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책고르기, 책 정보 수집, 학계 동향 파악 -페페

책고르기, 책 정보 수집, 학계 동향 파악
"책방주인을 통해 책을 사는 일은 책을 매입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도서목록이다. 비록 책구입자가 도서목록으로부터 주문하는 책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책의 한부 한부는 언제나 하나의 놀라움이고, 또 주문하는 일에는 도박과 같은 우연이 뒤따른다. 거기엔 말못할 실망감과 함께 커다란 행복감도 뒤따른다. ... 책을 구입하는 일이란 결코 돈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전문적 지식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두 요소가 구비된다고 해서 진정한 서재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서재에는 언제나 무언가 투시될 수 없고 또 동시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다. 누구든지 ... 직감적 안목과 감식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출판년도, 출판장소의 이름, 크기, 전 소유주, 장정 등과 같은 모든 세부적 사항은 그에게 많은 힌트를 줄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때 이러한 것들을 그 자체로서만 삭막하게 서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말고, 이러한 것들이 함께 어울려 내는 하모니와 이 하모니의 질과 강도에 따라서 그것이 자기 자신에 속할 성질의 것인가 아닌가를 식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34-35쪽)

역사적 의의나 사연 등이 담긴 고서적을 수집하거나 순전히 외관상의 미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고 책을 사는 경우는 드물 것이고, 대개는 그 내용 때문에 책을 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책을 산다는 것이 "전문적 지식만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그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읽기 전에 책의 내용을 어떻게 알 것이냐이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 서평이다. 국내의 서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인데, 첫째는 책이 속한 분야의 전문가에 의한 서평, 둘째는 기자나 자칭 '출판평론가'라는 이상한 타이틀을 단 그룹들이 써내는 서평. 전자의 경우는 턱없이 부족하고, 후자의 경우는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보도자료를 베끼거나, 어떤 일관된 자기 관점 없이 독후감 수준의 인상비평에 그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나마 이들이 쓰는 서평의 양을 다 합해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새로 나온 책 중에서도 많은 흥미로운 책들이 서평 한 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넘어가기 일쑤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결국 서점에 직접 찾아가거나 인터넷 서점의 신간목록을 정기적으로 체크해야 한다. 그리고 약간 읽어 보거나 설명을 읽고 고위험도의 베팅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물론 책을 산다는 것은 언제나 도박이지만 말이다.

물론 저자나, (그 책이 번역서일 경우)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나 책에 대한 정보는 자신의 독서이력이나 주위의 권유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저자나 책에 대한 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번역서나 아니 나아가 외국서적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인터넷의 좋은 점이라면 설혹 비용이 좀 들더라도 과거와 달리 국내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대중서와 교양서의 경우는 다음 사이트에 가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 번역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영미권의 몇몇 유력한 서평전문지의 웹사이트지로 무척 도움이 된다. 만약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자라서 외서 번역에 관심히 많다면 웹사이트를 참조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구독해야 할 것이다.

London Review of Books (http://www.lrb.co.uk/)
Guardian Unlimited Books (http://books.guardian.co.uk/)
Times Literary Supplement (http://www.the-tls.co.uk)
New York Review of Books (http://www.nybooks.com/)

위의 두 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아래 두개는 보수적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아래 두 개의 사이트는 별로 재미도 없다. 관심이 지나치게 폭넓지 않고 특정분야만 골라 본다면 위 사이트들은 한 달에 한번 정도 반나절 정도만 투자해서 방문하면 된다.

하지만, 위 서평지들은 교양있는 대중을 독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학계나 업계의 최신 동향을 알아야 하는 전문연구자의 경우에는 그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지는 못한다. 이 경우는 당연히 전문학술잡지에 실리는 서평을 참조해야 한다. 하지만 전문학술잡지를 구독하기 어렵거나 전문학술잡지가 있는 도서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할까? 전문학술잡지도 자체적인 웹사이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 경우 서평 내용은 올라오지 않아도 서지정보는 올라와 있는 경우는 많다. 서평이 쓰여졌다는 것은 최소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뜻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다음은 학술지 자체의 소개도 겸하고 있다).

철학: Radical Philosophy (www.radicalphilosophy.com)- 영미권의 철학전문지들은 대개는 분석철학 위주지만, 영국에서 발행되는 이 잡지는 상대적으로 대중적이면서도 대륙철학도 다루고 있다. 특징이라면 신간서평이 절반정도를 이루고, 연 6회 발간되며, 비판적인 사회이론 분야의 책들도 다룬다는 점이다. 그 밖에 사회이론분야와 연관이 있는 철학 분야의 잡지로는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http://www.sagepub.com/journal.aspx?pid=164)가 있다.

정치경제학: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http://www.susx.ac.uk/Units/IRPol/RIPE/): 영국에서 발행되는 정치경제학과 국제정치경제학계의 새로운 경향을 접할 수 있는 잡지. http://www.susx.ac.uk/Units/IRPol/RIPE/reviews.html에서 최근 리뷰한 책의 목록을 볼 수 있다. 다만 업데이트가 자주되지 않는다. 그 밖에 추천할만한 정치경제학 학술지로는 Capital & Class (http://www.cseweb.org.uk/subs.html), New Political Economy (http://www.shef.ac.uk/uni/academic/N-Q/perc/npe/), Economy and Society(www.tandf.co.uk/journals/titles/03085147.asp 또는 www.ingentaselect.com/rpsv/cw/routledg/03085147/contp1.htm)와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http://www.urpe.org/rrpehome.html)이 있다. 앞의 세 잡지가 제도주의나 사회이론적 성향을 강하게 띤다면 마지막 잡지의 경우는 경제학적 성향이 강하다. 그 밖에 서평은 거의 실리지 않지만 비주류 경제학의 최고 권위지 중의 하나인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도 참고할 만하다.

사회학: Contemporary Sociology - 사회학 관련 신간에 대한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잡지이다. 안타깝게도 웹상에서는 글 목록도 구할 수 없는 듯 하다. 도서관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문화연구: Theory, Culture, and Society (http://tcs.ntu.ac.uk/tcs/) 엄밀히 말하면 사회학, 철학, 인류학 등을 모두 넘나드는 잡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국 센터라고 할 수 있다. 그쪽에서 어떤 책들이 나오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기타: Monthly Review (http://www.monthlyreview.org/). New Left Review (http://www.newleftreview.net/) 각각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좌파 잡지들이다. 일부 글을 읽을 수도 있지만, 서평도 매호당 2-3개씩 꾸준히 실린다. 이 밖에 최근에 가장 주목할 만한 잡지는 Historical Materialism (http://www.ingentaselect.com/rpsv/cw/brill/14654466/contp1.htm)이다. 상당히 많은 서평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실리는 논문들도 재미있는게 많다. Vol. 11 No. 1 (2003)은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그 밖에 외국의 신간서적 정보를 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블랙웰이라는 영국 최대의 학술전문서점 웹사이트에 가서 Email Alerts에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등록하면 관심분야별 신간정보를 받아 볼 수 있다. 엄청 많은 책들이 새로 나오기 때문에 이메일 여는 데도 시간이 걸릴 지경이고 내용을 일일히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드니, 너무 많은 분야를 관심분야로 선택하지 않는게 좋다.

Blackwell's Online Bookshop (http://www.blackwell.co.uk/bobuk/scripts/welcome.jsp)

또는 Polity Press, Basil Blackwell, Routledge, Verso, Monthly Review Press, Pluto Press, Sage Publications 등의 사이트를 주기적으로 방문하거나 Email Alerts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가입하는 방법이 있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협소한 우리나라 신문의 국제면, 학술면을 떠나서, 세상에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면 다음 사이트를 보면 된다.

Political Theory Daily Review (http://www.politicaltheory.info)

정치 뉴스와 사회과학 학술뉴스(주로 정치학 관련)에 관련해서만 해도 매일 가서 읽는게 부담이 될 만큼 많은 소식이 올라오는 사이트이다. 나도 한동안 익스플로러 홈으로 해 놓고 매일 방문하다가 엄청난 정보과부하로 포기했다. -_- 운영비도 안나올 터인데 그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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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쓴 글을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 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혹은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이었고 한 잡지의 청탁을 받아서 3배쯤 되는 초고를 쓴 이후에 다시 줄인 것이다(초고는 모스크바 통신에 올려놓았었다). 7월말쯤에 씌어졌지만 9월호에 맞추기 위해서 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렸고 자연스레 <두이노의 비가>에 대해 몇 마디 주절거리게 되었던 것인데, 책이 기억에는 8월 중순쯤 나왔을 법하다. 아직은 무더위가 기승이지만, 조금 앞당겨서 이 글을 호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곧 가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여, 마침내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 '가을날'이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시는 그의 대표작 <두이노의 비가>이다. 그리고 이 <비가>를 읽어보기 위해서 얼마전 러시아어로 번역된 릴케시 선집을 한 권 샀다. 칸딘스키의 그림들이 표지와 속지 군데군데에 들어가 있는 손바닥만한 포켓북이다.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두이노의 비가>는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통해서였는데, 그게 벌써 17년 전이다. 무엇보다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1>의 시작부분이었는데, 가령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같은 시구를 당신은 접해본 적이 있으신지? 당시에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 왜 그런가? 일단 처음 두 구절을 옮겨본다(번역은 우리말 번역본들과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여 조합한 것이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릴케의 시구이면서 동시에 그의 것만도 아닌(그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적었다고 했다) 이 첫 시구에는 <비가> 전체를 이끌고 가는 핵심적인 모티브들이 포함돼 있다. 대표적인 건 '천사’인데, 이 시의 기본축은 ‘강한 천사’와 ‘연약한 인간’의 대비이다. 흔히 말해지듯이, 인간은 짐승도 아니지만, 천사도 못 된다. 유한한 존재이자, 필멸적 존재인 인간, 그래서 맨날(은 아니더라도) ‘울부짖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그 ‘어중간함’이 릴케 시의 숙고의 대상이다(죽음의 관점에서는 ‘너무 이른 죽음’. 릴케는 그걸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 받는가?

지상적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천상적 존재인 천사들은, 혹은 신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건 ‘계’가 다르고 ‘질서’가 다르며,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사들의 무관심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유치하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으로 더 무서워할 만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라고 릴케는 말한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겨 설혹 한 천사가 우리를 껴안아준다 해도 문제는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거라는 것. 천사는 너무도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야한 비유이지만, 가령 백일도 안 지난 아이한테 보약을 먹인다고 해보자.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며, 아이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관심과 사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실제로 엄마의 젖가슴에 눌려 질식사하는 아이들도 있다지 않는가?). 그러니 어찌 함부로 관심을 구하겠는가, 사랑을 구걸하겠는가?

간혹 밥 먹듯이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정말로 사랑을 견딜 수 있는 건지? 가슴이 터질 듯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터져 스러지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연약한’ 우리가 견뎌내기에는 너무 강한 정념이기 때문이다(나는 밥 먹으면서 사랑하고, 이 닦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는, 그런 사랑”(혜은이)은 얼마나 무서운/두려운 사랑인가?

그건 ‘진리’나 ‘복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맨정신으로 대문자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진리’를 견딜 수 있을까? 살아남는 일은 왜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할까? 그건 진리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복음은 어떤가? 만약에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복음’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의 ‘기적’은 어떤가? 혹은 ‘재림’은? ‘종말’은?..



해서, 릴케의 <비가>는 시작부터 많은 걸 ‘평정’하게 해준다. 내가 17년 전에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건 릴케의 이 시 구절을 읽은 덕분이다.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 허무와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끔은 골방에서 이 시구를 되뇌어보시라. 다소간 위로가 되고, 구제가 될는지 모른다(물론 구원은 턱도 없다. 우리는 연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천박하기도 하므로!).

하여간에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공연한 관심과 사랑, 진리와 복음을 구걸하지 말고, 그저 대충 울부짖는 데 만족할 일이다. 울다 보면 속이 후련해지고, 내가 또 언제 울어보겠냐는 생각도 들 테니까. 가을날, 우리의 삶은 그런 울음과 울부짖음 속에서도 딴은 탐스럽게 익어가나니...(<삶과 꿈>, 2004년 9월호)

 

 

 

 

04. 07. 26./ 06.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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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사이"(돌베게, 2006)에서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첼란의 시처럼 이해하기 힘든 언어의 단편, 또는 누스바움의 시선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물음, 그런 난민들이 계속 질러대고 있는 소리들에, 즉 삐걱거림, 비명, 흐느낌, 때로는 껄껄하는 웃음에까지 가능한 한 귀 기울이는 것이 현재의 국면을 타넘고 나가기 위해 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감수성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들어 그 소리들을 듣고 알려 나가는 것을 저에게 주어진 작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사이"(돌베게, 2006) 237쪽에는 위와 같은 말이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거대한 자본주의의 품에서 타인을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는 최소한의 자의식을 유지하는 망명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삐걱거림, 비명, 흐느낌, 때로는 껄껄하는 웃음"에까지 가능한 한 귀 기울이는 것, 스스로의 감수성과 이성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들어 그 소리들을 듣고 알려나가는 작업을 멈춰선 안 된다는....

이것은 거창한 구원 작업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예민해야 하는가? 예민하다 못해 스스로를 예리하게 닦아 세워야만 하는 고통... 어쩌면 그것이 경계에 선 자들이 느껴야 하는 공통의 고통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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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기독교의 다양한 관점들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안 읽은 줄 알았는데 절반 정도 읽었다

어찌나 줄을 열심히 그어 댔는지 다시 보기 싫을 정도다

앞으로 철학이라고 이름붙은 책은 안 보려고 한다

너무 어렵다

철학에 대한 건 형이상학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지고 논하기 때문에 너무 사변적이다

그리고 말을 위한 말이 되기 쉽다

상당히 부담스럽다

 

왜 도덕적 개인은 많아지는데 사회는 점점 타락해지는가?

사회가 타락해진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

과거 어느 시대에 비해 얼마큼 타락했단 얘긴가?

타락의 근거가 뭔가?

인간의 속성이 비슷하듯 그들이 이루는 사회도 다 오십보 백보였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도덕적인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어쨌든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으나 사회가 비도덕적인 이유는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집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집단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 정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심 정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런데 그 개인도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루이스는 양심, 절대적인 도덕률을 들어 신이 인간의 내면에 명령한 소리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즉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상식 수준에서 도덕을 지킨다

물론 살인 같은 끔찍한 범죄는 누가 보든 안 보든 쉽게 저지르기 힘들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지갑을 주웠다면 경찰서에 가져다 주는 것 보다 그냥 쓰는 게 훨씬 더 일반적이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행동일 것 같다


 

"종교개혁 당시 농민들이 복음의 원리를 사회적 평등의 원리로 이해하고 천국을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했을 때 루터가 봉건제후들의 편에 서서 농민들에 대항했던 것처럼, 오늘날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 역시 사회적 평화 뒤에 숨은 불의와 억압의 요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 무비판적으로 현존하는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기독교가 신비적 종교로서의 신약적 측면 그리고 예언자적 종교로서의 구약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이 억압받는 자에게는 체념을, 압제하는 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롭지 못한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잘못된 점을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성직자라면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신음하는 백성의 외침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구약의 종교를 통해 삶의 의지를 북돋아 줄 것이다 반면에 압제하는 자들에게는 내세의 심판과 천국을 그리고 있는 신약의 종교를 통해 자신이 지닌 부와 권력이 영속될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겸손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성직자들이 기존의 질서에 존재하는 불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건전한 비판 세력이 될 때 종교는 비로소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 사회를 도덕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과연 종교가 사회를 도덕화 시킬 수 있을까?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관여한다는 게 옳은 일일까?

루이스에 따르면, 성직자들은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기 위해 교육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 제도나 운영 체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잘 모르는 일에는 나서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박정희 시대 때는 숨죽이고 독재 정권에 협력하면서 경제 개발의 특혜를 누린 교회가,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민주화 시대가 오자 사학법 들먹이면서 나라 구한답시고 구국 기도회를 여는 모습은 가소롭기 짝이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직자는 말 그대로 성직을 수행하면 될 것 같다

사회의 도덕화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고 (능력이 안 된다고 본다)교인들의 영적인 삶을 이끌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종교가 사회에 관여하면 (도덕화든 어떤 명분이든) 곧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늘 사회참여는, 특히 종교의 힘이 센 사회에서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사회를 도덕화 시키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가 미처 신경쓰지 못한 복지 부분에서 조용히 일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로든 종교는 영적이 삶을 책임져야지, 절대 사회 권력화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란 궁극적으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신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곧 개인적 체험의 절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성서의 구절처럼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경전의 이해와 해석에 의존하며 이해와 해석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존하기에 종교적 체험을 절대화하는 것은 자칫 자신의 주관을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기독교는 배타적 종교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 같은 자력종교는 구원 자체가 불가능 하다

이슬람은 어떤 교리인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적어도 내가 알기에 불교신자는 신에게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말하는 신만이 옳다는 것도 아집이고 독선일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절대자 즉 야훼 하나님을 대면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게 아닌가 싶다

카톨릭에서 선언한 바대로,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루이스의 저서에도 타종교의 경우 자신은 느끼지 못하지만 점점 우리가 믿는 구원 쪽으로 변해가는 경우를 설명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믿음과 성찰을 통해, 교회를 통한 방법보다는 돌아가는, 빠르지 않은 길이지만 어쨌든 하나님께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관용은 인정되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라면 이 고통이 죄의 대가라는 질책, 천국에서 영생하는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위로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참된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파늘루 신부는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있는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 악에 대한 해명이 아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파늘루 신부처럼 비록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스러운 신의 의지를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계속해서 전진해나가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의 결단일 것이다 또는 고통 속에 부르짖는 인간에 대해 침묵하는 냉혹한 신을 믿기보다는 신 없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며 자원봉사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리유와 장 타루처럼 어둠 속을 맹목적으로 헤쳐나가는 비신앙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는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

 

기독교인은 신의 성스러운 의지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닥쳐온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서 바로 우리의 선택을 하기 위하여 뛰어들어야만 한다 어린아이들이 겪은 고통은 우리들에게 쓴 빵과 같다 그러나 그 빵 없이는 우리들의 영혼은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극심한 고통 속에 헤맬 때 마땅히 네 죄 때문에 받아야 하는 댓가이므로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성직자가 있다면 당신이 한 번 당해 보라고 되받아 치고 싶을 것이다

다리를 절거나 말을 못하는 등의 선천적 불구가 하나님이 당신을 더욱 사랑하시고 천국의 자리가 더 높기 때문이라고 위로한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 앉고 나 대신 불구가 돼보라고 쏘아 주고 싶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겪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위로랍시고 하는 얘기들이 오히려 더욱 큰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왜냐면 그저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만약 상대방이 위로마저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대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불행은 오로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고 누구의 잘못으로 대신 겪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분노를 쏟아낼 아무 권리도 없다

한술 더 떠서 상대가 비난하고 조롱한다 해도 나는 대항할 능력조차 없다

이미 불행해져서 방어할 능력조차 사라진 상태기 때문이다

 어떤 실직자가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제대로 알아 주지 않는다면서 왜 나를 이해해 주지 않냐고 화를 낸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는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다가 불행해진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잘못으로 자기 책임으로 오늘날의 비참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에게 빚진 사람도 없고 분노와 노여움을 받아 줄 의무가 있는 사람도 없고 굳이 이해를 하러 들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가 주변의 호의를 구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신이 남들보다 불행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도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한한 인내와 호의를 당연하게 기대한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다

내가 불구가 된 것은 누구 탓도 아니다

세상이 나에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잘못하신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열등하게 태어났을 뿐이다

무시당해야 마땅한 약자이지만, 도덕이나 동정심 같은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심성에 기대어, 혹은 종교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이해받고 배려받는 넘치는 호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불행을 세상탓 하고 하나님 탓하는 사람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하다

절름발이가 착하다는 편견을 버리라는 니체의 일갈이 생각난다


 

다양한 기독교적 해석을 읽으면서 다소간의 안심이 된다

신전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처럼 과학과 신학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고, 성경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보수적이고 극단적인 창조론에 입각한 성경무오류설 같은 한쪽 교리만 접하면서 고민해 왔던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다른 문제로 남는다

특정 교회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진화론은 얼마든지 함께 설명할 수 있고, 갈릴레이의 말처럼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즉 성경을 통해 계시하기도 하지만, 자연을 통해서 계시하시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야 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비밀을 푸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뉴턴이나 갈릴레이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도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해석을 하는 성직자들을 반대할 뿐이다

신의 존재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게 아니라, 신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페미니즘과 신앙도 훌륭하게 조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좀 더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알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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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을산 > 돌아온 고수 두분....

서림님의 컴백을 축하드립니다.

안그래도 숨은 다른 고수 두분이 조용히 컴백 하신 소식을 어떻게 전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님 서림님께서 멍석을 깔아주셔서 다행이에요.  

간달프

간달프님은 알라딘 서재 초기에, 그리고 서재 기능이 생기기 전에 이미 '명예의 전당'에 오르셨던 분입니다. 
페이퍼보다는 서평을 주로 쓰셨는데,  꼭 2 년 전인 2004년 8월에 마지막 글을 올리시고는 홀연히 사라지셨답니다. 
음.....분류를 하자면...... 로쟈님과 바람구두님 과에 속하십니다. 
오늘!!  바로 오늘 2년 만에 또 홀연히 나타나셔서 리뷰를 올리셨더라구요. 
많이 많이 환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또다시 사라지지 못하게요.

 

수수께끼
수수께끼님은 서재인 중에서도 독특한 입지를 구축하신 분입니다. 
동양미술, 문화사, 예술, 사진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잠시 알라딘을 떠나시기 전에는 마이리스트와 마이리뷰 10위 안에 드셨답니다.
특히 미술사, 문화사 부문의 리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한번은 서재가 사고로 폐쇄되어서 그 귀한 리뷰와 리스트 일부가 날라갔던 아픈 시련도 있었답니다.
지난 7월달에 돌아오셔서 "이제는 알라딘을 좀더 가까이 하겠다" 고도 하셨는데
아직은 여름 휴가를 즐기시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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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분, 비록 최근 리뷰나 페이퍼는 몇 안되지만,  꼭 현대 문학만이 맛이 아니듯,
두분의 리뷰에서 고전의 맛을 충분히 맛볼 수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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