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북한이나 한나라당이나

한겨레(06. 06. 23)에서 성한용 기자의 칼럼 '북한이나 한나라당이나'를 옮겨온다. 타이틀에서 이미 '양비론적' 시각이 암시되고 있는데, (양편에서 돌이 날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러한 칼럼의 입장이 '상식'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대립물의 통일성'이라는 헤겔철학의 교훈을 한반도의 정세 속에서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즉, 주사파나 수구보수나(해서 때로 극렬 주사파가 뉴라이트의 전도사로 나선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들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입으로 한말을 하는 것이니까). 혹은 아메리카 버전으로, 주사파나 네오콘이나. 아무리 서로 으르렁거린다고 해도 그들은 서로 얼마나 '상생적인' 것인지!..

 

 

 

 

-해방 이후 남과 북에 각각 정권이 수립되자 북한은 끊임없이 남한 민중의 봉기를 선동했다. 북한의 이런 노선은 남한의 민주화 운동 세력에 큰 부담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북한의 간첩으로 몰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말기의 ‘폭압정권’ 시절 대학 시위 현장에는 가끔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우리는 남한의 민주화를 요구할 뿐 북한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니, 착각해서 남침을 시도하지 말라’는 정도의 메시지였던 것 같다. 사실은 북한보다는 수사기관과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한 고려였다. 지금 보면 유치하지만, 당시에는 절박했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의 논리와 생존 방식이 있었다.

 

 

 

 

-냉전시대가 가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리는 공포는 사라졌다. 그런데도 냉전시대의 논리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북한 당국자들의 한나라당 비난 발언은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 ‘내부용’이다. 그래도 요즘 도가 지나치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온 나라가 전쟁의 화염 속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는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의 말은 남쪽의 ‘수준’을 무시한 폭언이었다.

-남한에서 북한의 협박에 놀아날 유권자들은 없다. 그는 광주에까지 모습을 드러내 남쪽 사람들의 기분만 나쁘게 만들었다. 조평통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가 박근혜 전 대표를 ‘유신의 창녀’라고 비하한 것은 더 심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2년 5월 북한을 방문한 박 전 대표를 극진히 환대한 일이 있다. 그 뒤 북한은 박 전 대표에 대한 직접 비난을 삼갔다. 북한도 통제력에 한계가 있긴 하겠지만, 좀 어이가 없다.

-북한은 그렇다고 치자.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안경호 국장의 발언에 대해 지난 15일 논평을 냈다. “정부 여당과 북한이 한나라당의 집권 저지라는 공동의 목표달성을 위해서 어떤 책략을 펼칠 것인지 한나라당은 지금부터 모든 가능성에 대해 면밀하게 대비해야만 한다.” 80년 서울의 봄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바로 그 심재철이다. 열린우리당이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너무 심하다.

-안경호 국장 발언에 이어,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움직임이 겹치자, 한나라당 지도부는 냉정을 잃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인 송영선 의원은 “이른 시일 안에 미국의 미사일방어 체제에 편입돼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게 현실적인 대응방안”이라고 주장했다. 또 “우리 정부가 미국, 일본, 유엔과 함께 대북 금융제재를 취하고 압박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반도를 미-중 대결의 최전선으로 만들려는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 강경파의 논리 그대로다.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했던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북한 당국자들에게 “남남 갈등을 부추기려 하지 말고 보수세력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북쪽 인사들은 “서로 잘 해보자”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다. 북한은 변해야 한다. 그렇지만 한나라당도 변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지금까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지원을 ‘퍼주기’라고 비난하기만 했다.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이란 것이 있긴 있는지 의심스럽다. 남북관계는 냉엄한 현실이고 유권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남북관계에서 구체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 집권은 어렵다.

-“소극적·방어적인 대북정책에서 벗어나 호혜적 상호공존 원칙에 입각한 유연하고 적극적인 통일정책으로 전환한다. 이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남북한의 공동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역동적인 통일 한반도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 나간다.” 한나라당의 정강·정책 전문에 나오는 얘기다.

06. 06. 25.

 

 

 

 

P.S. '북한이나 한나라이나'의 유신 버전은 '김일성이나 박정희나'이겠다. 포스트-유신 버전으로 말하자면, '김정일이나 박근혜나'. 이건 대단한 지혜도 아니고 발견도 아니다. 내놓고 떠들지 않는 '상식'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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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주마간산으로 뒤적이기 (6) : 김현과 라면...

"김현과 라면"이라고 적어놓고 보니 좀 우습다. 꽤 오래 전부터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라는 책 이름을 떠올릴 때면 늘 "성철스님 십억 이야기"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성철스님과 십억이란 돈이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마는, '시봉'이라는 낯선 말보다는 요즘 유행하는 '십억'이라는 속세의 낯익은 말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김현과 라면"이라는 말도 얼핏 보기엔 좀 생뚱맞다. 문학평론가 김현, 그러니까 문지 동인들이 한 목소리로 "뛰어난 문학 이론가이자, 정치한 비평가였으며, 성실한 프랑스문학자이자, 문화와 예술의 날카로운 관찰자였으며 (...) 동시에 아름다운 문장가였고, 정력적인 독자였으며, 훌륭한 스승이었고, 자상한 선배였으며, 문학지 동인으로서, 탁월한 편집자로서, 치밀한 번역자로서 (...) 자유와 민주주의, 개성과 다원주의의 가치관을 신념하고 또 실천하였으며, 모국어로 공부한 첫 한글 세대로서 (...) 우리 문화와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 실존적 지성의 정신적 탐구를 수행하면서, 샤머니즘과 니힐리즘의 극복을 향해 씨름해왔으며 (...) 실제의 생애는 조용하고 겸손했지만, 글을 통한 그의 내면의 싸움은 그런 만큼 치열하고 도저했던" 인물이라고 목놓아 합창하는 그 김현의 어마어마한 삶 가운데 감히 "라면"이라는 속되고 싼티 나는 물건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어보이는 것이다.(앞의 인용문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김현문학전집의 뒤표지에 나온 "김현문학전집을 간행하며"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문지판 "국민교육헌장"이랄까, 아니 "김현문학헌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장미가 넘친다.) 하여간 문지 동인들의 비장한 합창곡을 듣다 보면 김현이란 사람이 과연 "화장실에서 똥을 누긴 했는지"에 대해 궁금한 생각이 들 정도다. 뭐, 노골적으로 경망스럽고 빈정거리는 물음이긴 하지만, 솔직히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에는 한때 안성기와 장미희가 나오는 "미국 올 로케" 영화라고 해서 큰 인기를 끌었던 배창호의 <깊고 푸른 밤>을 아내와 보고 온 김현이 쓴 비판적 영화평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김현은 "안성기가 변 누는 장면"에 대해서 한참 동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 문학전집을 가끔 한두 권씩 뒤적여보긴 하지만, 이 책을 뒤적여보긴 처음인데 생전에 출간된 에세이집 두 권과 미발표 산문을 엮은 이 책은 얼핏 보기에 매우 "개인적"이고 "솔직한" 글들을 적잖이 담고 있는 것 같다. 방금 말한 "영화평"을 비롯해서 자기가 반포의 아파트에 살게 된 이야기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다가 건강이 악화된 이야기 등등 앞서의 "김현문학헌장"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현이라고나 할까? 오늘날의 문학평론에 있어 가장 큰 우상 가운데 하나인 "김현의 우상"에 대해 적잖은 반감(솔직히 "김현"이 얄미운 것이 아니라, "김헌문학헌장"이 얄미운 것이다.)을 지닌 나로선, 어쩌면 이 책 한 권을 주루룩 읽고 나면 오히려 그가 인간적으로 좋아질런지도 모르겠다.(물론 어디까지나 "김현"이 좋아지는 것이지, "김현문학헌장"이 좋아질 리는 없다.) 이 책이 얼마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는 맨 끝자락에 실린 "라면 문화 생각"(392쪽)이라는 글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김현과 라면이라는,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가지에 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다.

  • 라면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밥맛이 없을 때, 또는 지난 밤에 지나치게 술을 마셔 속이 쓰릴 때, 또는 입이 심심할 때, 나는 라면을 끓여먹는다. 파를 조금 썰어넣고, 때로는 달걀을 깨넣거나 하여 먹는다. 내가 라면에 맛을 들인 것은 대학 연구실에서 조교 노릇을 할 때이다. 오랜 하숙생활에 진력이 나 거의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할 때였는데, 겨울날 연구실에 피워놓은 연탄 난로에 라면을 끓여먹는 맛은 가장 그럴듯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때에 내가 느낀 라면의 가장 큰 덕목은 간편함이었다. 냄비 하나와 물만 있으면 끼니를 때울 수가 있었다. 라면이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라면을 만드는 기름이 좋지 않았든지, 아니면 설거지를 꼼꼼하게 하지 않아서였든지, 서너 달쯤 라면을 끓여 먹으면 냄비 밑바닥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그래도 나는 라면의 맛을 탓하지 않았다. 물 끓는 소리와 (물 끓는 소리가 귀에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는 아는 사람만이 안다.) 라면이 알맞게 익었을 때에 퍼지는 구수한 냄새, 그런 것들이 라면의 맛을 이루는 것이겠지만, 그때에는 물을 적게 하여 거의 떡처럼 만들어 그것을 술안주로 먹기까지 하였다. (392-393쪽)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라면 예찬은 곧이어 라면 비판으로 돌변한다. 물론 김현 자신의 애정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겠지만, 적어도 지면의 특성상 (이 글은 <뿌리깊은 나무> 1980년 3월호에 수록되었다!) 라면이 상징하는 현대문화와 합리주의와 기계문명을 들먹여 한 방 먹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에 김현은 다음과 같은 "뻔한 말씀 감사합니다" 식 결론부로 접어든다.

  • 물건의 생산과 소비에서 자기가 진정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회에서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말해 두께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면을 먹기는 이제 쉬운 일이 아니다. 라면을 먹으면서 잃은 (아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다. 차라리 '라면 먹기에 대한 성찰로써 드러난'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사람의 두께를 되찾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과거의 체험을 체험으로 인정하면서, 현재의 체험을 그것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따지는 일일 따름이다. 나는 복고주의자가 아니다. 또 복고주의자가 되어 자연과 합일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모습을 억지로 지워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쨌든 지금의 한국 사람의 두께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작업을 서둘러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 역사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399쪽)

식생활에서 밥과 라면의 비중이 거의 비슷할 정도로까지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진 나로선 김현의 솔직한 고백이 반갑고 또 우습기조차 하다. 하긴 그렇다. "뛰어난 문학이론가이자 정치한 비평가"인 사람이라고 해서 라면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라면을 먹으면 반드시 똥이 나오는 하는 법이니, 결국 "아름다운 문장가였으며 정력적인 독자"인 김현도 똥을 누긴 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요즘에는 각종 식품첨가물 운운 하는 이야기 때문에 애꿎은 라면이 신나게 두들겨 맞는 분위기인데, 솔직히 말해서 라면이 그렇게 죄 많은 물건인가 하는 의구심도 없지는 않다. 물론 인공화합물인 조미료가 몸에 좋을 리는 없지만, 솔직히 이렇게 매캐한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다들 잘 먹고 잘 사는데 그깟 라면 하나에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이거다. 그런 식으로 유기농이니 웰빙이니 청정이니 하는 것만 찾아다녀 보았자, 솔직히 누가 구증구포를 하는지 아니면 뭐 온갖 이상한 걸 섞는지 알 게 뭐냐. 개그맨 박준형의 말마따나 어린 시절에 문방구에서 사먹던 불량식품은 "식용색소 11호, 12호, 13호"일 뿐이었는데도 기가막힌 "포도맛, 오렌지맛, 콜라맛"이 나더라고 하지 않던가. 먹고 배부르면 그만이고, 먹고 기분 좋으면 그만이지 뭐.

창밖이 훤히 밝아오니 나도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어야 하겠다.(노란 너구리에, 처형네서 얻어 온 바지락 몇 개와 콩나물을 넣어서.) 그리고 만약 내가 "김현문학헌장"을 제정하는 자리에 있었더라면, 차라리 그 어마어마한 호칭과 위업과 장점 뒤에 슬쩍 "연구실에서 끓여먹는 라면과, 반포치킨에서 마시는 맥주를 사랑했던 소박한 인물이었으며"라는 문구를 하나 집어넣었을 것 같다.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는 문지 동인들 역시 약간의 "유머감각"과 고인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언제 한 번은 김현의 기일을 맞이해서 다들 모인 다음, 커다란 솥에 라면 한 박스를 끓여서 후루룩 후루룩 나눠먹는 것도 그럴 듯한 기념이 되진 않을까? 물론 뒤풀이는 맥주로 하겠지만 말이다.

 

*** 차례 맨 마지막 페이지에 오타가 있다. "대가의 죽음 / 나쁜 분장 / 의도인"이라는 소제목은 "라면문화생각"이 아니라 그 밑의 "세 개의 단상" 밑에 붙어있어야 한다. (왜 내 눈엔 이런 것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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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한‧미자유무역협정 비판-윤소영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에서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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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자유무역협정 비판


윤 소 영


6월 5-9일간 미국 워싱턴에서 1차 공식협상이 개최된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반대가 광범하게 전개되고 있다. 주요 사회운동단체들이 발간한 자료집들만 보더라도, 범국민운동본부의 󰡔한‧미FTA 저지를 위한 국민교양 자료집󰡕(40쪽), 민주노동당의 󰡔한‧미FTA의 문제점󰡕(112쪽), 민주노총의 󰡔새로운 한‧미관계 구축을 위한 미국의 전략: 한‧미FTA 추진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18쪽), 한국노총의 󰡔한‧미FTA 자료집󰡕(130쪽), 전농의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민족은 망한다󰡕(27쪽) 등이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이 아니라 그 효과에 대한 나열이나 묘사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1)


경제위기‧세계화‧지역화‧통치성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따라 세계화와 지역화를 분석해야 한다(더 자세한 것은 윤소영,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 2006, 2-3장을 참조하시오). 마르크스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라는 개념을 통해 노동을 절약하고 고정자본을 소비하는 ‘편향적’ 기술진보를 분석하는데, 여기서 그가 도출하는 결론이 바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경제법칙이자 자본주의적 경제위기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불리는 고정자본의 생산성 하락과 이윤율 하락이다.

경제위기를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금융화는 생산성과 이윤율의 하락에 따라 실물적 축적이 금융적 축적으로 변모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2) 금융화의 주요한 형태는 이윤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고정자본투자(마르크스가 말하는 집적)와 달리 이윤의 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증권투자(집중)다. 1990년대 이후 초민족자본(법인자본 및 기관투자가)이 금융화의 주체가 되면서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동시에 지역적 조건에 따라 세계화를 구체화하려는 지역화가 모색된다. 말하자면 세계화와 지역화라는 형태로 진행되는 금융화가 경제위기에 대한 부르주아적 대응인 셈이다. 

초민족자본이 추진하는 세계화와 지역화를 지지하는 다양한 국제경제기구들이 있는데, 그들간의 분업과 협업이 세계적‧지역적 ‘통치성’(지배구조)을 구성한다.3) 세계화를 위한 국제경제기구들로는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이 있다. 세계무역기구가 초민족자본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대변한다면,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은 초민족자본의 이익을 간접적으로 대변한다. 세계무역기구가 1970년대 금융의 자유화, 1980년대 농업‧서비스의 자유화를 추진하던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을 계승한다면, 1970년대초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한 이후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추진한다.

지역화를 위한 국제경제기구들을 대표하는 것이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인데,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유럽연합의 핵심은 공동시장과 화폐동맹이다. 공동시장과 자유무역협정은 상품 및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즉 무역 및 금융의 자유화를 추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공동시장이 공동의 경제정책을 통해 ‘폐쇄적’ 지역화를 추구한다면,4) 자유무역협정은 공동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지 않는 ‘개방적’ 지역화를 추구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공동의 경제정책을 상징하는 공동통화 유로를 채택함으로써 공동시장과 화폐동맹을 결합하는 유럽연합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정책수단은 노동의 신축화(유연화)이지만, 공동통화를 채택하지 않는 자유무역협정에서는 노동의 신축화 외에도 평가절하라는 또 다른 정책수단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참고로, 공동통화를 채택하는 화폐동맹은 이른바 ‘통화대체’의 일종이다. 화폐동맹은 유럽의 독일처럼 지역 헤게모니가 존재하는 경우에 가능한데, 이런 의미에서 유로는 마르크의 확대판인 셈이다. 통화대체의 또 다른 종류는 중남미처럼 지역 헤게모니가 존재하지 않아서 세계 헤게모니 미국의 달러를 공용화하는 달러리제이션이다. 달러리제이션은 1990년대 러시아처럼 비공식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지만, 1990년대 아르헨티나처럼 공식적으로 추진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민족화폐는 유지되지만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과 태환이 보장된다. 민족화폐가 완전히 폐지되는 극단적인 달러리제이션은 중남미에서조차 아주 예외적이다.

 

문민화 이후 남한경제의 세계화와 지역화


이제 문민화 이후 남한경제의 세계화와 지역화를 설명해보자(더 자세한 것은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위의 책, 1장을 참조하시오). 1986-88년간 이른바 ‘3저 호황’ 이후 새로운 경제위기가 예고된 것은 1990년이었는데, 당시 이윤율은 1979-80년 수준으로 하락했다. 김영삼 정부가 세계무역기구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함으로써 세계화를 개시한 것은 이런 상황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벌을 주체로 하는 세계화는 오히려 반도체‧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 등에서 고정자본투자의 급증과 이윤율의 급락을 초래함으로써 1997-98년 경제위기(및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

1997-98년 위기를 계기로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의 지도 아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추진하면서 재벌 중심의 세계화를 지속했다. 50% 정도에 달하는 급격한 평가절하로 인해 재벌의 경쟁력이 회복되었지만, 그러나 재벌에 대한 초민족자본의 금융적 지배도 심화되었다.5) 또 김대중 정부 이후 남한경제는 장기침체에 진입했는데, 재벌이 중국을 통한 우회 수출을 시도하면서 국내 고정자본투자가 정체되었고 초민족자본의 지배에 따라 국내총생산(GDP)과 국민총생산(GNP)의 괴리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재벌의 세계화를 지역적으로 구체화하려고 시도한다. 남한경제도 유럽경제처럼 공동시장과 화폐동맹을 추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현실적 근거도 없다. 남한경제를 비롯한 동아시아경제가 대미 상품수출을 통해 성장해왔고 또 노동의 신축화와 함께 평가절하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7-98년 위기 이후 동남아시아경제를 희생한 중국경제의 성장이 단적인 사례다. 중국경제의 추월 가능성에 대한 재벌의 경고에 따라 노무현 정부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것은 이런 상황과 관련된다.

게다가 남한경제와 동아시아경제는 수출달러의 환류와 자본도피를 통해 미국으로 자본을 수출함으로써 미국경제의 달러시뇨리지(발권이익)와 이중적자를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동남아시아경제를 포함하는 ‘중화경제권’에 대한 대안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무런 현실적 근거가 없다. 1990년대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중심이 유럽에서 일본과 중국을 포함하는 아시아‧태평양으로 이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를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협정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미국의 궁극적 목적일 것이다.

따라서 경제위기(및 외환위기)에 대한 남한 부르주아지의 대응으로서 평가절하(및 수출달러환류‧자본도피)를 보충하려는 시도가 바로 한‧미자유무역협정인 셈이다. 초민족자본의 증권투자로 인한 평가절상 압력 때문에 평가절하를 통해 재벌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초민족자본의 증권투자를 오히려 가속화시키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미봉책일 따름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남한경제의 장기침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예를 들어 경상수지흑자가 감소할 것인데, 그럴 경우 국내총생산과 국민총생산도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6)

 

보론: 농업 및 서비스 개방


세계화와 지역화의 부정적 효과가 집약되는 부문이 농업과 서비스이기 때문에 한‧미자유무역협정에서 농업과 서비스 개방이 쟁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농업 개방의 핵심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농산물시장 개방이 아니라 초민족자본인 농업메이저가 추진하는 ‘녹색혁명’에 대한 종속에 있다. 그리고 물론 녹색혁명에 대한 종속은 농산물시장 개방 이전으로 소급되는 남한농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예를 들어 중남미농민과 달리 남한농민은 농업메이저에 의해 포섭되어 자기착취 당하는 자영농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7)

서비스 개방의 핵심은 법률, 회계, 재무, 마케팅과 관련된 컨설팅서비스뿐만 아니라 금융,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기술과 관련된 컨설팅서비스도 포함하는 이른바 ‘사업서비스’에 있다. 그리고 물론 사업서비스 개방은 김대중 정부 이후 추진되고 있는 이른바 ‘지식기반경제’로의 전환의 핵심이다.8) 또 사회서비스(공공서비스)에서는 병원이 아니라 초민족적으로 활동하는 제약회사‧보험회사와 관련되는 보건의료 개방이 핵심이고, 반면 학교가 아니라 유학이나 ‘두뇌유출’과 관련되는 교육 개방은 부차적이다.9)

참고로, 세계화와 지역화가 진행되면서 공기업이 항상 사유화(민영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두자(게다가 공기업의 사유화는 초민족자본이 아니라 민족자본에 의해 주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통‧통신과 관련된 공기업과 달리 전기‧석유가스(에너지)‧수도와 관련된 공기업을 사유화해서 수익성을 확보하려면 통치성을 훼손하는 아주 곤란한 사회‧정치적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사유화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공‧사제휴나 탈규제를 통해 경쟁원리를 도입하기도 하는 것이다.10)


2006. 6. 10.


1) 󰡔민중언론참세상󰡕이나 󰡔프레시안󰡕 같은 인터넷 신문을 통해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에 가세하는 지식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조차 ‘제2의 IMF 위기’, 심지어 ‘제2의 한‧일 합방’ 같은 역사적으로나 정세적으로나 별의미 없는 유비를 남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2) 경제위기를 특징짓는 또 다른 현상은 대량실업과 궁핍화다. 보통 비정규직화와 양극화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대량실업과 궁핍화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특히 양극화는 재벌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사이의 격차를 의미하기도 하므로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다.
 

3) 물론 세계적‧지역적 통치성이 국제경제기구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 통치성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세계화가 필수적이고, 지역적 통치성에는 나토(미‧유럽군사동맹)와 미‧일군사동맹 같은 지역적 군사동맹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유럽연합이 추구하는 지역화도 ‘블록화’(식민지화)는 아니다. 유럽연합헌법조약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유럽연합이 세계화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인경‧박정미 외, 󰡔인민주의 비판󰡕, 공감, 2005 참조.

5) 법인자본과 달리 재벌이 금융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삼성이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못하고 순환출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6) 이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민주노총(재벌‧공기업노조운동)을 사회운동으로 변모시키자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코파가 이미 지난 수 년간 주장해왔던 세계무역기구‧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투쟁도 그런 변모를 추동하지 못한다면 단순한 캠페인에 그칠 따름이다. 대안세계화‧대안지역화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관련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윤소영,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운동󰡕, 공감, 2004를 참조하시오.

7) 농민운동이 농산물시장 개방만을 쟁점으로 제기할 때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처럼 남한에서도 ‘농촌의 휴양지화’가 진행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제이슨 무어 외,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 공감, 2006 참조.

8) 경제협력개발기구의 기준에 따르면, 금융 및 사업서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기반경제에는 교통‧통신과 관련되는 항공‧우주‧정보‧통신산업이나 보건의료와 관련되는 생명공학산업 같은 첨단제조업도 포함된다.   

9) 이 때문에 보건의료운동은 공공성 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의사‧약사 등 전문직정책운동이나 병원노조운동에서 탈피해야 한다. 또 교육운동도 교원노조로서 전교조운동에서 탈피해야 한다. 비센트 나바로 외, 󰡔보건의료: 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공감, 2006; 윤종희‧박상현 외, 󰡔대중교육: 역사‧이론‧쟁점󰡕, 공감, 2005 참조.

10) 따라서 공공성은 방어투쟁의 구호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전국민중연대를 토대로 지난 3월에 구성된 범국민운동본부가 채택한 이른바 ‘공공성 강화’는 아주 잘못된 구호인데, 오히려 사회운동단체들의 코퍼러티즘적 경향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화를 국유화로 환원하는 오류를 지속시키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코퍼러티즘적 국유화론에 대한 더 자세한 비판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위의 책을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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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학"을 잘 읽기 위한 책들 - 01

 

 

 

 

* 밑의 장은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학"의 목차를 원용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1장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1. 사회학 - 하룻밤의 지식여행 6 | 원제 Sociology  | 리차드 오스본 (지은이), 보린 밴 룬(그림), 윤길순 (옮긴이) | 김영사
- 이 책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기초입문서입니다. 사실 내용 자체는 난해하지 않지만 매우 적은 페이지에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학"의 내용과 간단한 사회학사와 개념들을 우겨넣었기 때문에 어려운 책이죠. 하지만 반대로 기든스의 "현대사회학"을 읽고 난 뒤에 보시거나 곁에 두고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보고 싶다할 때 요약본 형태로 생각하며 보시기엔 괜찮습니다. 일단 책 값이 쌉니다.


 

 

 

2. 사회학의 발견 | 김윤태 (지은이) | 새로운사람들
-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학"의 한국 저자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흡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진 책입니다. 두 권의 책을 비교해가면서 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추천, 그렇지 않은 분에겐 비추천입니다.



 

 

 

3. 개념 중심의 사회학 | 김선웅 (지은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이 책 역시 앞의 김윤태의 책 "사회학의 발견"과 흡사합니다만,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추천, 비추천 역시 같습니다.


 

 

 

 

4. 사회학 - 반양장, 전면개정판 |  (엮은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아마 겨울나무님이 학교에서 사회학 입문 과정에서 공부한 책이 이 책일 듯 싶군요. 아마도 국내 저자들에 의해 저술된 사회학 입문서 중에서는 가장 괜찮은 책이 아닐까 싶어요.


5. 사회학사:사회학이론의 성격과 발전 - 풀빛 75 | 니콜라스 S. 티마셰프 (지은이) | 풀빛
- 이 책은 품절 상태로 나오는데, 그래도 시중에서 구해보시려고 노력하면 구하기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닐 듯 합니다. 말 그대로 사회학사입니다만, 초판이 1955년에 나왔던 것을 76년에 다시 개정판을 낸 것이므로 현대사회학의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진 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전의 사회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는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6. 사회학에의 초대 | 피터 L. 버거 (지은이), 이상률 (옮긴이) | 문예출판사
- 이 책은 언젠가 제가 서평을 쓴 적도 있는 책인데, 사회학의 기초토대라 할 수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것이 무엇인가? 사회학적 상상력을 갖추기 위해선 어떻게 사고 할 것인가? 사회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에세이 형태로 던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읽기엔 어렵지 않으나 읽고 무슨 이야기인지 해독하려면 나름의 성찰이 필요한 책입니다.

* 여기에 덧붙여 오귀스트 콩트, 에밀 뒤르켐,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 등등의 원저술들을 읽어주면 금상첨화겠지요.



2장 문화와 사회
사실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분야의 추천도서를 고르는 것이 더 어렵네요.

 

 

 

 

1. 문화연구 - 하룻밤의 지식여행 12 | 원제 Cultural Studies | 지아우딘 사르다르 (지은이), 이영아 (옮긴이) | 김영사
- 앞의 '사회학'편에서 이야기한 바와 거의 동일한 문제와 장점을 지닌 책입니다.


 

 

 

 

2.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 대중예술산책 3  | 김정은 지음  |  어진소리(민미디어)
- 가장 좋은 책이라기 보다는 가장 기초적이고 쉬우면서 실용적인 문화실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입니다.


 

 

 

 

3.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 문화교양 2 | 존 스토리 지음, 박모 옮김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시기적으로 원용진의 책(대중문화의 패러다임 / 한나래)보다 한 해 먼저 나온 책으로 실제 다루는 내용은 김정은>원용진> 존 스토리 수준의 난이도를 가졌으나 내용면에서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세 권의 책은 각각의 특장점을 가졌는데, 김정은은 이해가 쉽고, 재미있다는 점, 원용진은 국내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점, 존 스토리는 외국 이론가들에 대해 좀더 잘 설명되어 있다는 장점을 지닙니다.


 

 

 

4. 대중문화의 이해 - 전면 개정판 | 김창남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존 스토리와 원용진의 장점을 합쳐 놓은 책이지만, 이론 소개의 측면에서는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나중에 한 번 정도는 이 책을 주요 텍스트로 하여 세미나를 진행하고 싶을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해서는 잘 짜여져 있습니다.



 

 

 

 

5. 문화연구입문 - 한나래 언론문화총서 16 | 그래엄 터너 지음 | 한나래
6. 문화연구이론- 한나래 언론문화총서 25  | 정재철 (지은이) | 한나래 | 1998년 2월
7. 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 박명진 외 | 한나래


3장 변화하는 세계
이 분야는 한 마디로 무슨 책을 읽어라고 단정해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한 분야입니다. 그만큼 세계화 혹은 지구화는 우리 삶 전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작게는 여러분 안방이나 거실, 침실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변화를 몰고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권의 책을 소개해보면....

토머스 프리드만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요아나 브라이덴바흐, 이나 추크리글의 "", 김현미의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강상중, 요시미 슌야의 " - 새로운 공공공간을 찾아서", 죠지 몬비오의 "도둑맞은 세계화", 로버트 A. 아이작의 "세계화의 두 얼굴", 귄터 그라스 외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폴 킹스노스의 "세계화와 싸운다" 등등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일부는 이미 지나치게 낯이 익은 이론들이고, 일부는 절대로 동의하고 싶지 않은 결론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제가 언급한 책들은 세계화에 대해 각별한 관심이 있는 분들에 한해서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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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서씨네 삼형제에 관하여 (2)
서승의 옥중 19년
서승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서승의 수기를 읽다 보니 감동에 앞서 탄식이 나온다. 이념이란 것, 양심이란 것, 자존심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위대하게, 혹은 무섭게 만드는지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의 의지는 굳었고, 그의 이상은 고매했고, 그의 정신은 맑았다. 하지만 그의 육신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과연 무엇이 남은 것일까. 물론 옥중에서 19년을 썩은 그의 삶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리라.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 때문이건, 아니면 적어도 이 책에 드러나는 초연한 태도 때문이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그를 존경하고 싶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약하기 그지 없는 내 본성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참으로 지독한 사람이다!"

언젠가 시몬 비젠탈이 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강제수용소 체험담에서, 그가 여차 하다간 생사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에 나치가 요구한 대답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는 대목을 읽으며, 나 같으면 차라리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얼마든지 해 주고 그 덕분에 빵 한 조각이라든지, 담배 한 개피를 얻어내는 편을 택하겠다는 지독하게도 "속물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탈무드>에 보면 어느 나라의 왕이 그곳 유대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의 율법에서 금지하는 부정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먹이려고 했을 때의 일화가 나온다. 율볍을 어길 수가 없으니 차라리 죽기살기로 반란이라도 벌일까 궁리하는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이렇게 말한다. "돼지고기 때문에 목숨을 거느니, 차라리 율법을 어기고 목숨을 건지는 것만 못하다."

어쩌면 이것은 "생존자의 논리"이고 "살아남은 자의 변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 자기 몸을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려는 본능이야말로 인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철저한 것이 아닌가? 빅토르 프랑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뒤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가장 착한 사람들은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도 자신이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수많은 우연의 연속과, 또한 이런저런 장물과 필수품을 뒷거래해서 모아둔 빵덩어리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생존을 향한, 그러니까 사람이 살고자 하는 열망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강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서승이란 한 "인간"이 무려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구속된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 앞에서 나 역시 그와 똑같은 (물론 기개는 훨씬 못하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감탄에 앞서 경악을 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는 어떤 "인간"이기에 그처럼 크나큰 고통과 수모를 감내했던 것일까? 물론 그의 뒤틀린 운명에 있어 최우선의 가해자는 바로 박정희 정권이며,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일련의 군사정권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솔직히 이 책을 읽다 보면 박정희는 정말 "나쁜 놈"임을 알 수 있다. 제아무리 경제 발전이니 뭐니 하는 "치적"을 갖다 붙인다 하더라도, 과연 올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인간의 딸이 지금까지도 버젓이 야당 당수로 행세하며, 또 그런 인간의 딸을 지지하는 인간들까지 있다니!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일까?) 과연 그 울분과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친절한 금자씨"라도 불러다가 그 당시 관련자와 가해자들을 어디 폐교에라도 모아놓고 난장이라도 쳐야만 할까?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도 남지 왜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심약한 나로선 문득 이런 의문도 들었다. 제아무리 스스로의 양심과 이념에 충실했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말을 꺼내놓고 보니 마치 내가 그에게 전향을 강요했던 수많은 교회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다. 하지만 나로선 솔직히 그의 처지가 딱하고도 기막혀서 해 보는 말일 뿐이다. 물론 이 책의 지은이라면 이런 내 어설픈 말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로선 서승이나 서준식 두 형님들의 기구한 삶과 고통 못지않게,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돈벌이를 해야 했고, 자신의 삶은 내팽개친 채 두 형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나아가 차례차례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또 다른 고단한 삶을 살았던 서경식의 입장에 더욱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감옥에서 고문을 받는 것만큼이야 고통스럽지 않았겠지만, 서승의 초연함도, 서준식의 지독함도 나눠갖지 못한 심약한 책벌레 서경식이 20여 년 세월 동안 겪었을 또 다른 고생은 어떤 것이었을지, 나로선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억지 소리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투사의 종자"도 아니고 "양반의 종자"도 아닌 나로선 혹시나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 경우 서승이나 서준식의 자리보다는 오히려 서경식의 자리에 놓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즉 결코 앞에 나서지도 않고, 앞에 나선다 해도 끝까지 밀고 나가진 못하는 나약한 성격인 나 같은 인물이야 그저 뒤에 멀찍이 서서 남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죄의식과 자괴감과 안타까움으로 인해 차일피일 또 다른 심적 고통을 겪는 것밖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영웅, 혹은 투사로 여기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역사적 상징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지하의 경우는 아닐까 싶다. 이전에 그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참으로 착잡했던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상징"인 김지하와 "개인" 김지하는 천양지차로 다른 인물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김지하를 "역사적 상징"이며 "<오적>의 작가"로 생각하지만, 솔직히 김지하는 본인의 의도나 의지라기보다는 그저 우연에 우연이 얽혀들며 "민주화의 상징"이 된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김지하는 한 시대의 상징이 되기보다는 그저 이런저런 유쾌한 풍자시를 쓱쓱 써갈기면서 문필 활동을 하며 유쾌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의 방향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이 되는 영예 아닌 영예를 누리는 동시에, 그 대가로 인해 육신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70년대의 김지하와 90년대의 김지하가 보여주는 그 단절, 혹은 차이나 전환은 오히려 "연속선상"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는 애초부터 그렇게 속물적이었으며, 애초부터 그렇게 광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예언자이자 투사로 비춰졌을 뿐이며, 이제 더 이상 그런 시대적 배경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본모습이랄까, 진면목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솔직히 나는 김지하라는 "개인"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김지하라는 "역사적 상징"이 더욱 대단했다고 본다. 그런 시대의 후광이 드리워지지 않았을 때 나타난 것은 김철의 말마따나 "횔덜린의 것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광기"뿐인 것이다.

서승과 서준식, 두 사람 역시 오늘날에는 한국의 현대사, 특히 민주화와 인권에 관련되어 어느 누구보다도 확연한 상징이 되어버렸지만, 솔직히 그것은 이들이 겪은 고초에 대한 당연한 보상인 동시에, 이들이 결코 원치 않았던 엉뚱한 감투인 것은 아닐까? 물론 당시의 한국이 갖고 있던 숱한 모순과 악덕으로부터 비롯된 끔찍한 인권 침해 사례를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 축소시켜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제아무리 그럴 듯한 역사적 상징으로서의 후광을 머리에 씌워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고문당하고 협박당하고 두들겨 맞는 것은 "개인"이 아니냐는 불만이 생겨서 그런 것뿐이다. 서승이 묘사한 비전향장기수들이야말로 그 "이념"과 "민족"과 "조국"에 충성한 사람들인지 몰라도, 글쎄, 무려 반세기가 지난 뒤에 그들의 노력과 고집과 고통이 어떤 결실이나 의의를 거두었느냐를 생각해 보면, 나로선 아무래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어쩌면 그들은 지독한 "이상주의자"에 "낭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이 그들 "서씨네 삼형제"의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흥미로운 밑그림을 그려주었다면, 서승의 <옥중 19년>은 저자 자신과 서준식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20년 세월의 고난을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 본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읽을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또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고 또 짖궂은 데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 서준식이니만큼, 구속된 상태에서 겪어야 했던 불의나 부당함을 그저 참고 넘어가진 못했을 텐데, 과연 또 어떤 눈물겹고 가슴저미는 사연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그래도 이들 "서씨네 삼형제"가 이런 "옥중기" 분야의 베스트/스테디셀러 저자인 신영복을 능가하는 까닭은 그들의 치열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장기수로 복역하면서 일종의 "도사"가 다 되어 세상 만물을 하늘 위에서 굽어보듯 만사를 포용하는 신영복에 비하자면, 이들 "서씨네 삼형제"는 아직까지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생물체가 분명하다. 이들의 저술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신영복처럼 두리뭉실 애매모호하지가 않고 오히려 날카롭고 정확하다. 어쩌면 그 고통과 울분이 이들을 녹슬지 않게끔 더더욱 연마해 주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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