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기독교의 다양한 관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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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안 읽은 줄 알았는데 절반 정도 읽었다
어찌나 줄을 열심히 그어 댔는지 다시 보기 싫을 정도다
앞으로 철학이라고 이름붙은 책은 안 보려고 한다
너무 어렵다
철학에 대한 건 형이상학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지고 논하기 때문에 너무 사변적이다
그리고 말을 위한 말이 되기 쉽다
상당히 부담스럽다
왜 도덕적 개인은 많아지는데 사회는 점점 타락해지는가?
사회가 타락해진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
과거 어느 시대에 비해 얼마큼 타락했단 얘긴가?
타락의 근거가 뭔가?
인간의 속성이 비슷하듯 그들이 이루는 사회도 다 오십보 백보였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도덕적인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어쨌든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으나 사회가 비도덕적인 이유는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집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집단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 정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심 정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런데 그 개인도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루이스는 양심, 절대적인 도덕률을 들어 신이 인간의 내면에 명령한 소리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즉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상식 수준에서 도덕을 지킨다
물론 살인 같은 끔찍한 범죄는 누가 보든 안 보든 쉽게 저지르기 힘들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지갑을 주웠다면 경찰서에 가져다 주는 것 보다 그냥 쓰는 게 훨씬 더 일반적이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행동일 것 같다
"종교개혁 당시 농민들이 복음의 원리를 사회적 평등의 원리로 이해하고 천국을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했을 때 루터가 봉건제후들의 편에 서서 농민들에 대항했던 것처럼, 오늘날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 역시 사회적 평화 뒤에 숨은 불의와 억압의 요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 무비판적으로 현존하는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기독교가 신비적 종교로서의 신약적 측면 그리고 예언자적 종교로서의 구약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이 억압받는 자에게는 체념을, 압제하는 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롭지 못한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잘못된 점을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성직자라면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신음하는 백성의 외침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구약의 종교를 통해 삶의 의지를 북돋아 줄 것이다 반면에 압제하는 자들에게는 내세의 심판과 천국을 그리고 있는 신약의 종교를 통해 자신이 지닌 부와 권력이 영속될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겸손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성직자들이 기존의 질서에 존재하는 불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건전한 비판 세력이 될 때 종교는 비로소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 사회를 도덕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과연 종교가 사회를 도덕화 시킬 수 있을까?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관여한다는 게 옳은 일일까?
루이스에 따르면, 성직자들은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기 위해 교육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 제도나 운영 체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잘 모르는 일에는 나서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박정희 시대 때는 숨죽이고 독재 정권에 협력하면서 경제 개발의 특혜를 누린 교회가,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민주화 시대가 오자 사학법 들먹이면서 나라 구한답시고 구국 기도회를 여는 모습은 가소롭기 짝이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직자는 말 그대로 성직을 수행하면 될 것 같다
사회의 도덕화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고 (능력이 안 된다고 본다)교인들의 영적인 삶을 이끌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종교가 사회에 관여하면 (도덕화든 어떤 명분이든) 곧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늘 사회참여는, 특히 종교의 힘이 센 사회에서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사회를 도덕화 시키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가 미처 신경쓰지 못한 복지 부분에서 조용히 일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로든 종교는 영적이 삶을 책임져야지, 절대 사회 권력화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란 궁극적으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신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곧 개인적 체험의 절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성서의 구절처럼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경전의 이해와 해석에 의존하며 이해와 해석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존하기에 종교적 체험을 절대화하는 것은 자칫 자신의 주관을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기독교는 배타적 종교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 같은 자력종교는 구원 자체가 불가능 하다
이슬람은 어떤 교리인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적어도 내가 알기에 불교신자는 신에게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말하는 신만이 옳다는 것도 아집이고 독선일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절대자 즉 야훼 하나님을 대면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게 아닌가 싶다
카톨릭에서 선언한 바대로,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루이스의 저서에도 타종교의 경우 자신은 느끼지 못하지만 점점 우리가 믿는 구원 쪽으로 변해가는 경우를 설명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믿음과 성찰을 통해, 교회를 통한 방법보다는 돌아가는, 빠르지 않은 길이지만 어쨌든 하나님께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관용은 인정되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라면 이 고통이 죄의 대가라는 질책, 천국에서 영생하는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위로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참된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파늘루 신부는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있는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 악에 대한 해명이 아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파늘루 신부처럼 비록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스러운 신의 의지를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계속해서 전진해나가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의 결단일 것이다 또는 고통 속에 부르짖는 인간에 대해 침묵하는 냉혹한 신을 믿기보다는 신 없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며 자원봉사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리유와 장 타루처럼 어둠 속을 맹목적으로 헤쳐나가는 비신앙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는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
기독교인은 신의 성스러운 의지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닥쳐온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서 바로 우리의 선택을 하기 위하여 뛰어들어야만 한다 어린아이들이 겪은 고통은 우리들에게 쓴 빵과 같다 그러나 그 빵 없이는 우리들의 영혼은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극심한 고통 속에 헤맬 때 마땅히 네 죄 때문에 받아야 하는 댓가이므로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성직자가 있다면 당신이 한 번 당해 보라고 되받아 치고 싶을 것이다
다리를 절거나 말을 못하는 등의 선천적 불구가 하나님이 당신을 더욱 사랑하시고 천국의 자리가 더 높기 때문이라고 위로한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 앉고 나 대신 불구가 돼보라고 쏘아 주고 싶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겪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위로랍시고 하는 얘기들이 오히려 더욱 큰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왜냐면 그저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만약 상대방이 위로마저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대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불행은 오로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고 누구의 잘못으로 대신 겪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분노를 쏟아낼 아무 권리도 없다
한술 더 떠서 상대가 비난하고 조롱한다 해도 나는 대항할 능력조차 없다
이미 불행해져서 방어할 능력조차 사라진 상태기 때문이다
어떤 실직자가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제대로 알아 주지 않는다면서 왜 나를 이해해 주지 않냐고 화를 낸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는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다가 불행해진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잘못으로 자기 책임으로 오늘날의 비참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에게 빚진 사람도 없고 분노와 노여움을 받아 줄 의무가 있는 사람도 없고 굳이 이해를 하러 들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가 주변의 호의를 구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신이 남들보다 불행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도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한한 인내와 호의를 당연하게 기대한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다
내가 불구가 된 것은 누구 탓도 아니다
세상이 나에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잘못하신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열등하게 태어났을 뿐이다
무시당해야 마땅한 약자이지만, 도덕이나 동정심 같은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심성에 기대어, 혹은 종교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이해받고 배려받는 넘치는 호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불행을 세상탓 하고 하나님 탓하는 사람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하다
절름발이가 착하다는 편견을 버리라는 니체의 일갈이 생각난다
다양한 기독교적 해석을 읽으면서 다소간의 안심이 된다
신전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처럼 과학과 신학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고, 성경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보수적이고 극단적인 창조론에 입각한 성경무오류설 같은 한쪽 교리만 접하면서 고민해 왔던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다른 문제로 남는다
특정 교회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진화론은 얼마든지 함께 설명할 수 있고, 갈릴레이의 말처럼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즉 성경을 통해 계시하기도 하지만, 자연을 통해서 계시하시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야 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비밀을 푸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뉴턴이나 갈릴레이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도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해석을 하는 성직자들을 반대할 뿐이다
신의 존재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게 아니라, 신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페미니즘과 신앙도 훌륭하게 조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좀 더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알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