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서씨네 삼형제에 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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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의 옥중 19년
서승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서승의 수기를 읽다 보니 감동에 앞서 탄식이 나온다. 이념이란 것, 양심이란 것, 자존심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위대하게, 혹은 무섭게 만드는지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의 의지는 굳었고, 그의 이상은 고매했고, 그의 정신은 맑았다. 하지만 그의 육신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과연 무엇이 남은 것일까. 물론 옥중에서 19년을 썩은 그의 삶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리라.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 때문이건, 아니면 적어도 이 책에 드러나는 초연한 태도 때문이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그를 존경하고 싶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약하기 그지 없는 내 본성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참으로 지독한 사람이다!"
언젠가 시몬 비젠탈이 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강제수용소 체험담에서, 그가 여차 하다간 생사를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에 나치가 요구한 대답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는 대목을 읽으며, 나 같으면 차라리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얼마든지 해 주고 그 덕분에 빵 한 조각이라든지, 담배 한 개피를 얻어내는 편을 택하겠다는 지독하게도 "속물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탈무드>에 보면 어느 나라의 왕이 그곳 유대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의 율법에서 금지하는 부정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먹이려고 했을 때의 일화가 나온다. 율볍을 어길 수가 없으니 차라리 죽기살기로 반란이라도 벌일까 궁리하는 유대인들에게 랍비는 이렇게 말한다. "돼지고기 때문에 목숨을 거느니, 차라리 율법을 어기고 목숨을 건지는 것만 못하다."
어쩌면 이것은 "생존자의 논리"이고 "살아남은 자의 변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 자기 몸을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려는 본능이야말로 인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철저한 것이 아닌가? 빅토르 프랑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뒤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가장 착한 사람들은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도 자신이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수많은 우연의 연속과, 또한 이런저런 장물과 필수품을 뒷거래해서 모아둔 빵덩어리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생존을 향한, 그러니까 사람이 살고자 하는 열망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 강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서승이란 한 "인간"이 무려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구속된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 앞에서 나 역시 그와 똑같은 (물론 기개는 훨씬 못하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감탄에 앞서 경악을 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는 어떤 "인간"이기에 그처럼 크나큰 고통과 수모를 감내했던 것일까? 물론 그의 뒤틀린 운명에 있어 최우선의 가해자는 바로 박정희 정권이며,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일련의 군사정권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솔직히 이 책을 읽다 보면 박정희는 정말 "나쁜 놈"임을 알 수 있다. 제아무리 경제 발전이니 뭐니 하는 "치적"을 갖다 붙인다 하더라도, 과연 올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인간의 딸이 지금까지도 버젓이 야당 당수로 행세하며, 또 그런 인간의 딸을 지지하는 인간들까지 있다니!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일까?) 과연 그 울분과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친절한 금자씨"라도 불러다가 그 당시 관련자와 가해자들을 어디 폐교에라도 모아놓고 난장이라도 쳐야만 할까?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도 남지 왜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심약한 나로선 문득 이런 의문도 들었다. 제아무리 스스로의 양심과 이념에 충실했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말을 꺼내놓고 보니 마치 내가 그에게 전향을 강요했던 수많은 교회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다. 하지만 나로선 솔직히 그의 처지가 딱하고도 기막혀서 해 보는 말일 뿐이다. 물론 이 책의 지은이라면 이런 내 어설픈 말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로선 서승이나 서준식 두 형님들의 기구한 삶과 고통 못지않게,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돈벌이를 해야 했고, 자신의 삶은 내팽개친 채 두 형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나아가 차례차례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또 다른 고단한 삶을 살았던 서경식의 입장에 더욱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감옥에서 고문을 받는 것만큼이야 고통스럽지 않았겠지만, 서승의 초연함도, 서준식의 지독함도 나눠갖지 못한 심약한 책벌레 서경식이 20여 년 세월 동안 겪었을 또 다른 고생은 어떤 것이었을지, 나로선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억지 소리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투사의 종자"도 아니고 "양반의 종자"도 아닌 나로선 혹시나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 경우 서승이나 서준식의 자리보다는 오히려 서경식의 자리에 놓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즉 결코 앞에 나서지도 않고, 앞에 나선다 해도 끝까지 밀고 나가진 못하는 나약한 성격인 나 같은 인물이야 그저 뒤에 멀찍이 서서 남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죄의식과 자괴감과 안타까움으로 인해 차일피일 또 다른 심적 고통을 겪는 것밖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영웅, 혹은 투사로 여기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역사적 상징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지하의 경우는 아닐까 싶다. 이전에 그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참으로 착잡했던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상징"인 김지하와 "개인" 김지하는 천양지차로 다른 인물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김지하를 "역사적 상징"이며 "<오적>의 작가"로 생각하지만, 솔직히 김지하는 본인의 의도나 의지라기보다는 그저 우연에 우연이 얽혀들며 "민주화의 상징"이 된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김지하는 한 시대의 상징이 되기보다는 그저 이런저런 유쾌한 풍자시를 쓱쓱 써갈기면서 문필 활동을 하며 유쾌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의 방향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이 되는 영예 아닌 영예를 누리는 동시에, 그 대가로 인해 육신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70년대의 김지하와 90년대의 김지하가 보여주는 그 단절, 혹은 차이나 전환은 오히려 "연속선상"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는 애초부터 그렇게 속물적이었으며, 애초부터 그렇게 광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예언자이자 투사로 비춰졌을 뿐이며, 이제 더 이상 그런 시대적 배경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본모습이랄까, 진면목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솔직히 나는 김지하라는 "개인" 자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김지하라는 "역사적 상징"이 더욱 대단했다고 본다. 그런 시대의 후광이 드리워지지 않았을 때 나타난 것은 김철의 말마따나 "횔덜린의 것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광기"뿐인 것이다.
서승과 서준식, 두 사람 역시 오늘날에는 한국의 현대사, 특히 민주화와 인권에 관련되어 어느 누구보다도 확연한 상징이 되어버렸지만, 솔직히 그것은 이들이 겪은 고초에 대한 당연한 보상인 동시에, 이들이 결코 원치 않았던 엉뚱한 감투인 것은 아닐까? 물론 당시의 한국이 갖고 있던 숱한 모순과 악덕으로부터 비롯된 끔찍한 인권 침해 사례를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 축소시켜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제아무리 그럴 듯한 역사적 상징으로서의 후광을 머리에 씌워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고문당하고 협박당하고 두들겨 맞는 것은 "개인"이 아니냐는 불만이 생겨서 그런 것뿐이다. 서승이 묘사한 비전향장기수들이야말로 그 "이념"과 "민족"과 "조국"에 충성한 사람들인지 몰라도, 글쎄, 무려 반세기가 지난 뒤에 그들의 노력과 고집과 고통이 어떤 결실이나 의의를 거두었느냐를 생각해 보면, 나로선 아무래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어쩌면 그들은 지독한 "이상주의자"에 "낭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이 그들 "서씨네 삼형제"의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흥미로운 밑그림을 그려주었다면, 서승의 <옥중 19년>은 저자 자신과 서준식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20년 세월의 고난을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 본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읽을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또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고 또 짖궂은 데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 서준식이니만큼, 구속된 상태에서 겪어야 했던 불의나 부당함을 그저 참고 넘어가진 못했을 텐데, 과연 또 어떤 눈물겹고 가슴저미는 사연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그래도 이들 "서씨네 삼형제"가 이런 "옥중기" 분야의 베스트/스테디셀러 저자인 신영복을 능가하는 까닭은 그들의 치열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장기수로 복역하면서 일종의 "도사"가 다 되어 세상 만물을 하늘 위에서 굽어보듯 만사를 포용하는 신영복에 비하자면, 이들 "서씨네 삼형제"는 아직까지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생물체가 분명하다. 이들의 저술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신영복처럼 두리뭉실 애매모호하지가 않고 오히려 날카롭고 정확하다. 어쩌면 그 고통과 울분이 이들을 녹슬지 않게끔 더더욱 연마해 주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