컵의 전면적 상업화에 대한 이성적 자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또 권력과 자본에 의해 조장된 신드롬 속에서 점점 더 비리과 거간의 매개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골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글은 필독을 요한다.
 
「철학에서의 파시즘과 철학할 권리-철학자 농민 천규석의 철학과 유목주의의 문제」
 
홍윤기 선생의 「철학에서의 파시즘과 철학할 권리-철학자 농민 천규석의 철학과 유목주의의 문제」는 원래 유목주의nomadism 관련 서적들에 관한 주제서평으로 청탁되었지만, 필자의 의욕에 의해 노마디즘 현상은 물론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본격적 문제제기를 담은 글로 확장되어 <황해논단>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 글은 학문세계에 미만하고 있는 권력화 메커니즘과 배타적 지식독점주의 등에 대한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으며, 근래에 유행하고 있는 유목적 사유 일반의 허약한 논리체계와 그 권력화, 그리고 유목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생태주의적 사유의 생태철학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 등을 담고 있는 경쾌하고 풍자적 유머감각 넘치는 글로서 향후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황해문화 여름호(통권51호) - 목차
 
 
 
  권두비평
 2 2006년 초여름, 기우뚱한 균형 잡기│김진석
 
    특 집│지금 당신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12   조각난 공동체, 먼 복지국가│고세훈
 33   ‘성화된 양심’은 없다│김진호
    -우리 시대 ‘양심의 도구화’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
 48   여성에게 국가란 무엇인가│김은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중심으로
 70   민족은 국가를 넘을 수 있는가│한건수
 83   특집좌담│한국과 일본-두개의 국가, 차이와 연대 
     다카하시 데츠야·나카니시 신타로·김명인·정근식
 
  창 작
 136 시    강태열·조정권·정호승·박철·문경화·이세기·조정
 161 소설  초대│김지현
 
  연속기획│통일을 준비한다. 19          
 184  북중관계의 진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남주
 
  황해리포트
 200 상해와 인천│최원식
 -인천은 동북아 허브Hub인가
 
  황해논단
 216 철학에서의 파시즘과 철학할 권리│홍윤기
   -철학자 농민 천규석의 철학과 유목주의의 문제
 
  인천, 이 사람
 245 인천 최고(最古)의 보양 음식점, 북청집 신춘애 씨│김윤식
 
   시 평
 256 월드컵 응원의 상업화│홍성태
 266 골프의 대중사회학│정희준
   -국위선양과 출세의 몽환적 만남
 
     문화비평
 278    건축·만국공원의 기억과 ‘창조적 복원’의 난센스│전진삼
 286    미술·인천의 재발견-기록과 개입 사이에서│민운기
 293    음악·‘스페이스 공감’│신현준
 299    연극·만화와 연극│안치운
 304    영화·인종의 재발견, 또는 타자에 대한 영화적 무의식│박명진
 310    문학·로스쿨시대의 문학의 위상│김경수
 315    사진·사진관에서 생긴 일│이경민
        -근대 사진문화의 풍경2
 324    출판·인천에서 나온 반가운 책 세 권│최성일
          
  서 평    
 330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인권을 위한 강의』│이경주     
  『일본전후정치사』│하종문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서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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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펌] 역사의 종언? 한미 FTA, 정치시장은 왜 개방 안 하나?

기본정보
제 목 (한국) 역사의 종언? 한미 FTA, 정치시장은 왜 개방 안 하나?
저 자 이근
출 처 미래전략연구원
발간일 2006/04/11
출간형태 보고서
종 류
    
목 차
[순발상의 FTA: 정치시장의 개방]
[정치시장 개방의 지적 실험]
[정치시장 개방: 미국이 안 받는 이유에 대한 추론]
[미국 소프트 파워의 포로가 된 한국]
요 약
이번 한미 FTA의 구상 속에는 경쟁력을 키워야 할 시장은 대부분 다 포함되어 있는데, 가장 경쟁력이 약한 정치시장은 제외되어 있다. 즉 정치인의 경쟁은 가장 철저하게 국제적 경쟁에서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치시장을 열 수는 있는 것인가? 정치시장을 열어서 경쟁을 시키는 방법은 과연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진정 원한다면 할 수 있다”이다. 다만 그 방법이 매우 과격하고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는 있는 노릇이다. 순발상으로 말이다. 여기서부터가 지적인 실험의 시작이다.
본문내용
이 글의 목적은 현재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 오는지 기존의 경제학적 시각이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한번 점검해 보는데 있다. 이미 한미 FTA에 관한 경제학적 혹은 정치경제학적 지지와 비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글은 이 문제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사고의 틀을 제시하기 위하여 일종의 지적 실험 혹은 연습(intellectual exercise)을 하고자 한다. 이 실험의 결과가 반드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고를 통하여 뭔가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므로, 이 글을 통하여 한미 FTA에 관한 보다 지적인 새로운 토론이 촉발되기를 조용히 기대한다.


[순발상의 FTA: 정치시장의 개방]

그렇다면 이 문제를 대통령이 좋아하시는 역발상이 아니라 순발상으로 한번 풀어본다. 즉 정부가 제시한 논리대로 따라가면서 문제를 풀어본다는 의미다. 정부가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논리는 개방을 통하여 한국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이다. 특히 고용 및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큰, 또 미래 한국 경제에 가장 중요한 금융, 서비스 시장을 먼저 열어서 경쟁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금융, 법률, 컨설팅, 의료, 교육 시장을 열어서 이들 산업의 강국인 미국과 경쟁을 하게 되면 한국의 산업도 강해진다는 논리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논리를 반박하기 보다는 (사실 반박해야 할 논리이지만) 이 논리를 그대로 받아서 경쟁력이 가장 취약한 다른 시장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가장 경쟁력이 없는 부분은 누가 뭐래도 정치분야일 것이다. 예전부터 경제는 1류 정치는 3류라는 말도 있었고, 정치만 잘하면 다른 것도 다 잘될 것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오죽하면 선진국 정치인을 수입하자는 말도 나왔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정부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순발상을 하게 되면 한국 정치인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은 바로 이들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는 선진국 정치인과 피나는 경쟁을 시켜서 선진 정치기법을 익히게 하고, 또 경쟁력이 없는 정치인을 도태시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한국 정치인의 경쟁력이 높아지게 된다. 즉 정치시장을 개방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치는 경제가 아니니 정치시장을 개방한다는 표현이나 논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경쟁이 경쟁력을 키운다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어디에서나 통한다. 교육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정부혁신도 그렇다. 선진 정치인과의 경쟁이 없는 정치인은 자연스럽게 선진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즉 순발상을 하게 되면 정치시장을 개방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번 한미 FTA의 구상 속에는 경쟁력을 키워야 할 시장은 대부분 다 포함되어 있는데, 가장 경쟁력이 약한 정치시장은 제외되어 있다. 즉 정치인의 경쟁은 가장 철저하게 국제적 경쟁에서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치시장을 열 수는 있는 것인가? 정치시장을 열어서 경쟁을 시키는 방법은 과연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진정 원한다면 할 수 있다”이다. 다만 그 방법이 매우 과격하고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는 있는 노릇이다. 순발상으로 말이다. 여기서부터가 지적인 실험의 시작이다.


[정치시장 개방의 지적 실험]

정치시장을 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드는 것이다. 사실 한미 FTA를 하게 되면 한국의 제도가 미국으로 갈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고, 대부분 미국의 경제제도 및 기타 스탠더드가 한국에 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시장과 미국시장과의 차이를 상당부분 좁히게 된다. 거대자본을 가진 미국이 한국의 우량기업을 상당부분 지배할 것이고, 따라서 한국의 우량기업(어느 나라 기업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려워질 것이지만) 경영에도 상당히 관여할 것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미 FTA는 사실 상 정치 이외의 대부분의 미국제도를 한국에 도입하게 되어 실질적으로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경제적 주(state)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아무도 미국이 한국의 거대 도가 될 것이라는 (경상도와 같이 미국남도, 미국북도가 생길까?) 순진한 상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미국의 한 주가 되는 것이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면 (미국의 선진제도와 기법을 도입하고, 선진기업과 경쟁하게 되니까) 정치적으로도 미국의 한 주가 되는 것이 한국 정치의 경쟁력을 높이게 된다. (미국 정치의 선진적인 제도와 기법을 도입하고, 선진 미국 정치인과 경쟁을 하게 되니까).

문제는 정치시장을 개방하게 되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계속 존속할 수 있느냐인데, 국가가 국민 보호와 복지와 번영을 위해 존재한다면, 한국 대신 미국이 민주적인 정치체제에서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이므로 우리가 민족이라는 가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를 잠시 해체하고 다시 한번 가상의 공동체를 미국과 함께 만든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선진적인 미국 정부가 한국의 국방과 경제, 복지를 책임질 터인데 그까짓 이름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이미 이민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국가의 이름보다는 실리를 찾아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 아닌가? 한국 국민이 그냥 선진국의 일원이 될 것이니, 요즘 유행하는 “선진화”담론이나 운동도 필요 없다. 미국에 편입되면 선진화는 그냥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주국방, 한미동맹강화 등도 걱정할 필요 없다. 그냥 해결된다. 영어교육, 해외유학 특별히 애쓸 필요 없다. 자연스럽게 영어배우고, 미국교육 받게 된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정부혁신 및 개혁도 자연히 될 터이고, 기업의 불법로비, 대선자금, 기업지배구조, 언론개혁 등 대부분의 목표들이 다 달성될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제를 따라하는 개헌도 자연히 될 터이고, 대북정책 및 대중정책에 대한 한미간의 공조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내치 및 외교 수준이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현실성이 없는 가공의 시나리오지만 지적 실험을 위하여 여하튼 이러한 이익을 고려하여 한국이 미국과 통합하여 정치시장 개방을 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러한 가정 하에서 한국의 정치시장에 어떠한 결과가 발생할 것인지 추론해 보자.

한미간에 정치시장이 개방되어 한국이 미국의 51번째 주가 된다면 현재 대다수의 한국 정치인들은 실업자가 될 것이다. 우선 영어와 한국어를 공히 잘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상당수의 정치인이 걸러진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와 문화 및 다양한 제도에 대하여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기간이 짧다면 경쟁력이 없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유학하였거나, 미국의 교포인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새로운 주의 정치시장 대부분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왕의 선거조직, 문화 등등이 미국의 정치제도에 따라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부분 와해되거나, 불법화되거나, 아니면 변화되어 정치지형에 상당한 회오리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정치시장이 개방될 때 누가 가장 먼저 머리에 띠를 두르고 반대할 것인가? 바로 지금 한미 FTA를 가장 먼저, 강하게 주장하거나 아니면 침묵하고 있는 정치인들이다. 자신들은 경쟁에서 보호되고, 다른 한국 사람들은 모두 신자유주의 시장 안의 경쟁 속으로 몰고 가는 정치인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 아닌가? 남의 일 보듯,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정책을 끌고 가는 이유는 자신들은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차라리 정치시장이 개방되어 정치인의 경쟁이 열리고, 똑똑한 교포나 2세, 3세 정치인들이 한국이라는 미국의 1개 주를 통치하여 이곳의 주민을 선진적으로 보호해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농담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마 정치시장만 보호하고 경제시장을 열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사회적 갈등이 심해져 오히려 지금 한국의 정치시장에는 더욱 큰 장이 서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정치인들과 한국의 관료들이 설마 이러한 상황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에 봉착한다. 정치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정치인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리고 경제전문가들이나 경영인들은 정치시장을 개방하자는 말을 못 할까? 왜 한국이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할까? 우리가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미국과의 통합으로 달성할 수 있는데 왜 주저하는 것일까? 한미 FTA는 주권과 실익사이에서 주권을 좀 버리고 실익을 얻자는 것인데, 정치시장마저 개방하여 주권을 버리고 실익을 더 얻을 수 있다면 주권까지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유럽은 유럽통합을 통하여 주권을 어느 정도 버렸고, 미국도 역사적으로 다른 개별적인 주들이 합치면서(주권을 버리면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던가? 왜 주저하는 것일까?

주저하는 이유는 우선 민족주의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과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없애고 미국인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은 다 뭔가? 그들이 지금 한국인보다 민족주의 의식이 약해서 미국으로 국적을 바꿨나? 지금 한국에 남아있는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보다 훨씬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인가?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이민간 이들은 아마도 한국보다 미국정부가 본인들의 실익을 더욱 보장해 줄 것이라는 이유로 이민갔을 가능성이 크다.

주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차별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도 못하고,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습관도 달라서 미국 사회에서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차별받고, 그렇게 되면 고용 및 여타 취업, 출세 기회가 박탈당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미 자신들도 먹고 살기 힘든데, 거기에 이질적인 한국인이 들어와서 같이 경쟁하려 한다면 미국인들이 가만 놔두겠는가? 실제로 미국의 비주류인 흑인과 히스패닉 중에서 출세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어쩌면 민족주의와 차별 중에서 보다 중요한 이유는 차별, 즉 구조적으로, 원천적으로 다양한 기회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한미 통합을 반대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이러한 차별의 문제, 부와 가치의 불공정 배분에서 주민 혹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기능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미국정치에서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한국 국민을 차별에서 보호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부와 가치의 배분에서 기왕의 주류 미국인에게 밀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국민을 보호해 주기 위한 정치인과 정치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아이러니는 한국 국민을 보호해 달라고 정치인들을 뽑아 주고, 정부에 세금도 내고, 공무원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데, 정작 이러한 선택을 받은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한미 FTA를 통하여 자기들만 보호 받고, 나머지 국민은 미국의 제도와 스탠더드와 엄청난 자본 앞에 무방비로 내몰고 있다. 그리고 묻는다. “그렇게도 자신이 없습니까?”


[정치시장 개방: 미국이 안 받는 이유에 대한 추론]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상상력을 발동해 보자. 정부의 역발상에 대한 순발상이 국민들에게 먹혀서, 그리고 한국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우리도 경쟁에서 자신있다”라고 선언하면서 한미통합(한미합방이 더 맞는 표현일 듯)을 미국에 제시했다고 하자. 이제부터는 한미 FTA의 협상이 아니라, 한미통합의 협상에 들어간다. 과연 미국이 이에 응할 것인가?

현재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미국은 거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통합의 코스트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의 복지수준과 제반 수준을 미국의 수준으로 올려야 하고, 국민소득을 미국의 수준에 맞추어야 하니 미국은 대단한 경제적 지불을 하여야 한다. 통합 시 환율을 조정하여 일거에 국민소득을 높인다 하여도 이러한 변화에 한국의 제조업체가 얼마나 경쟁력있게 미국의 기대에 부응할지 매우 불확실하다. 그리고 통합이후의 다양한 정치적 소요, 반미데모(경우에 따라서는 조직적 저항운동과 테러혐의 등이 난무할 것임), 그리고 장거리 영토의 통치에 필요한 거래비용 등 얻게 되는 이익보다 지불해야할 코스트가 훨씬 클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미국이 한국의 복지 및 소득 수준을 정책적으로 올리지 않으면서 한국으로부터 통합에 준하는 상당한 혜택을 얻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한미 FTA를 하게 되면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대부분의 제도와 스탠더드가 한국으로 수입되어 한국은 미국의 한 주에 준하는 사회경제체제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한미동맹, 전략적 유연성, 한미 무기체제의 상호호완성, 한미연합전력, 그리고 강건한 한미동맹파에 의해 한국은 이미 미국의 세계전략상 전진기지가 되어가고 있고 북한의 위협이 감소할수록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언어에 있어서도 한국에서 한국말 잘 하는 사람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사람이 경쟁력을 갖도록 대세가 형성되었다. 세계화가 진행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이는 역차별이 아닐 수 없다. 영어 유치원에서부터 이미 창씨개명(엄밀하게 말하면 창씨는 아니지만 개명은 하고 있다)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고, 금융가에서는 웬만한 국제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다 이미 개명을 하였다. 한국 교육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가정의 해체를 불사하며 (소위 기러기 아빠 현상) 엄청난 돈을 미국의 학교에 쏟아 붓고 있으며, 이미 미국에서 조기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귀국하여 한국의 주요 금융, 서비스 업종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금융, 서비스가 앞으로 한국의 성장동력이라고 정부에서 말하고 있다). 미국 할리우드 문화는 이미 친숙해져 버렸고, 스크린 쿼터도 축소하였으니 더욱 친숙해 질 것이다. 그리고 유승준은 군대 안 간다고 쫒아냈지만 교포들이 한국에 가져온 미국적 문화는 연예계와 영어학원계를 통하여 널리 유포되고 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 온 상당수의 사회과학자들은 미국의 아젠더를 한국에 와서도 계속 연구하고, 증명해 주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미국에서 새로운 것이 생산되면 생산되는 대로 바로바로 수입해 준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사회과학 아젠더를 미국화 시켜버린다.


[미국 소프트 파워의 포로가 된 한국]

이상의 현상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본이 일제시대 때 한국에 강압적으로 강요하여 하고자 한 일을 미국에 대하여 알아서 순순히 다 해주고 있다. 그러고도 미국으로부터 반미국가, 배은망덕한 국가 소리 들으면서 더욱 길들여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국제정치에서 말하는 미국의 "소프트 파워“다. 즉 강요를 안 해도 알아서 하게 하는 힘,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따라오게 하는 힘이다. 지난 세기 제국주의 이후의 제국은 이러한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제국을 건설하고, 식민지를 만들고 경영한다. 지불하는 것은 별로 없지만 가져가는 것은 최대로 또 자연스럽게 문명적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러한 소프트 파워에 딱 걸려든 것이 한국이고, 또 한미 FTA를 추진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물론 애국심으로 일을 추진하지만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 오히려 미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귀결하는 메커니즘을 잘 모른다. 하인스 워드가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한국인이 교황청의 추기경으로 탄생하였다고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미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무조건 반미로 몰리고, 미국에 대해서 비판하면 비슷하게 미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무조건 미국을 잘 모른다고 타이르고, 그런 곳이 지금 미국의 소프트 파워 안에 편입되어 있는 한국이다.

자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인들은 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의 소프트 파워의 시대에 그저 전근대적으로 신분상승하고, 출세하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관직에만 등용되면 되는 것인가? 그것이 정치인의 목표인가? 이 험난한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 국민은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렇게도 자신이 없냐고 꾸중을 들어야 한다면, 우리는 아예 미국과의 전방위적 통합을 선택하고 싶다. 정치인도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시키고 싶다. 최소한 미국에는 공청회도 하고, 협상전략도 공개하고, 절차도 투명하게 진행하며, 보상체계도 마련하는 국회와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진짜 한국 국민들이 알아서 한국을 미국에 넘기기 전에 한국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스스로 정치의 경쟁력을 확립해 주기 바란다. 언젠가는 우리가 미국의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FTA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미 FTA, 보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점검해 보자. 지금 저기서 엄청난 쓰나미가 몰아닥치고 있는 것이 안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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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감상적 허무주의와 무라카미 현상

아침 출근길에 읽은 조간신문이 다소 '심심'했는데, 그나마 흥미를 끈 건 원로비평가 유종호 선생의 무라카미 하루키 비판 기사였다(유종호 선생에 대한 페이퍼는 이전에 한번 쓴 바 있다). 한국일보에서 읽었지만, 동아일보도 관련기사를 다루고 있어서 같이 옮겨놓도록 한다. 새로운 문제제기라기보다는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뒷북'처럼 읽히지만(물론 그의 발언은 하루키에 탐닉하는 세대에 대한 문학 교육자로서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평론가 유종호 씨 '무라카미 ‘노르웨이의 숲’은 음담패설집'”이란 호들갑스런 제목을 달았다

나는 '음담패설'이란 말을 쓰지 않겠지만(나는 나이브한 감상적 허무주의를 그냥 '포르노'라고 부른다), 그의 문학이 '데카당스'의 문학이라는 건 새로운 사실도, 지적도 아니다. 나는 좀 눅여서 '감상적 허무주의와 무라카미 현상'이라고 제목을 바꿔단다. 이 제목이라면 한가할 때 비평문을 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 초점은 '무라카미 문학'이 아니라 '무라카미 현상'이며, 나의 관심은 사회학적 관심이다.  

동아일보(06. 05. 25) 원로평론가 유종호(71·사진) 씨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유 씨는 문예지 ‘현대문학’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무라카미 바람’을 일으킨 책. 유 씨는 대학 초년생 중 가장 감명 깊게 혹은 흥미 있게 읽은 문학책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드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면서, 자신이 본 바로는 “성적으로 격리된 수용소 재소자들이 일상적으로 나눔직한 성의 얘기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유 씨는 이 작품 속에 “성적인 문제로 좌절이나 일탈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고 성적 호기심을 부추기는 성적인 얘기가 전경화되어 있고, 고교 3년 여학생의 자살을 위시해서 수수께끼 같은 자살이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유 씨는 또 “소설의 화자가 대학생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는 등 등장인물들이 다소간 학교교육의 피해자 내지는 희생자란 함의를 풍기고 있다”며 “요컨대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고 주장했다. 유 씨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이 책은 마약과 같이 단기간의 안이한 위로를 제공해 줄 것”이라면서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결코 예술가의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 씨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 없는 시대의 언어 상품”이라며 작품을 낳은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무라카미가 거둔 상업적 성공을 비하하거나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 “다만 그의 문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이상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하급문학일 뿐”이라고 말했다.(*물론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요즘의 학생들이 '고급문학'을 읽어낼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인지, 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유 씨는 2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상당수의 대학생이 문학적 위엄을 보여 주는 고전을 제쳐놓고 <노르웨이의 숲>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서, 곤혹스럽고 우려가 되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나는 유종호 교수의 평가에는 동의하지만, 우려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문학적 위엄'을 먼저 내팽개친 건 독자보다 문학계/출판계가 먼저라고 보기 때문이다. 팔아먹을 만큼 팔아먹은 책에 대해서 '음담패설'이라고 깎아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비록 음담패설이라고는 해도, 가라타니 고진의 지적대로, 하루키의 음담패설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문학이 아닌 상품의 자리에 서면, 하루키 문학은 타기의 대상이 아니라 벤치마킹의 대상이다(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한국일보(06. 05. 25)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가 우리 문학의 저급화와 교양 퇴조 풍조에 대한 고언(苦言)을 25일 예술원 세미나에서 발표한다.

-‘문학의 전락 - 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그는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감상적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음담패설집”이며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청춘은 성(性)적인 계절이지만 동시에 성숙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며 “이 책은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에서 (작중 화자가 거론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대척점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대학 교육과 교육을 통해 축적한 인문적 교양이 신분의 표지였던 과거와 달리, 대학교육이 보편화하고 생활스타일이 다원화하면서 ‘교양’ 역시 ‘구제도의 하나’가 돼버렸다고 개탄했다. 그는 문학의 길이 ‘기쁨으로 출발하나 / 종당에는 낙망과 광기가 온다’고 했던, 낭만주의 시인 워드워스의 시 ‘결의와 독립’의 시행을 인용하며, ‘(이미) 낙망과 권태를 체험하고 있는 연구자나 교사의 비문학적 관심과 정열’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문학의 매혹에 눈뜨게 하는 기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 근거로 범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문학계의 ‘이론’ 탐닉 현상을 들고 있다. “작품 읽기보다 이론 읽기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정전 개념의 해체를 통해 나태한 젊은이들에게 고전기피 현상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또 교수들의 연구업적 경쟁체제도 “교수들로 하여금 ‘이론’ 도입을 통한 논문 엮어내기를 강요하여 작품을 한갓 논문의 자료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했다.

(*)문학계의 이론 탐닉을 독자들의 하루키 탐닉에 견주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요컨대, 작품 읽기/읽어내기를 기피하면서 논문 엮어내기에나 탐닉하는 문학 연구자들 또한 데카당스들이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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