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건강함
윤도현 - 2집 an Band [재발매]
윤도현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해넘이 시간 가까워져가는 사무실을 혼자 지키다 꾸벅 졸다가 전화벨 소리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깬다. 수화기 위에 손을 대고 두 번째 벨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을 비비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언제 졸았냐는듯 전화를 받는다. 역시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도 한없이 늘어져있다. 바쁜 일이 없는, 몰두할 만한 일이 없이, 긴장이란 말을 되새겨본 기억이 아득해진 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가식적인 웃음으로 전화를 끊고 눈을 비비다 지금과 비슷한 가을햇살을 맞으며 도서관 앞 잔디밭에 드러누웠던 몇 년 전을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했을 스물 일곱을 그저 그려보았던 걸. 그 공상의 대부분은 막연히 내가 보아왔던 "공대 대학원생"의 낮과 밤을 바꾸어 살아가는 - 정확히 말해 낮도 밤도 없이 살아가는 - 폐인스런 삶 한가운데의 내 모습이었고, 가끔 드물게 생각치도 못하게 취직하여 미친듯이 위아래에 치이며 괴로워하면서도 무언가 만들어가는 모습을 드문드문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느슨히 책상 앞에 앉아 졸며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열정없는 늙은 청년이 될 거란 상상하지 못했다.

문득 윤도현의 두번째 엘범이자 윤밴의 첫번째 앨범이 듣고 싶었다. 가장 직선적이고 가장 거칠게, 그러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고 가장 건강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앨범이기에.

첫곡 '긴 여행'이나 '꿈꾸는 소녀', '다시 한번'에서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나직이 노래하다가도 '하루살이', '이땅에 살기 위하여', '철문을 열어' 에서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 없이 절제되지 않은 가사를, 감정을 질러대기도 한다. 혹자는 같은 엘범 안에서 '저하늘 맑은물 우리를 감싸주던...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버린 걸까(어디로 中)'슬프게 혼잦말 되뇌이던 소년의 목소리가 어느새 돌변하여 '수배자로 쫓기고 쇠창살에 같혀가며 우리는 절규한다(이땅에 살기 위하여 中)'며 팔뚝질을 해 대는 데 이물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순수에 대한 갈망을 나직이 노래하는 것도, 절제되지 않은 분노를 강렬히 분출하는 것도,  그런 행동 모두 정직하고, 건강한 몸짓임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단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양 극단을 오가는 것 뿐이다. 그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일 때에도, 핏대 세워 목 터져라 질러댈 때에도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윤밴의 3집 이후는 2집에서 형성된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절제되지 않은 거친 소리를 조금씩 조금씩 다듬어 음악적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과도기적인 3집과 4집 '한국 rock 다시 부르기'를 거친 윤밴은 5집 'an urbanite'에서 귀에 착착 감기는 깔끔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저 2집에서 뻥뻥 질러대기만 했던 윤밴이 5집에의 '거울'이나 '내게 와줘'같은 곡에서 자유자재로 톤을 바꿔가며 그때에 걸맞는 분위기를 전달할 정도로 성장한다. 5집까지의 윤밴만큼 그 성장을 바라보는게 즐거운 밴드도 없었다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다. 2집은 이들이 그 근간으로 삼았던 세계관의 출발점이자 정신적인 본질이라는데 가치가 있다.

굳이 음악 외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가리지좀마'는 통쾌하며 '다시 한 번'은 나직하고 희망차다.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인 '이땅에 살기 위하여'와 필연적으로 양심수, 비전향 장기수들을 떠올리게 되는 '철문을 열어'에 가슴 먹먹할 수 밖에 없다. 구성 자체에도 신경을 쓰고 있어, 처음과 마지막 트렉인 '긴 여행'과 '어디로'의 대응 관계도 멋지다. 이 앨범 전체에서 "rock"이라는 말과 "건강함"이라는 말이 불화없이 어울릴 수 있음을 이 앨범에서 증명해 낸 게, 윤밴의 가장 큰 업적인지도 모르겠다.

2002년 월드컵이 앗아간 게 있다면, '국민가수'로 떠오른 윤도현의 직선적 건강함이 빛바랜 것이라 씁쓸히 말하곤 한다. 그간의 활동으로 단련된 윤밴의 지극히 건강한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오~ 필승 코리아~"가 그렇게 호소력 강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로 인한 상업적 성공은 '정글스토리'자체였던 한국 로커들의 삶의 한가운데를 몇년간이나 억척스럽게 살아온 데 대한 정당한 댓가가 아닐까 싶어, 이제 정당한 제 몫을 받는구나 하고 잠시 흐뭇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6집 이후 세련됨에 너무 기울어진 걸 듣게 되거나, 또 이런저런 방송에 나와 어눌한 말로 사람들을 웃기는 윤도현의 모습을 보게 되면 별 수 없이 이들의 두번째 엘범을 그리워한다. 가장 건강하고 강렬하며, 가장 순수했던 윤밴의 '그때'를. '가리지좀마'라고 내지르는 윤밴의 거칠고 시원시원한 소리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갑자기 더 거슬러 올라가, 처연함 그 자체인 1집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듣고 싶어졌다. 나, 가을 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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