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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일) 저녁 8시, KBS스페셜에 주목!
 
[한미FTA저지특별기획](25) - 이강택, 'FTA 12년, 멕시코의 명과 암'

 

유영주 기자 yyjoo.net
31일 오후 KBS에 들러 이강택 피디를 만났다. 이번 주말 KBS스페셜에 방영할 'FTA 12년, 멕시코의 명과 암'을 편집하고 있었다. 이강택 피디는 한미FTA 이슈가 불거진 2-3월 경 한미FTA와 관련한 기획에 들어갔다. 최초 기획은 3부작 정도로 생각했으나, 여건상 멕시코 현지 취재 한 편에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담았다고 밝혔다.

알려진 대로 멕시코는 1994년 NAFTA 발효 이후 지금까지 자유무역협정이 가져다준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강택 피디는 멕시코 전역을 누비며 NAFTA 이후 멕시코 인민들의 삶의 현장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한다.

KBS스페셜 'FTA 12년, 멕시코의 명과 암'은 4일(일) 저녁 8시 KBS 1TV를 통해 방영된다. 멕시코 현장을 어떻게 담아왔는지 무척 궁금하다. 한미FTA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모두 시청하길 바란다. 한미FTA 추진에 혈안이 된 '묻지마' 자유무역주의자들도 이날은 정신 차리고 이 방송을 꼭 볼 것을 권한다.


제작 배경과 문제의식

지난 번 남미에서 한 차베스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 남미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퇴조하고 있는가를 취재한 적 있었다. 작년 말부터 FTAA(전미자유무역협정)가 어떻게 브레이크 걸렸는지를 국내에서 취재하던 중이었는데, 그러다 올 2-3월 경 한미FTA를 추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지 당황스러웠다.

당시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한미FTA 두 가지 중 하나를 집중해서 다룰 생각이었다. 둘 다 제대로 다뤄서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여건상 한미FTA 문제를 택했다. 남미에 가서 보면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현실이 명확하게 보인다. 멕시코도 그럴 거라 해서 FTA쪽을 뚫었다. 평택은 다른 동료들에게 맡겼다. 당시에는 한 3부작 정도로 생각했다. 하나는 멕시코의 사례, 하나는 한미FTA가 우리 사회 각 부문에 미칠 영향, 하나는 한미FTA 문제 종합 등으로 구성하려 했다. 그런데 한미FTA의 심각성과 중요성에 비해 당시 방송사 내부 분위기가 너무나 조용했고 관심 밖이었다. 제작기간과 제작여건 탓에 기획을 규모있게 가져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4월 중순쯤 멕시코를 통해 명확히 보여주자는 것으로 정리했다.

제작 초점

두 가지였다. 도대체 FTA가 뭐냐 라는 거다. 우리가 다 짐작하듯이 FTA는 초국적자본에게 무한한 자유와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개도국의 국민경제가 미국 초국적자본에 의해 부문별로 포섭되거나, 포섭 안되면 배제되는 걸 의미한다. 내국인 대우 문제나 이행의무 금지 문제나 하나하나 놓고 보면... FTA의 결과로서 국민경제 해체 현상을 가장 잘 보이는 곳이 멕시코다. 멕시코의 조건이 한국과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미국과의 FTA가 간다고 했을 때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미국과 FTA를 추진하려는 한국 사회에 엄중한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취지를 담았다. 민중의 생존권에 얼마나 심대한 위협을 가져오게 될 것인지... 대다수 민중들이 영원히 배제되는 것인데, 잊혀지는 것인데...

생각만큼 충분히 담았는지

프로그램에서 충분하다거나 완벽하다는 건 없는 것이고, 다만 애초 목적한 바를 보여주는 정도로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 않았나 싶다. 사실 남미 취재는 여러 가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약속을 안 지킨다거나, 국가나 정부가 워낙 권위주의적이라 접근이 어려운 점 등이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짚어야 할 요소는 확실히 짚었다고 본다.

멕시코의 현실은 이미 여러 기고나 자료 등을 통해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멕시코 현실을 보는 시각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 취재팀이 현지에 취재차 머무른 기간이 18일, 국경을 비롯해서 거의 전역을 돌아다녔다. 일단은 전체적인 취재가 되었고, 특정한 부분만 보고 뻥튀기를 하지는 않았다. 현장을 돌면서 멕시코의 모습을 직접 확인했으므로 현장의 생생함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노점상

예를 들어 멕시코 하면 노점상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거의 모든 지하철 역과 가로에 노점상이 있다. 길 양쪽 모두 노점상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걸어다니기조차 어렵다. 말 그대로 노점상 천지다. 왜 이렇게 되었겠나. 노점상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시점이 FTA 시작하는 시점과 비슷하다. 노동자, 농민, 화이트 출신들 다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멕시코에는 실업수당이 없다. 정리해고 당하면 구직활동을 하기 마련이지만 멕시코에는 구직활동을 할 여유가 없다. 자기 있는 것이라도 내다 팔지 않으면 굶어죽을 형편이다.

멕시코 시티 가로에 꽉들어 찬 노점상들. 인도는 노정상들이 점유하고 차도에 사람과 차가 얽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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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궁 옆 골목의 노점상. 4000만 경제활동 인구 중 정규직은 1300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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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종류의 돈벌이가 있지만 안정된 직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주차 대행 하고 몇 푼 받거나, 신호등에 차가 서면 광대짓을 해서 팁을 받기도 하고, 유리창 닦기를 해서 돈을 버는데 떼거지로 몰려든다. 아침에 신문 팔고 껌 팔고, 이 사람들이 로타리에 가면 그룹으로 몰려있다. 가족들이 다 나와있다. 멕시코는 초등학교까지만 의무교육이 되어 있는데, 아이들이 학교에 갈 생각을 포기한다. 애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다. 일부는 저임노동 현장으로 인입되고...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게 학교에서 돈만 안 받는 걸로 되는 게 아니고 가정과 사회 학교 차원의 인프라가 있어야 가능한데 그게 없는 것이다.

장벽과 이민

멕시코 이민 문제는 영화에도 많이 등장하고 워낙 국제적인 이슈이기도 하다. 실제로 장벽에는 수백 개의 희생자 추모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마다 이름이 다 써 있다. NAFTA 이후 해마다 숨진 사람들의 숫자가 관에 쓰여 있다. 국경이 장벽을 두고 불과 20미터인 데도 있다. 전자감응장치 등 경비가 삼엄하지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깝다. 티후아나 시에서는 밤에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경비대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더라. 이렇게 국경을 넘은 멕시코 이민 인구가 무려 13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멕시코 국경. 멕시코쪽의 벽은 낮으나 미국 쪽의 벽은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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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멕시코 국경(일명 또르띠야 장벽)에 결려있는 십자가. 월경하다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의미. 그 옆의 관에는 연도별 희생자 수가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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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이 3200킬로미터로 휴전선의 10배에 가까운데, 도시 지역에는 멕시코 쪽 장벽과 미국 쪽 장벽 두 개가 있고 미국 쪽이 높게 되어 있다. 사막 지대에는 철조망만 있다. 접근이 힘드니까. 강 있는 데는 대충 표시만 해놨고. 옛날에는 도시 쪽 장벽을 많이 넘었는데 워낙 통제가 심해지니까 최근에는 사막으로, 물로 향한다. 사막으로 가다 탈수로 많이 죽는다. 낮 기온이 50도를 넘어가니까. 물에서 헤엄치다 죽고, 미국 국경 넘어가다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 이래저래 국경에서 죽는다.

미국 국경의 장벽 근처에서 넘어갈 기회를 엿보는 불법 월경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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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음을 무릅쓰고 넘어가겠나. 농촌을 떠나 먹고살려고 마킬라도라로 향한다. 일자리 찾으려고 국경도시로 온다. 일단은 일자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와봤자 노동조건이란 게 사람 살 데가 아니다. 산에다 무허가 판자촌을 지어 산다. 물가는 하늘을 찌른다. 일자리는 없고 인구는 많으니 저임 압박이 생기고... 물론 다른 지역보다 조금 더 받기는 한다. 멕시코 최저임금이 4달러가 조금 넘는데 여기 사람들은 보통 6-8달러 정도 받는다. 그런데 이걸로 생활이 안 되니 당연히 잔업을 하고, 보통 12시간 이상 일 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먹고산다.

티후아나 시에 있는 어느 집을 방문했다. 방 하나에 11명이 모여 살고 있었다. 침대에 애들 셋, 소파 양쪽 두 개 합쳐서 세 명이 자고, 나머지 5명은 한쪽에 세워놓은 메트리스를 깔고 잔다. 물도 안 나온다. 이 사람들 취재하려 했더니 자기 신원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그나마 회사에서 짤릴까 봐. 이게 마지막 생존 현장인데 거기서 안 되면 국경을 향하는 거다.

멕시코의 FTA 협상

한마디로 NAFTA는 함정이고 사기극이다. 정부 관료들이 NAFTA가 되면 좋은 일자리가 많아질 것이고 멕시코는 선진국이 된다고 떠들었다. 장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거라 했다. 살리나스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그렇게 떠들고 다녔던 거다. 88년부터 93년 말까지가 살리나스 재임기간인데, 그때 로드맵 다 추진되었다. 처음부터 농업보조금 없애고 가격지원제도라 해서 비료나 종자나 정부보조 통해 사전정비작업 했다. 멕시코 농민들은 공유지 중 일부를 불하받는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90년대 초반에 이 법도 다 바꿔버렸다.

빼앗긴 공유지를 돌려달라고 한달이 넘게 멕시코시티 레포르마 대로에서 나체 시위를 벌이고 있는 베라크루스 주의 농민들. 그들의 절박함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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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FTA 홍보 팜플렛 만들어서 살포하고, 티비 공익광고 때리고, 학자들 시켜서 각종 통계 왜곡하고 온갖 짓거리 다 했다. 미국이 옥수수는 요구안에 포함을 안 시켰는데 멕시코 정부는 협상하면서 알아서 다 챙겨주었다. 미국과 멕시코가 협상한 게 아니라 미국끼리 협상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국 가서 공부하고 온 애들이 그렇게 헌납 짓거리를 한 거다. 미국은 보조금 문제 나오면 일체 말도 못 꺼내게 했다. 미국은 민간품목 등 14개를 모두 관철시켰지만 멕시코가 인정받은 건 불과 3개에 불과했다.

협상은 일체 비공개로 진행됐다. 기업가 중 일부가 협상 보좌 비슷하게 해서 같이 결합시키고, 내용이 확정될 때까지 아무한테도 오픈하지 않았다. 그러다 국회 비준 일주일 전에 산더미 같은 협상서류들을 갖다주더라는 거다. 그때가 92년인데 국회는 검토할 시간도 없었고 집권당인 제도혁명당이 다수여서 거수기로 통과시켜버렸다.

협상 후에도 엉망이었다. 이건 뭐 나라도 아니더라. 미국이 옥수수를 15년 동안 물량을 일정하게 늘리고 관세도 단계적으로 줄이는 것으로 협상했다. 양을 넘어서면 할당관세를 물리기로 한 거다. 그런데 카길이 물량을 쏟아 붇는데 멕시코는 할당관세를 안 물렸다. 멕시코 식품가공업자들에게 이득이 되니까 그냥 다 받아준 거다. 나라꼴이 어떻게 되었겠나.

농촌

마초아칸 주의 파닌디쿠아로 라는 농촌을 들렀다. 마을 입구부터 농토가 버려져있다. 마을이 휑하다. 유령 마을이 따로 없다. 농촌 마을 대부분이 그렇다. 한 집에 가봤더니 노인네가 손주 데리고 살고 있더라. 아들 셋이 다 미국에 가있다고 했다. 불법이민 한 거다. 아예 경작해서 못 먹고사니까. 미국 가서 남부농장지대나 건설 현장에서 허드렛일 하면서 돈을 보내주면 그걸로 먹고산다.

파닌디꾸아로 농촌마을의 폐가. 미국 옥수수의 대량 유입으로 NAFTA 이후 멕시코 농민의 1/3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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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현장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입구부터 빈집이고, 떠난 지 오래된 집도 있고, 어떤 집은 멀쩡한데 문마다 자물쇠 잡초 무성하고... 자동차는 대부분 바퀴가 빠져있다. 못 가져가니까 훔쳐가지 못하게 해놓은 거다.

영화

까를로스 까레라 라고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칸 황금종려상 받은 천재감독이 있는데, 90년에 데뷔작 발표한 후 지금까지 17년동안 영화 겨우 4편 만드는 데 그쳤다. 영화 만드는 족족 상을 받았던 감독이다. 그런데 멕시코는 지금 이 감독에게 영화 만들 기회를 안 준다. 영화산업의 인프라가 다 무너졌기 때문에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까를로스 감독은 먹고살기 위해 광고제작을 택하고 만다. 1년에 자기 영화 두 편만 만들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미국 헐리우드에서 연출 제의가 숱하게 들어오지만 거부한다고 한다. 영화가 나라의 정체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감독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정말 버틸 수 있을까...

문닫은 멕시코인 소유극장. 헐리웃 영화를 직배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 폐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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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전역에 공공기금의 보조를 받아 운영되는 극장이 조금씩 있었는데 이것도 최근 없어졌다. 예산부족으로 폐쇄하라는 건데 배경에 미국영화협회(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가 있었다. 잭 발렌틴 회장이 횡포를 부린 거다. 멕시코에는 영화감독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광고, 티비 방송 등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겨우 먹고산다. 이 사람들이 영화관람료 중 1페소씩 걷어 국산영화기금으로 쓰자고 영화인과 정치인들과 법제화를 추진했는데 이게 한 방에 정리되어 버렸다. 2003년 쯤 잭 발렌틴이 국산영화기금 운동 하지말라고 주장하자 맥시코 정부가 나서서 이 운동을 탄압한 거다.

수출, 외자

FTA 추진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다. 수출이 3배 이상 늘었다고 말한다. 맞다. 그런데 수출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미국의 빅3가 다 챙겼다. 5위가 멕시코 석유회사, 6위가 휴렛팩커드... 마킬라도라가 멕시코 수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대부분 조립가공인데 들여다보면 멕시코 국내 부품 소재 사용은 3%에 불과하다. 수출이 는다는 건 미국 회사의 수출이 는다는 이야기다. 본국 본사와 현지 법인 사이의 거래일 뿐인데 이걸 수출 통계로 잡으니 수출 증가라는 말이 되는 거다. 멕시코 부품 소재가 3%밖에 안되므로 따지자면 멕시코 경제에 남는 건 3%와 노동자들이 받는 노임뿐인 셈이다. 더군다나 국내 제조업 부문을 보면 마킬라도라를 포함해서 일자리가 15% 이상 줄었다. 농업을 빼고 제조업 분야만 봐도 그렇다. 수출 증대 숫자가 가지는 외형적 수치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멕시코 금융은 95% 정도가 외국계에 장악되어 있다. 멕시코 기업에는 대출을 아예 안 해준다. 한 회사가 망하면 연계된 회사가 망하니 연쇄 도산하는 일이 숱하게 벌어진다. 그러니까 마킬라도라 이야기하고 수출 늘었다고 떠드는 게 국민경제 차원에서 보면 얼마나 허구적이겠는가.

외자도 그렇다. 외자가 네 배 정도 늘었다. 그런데 외자 들어오면 포트폴리오 투자에 집중하지 회사를 만들거나 공장을 짓거나 하지 않는다. 기존 회사 중에 수익성 날 만한 것은 선별해서 인수합병해 버린다. 경제 외형은 소유주가 바뀔 뿐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노동자들은 대폭 정리해고 시킨다. 기존 생산 거래선은 외자 소유의 계열사로 돌려버린다.

예를 들어 월마트는 멕시코 현지 유통 1위인데, 지금까지 있으면서 단 하나라도 월마트 매장을 새로 만든 게 없다. 다 멕시코 유통회사 지점들을 인수한 것이다. 그것도 쓸만한 것만. 외국인투자가 늘었다는 말이 웃기는 게, 98년인가 멕시코 최대은행인 바나맥스 은행을 시티그룹이 인수하는데 인수대금이 125억불인가 그랬다. 이걸 놓고 외국인투자가 엄청 늘었다고 홍보했다. 은행이 외국인에게 넘어간 건데 외자 투자로 잡는다.

민영화

멕시코의 공기업 민영화는 80년대부터 추진되어왔다. 그러니까 NAFTA 체결되면서 민영화가 현저하게 늘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런 흐름을 강화한 건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통신회사인 뗄멕스라든지 도로 등이 민영화되어 있다.

웬만큼 버는 사람은 휴대전화 한다는 생각을 못한다. 서민은 없고 중산층도 요금 부담 땜에 수신 전용으로만 쓰거나 한다. 배겨날 수 없으니까. 휴대전화 가지고 있고 전화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신분을 표현하는 데 이르렀다.

멕시코의 길은 생각보다 잘 뚫려 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 지방으로 이동하다 문득 의문이 들곤 했다. 취재 차량 외에 도로에 차가 잘 안 보이는 거였다. 이유인즉 도로가 민영화된 지라 통행요금이 엄청나게 비싸 서민들은 전혀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 도로는 기업과 부자를 위한 인프라일 뿐 공공성 성격은 하나도 없다. 서민들은 대부분 좁은 국도로 다닌다.

신흥상업지구 산타페의 전경. 1700여 개 다국적 기업 현지법인이 입주해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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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을 갖는 공공재는 찾아보기조차 어려웠다. 빈민 지역에 가면 전기 가스 등 기본적인 것조차 안 들어온다. 그러니 전기를 불법적으로 몰래 끌어와 쓰는 일이 다반사다. 국민소득 5-6천불 수준인데도 구매력 수준은 세계 80위에 머물러 있다. 카를로스 슬림은 세계 3-4위 정도 규모다. 그러면서도 세계 100대 부자에 12명이나 들어있다. 80년대 민영화 과정에서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멕시코 최대 제빵기업 빔보, 코로나 맥주회사, 유리회사 비트로, 시멘트회사 세멕스 같은 기업들, 이들 기업들만이 FTA로 막대한 이득을 본 거다.

메탈클레드

충격이었다. 현장은 산 루이스 포토시 주에 속한 과달까사르라는 마을인데 미국하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도로망이 비교적 잘 연결되어 있는 산지다. 멕시코의 동북지방 국경에서 가까운 산 안에 있는 분지 같은 마을이다.

메탈클래드사가 산루이스포토시 주에 설치한 폐기물 처리장. 현재 폭발 및 오염확산을 막기 위해 멕시코 정부 예산으로 안정화 작업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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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코테린이라는 업체가 여기에서 워낙 폐기물 처리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메탈클레드가 이를 인수했다. 메탈클레드는 미국에서 석면 처리를 하던 크지 않은 회사였다. 그러다 메탈클레드가 미국의 각종 산업폐기물을 멕시코에서 처리하는 사업기회를 얻었다. 입지 선정에서 그 지역을 고르고, 금융시장 투자자로부터 펀딩을 받아 이곳으로 들어왔다.

멕시코는 건축허가 때 연방정부 허가, 주정부 허가, 그리고 최종 지방정부가 건축허가를 내게 되어 있다. 메탈클레드는 연방정부, 주정부 허가는 받았지만 지방정부 허가를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코테린 사로부터 사업권을 사서 합작을 했다. 여기에 학교도 짓고, 병원도 짓고, 건물은 창고로만 이용한다고 사기를 쳤다. 현지 고용 창출 효과 선전까지 곁들이며 주민들을 속이고서 대규모 산업폐기물 매립을 시작했다.

이 지역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산 너머 인접 마을에서 암환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갔던 마을에는 과달까사르에는 1200명 정도가 모여 사는데 여기서 1993년 이후 암환자 23명이 발생했고 사망했다. 기형아가 태어나기 시작하고, 척추가 갈라지거나 무뇌아가 태어나기도 했다. 그린피스가 현지조사를 한 결과 지하수맥이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산 너머 반대 마을과 지하수가 통해있었던 거다.

반대운동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지방정부도 눈치를 보게 되었다. 결국 주민 압력에 밀려 생태보호구역으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메탈클레드가 온갖 공작을 폈다. 미 대사관 직접 전화하고 압력 넣어서 이런 식으로 하면 미국투자 다 끊는다고 압박했다. 뇌물 작전 펴고 주정부 주지사 선거에 개입하고. 그러다 주정부 관료들의 뇌물 사건이 폭로되기도 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택한 수단이 NAFTA 협정 11조였다. 멕시코 정부가 안 해줘서 수익을 못 냈다며, 미국 기업이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버린 것이다. 11조에 따라 불법적인 사업을 펼치다가 주민의 반발로 사업을 못하게 되자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멕시코 정부는 1650만 달러를 배상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업과 멕시코 정부가 결국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멕시코 사람들의 생존의 권리이자 공적 규제조차 완전히 무력화되어버린 것이다. 처음 NAFTA 협상에서 이 조항 넣을 때 누구도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조항인 줄만 알았지, 막상 구체적인 사건으로 현실화되고 보니 협상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 실감하게 된 것이다.

멕시코의 명과 암, 그리고 한미FTA는

멕시코가 시사하는 것은 미국과 중진국 내지 개도국과의 최초의 비대칭적 FTA라는 건데, 핵심이 뭐냐면 비교열위에 있는 나라는 미국자본에 다 포섭된다는 거다. 멕시코 국민경제는 해체되었고, 민중의 생활은 파탄 났다. 멕시코에는 한마디로 국면경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FTA가 개도국의 국민경제를 해체하는 프로젝트란 걸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재주 있으면 이야기해도 좋다. 한미FTA가 추진될 시 멕시코 사례와 어떤 점이 다를 게 있다는 건지.

방영을 앞둔 소감

지난 5.1일 소칼로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연설하는 마르꼬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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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런데 FTA에서 영향권 밖에 있는 것이란 없다. 모든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바꿀 것이다. 논리적으로 FTA가 어떤 파탄을 초래할 것인지 국민적 공감을 크게 형성하기 어렵고, 또 한미FTA 반대 진영이 이를 실천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나 싶다. 이번 프로그램이 FTA를 실체를 돌아보는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론인으로서 소명감을 갖고 만들었다. FTA의 진실을 가리는데 작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지난 번 차베스 인터뷰 이후 공격을 좀 받은 적 있는데 이번에 또 소동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 물론 휘둘리지 않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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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펌/민중의소리] 차별 앞에 장님이 되버린 헌법재판소

 

차별 앞에 장님이 되버린 헌법재판소
헌재 안마사자격 위헌 판결에 시각장애인의 삶, 휘청휘청
윤보중 기자    메일보내기  

   
 지난 5월 25일의 헌법재판소 판결이 시각장애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그 파장이 점차로 드세지고 있다. 매일 한강에서 투신하는 시각장애인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곳곳에서 집회와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직업의 자유가 생존을 박탈한다?
  
  헌법재판소는 2003년 6월에 이미 한번 합헌 결정한 바 있었던 "시각장애인만을 안마사 직업을 할 수 있도록 한 조항"에 대해 지난 5월 25일 정면으로 뒤집는 위헌 판결을 내렸다.
  
  소송의 주도자는 전국안마시술소업소연합회. 결국 위헌 판결로 관련 업계들은 환호성을 터트리고 있지만, 그 결과는 엉뚱하게도 시각장애인의 생존권만 유린하고 있다.
  
  전체 장애인들 중에서 그 구성비에 의한 취업분포에서도 시각장애인은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취업률을 보이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적합직종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업종을 확장하고 새로운 신기술을 도입한 직종 개발은 여전히 미래형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는 마사지 업소 주인들에게 이들 장애인의 선택은 자유가 아닌 생존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보직종은 특권이 아니다
  
  맹인안마사로 통하는 안마사 제도는 1912년 조선총독부에 설치된 경생재생원에서 시각장애인들에게 침술과 안마술 교육을 실시하면서 시작됐다. 그동안 이 제도가 항상 시각장애인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 안마사 제도가 과거부터 시각장애인의 업종이라고 하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외국의 경우에도 장애인들을 위해 특종업종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사례가 있다. 유보 직종이라는 것인데, 특종 장애유형의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고용토록하는 제도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 시각장애인에 대해 자판기 운영을 유보직종으로 하고 있다.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은 안마업을 유보직종으로 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에는 주차안내원이나 복권판매업 같은 직종을 유보직종으로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유보직종은 각국의 역사, 문화적인 차이에 의해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산업화된 사회에서 장애인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장치로서 보편적인 인권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에는 예외가 없다.
  
  결국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장애인들에게 생존을 보장해주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던 유보직종을 폐기한 것이다.
  
  독자적으로 안마업소를 차리기 어려운 시각장애인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 같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현실화 된다면 안마사를 하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은 실직상태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업소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장애인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소수와 특권적 소수를 구분하지 못하는 헌법재판소
  
  2003년 헌법재판소가 합헌 판결을 내릴 당시에 "안마사는 원칙적으로 시각장애인에게 허용되는 업종이라는 법의식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위헌판결이 "의료법 규정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있는 구 직업안정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과 "현행법상 인정되고 있는 상당수의 자격위임 조항들을 모두 헌법에 위반된다"고 봄으로써 "복지행정국가의 필수적"인 위임입법에 존립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2006년 위헌 판결문에는 "시각장애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하여금 안마사 자격을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시각장애인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한 등록안마사를 위하여 신체장애인 나아가 일반국민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함으로써"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헌법재판소는 2003년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행정복지국가 이념을 중시한 나머지, 장애인을 사회적 소수로 보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2006년, 불과 3년만에 사회적 분위기는 100여년간 형성된 법의식을 뒤집을 만큼 급변하였고, 사회적 소수였던 그들은 이제 안마사를 하기 위해 줄서 있는 건강한 시민들에게 특권적 위치에서 불평등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합헌에서 위헌으로 판결을 뒤집은 헌법재판소가 지난 3년간 보아온 한국사회의 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관련기사]
“헌법재판소는 위헌판결 즉각 기각하라” ㅣ 맹철영 기자


2006년06월03일 ⓒ민중의 소리

 

 

 사실 요즘 머리가 복잡합니다. 공부도 안되고. 월요일에 광화문 집회 갔다가 학교 갔었고, 오늘도 마포대교 밑 둔치에서 하는 집회 갔다가 들어왔는데, 마포대교 위 교각 끝에는 아직도 시각장애인 동료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고,

  ...

 이땅 시각장애인들은 안마 외에는 할 것이 거의 없답니다. 좀 배우고 운 좋은 사람들은 맹학교 교사나 복지관 직원 하고, 대부분은 안마죠.

 복지관이나 양로원에 취직 시키면 된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지만, 그곳에서 받아야 얼마나 받겠습니까... 그래도 밖에서 시술소 일 다니거나, 자기 개인 치료실 하면 그럭저럭 자녀들 교육시키면서 쪼들리지 않게 살 정도 버는데, 복지관에서 안마하고 그 정도 받긴 힘들 듯해요.

 지금도 몇몇 복지관에서 하고 있는데, 적게 벌어도 일반 직장인처럼 살길 원하는 사람들이 지원해서 하고 있죠. 그렇지만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내몰면 안되는데...

 저랑 같이 맹학교에서 교육(안마, 침) 받은 분들이,  전직 고등학교 수학교사, 여행사 부사장 출신,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뭐더라 어떤 과목 가르쳤다는 교사, 수중용접 일 했다는 형, 동사무소에서 일했던 사람 등등...

 그 전에 뭘 했든, 일단 실명하면 맹학교에서 안마 배워야 자립할 수 있는 현실이죠. 아휴~ 그만 해야지...^^

 

 

 음... 수요일에 개인적으로 받은 메일의 일부분이다. 시각장애인 뿐이겠냐만, 그래도 지켜왔던 건 지킬 수 있는 건 지켜야되지 않을까. 도대체 누가 위헌소송을 냈나했는데... 참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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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남자는 영원한 철부지" 남성 동성애자의 결론



에릭 헤그만 지음. 펀북스,256쪽, 7800원

'남자는 다 그래'. 유행가 가사냐고? 천만에, 버젓한 책 제목이다. 리드미컬한 제목처럼 책은 톡톡 튀고 간결하다. 정색하기보다 낄낄대고 무릎 쳐가며 읽기 딱 좋은 책. 책 자체도 그렇지만 이런 책들이 쏟아져 나오며 독자에게 선호되는 최근 출판 풍토가 흥미롭다.

아무튼 책은 남자보고서.남자해부서다. 필자는 게이 남자. 독일 함부르크에서 문화.멀티미디어.데이트.인간관계 등을 소재로 저술 활동을 하는 '튀는 게이 프리랜서'다. 필자는 "나 자신이 완전한 남자이며 남자 파트너와 소통하고 여자들의 허물없는 친구라는 점에서 남자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강조한다.

책의 결론은 하나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든 남자는 똑같다는 것. 필자가 명명한 '사피엔스 페니스종'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자상한 사람이든 마초든 다 똑같다. 절대로 철들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발하고 코믹한 안목으로 그의 파트너이자 친구인 남자들을 해부한다. 아이 장난감을 갖고 놀고, 섹스와 멋진 자동차, 수퍼맨과 경주에 탐닉하고, 이별과 종말을 두려워한다. 이 가운데 엄살이 심한 남자들의 철없는 얼굴이 드러난다. 평원에서 달리던 고대 전사의 승전보를 잊지 못해 여전히 내기와 승부에 집착하는 남자들은 3분에 한 번씩 섹스를 생각하며 '브레인 피트니스(사고가 잘 되게 머리를 정리해주는 것)'를 한다는 것이다. 책은 그렇게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니 태생적으로 어른이 될 수 없는 현대 남성의 유아성을 섭렵한다. 이들을 '피터팬종'이라 명명해도 좋으리라.

필자의 약력도 눈길을 끈다. 그는 저술 활동과 함께 함부르크 온라인 중매소의 데이트 전문가로 이메일.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철인 3종 경기 트레이너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오토바이와 만화의 열혈 매니어다. 그 자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물기를 거부하며 한 순간도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허전해하는 유아적 남성인 것이다. 사소한 수다떨기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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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정작 ‘장정일’은 누구인가

정작 ‘장정일’은 누구인가

신간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중 남재일의 장정일論

2001-12-21 오전 10:16:01

 

 

장정일의 인간적 면모와 문학세계를 종합한 일종의 평전의 책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행복한 책읽기)가 지난달 출간돼 화제다. 이 책에는 구광본, 임형욱 등 동료 문인, 변호사 강금실, 전직 기자 남재일 씨 등의 글과 장씨 본인의 작품 및 단상이 담겨 있다. 영화 제작이 추진 중인 시나리오 ‘보트 하우스'도 실렸다.

20컷에 이르는 사진 자료와 소설가인 부인 신이현이 그린 일러스트들을 삽입함으로써 작가 장정일의 모습을 더 실제적이고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을 출판한 ‘행복한 책읽기’는 “장정일이라는 이름 석자는 TV뉴스를 통해 대한민국 곳곳에 파고들었지만 정작 장정일이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인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우리시대의 인물읽기 시리즈의 첫 번째 인물로 선정했다.

특히 ‘거짓말 사건’이후 장정일은 슬그머니 문학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난 듯이 보이지만 그를 다시 조명해봐야 하는 이유는 장정일이 일으킨 파장이 한때의 소동이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제대로 탐구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장정일..>중 소설가 장정일을 오랜 기간 만나왔던 남재일(전 중앙일보기자, 고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씨의 글 전문을 필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싣는다. 편집자


작가 장정일을 집중 재조명한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는 장정일의 인간적 면모와 문학세계를 종합한 평전이다. ⓒ행복한 책읽기


아주 단단하고 뾰족한 그리움

프롤로그

햇수로 1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기자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사무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적이다. 특히 문화부에서 만난 작가들이나 영화감독들과의 관계는 그 이중적 성격이 더 강했다. 취재대상이 개인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고, 취재내용도 다분히 사적인 예술세계를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맺어지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기자직을 그만두고 나서 뒤돌아보면 결국 기자가 만나는 사람은 두 부류밖에 없는 것 같다. 하나는 내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필요에 의해 만나서 사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지만 그 사적인 친분이 필요의 부재를 대체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장정일을 만난 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를 발표한 직후 문학담당이었던 나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느 다른 작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만나 술 마시고 문학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헤어지는 관계를 유지했다. 다른 담당에 비해 취재원과의 관계가 사적인 편인 문학담당 기자가 성실하게 취재원 관리를 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기자생활을 그만두면서 취재원 관계로 만나던 사람들 대부분과 사적 친분도 흐지부지됐는데, 장정일과는 여전히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만남의 성격도 달라졌다. 더 이상 만남의 내용을 음주량으로 채우지도 않게 됐고 문학에 관한 얘기도 하지 않게 됐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이 대구의 한 서점에서 만나 저녁 먹고 차 마시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지는 게 보통이다. 가끔씩 이른 시간에 만나면 영화를 보거나 목욕탕에 가는 일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둘 사이의 침묵이 불편하지 않고 아주 오랜만에 만나도 엊그제 본 것처럼 어색하지 않게 됐다.

더 이상 주장도 반박도 않게 됐고, 남들 걱정 않고 세상 걱정 않게 됐다. 다변으로 친밀함을 표현하고 날선 주장으로 서로를 보여주지 않아도 투명하게 보이는 관계. 그래, 어느새 우린 친구가 돼 버린지도 모르겠다.기자 생활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친구가 된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정일의 경우는 그 과정이 좀 특이하다.

영화감독 H의 경우는 처음부터 취향이 끌렸고 자주 오래 만나면서 친해졌다. 연애 초기의 남녀가 그렇듯이 하루가 멀다하게 만나고 주변사람들 연루시키고 단둘이 여행도 가보고 개인적인 비밀도 털어 놓으면서 친구가 됐다. 장정일은 첫 만남부터 H의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H는 완전무명의 감독이었을 때 처음 만났고, 장정일은 이미 문학담당 기자의 고정적인 취재원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첫 대면했다. 그리고 장정일을 처음 만났을 때는 개인적으로 끌리진 않았다. 기사의 소재가 되는 작가이고 외모나 글이 다 완강하게 자기를 고집하는 그 강한 힘에 호기심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장정일과 나의 공통점을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한 일(一)자라는, 이름에 쓰면 단명하거나 고독해진다는 그 글자로 끝나는 것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금 내가 그를 평생 변하지 않을 친구로 생각하게 됐는지 그 계기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를 만날수록 나를 끄는 것은 촉각적인 매력이 아닌 어떤 막연한 믿음이라는 것만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오래 보지 않아도 한가닥은 같이 있는 것처럼 늘 맞닿아 있고, 시간 오래 흘러 피차 이것저것 많이 변해도 유행가의 곡조처럼 변치 않을 마음의 한 대목은 나눠 가질 거라는 믿음 말이다. 나는 그러한 믿음이 언제 어떻게 내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는 일은 내 개인적으로는 그 믿음의 진원지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첫 만남

서소문 중앙일보 구내 커피숍에서 장정일을 인터뷰하기 위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직후 그가 호주머니에서 신문에서 도려낸 작은 기사조각을 꺼냈다. 모 일간지에 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 대한 서평이었다.

“아니 작가가 1년 동안 공들여 쓴 소설을 이렇게 한마디로 매도할 수가 있심니까. 기자가 그럴 권리가 있심니까.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안 쓰면 되는 것 아닙니까.”그가 보여준 기사 조각은 ‘신간안내’ 코너에 실린 한 줄짜리 서평이었는데, “어느 성도착자의 변태적 성 행각을 그린 소설”이라고 간단하게 언급돼 있었다. 내가 봐도 그 기사는 당시 장정일이 가진 뉴스가치를 감안하면 이상하리만치 홀대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상했던 것은 극도로 흥분한 장정일의 태도였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받으면 몹시 감정이 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평가에 조금도 동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의 작가들은 속으로 삭인다. 불만을 터뜨려 봤자 혹평이 찬사로 바뀌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평가에 대한 침묵을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보는 작가에 대한 관습적인 시선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기자가 작가를 만날 때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 관습적 시선이 바탕에 깔려 있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고. 장정일은 그 시선의 요구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낯섬......혼돈......판단중지......호기심의 순으로 나는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 느낌은 적정한 거리를 전제로 더 이상 다가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못하게 하는 관찰에의 욕구 같은 것, 다시 말해 관음증적인 것이었다.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제안으로 신촌에 있는 우드스탁에 가서 맥주를 마실 때까지도 이 야릇한 긴장감은 풀리지 않았다. 거기서 오고간 이야기 중에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물 이야기밖에 없다. 아마도 재즈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재즈를 들으면 온 몸의 나사가 죄다 풀리는 것 같는 느낌이 드는데, 물에서 천천히 유영할 때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고 하자 그는 “목욕탕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목욕탕보다 수영장을 좋아하고, 물과 햇빛과 바람이 적당히 섞여 있는 공간이 좋다”고 하니까 그는 “아주 감각적이네요. 나만큼이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어느 시점에선가 그는 아주 사적인 스토리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나는 순간 이런 얘기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해도 되냐는 생각이 들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개인적인 관계로 빠져드는 데 대한 기자로서의 반사적인 거부반응도 있었지만 공통의 성감대를 찾아 전신을 포개놓는 그 거침없는 직설의 화행을 통한 관계맺음이 개인적으로 익숙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드스탁을 나오면서 나는 인터뷰할 때 그의 태도나 맥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들이 그로서는 최대의 호의를 베푼 것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그와의 사이에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은 별로 사라지지 않았다. 뭐랄까, 그의 질감은 아주 물컹한 것과 아주 날카로운 것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었다. 그의 외모와 표정부터가 그랬다. 체형과 얼굴을 롱샷으로 잡으면 동자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표정을 클로즈업하면 검술 수업을 받는 소년 사무라이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말은 동자승의 감수성으로 세계에 다가가고 사무라이의 칼 끝으로 인식하는 절대고독의 울음이 배어 있었다. 내가 본, 혹은 만든 그의 이미지에 내재하는 이 불균형의 이원론은 그를 거듭 거듭 만나면서 하나의 탄착점으로 녹아들어 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하나의 완성된 탄환으로 정해진 탄도를 날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변한 것은 그가 아니고 나의 시선일 수도 있다. 어찌됐건, 지금 나에게 그는 하나의 양감, 그리고 하나의 질감으로 와 닿는다. 그건 작가 장정일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인간 장정일일 수도 있다. 그 둘 사이에 부조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촌에서

내가 처음 장정일을 만났을 때 그는 은평구의 한 동네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 가보지 않았다. 주로 신촌에서 만나 소주를 마시거나 락카페에서 음악을 들었다. 문학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중간에 합석을 하지 않는 한 네 명 이상을 넘지 않는 자리였다.

그는 사람 많은 행사와 모임을 피했다. 이때 그에게서 받는 인상은 약간 불안하고 늘 진지하고, 그리고 강한 공격적 의지로 생활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거의 농담을 하지 않았다. 술은 소주를 좋아했는데 마시는 속도가 물 마시듯 했다. 술이 세서 잘 취하지 않았지만 일단 본인이 ‘갔다’고 느끼면 소리없이 사라지는 버릇이 있었다. 한번은 이대 앞의 ‘올로올로’에서 2차로 맥주를 마시다 화장실을 갔는데 소식이 없어 한참이나 찾아다닌 적이 있다. 나중에야 나를 찾으러 나온 김완준으로부터 ‘자주 그런다’는 얘길 듣게 됐는데, 사실 이때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습성을 가진 인물을 내 주변에서는 처음 봤기 때문에 무례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하지만 한참 후에야 그런 버릇이 자신을 지키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장정일 특유의 직설법임을 이해하게 됐다.또 한가지 이때 받은 인상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장정일의 돈 씀씀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장정일이 지갑을 갖고 다니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못 본 것인지 아예 지갑이 없는 것인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늘 만 원짜리 몇 장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물론 신용카드는 없다. 그러니 그는 하루 지출할 최대한의 액수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간혹 비싼 술자리로 이어지면 그는 계산대 앞에 그냥 서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면 장정일의 문청시절 지기이자 나의 고등학교 짝지이기도 한 김완준이 우스개로 “그게 다 장정일의 배째라 작전이야”라고 속살대곤 했다.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장정일의 진짜 작전임을 깨달았다. 그것도 경제의 범위에 한정된 작전이 아니라 그의 삶을 관통하는 작가로서의 생존전략임을 알 수 있게 됐다.“Y형 같은 경우만 해도 그럭저럭 몇 년 소설쓰다 힘 떨어지면 어디어디 문창과 교수로 안 가겠심니까. 그런데 나는 전혀 호환이 안 되는 작갑니더. 글 못 쓰면 죽어야 됩니더.”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작가라는 말이 문화적 호사를 예약해 주는 작위가 아니라 직능을 보증하는 자격증이어야 했던 듯 싶다. 그의 불온한 발언들, 그의 불안한 생활여건들, 그의 불투명한 미래를 상상해 보라. 그 어느 것도 쉽게 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이 삼중의 악조건을 작가라는 하나의 끈으로 꿰어 매고 끌고 나갈 수 있는 출구가 필요했다. 그 출구는 몹시 좁았고 그는 자신의 몸을 거기에 맞추기로 작심하고 혹독한 감량에 돌입했다. 작가에게 덧씌워지는 화려한 장식은 노동에 방해가 된다.

그러면 버린다. 어떻게? 존재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얻는 날선 자의식의 검으로 단칼에 베버린다. 상처에서 나는 피는 고독에 소비되는 영양의 보충을 위해 핥아 먹는다. 발언의 불온지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든 국가에서 권장하는 커뮤니티에 소속되지 않는다. 어떻게? 우선 세계에서 가장 결속력이 강하고 보수적인 한국의 학부모는 되지 않는다. 다른 커뮤니티도 태업으로 일관한다.

다음은 불안한 생활여건을 불안정하게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감각을 가난한 놀이에 길들인다. 택시와 양주를 적으로 간주하고 핸드폰과 신용카드를 배척하고 브랜드 중독에 걸린 미인을 보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전염병 환자로 기피한다. 그렇게 긴축으로 남는 힘은 모두 불안한 미래와 싸우는 병참기지에 저장한다. 책을 사서 독서일기를 쓰고, 재즈CD를 사서 말라가는 가슴 한 귀퉁이에 스프링클러를 달아주고, 가끔 지기의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사면서 체온을 나눈다.

그렇게, 그렇게 하산할 날을 꿈꾸며 언어의 칼 끝에 시선을 집중하다 보면 앞을 가렸던 안개는 걷힐 것이다. 거기에 어떤 풍경이 오든 그게 무슨 대수랴. 나는 장정일의 삶의 서사가 구성된 과정을 이렇게 상상해 본다.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해 보였던 그의 단속적인 행동들도 이 서사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내가 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거짓말 사건’이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를 좀 더 가까이서 알 수 있게 됐고, 이때 받은 인상이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결정지웠던 것 같다.

 

 


거짓말과 장정일의 진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한창 논란이 되고 있던 97년 봄 나는 ‘J─스타일’이란 특집면을 만드는 부서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2년 앞서 영화담당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취재원으로 장정일을 만날 일은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것과 관련해서 전화를 했고 가벼운 안부 정도를 묻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J─스타일의 창간호를 준비하고 있을 때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한창 논란이 됐고 나는 장정일의 입장을 옹호하는 기사를 썼다. 그 직후인 97년 3월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다시 장정일에 관한 기사를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기사는 한동안 뜸했던 그와 다시 자주 접촉하는 계기가 됐다. 장정일로서는 ‘거짓말’을 둘러싼 상황이 심적으로 부담스런 상태였고, 사회적 반응이 어떻게 귀결될지 궁금해 했다.

나는 “성적 표현의 수위나 여주인공이 고등학생이란 설정이 금기의 선을 넘어간 것 같다”며 “내가 판사면 골치 아프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한술 더 떠 “맞심더, 내가 판사라도 구속 안 시키겠습니까”라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었지만 그는 이미 구속을 각오한 것 같았고, 그 소설 자체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던져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한창 논란을 빚고 있던 5월 나는 칸 영화제에 가게 됐다. 그때 장정일의 처인 신이현은 파리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 장정일을 만났을 때 그는 “파리로 나오면 집사람한테 재워달라 하이소”라며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칸 영화제에 갔다가 나오면서 파리에 들러 신이현의 집에서 이틀밤을 신세졌는데, 그때까지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고작 전화로 원고청탁하면서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장정일은 남들이 불편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일을 아주 쉽고 편하게 생각하고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거짓말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문학계의 예술작품 인정 감정서가 필요해서 적임자를 찾고 있을 때였다. 자격 요건은 문학평론가나 문학전공교수였는데, 대중적인 지명도가 높은 인물일수록 유리한 상황이었다.

나는 평소 장정일과 친분이 있던 이인화가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옆에 있던 신이현도 같은 뜻을 비쳤다. 하지만 장정일은 난색을 표명했다. 대학교수로 있는 사람을 이 사건에 연루시켜서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장정일은 이인화와 함께 계간지 좬상상좭의 편집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냥 쉽게 부탁할 수도 있을 법한데, 끝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이후 이 문제가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기 직전 신촌의 한 술집에서 만나 검사의 질문에 대한 예상 답변을 만들 때의 모습이다. 이런저런 가질문을 만들어 보고 그에 대한 모범답변을 요약해보는 일을 하다가 문득 그러한 광경 자체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그는 내뱉듯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사건 끝나면 닥치는 대로 대중매체하고 인터뷰해야겠심더. 여성지하고 하고 주간지하고도 하고 연예정보지하고도 하고 되는 대로 많이, 평소에 내 주장을 해야 싸움이 될 거 아닙니까.”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나도 상가도 가고 결혼식도 가보고 그래야겠심더.”나는 지금도 그 말이 반어적인 자기 다짐으로 이때껏 자기가 살던 방식을 더욱 굳건하게 지켜나가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작지만 빈틈없던 단단한 아성의 균열을 목도하는 탄식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다만 그는 지겹도록 바뀌지 않는 세상의 공고함을 소름끼치게 피부로 느낀 듯 했고, 문학판의 대응자세에 대해서는 많이 섭섭해했다. 그러나 그 섭섭함에 대해서는 이내 자신의 퍼포먼스에 뒤따르는 필연적인 증상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삭였다.

이때까지도 그의 이미지는 분노에 찬 도시의 게릴라나 머리띠를 동여매고 파업을 주동하는 선동가를 연상시켰다. 거기에는 늘 적이거나 동지이거나 관중의 존재가 군살처럼 붙어 다녔다. 하지만 실형을 살고 나온 다음 그는 훨씬 날씬하고 단단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옛날 소년원 생각하고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감방도 많이 민주화됐심더. 같이 있던 사람들도 비교적 양질이고요.”그는 남의 얘기를 하듯 무심하게 감옥생활을 얘기했다. 마치 정리된 기억의 한 토막을 서둘러 과거로 흘려보내고 더 이상 이 문제로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미 그는 감옥에서 많은 생각을 한 듯했다. 어쩌면 감옥의 창살 틈새로 새삼스럽게 파고드는 외로움을 껴안고 한동안 씨름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세상과 싸워 이기기보다는 자신과 싸워 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확실히 그는 세상을 바꾸려는 파업에서 오래 자신을 지키려는 태업으로 삶의 전략을 수정한 듯 했다.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이 문제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문학동네에 대해서도 별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얼핏보면 예나 다름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주 조용하고 미세하지만 뭔가 확실한 내면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마디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사람관계는 변했다. 사무적인 것은 더 사무적으로 개인적인 것은 더 개인적으로 정리가 됐다. 어떤 혹독한 사회적 체험을 겪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에게도 피아의 경계가 엄격해질 대로 엄격해졌다.

그는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관계의 정치적 항상성도 물리적 연속성도 기대하지 않게 됐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한순간이라도 고마움을 느낀 사람들에게는 보복하듯 두 배의 정을 주고 남이 된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게 됐다.감옥에서 나온 한참 뒤의 일이다. 장정일은 내게 자신의 변호를 맡은 강금실 변호사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지금 벤처기업 전문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변호사로 있는 강 변호사는 장정일의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선뜻 자기가 하겠다고 자원해서 변호를 맡았다.

강 변호사와 저녁을 먹기 위해 대구에서 상경한 장정일은 신촌의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약속장소인 강남의 고급음식점에 나타났는데, 그때 그는 만 원짜리 50장을 종이에 싸서 들고 왔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반드시 이 돈을 다 써야 합니데이.” 나중에 강 변호사가 만류하는 바람에 그는 그 돈을 결국은 다 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나는 그때만큼 장정일이 거액의 돈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대학친구가 대구에 들러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전화를 했는데 마침 장정일과 선약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셋이서 자리를 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이 친구는 교수 특유의 강의조로 이야기를 했다. 자칫 작가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어투였는데 장정일은 시종 진지한 태도로 듣고 있었고 간혹 맞장구도 쳐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문화판 사람과 교류가 거의 없는 이 친구도 내게 “그 친구 참 괜찮네”라고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 자리가 참 불편했다. 마치 맞지 않는 남녀를 소개시켜 주고 커피를 얻어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미심쩍은 기분을 장정일은 단박에 묘한 감동으로 바꿔놓았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졌다. 식당 입구에 발목이 잡힌 우리는 한동안 서서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장정일이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가더니 한참만에 우산을 하나 사 가지고 왔다. 분명히 우산은 하나였는데, 그 우산을 내 친구에게 주면서 양복입었으니 우산을 가져가라고 주고는 정작 자기는 다시 빗속으로 뛰어가서 택시를 잡아타고 가 버렸다. 우산을 세 개 사서 하나씩 쓰는 것은 장정일답지가 않다. 그건 사치다. 두 개 사서 그 친구와 자신이 쓰는 것도 당치 않다. 그건 배신이다. 그리고 두 개를 사서 그 친구와 내가 쓰는 것도 이상하다. 그건 동어반복이고 사족이다.

그는 산문을 쓰지만 영혼은 시인이다. 애정표현도 시적이다. 그는 늘 하나씩 저 앞에 먼저 징검다리를 놓아준다. 그 울퉁불퉁한 돌덩이를 하나씩 밟아나가면서 그의 삶의 문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의 문학적 방법론을 온전히 수용하는 데도 꽤 시간이 필요했다.

문학담당을 맡기 전에 순전히 독자의 위치에서 읽었던 『아담이 눈뜰 때』는 뭔가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 시니컬하고 센티멘털한 질감은 내 취향과 맞아떨어졌지만 그 숱한 아포리즘들은 너무 익숙해서 개안의 스파크를 일으키기보다는 감각적 몰입을 방해하기만 했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는 도발적이었지만 아주 수학적이었다. 한마디로 질감이 풍부한 글에 반사적으로 몰입하는 내 문학적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소설이었다. 흔히 장정일을 얘기할 때 하루키를 거론하지만 하루키와 장정일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아마도 ‘신세대 문학’이란 범주로 구성한 사회학적 경향성이 닮았다는 것 이외에 정작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학적 방법론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하루키의 문학은 아름다운 소비다. 그것이 재즈이든, 스파게티든, 섹스이든, 사랑이든 그는 불가피한 현대적 삶의 조건들 속에서 순간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 아름다움은 집단을 통한 전면전을 진심으로 포기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대가이며 진정으로 개인을 찾아낼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개인을 만나기 위해 소설을 쓴다.

반면 장정일의 문학은 치열한 탕진이다. 사회가 드리우는 삶의 조건을 바꿀 수도 없고 나를 온전히 가지고는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가진 것을 자진 반납함으로써만 개인의 자격증을 얻게 되는 것, 그러니까 훨씬 더 착한 바보의 전략이다. 그리고 이 바보는 동시에 의욕적이기까지 해서 개인을 규합해서 세모난 네모의 세상을 만들기를 꿈꾼다. 장정일은 여전히 집단과 싸우기 위해 소설을 쓴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루키를 보는 장정일의 태도다. 삼 년전쯤인가 장정일의 ‘정말 좋심더’라는 말을 듣고 대구 두류산 공원 수영장에 같이 갔을 때의 일이다. 목욕탕이건 수영장이건 그는 본전을 빼겠다는 듯 2인분을 해치우는 버릇이 있는데, 이날도 10여 회 수영장을 왕복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수영장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주며 ‘정말 좋지요?’를 연발했다. 나는 “뭔가 허전하지만 대중 수영장치고는 정말 좋다”고 그의 기대수준의 절반으로 답했다. 그리고 내가 가 본 모 호텔 수영장의 경우를 얘기했다. 그 수영장은 탁 트인 하늘을 보면서도 뭔가 수영장에 안겨 있다는 안락한 소속감을 주었다. 반면 두류산 수영장은 넓지만 갇혀있거나 던져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 그 호텔 수영장에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자 장정일은 한참 있다 입을 열었다. “그러게 소설도 하루키처럼 놀아봐야 하는데 말입니더.......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거는 못 쓸 거 같심더.”

나는 요즘 하루키를 읽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장정일은 요즘도 어쩌다 하루키 얘기가 나오면 “좋은 작가지요”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하루키처럼 쓸 수 없고, 쓰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루키의 어떤 작가적 재능의 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한다. 이런 태도는 하루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독서일기에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동료작가들 칭찬도 많이 한다. 그것도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구체적 내용을 적시한다. 교과서를 통해 배우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사람을 통해 학습을 한 개인사 때문에 사람을 참고서로 해독하는 학승 기질은 여전하다. 아마도 그 힘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 부분으로 파악하고 수용하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 같고, 그 거리야말로 때가 밀릴 듯이 치열한 인간관계가 삶을 말아먹는 환경으로부터 작가로서의 자신을 보존하는 안전장치가 아닌가 싶다.

대구에서

7월말 대구에서 거의 1년만에야 장정일을 다시 만났다. 대구 시내 한 가운데 집필실을 마련했다고 해서 내가 가보자고 청했다. 두어 평 남짓한 집필실은 원래 창고로 쓰던 공간을 개조했는데, 벽과 바닥을 모두 목조로 마름질해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서가의 책과 책상 위의 노트북, 그리고 오디오 세트가 살림의 전부였다. 바람없는 대구의 여름을 선풍기도 없이 날 참인 것 같아서 “더워서 글이 써지겠냐?”고 묻자 그는 “많이 더우면 뻘거벗고 바닥에 가만히 누버 있심더”라고 한다.

게으른 중처럼 묵은 빡빡머리를 하고 있는 점을 빼면 그는 일 년 전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일 년 전 내가 대구에 머물 때 그는 대구에서 제일 큰 음반가게에 데리고 가기도 했고, 집에 불러 그 동안 사 모은 오디오 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자그마한 스파게티 전문점에 가서 저녁을 사 주면서 “이런 가게 하나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신이현은 파리의 가정집에 들어가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 또 언젠가는 대학가 근처에 카페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구는 장정일이 나고 자란 곳이다. 덥고 춥고 사방이 산으로 막힌 곳, 논쟁 좋아하고 고집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곳에서 장정일은 뿌리를 내리고 싶어한다. 집에서 버스 타면 20분 거리의 시내에 나와 CD를 사고 영화를 보고 지기를 만나거나, 그의 말대로 “목욕통에서 두어 시간 노는 것”이 일상이다.

그는 집을 나와 멀리 가는 것을 불편해 한다. 나는 그가 여행 가는 걸 본 적이 없다. 등산도 딱 한 번 서울에 있을 때 북한산에 같이 간 적이 있을 뿐이다. 그는 아주 익숙한 뒷골목을 배회하는 소년처럼 논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 곳에서 조그만 차이를 찾아내서 ‘대구 100배 즐기기’를 한다. 이전부터 소박하지만 실속있는 음식점을 잘 찾아냈던 그는 이번에 만났을 때는 청도의 역전에 있는 추어탕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추어탕을 직접 끓여서 그 자리에서 퍼주는 그 식당은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한꺼번에 나가는 공사판의 식당 같았다. 외양도 허름했지만 밖에서 제각각 기다렸다가 몰려들어가는 광경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맛있는 3천5백 원짜리 추어탕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날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차를 몰고 청도까지 가서 추어탕을 먹고 대구로 돌아온 것이 전부다. 글을 써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내고, 그의 소설이 대구 사람보다는 서울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서울에 있는 영화사나 출판사 사람들이 계약하러 대구에 내려오는 일이 종종 있다는 점을 빼면, 그의 생활은 영낙없이 동네에서 이발소를 하거나 편의점을 하는 대구의 평범한 아저씨다. 나는 그가 어떤 식으로든 포즈를 취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는 가만히 있거나 바로 액션을 취한다. 연(然)하지 않고 직선으로 달려가는 그의 행동은 온갖 호의와 친절과 우아함으로 장식된 렌즈 속에서는 불행히도 굴절된다. 볼록렌즈이거나 오목렌즈이거나 그는 한동안 일그러진 채 비춰졌고, 지금도 그를 비추는 초점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는 그런 흔들림에 동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초점이 되는 것, 그리고 렌즈가 거기에 맞출 때까지 기다리는 것. 내가 대구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타자의 자리로 여기지 않는 것.바람 한점 없는 대구의 한여름을 그는 카센터의 기능공처럼 보내고 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쭈쭈바를 빨면서 스포츠지의 연예면을 보는 것, 차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일거리 떨어질 일 없고, 남녀가 동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연예면은 무궁하리라는 느낌속에서. 나는 그 느낌을 불혹(不惑)이라 부르고 싶다. 나이 사십에 그는 비로소 세상을 앎의 대상, 알아야 하는 적으로 여기는 하나의 세계를 탈출한 것처럼 보였다.

남재일/전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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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건강함
윤도현 - 2집 an Band [재발매]
윤도현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해넘이 시간 가까워져가는 사무실을 혼자 지키다 꾸벅 졸다가 전화벨 소리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깬다. 수화기 위에 손을 대고 두 번째 벨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을 비비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언제 졸았냐는듯 전화를 받는다. 역시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도 한없이 늘어져있다. 바쁜 일이 없는, 몰두할 만한 일이 없이, 긴장이란 말을 되새겨본 기억이 아득해진 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가식적인 웃음으로 전화를 끊고 눈을 비비다 지금과 비슷한 가을햇살을 맞으며 도서관 앞 잔디밭에 드러누웠던 몇 년 전을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했을 스물 일곱을 그저 그려보았던 걸. 그 공상의 대부분은 막연히 내가 보아왔던 "공대 대학원생"의 낮과 밤을 바꾸어 살아가는 - 정확히 말해 낮도 밤도 없이 살아가는 - 폐인스런 삶 한가운데의 내 모습이었고, 가끔 드물게 생각치도 못하게 취직하여 미친듯이 위아래에 치이며 괴로워하면서도 무언가 만들어가는 모습을 드문드문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느슨히 책상 앞에 앉아 졸며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열정없는 늙은 청년이 될 거란 상상하지 못했다.

문득 윤도현의 두번째 엘범이자 윤밴의 첫번째 앨범이 듣고 싶었다. 가장 직선적이고 가장 거칠게, 그러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고 가장 건강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앨범이기에.

첫곡 '긴 여행'이나 '꿈꾸는 소녀', '다시 한번'에서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나직이 노래하다가도 '하루살이', '이땅에 살기 위하여', '철문을 열어' 에서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 없이 절제되지 않은 가사를, 감정을 질러대기도 한다. 혹자는 같은 엘범 안에서 '저하늘 맑은물 우리를 감싸주던...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버린 걸까(어디로 中)'슬프게 혼잦말 되뇌이던 소년의 목소리가 어느새 돌변하여 '수배자로 쫓기고 쇠창살에 같혀가며 우리는 절규한다(이땅에 살기 위하여 中)'며 팔뚝질을 해 대는 데 이물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순수에 대한 갈망을 나직이 노래하는 것도, 절제되지 않은 분노를 강렬히 분출하는 것도,  그런 행동 모두 정직하고, 건강한 몸짓임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단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양 극단을 오가는 것 뿐이다. 그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일 때에도, 핏대 세워 목 터져라 질러댈 때에도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윤밴의 3집 이후는 2집에서 형성된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절제되지 않은 거친 소리를 조금씩 조금씩 다듬어 음악적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과도기적인 3집과 4집 '한국 rock 다시 부르기'를 거친 윤밴은 5집 'an urbanite'에서 귀에 착착 감기는 깔끔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저 2집에서 뻥뻥 질러대기만 했던 윤밴이 5집에의 '거울'이나 '내게 와줘'같은 곡에서 자유자재로 톤을 바꿔가며 그때에 걸맞는 분위기를 전달할 정도로 성장한다. 5집까지의 윤밴만큼 그 성장을 바라보는게 즐거운 밴드도 없었다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다. 2집은 이들이 그 근간으로 삼았던 세계관의 출발점이자 정신적인 본질이라는데 가치가 있다.

굳이 음악 외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가리지좀마'는 통쾌하며 '다시 한 번'은 나직하고 희망차다.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인 '이땅에 살기 위하여'와 필연적으로 양심수, 비전향 장기수들을 떠올리게 되는 '철문을 열어'에 가슴 먹먹할 수 밖에 없다. 구성 자체에도 신경을 쓰고 있어, 처음과 마지막 트렉인 '긴 여행'과 '어디로'의 대응 관계도 멋지다. 이 앨범 전체에서 "rock"이라는 말과 "건강함"이라는 말이 불화없이 어울릴 수 있음을 이 앨범에서 증명해 낸 게, 윤밴의 가장 큰 업적인지도 모르겠다.

2002년 월드컵이 앗아간 게 있다면, '국민가수'로 떠오른 윤도현의 직선적 건강함이 빛바랜 것이라 씁쓸히 말하곤 한다. 그간의 활동으로 단련된 윤밴의 지극히 건강한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오~ 필승 코리아~"가 그렇게 호소력 강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로 인한 상업적 성공은 '정글스토리'자체였던 한국 로커들의 삶의 한가운데를 몇년간이나 억척스럽게 살아온 데 대한 정당한 댓가가 아닐까 싶어, 이제 정당한 제 몫을 받는구나 하고 잠시 흐뭇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6집 이후 세련됨에 너무 기울어진 걸 듣게 되거나, 또 이런저런 방송에 나와 어눌한 말로 사람들을 웃기는 윤도현의 모습을 보게 되면 별 수 없이 이들의 두번째 엘범을 그리워한다. 가장 건강하고 강렬하며, 가장 순수했던 윤밴의 '그때'를. '가리지좀마'라고 내지르는 윤밴의 거칠고 시원시원한 소리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갑자기 더 거슬러 올라가, 처연함 그 자체인 1집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듣고 싶어졌다. 나, 가을 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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