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주마간산으로 뒤적이기 (6) : 김현과 라면...

"김현과 라면"이라고 적어놓고 보니 좀 우습다. 꽤 오래 전부터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라는 책 이름을 떠올릴 때면 늘 "성철스님 십억 이야기"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성철스님과 십억이란 돈이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마는, '시봉'이라는 낯선 말보다는 요즘 유행하는 '십억'이라는 속세의 낯익은 말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김현과 라면"이라는 말도 얼핏 보기엔 좀 생뚱맞다. 문학평론가 김현, 그러니까 문지 동인들이 한 목소리로 "뛰어난 문학 이론가이자, 정치한 비평가였으며, 성실한 프랑스문학자이자, 문화와 예술의 날카로운 관찰자였으며 (...) 동시에 아름다운 문장가였고, 정력적인 독자였으며, 훌륭한 스승이었고, 자상한 선배였으며, 문학지 동인으로서, 탁월한 편집자로서, 치밀한 번역자로서 (...) 자유와 민주주의, 개성과 다원주의의 가치관을 신념하고 또 실천하였으며, 모국어로 공부한 첫 한글 세대로서 (...) 우리 문화와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 실존적 지성의 정신적 탐구를 수행하면서, 샤머니즘과 니힐리즘의 극복을 향해 씨름해왔으며 (...) 실제의 생애는 조용하고 겸손했지만, 글을 통한 그의 내면의 싸움은 그런 만큼 치열하고 도저했던" 인물이라고 목놓아 합창하는 그 김현의 어마어마한 삶 가운데 감히 "라면"이라는 속되고 싼티 나는 물건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어보이는 것이다.(앞의 인용문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김현문학전집의 뒤표지에 나온 "김현문학전집을 간행하며"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문지판 "국민교육헌장"이랄까, 아니 "김현문학헌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장미가 넘친다.) 하여간 문지 동인들의 비장한 합창곡을 듣다 보면 김현이란 사람이 과연 "화장실에서 똥을 누긴 했는지"에 대해 궁금한 생각이 들 정도다. 뭐, 노골적으로 경망스럽고 빈정거리는 물음이긴 하지만, 솔직히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에는 한때 안성기와 장미희가 나오는 "미국 올 로케" 영화라고 해서 큰 인기를 끌었던 배창호의 <깊고 푸른 밤>을 아내와 보고 온 김현이 쓴 비판적 영화평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김현은 "안성기가 변 누는 장면"에 대해서 한참 동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 문학전집을 가끔 한두 권씩 뒤적여보긴 하지만, 이 책을 뒤적여보긴 처음인데 생전에 출간된 에세이집 두 권과 미발표 산문을 엮은 이 책은 얼핏 보기에 매우 "개인적"이고 "솔직한" 글들을 적잖이 담고 있는 것 같다. 방금 말한 "영화평"을 비롯해서 자기가 반포의 아파트에 살게 된 이야기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다가 건강이 악화된 이야기 등등 앞서의 "김현문학헌장"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김현이라고나 할까? 오늘날의 문학평론에 있어 가장 큰 우상 가운데 하나인 "김현의 우상"에 대해 적잖은 반감(솔직히 "김현"이 얄미운 것이 아니라, "김헌문학헌장"이 얄미운 것이다.)을 지닌 나로선, 어쩌면 이 책 한 권을 주루룩 읽고 나면 오히려 그가 인간적으로 좋아질런지도 모르겠다.(물론 어디까지나 "김현"이 좋아지는 것이지, "김현문학헌장"이 좋아질 리는 없다.) 이 책이 얼마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는 맨 끝자락에 실린 "라면 문화 생각"(392쪽)이라는 글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김현과 라면이라는,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가지에 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다.

  • 라면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밥맛이 없을 때, 또는 지난 밤에 지나치게 술을 마셔 속이 쓰릴 때, 또는 입이 심심할 때, 나는 라면을 끓여먹는다. 파를 조금 썰어넣고, 때로는 달걀을 깨넣거나 하여 먹는다. 내가 라면에 맛을 들인 것은 대학 연구실에서 조교 노릇을 할 때이다. 오랜 하숙생활에 진력이 나 거의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할 때였는데, 겨울날 연구실에 피워놓은 연탄 난로에 라면을 끓여먹는 맛은 가장 그럴듯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때에 내가 느낀 라면의 가장 큰 덕목은 간편함이었다. 냄비 하나와 물만 있으면 끼니를 때울 수가 있었다. 라면이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라면을 만드는 기름이 좋지 않았든지, 아니면 설거지를 꼼꼼하게 하지 않아서였든지, 서너 달쯤 라면을 끓여 먹으면 냄비 밑바닥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그래도 나는 라면의 맛을 탓하지 않았다. 물 끓는 소리와 (물 끓는 소리가 귀에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는 아는 사람만이 안다.) 라면이 알맞게 익었을 때에 퍼지는 구수한 냄새, 그런 것들이 라면의 맛을 이루는 것이겠지만, 그때에는 물을 적게 하여 거의 떡처럼 만들어 그것을 술안주로 먹기까지 하였다. (392-393쪽)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라면 예찬은 곧이어 라면 비판으로 돌변한다. 물론 김현 자신의 애정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겠지만, 적어도 지면의 특성상 (이 글은 <뿌리깊은 나무> 1980년 3월호에 수록되었다!) 라면이 상징하는 현대문화와 합리주의와 기계문명을 들먹여 한 방 먹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에 김현은 다음과 같은 "뻔한 말씀 감사합니다" 식 결론부로 접어든다.

  • 물건의 생산과 소비에서 자기가 진정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회에서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말해 두께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면을 먹기는 이제 쉬운 일이 아니다. 라면을 먹으면서 잃은 (아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다. 차라리 '라면 먹기에 대한 성찰로써 드러난'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사람의 두께를 되찾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과거의 체험을 체험으로 인정하면서, 현재의 체험을 그것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따지는 일일 따름이다. 나는 복고주의자가 아니다. 또 복고주의자가 되어 자연과 합일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모습을 억지로 지워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쨌든 지금의 한국 사람의 두께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작업을 서둘러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 역사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399쪽)

식생활에서 밥과 라면의 비중이 거의 비슷할 정도로까지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진 나로선 김현의 솔직한 고백이 반갑고 또 우습기조차 하다. 하긴 그렇다. "뛰어난 문학이론가이자 정치한 비평가"인 사람이라고 해서 라면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라면을 먹으면 반드시 똥이 나오는 하는 법이니, 결국 "아름다운 문장가였으며 정력적인 독자"인 김현도 똥을 누긴 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요즘에는 각종 식품첨가물 운운 하는 이야기 때문에 애꿎은 라면이 신나게 두들겨 맞는 분위기인데, 솔직히 말해서 라면이 그렇게 죄 많은 물건인가 하는 의구심도 없지는 않다. 물론 인공화합물인 조미료가 몸에 좋을 리는 없지만, 솔직히 이렇게 매캐한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다들 잘 먹고 잘 사는데 그깟 라면 하나에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 이거다. 그런 식으로 유기농이니 웰빙이니 청정이니 하는 것만 찾아다녀 보았자, 솔직히 누가 구증구포를 하는지 아니면 뭐 온갖 이상한 걸 섞는지 알 게 뭐냐. 개그맨 박준형의 말마따나 어린 시절에 문방구에서 사먹던 불량식품은 "식용색소 11호, 12호, 13호"일 뿐이었는데도 기가막힌 "포도맛, 오렌지맛, 콜라맛"이 나더라고 하지 않던가. 먹고 배부르면 그만이고, 먹고 기분 좋으면 그만이지 뭐.

창밖이 훤히 밝아오니 나도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어야 하겠다.(노란 너구리에, 처형네서 얻어 온 바지락 몇 개와 콩나물을 넣어서.) 그리고 만약 내가 "김현문학헌장"을 제정하는 자리에 있었더라면, 차라리 그 어마어마한 호칭과 위업과 장점 뒤에 슬쩍 "연구실에서 끓여먹는 라면과, 반포치킨에서 마시는 맥주를 사랑했던 소박한 인물이었으며"라는 문구를 하나 집어넣었을 것 같다.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는 문지 동인들 역시 약간의 "유머감각"과 고인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언제 한 번은 김현의 기일을 맞이해서 다들 모인 다음, 커다란 솥에 라면 한 박스를 끓여서 후루룩 후루룩 나눠먹는 것도 그럴 듯한 기념이 되진 않을까? 물론 뒤풀이는 맥주로 하겠지만 말이다.

 

*** 차례 맨 마지막 페이지에 오타가 있다. "대가의 죽음 / 나쁜 분장 / 의도인"이라는 소제목은 "라면문화생각"이 아니라 그 밑의 "세 개의 단상" 밑에 붙어있어야 한다. (왜 내 눈엔 이런 것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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