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말들의 풍경] <23> '국어'라는 이름--自尊과 唯我 (고종석)

2006. 8.9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8/h2006080816554285150.htm

 

 

[말들의 풍경] <23> '국어'라는 이름--自尊과 唯我
주관·국가주의 깃든 '국어'대신 '한국어'로 부르자
英은 영어·佛은 불어로 불러 유독 우리나라는 '국어'라 말해
'국문학' '국사'도 민족적 편향… 정서적 이입 없는 '한국어'좋아


‘국어’는 ‘한국 국민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러나 ‘국어’라는 말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주의, 주관주의는 정신적 미숙의 표지다.

한국인들은 제 언어를 보통 (‘한국어’가 아니라) ‘국어’라 부른다. 영국인들이 제 일상어를 ‘영어’라 부르고 프랑스인들이 제 일상어를 ‘프랑스어’라 부르는 것과 견줘볼 만하다. 여기엔 납득할 만한 구석이 있다. 우리가 보통 영국이라 부르는 ‘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에서는 영어만 쓰이는 게 아니다. 공용어 영어말고도 지역 공용어로 웨일스어와 프랑스어가 인정되고 있고, 이 밖에도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지방별로 여섯 개 군소 언어가 영국 영토 안에서 지역어로 사용된다.

프랑스의 언어생태계는 종(種) 다양성이 훨씬 더 또렷하다. 공용어 프랑스어말고도 서른 가지가 넘는 언어가 그 나라 각지에서 쓰이고 있다. 10세기 말 이후 ‘국왕의 언어’가 되면서 그 나라의 제1언어로 권위를 세운 프랑스어는 대혁명 이후 뿌리내린 보통교육에 신세지면서 이젠 거의 모든 프랑스인의 언어가 되었지만, 아직 프랑스 전국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프랑스 영토 안의 이 군소 언어들은 프랑스어의 위세에 밀려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작은 언어들은, 비록 독립된 언어와 방언의 경계가 늘 또렷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어 방언이 아니라 프랑스어와는 다른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니, 영어나 프랑스어를 영국이나 프랑스의 ‘국어’라 명토박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사실 한 나라 영토 안에서 한 언어만 쓰이는 것은, 비록 한국인들이 거기 익숙해져 있긴 하지만, 매우 드문 현상이다.

반면에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는 오직 한국어만 사용된다. 그래서 이 언어를 ‘국어’라 부르는 것도 그럴 듯하다. 지난해 공포된 국어기본법은 제3조 1항에서 “‘국어’라 함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국어’라는 말이 한국 영토 안에선 오로지 한국어 한 가지만 사용된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다.

‘국어’라는 말은, 한국 영토 안에서는 한국어 한 가지만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을 창조하는 노릇도 슬며시 겸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다시 말해 한국인이면) 누구나 ‘국어’를(다시 말해 한국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가 이 ‘국어’라는 말에 배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제는, 앞에서 살폈듯, 대부분의 나라들에선 결코 자명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 역사를 ‘국사’라 부르고 한국 문학을 ‘국문학’이라 부르는 관행과 마찬가지로, 한국 언어를 ‘국어’라 부르는 관행에는 자존(自尊)의 동역학이 작동하고 있다. 한국문화를 대상으로 삼는 학문을 뭉뚱그려 이르는 ‘국학’도 마찬가지다.

이 말들에서는 또 에도 시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1868년까지의 시대) 이래 일본 국학(고쿠가쿠: 일본 고전 문헌의 연구를 통해 일본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선양하려던 17세기 이래의 학풍)의 메아리가 울린다. 에도 시대 이래 일본 국학자들(고쿠가쿠샤)이 중국 문화에 맞서는 자존을 제 학문의 심리적 밑받침으로 삼았듯, 한국의 국학자들도 외국 문화에 맞버티는 자존에 기대어 제 학문을 다져 왔다.

그러니까 그들이 기댄 자존의 이념적 표현은, 저항적이든 패권적이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라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조선어(학), 조선사(학), 조선문학이 해방 뒤 국어(학), 국사(학), 국문학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을 때, 그 개명(改名)의 본보기가 된 것은 일본인들의 관행이었을 게다.

‘국어’라는 말이 ‘국민’을 전제한다는 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국어’ 개념이 ‘국민’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이 말의 본적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려 더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고쿠고가쿠’(國語學)와 ‘고쿠고 교이쿠’(國語敎育)는 ‘일본인을 위한 것’이고 ‘일본어학’과 ‘일본어 교육’은 ‘외국인을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재일 사회언어학자 이연숙에 따르면, ‘고쿠고/일본어’의 구별은 그런 ‘안/밖’의 구별에 대응하면서도 거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고쿠고(국어)는 ‘세계의 많은 언어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기를 거부하는 개념’(‘고쿠고와 언어적 공공성’, 2000)이다. 이연숙이 이 논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시다 노부요시(志田延義)의 ‘대동아 언어 건설의 기본’(1943)에 따르면, “고쿠고는 국체를 수호하고, 국민을 양생 육성하며, 국체로 유지된다. 고쿠고는 ‘우리나라 말’이라는 뜻이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나열적인 뜻으로 일본어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고쿠고는 곧 일본 ‘국민’의 모어인 것이다.

이런 고쿠고론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에게 기묘한 열패감을 심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반도 주민들은 열도 주민들처럼 일본어를 ‘국어’라 불렀다. 그리고 제 일상어를 ‘조선어’라 불렀다.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국어’라 불렀다는 것은 반도 주민들이 ‘(일본) 국민’이었다는 뜻이다. 조선이 일본의 정식 영토였으므로, 조선인이 대외적으로 ‘일본 국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는 참정권이 없었고, 반도는 내무성이 아닌 총독부가 관할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대내적으로 여전히 ‘비일본인’, ‘비국민’이었다.

조선보다 앞서 점령된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내무성이 관할하고 그 지역 주민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과 대조적이다. 그것은 조선이 오키나와나 홋카이도와 달리 일본제국에 충분히 통합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반도에서 조선어의 지위를 ‘고쿠고’의 ‘방언’ 수준으로 끌어내려 궁극적으로 몰아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소위 ‘고쿠고 상용어화 운동’이나 ‘고쿠고 생활어화 운동’이 그 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일본어학자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는 조선어의 폐절, 다시 말해 ‘고쿠고 일원화’가 조선인의 복리(福利)라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국어를 ‘국어’라 부르는 관행에 일본어를 ‘고쿠고’라 부르는 관행만큼 국가주의 충동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한국어’의 쓰임새와 ‘고쿠고/일본어’의 쓰임새에선 나란한 편향이 읽힌다. 다시 말해 ‘국어’는 ‘한국 국민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꼭 갈라놓아야 할까?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를 지금처럼 꼭 ‘국어’라 불러야 할까? 이 시리즈의 부제에서도 드러냈듯, 나는 ‘국어’보다는 ‘한국어’라는 말을 선호한다.

딱히 국가주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라는 말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주의나 주관주의는 정신적 미숙의 표지다. ‘국문학’이나 ‘국사’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외국인 한국어학자, 외국인 한국문학자, 외국인 한국사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어학자, 한국인 한국문학자, 한국인 한국사학자도 보고 싶다. 물론 여기서 ‘한국’은 딱히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약칭이라기보다 한반도라는 공간 또는 한반도 남반부라는 공간을 무심히, 다시 말해 별다른 정서적 이입 없이 가리키는 말이어야 할 테다.

▲ '조선어'와 '한국어'
정치적 이유로 갈린 호칭 통일되면 통일되지 않을까

‘국어’라는 유아적(唯我的) 이름을 버리기로 했을 때, 한반도와 해외 한인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한국어’라 불러야 하느냐 ‘조선어’라 불러야 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현실정치가 거기 깊이 끼여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선’이 일제 강점 이전 반도에 존재했던 전제 군주국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반도 북반부에 자리잡고 있는 전체주의 공화국의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어라는 말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일제 시대엔 이 언어를 조선어라 불렀고, 해방 뒤에도 반도 북쪽에서는 여전히 조선어라 부르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도 오래도록 조선어라 불러왔다. 한반도에 두 국가가 수립된 뒤에도 일본에서 조선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일본인들이 북쪽에 우호적이어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말을 반도 전체의 지역 이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 두 나라 사이의 균형이 대한민국 쪽으로 크게 쏠린 데다가 한국 쪽의 집요한 로비가 먹혀 들어가, 이젠 일본에서도 한국어라는 말이 꽤 널리 쓰이고 있는 듯하다.

사실, 조선을 분단 이전의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면, 조선어라는 말이 한국어라는 말보다 객관적 서술에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남한 지역 주민집단의 심상 속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특정한 시기의 봉건 왕조나 지금의 북한 체제와 자주 겹치며 이물감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마냥 허투루 볼 수만도 없다. 그러니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이 언어를 남쪽에선 ‘한국어’로, 북쪽에선 ‘조선어’로 부를 수밖에 없겠다.

불행하게도 분단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언젠가 ‘한국어’와 ‘조선어’는 순수한 언어학 차원에서는 서로 방언관계에 있으되 정치적 이유로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언어들에 합류하게 될지 모른다.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어 따위가 언어학적으로는 한 언어의 방언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듯 말이다. ‘한국어’와 ‘조선어’는 사실상 이미 그 단계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한자문화권 바깥에서 이 언어가 한 가지 이름(Korean, coreano, coreen 등)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주류 미국인들이 특별한 맥락 바깥에선 제 언어를 (‘미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부르듯, 한반도에서 쓰는 언어 이름이 어떤 ‘문화적 결단’에 의해 ‘한국어’ 또는 ‘조선어’로, 또는 제3의 이름으로(예컨대 남북 양쪽이 공유했던 역사시대를 상기시키는 ‘고려어’나 국어운동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배달말’로) 통일될 수도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프레시안 - 김동춘 : 일본의 과거는 물으면서 우리 자신의 과거는 묻지 않겠다?

"일본의 과거는 물으면서 우리 자신의 과거는 묻지 않겠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8/15]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
등록일자 : 2006년 08 월 16 일 (수) 12 : 33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오늘은 광복절 6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61년 전 우리는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났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건국을 둘러싼 좌우익의 단절이 있었고, 민족상잔의 비극이 있었으며 민주화를 위한 고통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활기찬 민주국가로,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지만, 남북대치상황을 비롯해서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는 많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생겨난 억울한 희생자들의 문제도 아직 온전히 해결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광복 61주년을 맞아 진실 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인 성공회대 사회학부 김동춘 교수를 초대했습니다.
  
  광복 61주년 우리가 청산해야할 과거는 무엇이고, 과거사 청산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또,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는 현재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진실 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입니다.
  
  김동춘교수는 1959년 경북 영주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84년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93년에는 사회학과 박사를 받았습니다. 97년 3월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 교수로 지내면서 성공회대 인권평화센타 소장, 노동대학 학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참여연대 창립시부터 정책위워장과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황해문화] 편집자문위원, [비평] 편집위원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근대의 그늘', '전쟁과 사회',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등이 있으며 지난 5월 한길사가 수여하는 단재상을 수상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오늘이 광복 61주년입니다. 보통 사람으로 치면 진갑. 환갑이 지나고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때인데요, 61년 전 우리에게 주어졌던 과제가 온전히 다 풀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회학을 공부하신 입장에서 61주년을 맞는 소회 같은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김동춘 : 광복 61주년이 됐는데요, 그동안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나 경제력 같은 부분은 상당히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12위 경제대국이 됐구요. 당시만 하더라도 아시아의 후진국이자 가장 어려운 나라였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세계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1945년 당시 우리민족이 다 열망했던 통일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는 아직도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의 냉전체제가 아직도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한의 분단상황이 지속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아직 충분하게 자주적으로 서있지 못하는.. 이런 정치적인 굴절은 계속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지위를 획득해가는, 이런 이중적인 상황에 놓여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박인규 : 김동춘 교수께서는 97년부터 연구활동을 하시다가 작년 12월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옮겨가셨습니다. 교수일에서 다른 일을 하시게 된 건데,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아요. 어떻게 그쪽으로 가셔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는지..
  
  김동춘 : 이 위원회는 오랜 국민들의 여망에 부응해서 분단60년, 한국전쟁, 군사독재하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억울한 과거, 자신의 가족이나 개인사에 피해를 입은 사실들을 진상규명하고 명예회복을 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만들어졌는데요. 이 위원회는 정부에서 대통령이나 국회 혹은 국무총리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된 위원회입니다. 이 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제가 이 위원회를 만들기 위한 입법운동, 사회운동에 쭉 참가해 왔는데 그러다 보니 결국 이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있는 연구자로 지목이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서 잠시 휴직을 하고 이 위원회에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물론 이 위원회는 정부의 조직이죠. 정부조직의 한 관리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연구자로서도 참여하게 된 거고 이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온 사람으로서도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요구들이 있었고. 저는 연구자로서 그냥 활동하길 원했지만 주변의 요구에 의해서 이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박인규 : 과거사 청산, 또는 과거사 정리가 필요하다고 평소에 많이 주장하셨고 연구도 많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라.. 제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과거사에 관한 진실을 밝혀서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것이 목표다. 그런 글귀를 봤는데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게 작년 12월 1일부터죠. 과거의 억울한 일들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그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과거사의 어떤 부분들, 사건들에 관련된 걸 조사하시는 건지 말씀해 주시죠.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동춘 : 국민들이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87년 민주화 이후에 우리사회에 과거사 문제가 쏟아져 나왔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5,18 진상규명이었는데, 당시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이 구속된 일도 있었고. 그 다음에 유명한 의문사위원회가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당시에 국회 앞에서 유족들 400명 이상이 농성을 해서 군사정권 하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사람들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예가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 위원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가 여러 개 있습니다만 저희 위원회는 그 중에서 특히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 억울한 죽음들, 좌익이든 우익이든.. 비전투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 중 하나구요. 또 하나는 과거 의문사위원회에서 다뤘던 과제 중에서 좀 미진한 과제들. 7,80년대 군사정권 하에서의 각종 의문의 죽음들, 조작간첩사건들을 비롯해서 45년 이후에 많은 의혹사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구선생 암살사건부터 조봉암 선생, 장준하 선생 사건 등도 우리 위원회에서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 위원회의 임무는 크게 봐서 이 두 가지고, 그 외에도 해외동포나 독립운동 관련 진상규명운동도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사실상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진행돼 왔떤 여러 과거사 작업의 총결산, 종합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20세기의 숙제라고 할까요? 이런 부분들을 한꺼번에 진상규명하고, 억울한 일이 있다면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위령사업을 하고, 국민들 사이에서 갈라진 균열이나 갈등을 치유해서 나가자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박인규 : 말씀하신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에 관한 진실을 규명하고 명에를 회복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거창양민학살사건 같은 사건 위주로 조사를 하시는지, 아니면 피해자가 신고를 해야 되는 건지..
  
  김동춘 : 우선 절차는 피해자들이 신청을 하게 돼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 어머니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가족이나 목격자, 주변사람들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접수를 해서 사건을 조사하게 돼 있습니다. 만약에 동일한 사건에 10명 혹은 100명이 신청하게 되면 그걸 묶어서 조사한 다음에 그 진상조사 결과를 국회와 대통령에게 1년에 2 번씩 보고합니다. 그 다음에 본인들에게 그 결과를 통보해 줍니다. 예를 들면 진상규명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조사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은데, 진상조사가 되면 본인들에게 통보를 해줍니다. 그리고 본인들의 신청과 무관하게 직권으로 조사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분명히 피해사실은 있는데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 이런 경우는 우리 위원회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사건은 직권으로 조사하고 밝혀서 국민들에게 알리는 과정으로 가게 되죠. 진상규명이 된 이후에는 화해작업을 하게 되는데, 화해작업은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법에 의거해서 과거사 재단을 설립하게 돼있고, 혹시 가해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만나는 사업을 할 수 있고 위령사업도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사회적인 치료라고 할 수 있죠.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치료하는 화해작업도 위원회에서 진행하게 돼 있습니다.
  
  박인규 : 무엇보다도 피해를 당하신 분, 또는 그 가족들이 신고하는 것이 조사의 첫 단계라고 생각되는데요, 지금까지 신고가 어느 정도 들어와 있습니까?
  
  김동춘 : 작년 12월 1일부터 전국에서 약 4500건이 접수돼 있습니다. 전국의 약 250개 창구.. 시, 군, 구 단위별로 접수받고 있고 저희 위원회에서 직접 받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상당수 사람들.. 약 80%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알고도 신청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청을 해서 진상규명이 된다 한들 지금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상처를 오히려 더 건드리지 않겠나 하는 생각. 그리고 혹시나 정치적 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 또 한 번 피해를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국민들 사이에 깔려있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보상문제가 여기서 다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상이 없는 상태에서 신청해서 뭐하겠는가.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열 배 혹은 백 배 정도의 피해자들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이 분들이 신청하고 있지 않은 게 현실이고 우리 위원회에서 신청이 종료되는 게 올해 11월 30일까집니다. 몇 달 안 남았는데 홍보가 부족해서 아직까지 신청을 안 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한 측면이 있습니다.
  
  박인규 : 위원회 활동시한은 제가 알기로 4년인데 일단 신고를 받는 건 올해로 끝나는군요.
  
  김동춘 : 예. 마감이 되고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한다는 취집니다.
  
  박인규 : 그런 억울한 사정들을 다 조사하려면 현재 위원회가 확보하고 있는 조사요원의 규모로 봐서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지금 몇 분이나 계십니까?
  
  김동춘 : 전체 인력은 187명인데요, 공무원 파견오신 분들이 70명 정도, 별정직 공무원이 한 70명, 그 외 계약직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만, 현재 인력으로 이 많은 사건을 조사하는 건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마 내년 정도부터는 빨리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유족이나 피해자들의 요구와, 이걸 해결하지 못하는 위원회의 한계 때문에 상당한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큽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법을 개정해서 인원을 더 확충하고 제한된 기간 내에 빨리 작업을 완료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어쨌든 과부하 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박인규 : 생각보다도 훨씬 적은 신고건수지만 이것도 제대로 조사하려면 현재 인원으로는 어렵다. 제가 언젠가 원로 소설가 최일남 선생이 쓰신 글을 봤는데, 과거의 진실을 밝혀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를 한다. 이건 굉장히 좋은 얘기다. 문제는 가해자 측에서 잘못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어야 용서도 해주고 화해할 거 아니냐. 그런데 이승만 시절부터 쭉 보면 가해자가 직접 나와서 자기 잘못을 용기있게 밝히는 분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길 해요. 이번 경우도 피해자들이 많이 말씀하셔도 결국 진실을 밝히려면 가해자가 좀 나와 주는 게 굉장히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 그런 사례가 좀 있습니까?
  
  김동춘 : 대표적인 경우가 저희 위원회의 일종의 모델이라고 생각되는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었죠. 그 경우는 처벌을 하지 않는 대가로 가해자들의 증언을 유도했죠. 그렇게 해서 가해자들을 나타나게 해서 피해자들과 서로 만나게 하는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화해작업이 진행된 게 아닌가 합니다. 그 경우도 사실상 최상부의 명령자, 지휘자들이 고백한 예는 드물고 중간 단위나 하급 단위의 가해자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같은 경우도, 예상하건대 이런 가해자들 본인이 스스로 가해자가로 얘기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본인의 인생이 전부 부정되는 측면도 있고 동료들의 압력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화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몇 분이라도 그동안 잘못된 공권력의 행사의 집행자가 됐던 사실을 스스로 고백한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그간의 갈등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구요. 그래서 우선 이런 작업에서는 여러 가지 주변의 분위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아공의 경우도 사람들은 성공의 이유를 기독교문화라고 든 적이 있습니다. 관용과 고백. 그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과연 그런 문화적인 전통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되돌이켜 보게 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나 종교계가 이런 화해나 용서를 한 경험이 있는가도 돌이켜 보게 되죠. 그래서 중요한 시험대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박인규 : 약간 다른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올해가 광복 61주년이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인데 너무 과거에만 얽매여 있는 게 아니냐. 너무 회귀적, 복고적이라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동춘 : 그렇게 말하시는 분들은 일종의 자기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는 교과서 왜곡이나 침략주의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것을 얘기하면서, 우리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를 잊자고 얘길 하는 이중잣대를 갖고 있다는 거죠. 만약에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한다면 일본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침략의 과거사도 잊고 넘어가야 되는, 즉 일본의 현재 우익들을 정당화 해주는 논리적 모순이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사례로 저는 독일과 일본의 사례를 들고 싶습니다. 독일이 폴란드,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과거에 대한 용서를 빌고 공동교과서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함으로써 독일이 EU의 중심국가가 됐고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 겁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자신의 과거를 계속 부인하는 과정 속에서 동아시아에서 계속 평화체제가 구축되지 않고 일본이 우경화되는 문제들이 발생한 거죠. 결국은 과거사 정리라는 것은 국가나 사회의 아이덴티티 수립의 문제죠. 그런 점에서 어떤 국가냐, 어떤 사회냐.. 이런 걸 만드는 과정 속에서 인권이나 평화, 법, 정의, 이런 개념이 우리 사회의 모든 관행이나 법, 제도, 의식 속에 스며들어 오느냐가 21세기 우리 사회가 과연 약자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느냐. 혹은 정의가 지켜질 수 있는 사회가 되느냐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위해서도 과거사 정리가 필요한 것처럼 국내적으로도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명백한 진실규명과 정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대략 7,8년 과거사 정리를 해온 것 같은데, 과거사 정리라는 게 우리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로 나아가는 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중간평가를 하신다면..
  
  김동춘 : 저는 분명히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5.18과거청산을 예로 들자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이라는 게 대단히 형식적이었죠. 그리고 사실상 5.18 당시 가해책임도 명확히 밝혀진 건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억울한 죽음들을 진상규명 작업을 함으로써 광주지역의 지역주의 문제와 그 지역 사람들의 민주적인 의식이 분명히 향상된 효과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분명히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계는 있었지만. 그리고 의문사 같은 경우도 물론 진상규명이 충분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거기에 응답했다는 사실. 즉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고 국가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그냥 내버려 두진 않는구나 하는 약간의 신뢰감. 그리고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통합성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의 재고에 분명히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굉장히 많아서.. 성급하긴 하지만 그런 과거사 규명작업들이 하나로 좀 종합돼서.. 그런 걸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좀 필요한 작업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김동춘 : 이상적이 된다면 이런 위원회가 난립하지 않고 하나의 단일위원회가 돼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면 가장 좋죠. 왜 이렇게 됐는가 하는 건 우리 정치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과거사 정리작업이 진행됐는데 상당부분 유족들의 요구에 의해서 정치권이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하는 과정 속에서 이렇게 된 겁니다. 그때그때 유족들이나 시민사회가 요구하면 법을 만들고 또 요구하면 또 만들고. 그런 민원처리적 방식으로 해결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지 애초에 정치적으로 큰 플랜이 있었다면 이렇게 난립하지 않고 하나의 단일하고 일관된 계획하게 충분히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정치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과거사 정리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다른 생각이 있다면, 주로 야당에서 나온 얘긴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 행위, 친북행위에 대해서도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된다. 그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김동춘 : 바로 그 점이 저희 위원회 법에 반영돼 있습니다. 우리 위원회의 조사활동 중에서 이른바 적대세력이라고 지칭되는 북한 혹은 인민군 세력에 의한 인권침해나 폭력부분도 조사하게 돼 있습니다. 저는 그 큰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우리가 이 위원회 활동이 이데올로기로 다시 우리 사회를 찢어놓자는 게 아니기 때문에, 좌에 의한 학살, 우에 의한 학살 혹은 일부 운동권 세력에 의한 폭력.. 이런 부분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 잣대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피해사실을 진상조사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제기를 했던 분들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이 위원회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전제 하에 그런 문제를 제기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출발이나 핀트가 좀 안 맞는다고 생각하구요. 그래서, 여전히 우리 위원회 활동에 대해서 계속 이데올로기적인 사실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이런 부분들을 인권이나 평화의 잣대로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에 국민들에게 공감대를 일으킨다고 생각하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60년 동안의 한국현대사의 비극들을 보면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상 우리가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했고 외세에 의해 분단됐다는 더 큰 외적 환경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특정 개인 특정 집단을 공격했을 경우에 오히려 그것이 적절치 않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과거사 문제는 이데올로기 보다는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문제로 접근하는 게 마땅하다는 말씀이시죠?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광복 61주년을 맞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부터는 좀 개인적인 질문도 해보겠습니다. 김동춘 교수께서는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선생님도 하시고, 다시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가.. 상당히 독특한 이력을 갖고 계신데요. 무엇보다도 과거사 정리문제에 대해서 일찍부터 연구도 하시고, 또 과거사 정리를 위한 입법문제에 관해서 앞에 나서시기도 했는데, 과거사 정리가 왜 중요하다. 과거사 정리 문제에 천착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십니까?
  
  김동춘 : 개인적으로 유신시절에 대학을 다녔고, 그 유신억압이나 광주5.18 당시에 제가 학생으로서 체험을 했고 학생운동에도 약간 관여했던 경험 때문에 당시 억압적 체제나 그 체제 하의 고문이라든지 인권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민감하게 느꼈던 경험도 있구요. 연구자로서는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의 노동문제를 갖고 썼는데, 그 노동문제에 접근을 하면서 우리 사회의 노동현장에서의 폭력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우리사회에서 인권이나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해결이 안 되는 중요한 이유들이, 우리 사회의 냉전과 반공이데올로기 등에 의해서 폭력이 끊임없이 정당화 되고. 과거에 인권침해를 한 사람들이 처벌되지 않거나 진상규명 되지 않는 이런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됐죠.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의 집단적 폭력의 기원으로 저는 한국전쟁을 보게 됐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폭력과 전쟁 이후의 폭력, 즉 연좌제. 이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예를 들면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식의 담론, 그런 것들이 통용되는 이유가 바로 휴전체제죠. 전쟁은 끝났지만 지금 어떻게 본다면 기술적으로는 전쟁중 아닙니까? 그런 것이 구조화 된 폭력을 용인해 주는 시스템.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한국전쟁을 연구하게 됐구요. 그러면서 한국전쟁의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런 문제를 좀 해결해야겠다.. 이런 생각들을 갖게 됐습니다.
  
  박인규 : 저나 김동춘 교수가 대학 다닐 때는, 사실 관이라는 건 억압적이고 기본적으로 가까이 안 가는 게 좋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지금 어떻게 보면 관에서 만든 기구에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볼 수 있나요?
  
  김동춘 : 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국가를 상당히 불신해 왔고, 또 어떤 분이 쓴 글을 보면 자기가 여전히 국가를 불신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죠. 또 국가가 과거에 가해주체였기도 하구요. 그런 국가가 문제해결의 당사자가 된다는 역설적 측면도 있고. 또 그것의 한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민주화가 되면 국가가 국민의 국가로 변하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면서 점차 국민들의 요구가 국가의 활동에 반영되면서, 국가가 점차 국민의 국가로 변해오는 과정. 물론 김대중 정부가 국민의 국가를 표방했고 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이 충분하게 실질적으로 그런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국가가 앞장서서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역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민주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국가의 힘을 빌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오지 않았나 생각하고 제가 그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박인규 : 지금 활동하고 계신 곳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인데, 이건 국내적인 거죠. 많은 분들이 동아시아가 앞으로 공동평화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라간의 진실규명과 화해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게 일본인데. 오히려 고이즈미 총리 이후로.. 그리고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까지.. 과거사에 대한 진실을 직시하지 않는 듯한, 그래서 한일관계가 더 꼬이고 어려워지고 있는데요.. 이런 한일관계에서의 과거의 불행했던 진실을 양국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우리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동춘 : 한일관계의 기본 핵심은 한일이 아니라 한미일관계죠.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오늘의 일본의 우경화나 과거에 대한 부정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만든 거죠. 해방 이후 일본이 패망하고 난 다음에 일급 전범들을 처벌하지 않는, 미국이 처벌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오늘의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로 만들어준 당사자가 미국이고. 그리고 미국의 이해관계로 인해서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유지해야 될 필요성 때문에 일본을 파트너로 삼고 한국의 군사정권을 파트너 삼아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하면 동아시아가 하나의 공통의 역사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느냐의 문제겠죠. 그런 과정에서 아직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는 극히 초보적인 상태고. 민간차원에서 공동교과서 작업들이 시도되긴 합니다만 일본의 경우는 시민사회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숫자가 대단히 적고, 중국같은 경우는 지금 경제성장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과정에서 과거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있는 상탭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한국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식민지 경험을 했던 피해국가고 분단국가기 때문에 한국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일본의 각성을 유도하고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깨우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한국의 역할을 통해서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의 관계가 가능하면 서로 균등한 관계로, 상호 협조적 관계로 올라갈 수 있는 계기들이 한국에서의 과거사 정리와 남북한 평화체제 과정 속에서 오히려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평택기지이전문제나 작통권환수 등 문제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리고 있는데,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글어갈지에 대해서 국내적인 통합된 의견이 안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동아시아와 미국간의 중재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어려운 얘기지만 한미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동춘 : 부시정권 등장 이후 한미관계는 지금 최악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정권과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이건 지지하는 입장이건 마찬가진데, 그 이유는 미국이 기본적으로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목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북한을 화해의 당사자로 통일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이 간극을 좁히는 게 현재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현 부시행정부가 바뀌거나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되구요. 단지 미국 내에서도 일방적으로 테러국가로 지목하고 전쟁을 벌이는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높고, 미국 내에도 양심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고. 또 우리가 과거의 전통으로 봤을 때 어떤 특정 외세에 의존할 경우에는 반드시 분단으로 갈 수 있는 비극적 경험을 했기 때문에, 어쨌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 되기 때문에 실리적 실용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지 부당하게 우리의 운명이 주변 강대국에 의해 좌우될 지도 모르는, 예를 들면 전쟁 혹은 식민지화 혹은 지나칠 정도의 우리 미족구성원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적어도 중국이나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되고. 지금의 움직임은 그 줄다리기를 하는 정상적 관계로 가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우리가 북한이 어려우니까 도와주자고 하다가도 미사일 발사하니까 도와주지 말자고 하고.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우리의 일관되고 통합된 의견이 안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들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김동춘 : 저는 남북관계는 미래 한국사회 한국정치의 차원에서 봐야 된다고 생각하고. 북한은 기본적으로 체제생존위기에 몰려있다. 그리고 그런 위기에 몰린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고 선택의 폭이 굉장히 좁다고 생각합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북한의 행동이 도저히 예측불가능하고 국제관계의 신뢰를 깨는 행동들을 많이 하고 있죠. 그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승적 관점에서 우리가 장기적으로, 결국 남북한의 하나의 경제정치단위가 만들어져야 된다는 목표를 갖고 본다면 북한에 대한 지원같은 부분은 미래투자고 우리가 미래에 지불해야 될지 모르는 비용을 지금 지불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훨씬 성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활동시한이 최소 4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동춘 상임위원은 2년 임기로 가셨는데 혹시 하시다 보면 4년 다 하시는 거 아닙니까?
  
  김동춘 : 제가 앞으로 연구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데, 현재 연구활동을 못하는 상황이라, 가능하면 학교로 빨리 돌아가서 본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박인규 : 기본적으로 연구자시니까.. 앞으로의 연구테마랄까 활동계획 같은 걸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김동춘 : 지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주로 한국전쟁 피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활동을 그만 두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학문적으로 정리를 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보도연맹학살사건 같은 경우 우리 현대사회의 너무나 큰 비극이고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살하는 시스템. 그 사건 자체를 보기 보다는 제가 사회학자로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처벌하는 사회의 반인권적 메커니즘에 대해서 한번 분석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제가 연구하고 있는 좀 더 현재적인, 사회학적 주제. 특히 노동문제나 시민사회 등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지만 인간답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건데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학문적으로 많이 기여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박인규/기자
ⓒ 2001-2006 PRESSian. All right reserve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딸기 > 조너선 스펜스.

 

조너선 스펜스 예일대 역사학과 스털링석좌교수  jonathan.spence@yale.edu


1600년 이후 현재까지의 중국사와, 중세 이래 중국에 대한 서양의 인식을 가르치고 있음.

영국 태생. 캠브리지 대학을 나와 예일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음.

1965년부터 예일대 교수로 재직중. 1993년 스털링 석좌교수가 됨. 2004~2005 미국 역사학회장.


Bibliography

Mao Zedong (1999)
The Chan's Great Continent: China in Western Minds (1998)
The Taiping Vision of a Christian China, 1836-1864 (1998)
The Chinese Century: The Photographic History of the Last Hundred Years (1996)
God's Chinese Son: The Taiping Heavenly Kingdom of Hong Xiuquan (1996)
Chinese Roundabout: Essays in History and Culture (1992)
The Search for Modern China (1990)
The Question of Hu (1988)
Tsao Yin and the Kang-Hsi Emperor: Bondservant and Master (1988)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1984)
The Gate of Heavenly Peace: The Chinese and Their Revolution, 1895-1980 (1981)
To Change China: Western Advisers in China, 1620-1960 (1980)
The Death of Woman Wang (1978)
The China Helpers: Western Advisers in China, 1620-196 (1969)

 

 

한국어판 책표지

 

 


수상 경력

1978 William C. DeVane Medal of the Yale Chapter of Phi Beta Kappa

1982 Los Angeles Times History Prize

1983 Vursel Prize of the American Academy and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

2001 Companion of the Distinguished Order of St. Michael and St. George(Englan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원로들의 원론과 지혜

아침에 전철을 타고 오면서 경향신문의 김우창 칼럼을 읽었다. 최근 정부 고위 공직의 인사문제와 관련한 여러 말썽들을 되짚어보는 글인데, 공감하는 바가 많아서 옮겨놓는다(나는 왜 '원로들의 원론'에 자꾸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일까? 벌써 원로급 나이인가?). 칼럼의 제목이 '인사와 정책의 목표'이며, 그 부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이다.

경향신문(06. 08. 17) [시대의 흐름에 서서] 인사와 정책의 목표

-최근에 나라 안을 크게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일의 하나는 고위 관직의 인사문제이다. 보통 시민들에게는 이것은 왜 이렇게 시끄러워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학생이 서울대학에 합격했는가 못했는가 하는 것은 본인이나 부모 또는 친척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전체적으로 그 선발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일 것이다. 이 공정성에 대한 관심에는 그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규범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또 대학의 기능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가 들어있다. 보통 시민들이 특정 개인의 합격 여부에 초연해지는 것은 넓게 해석하여 대학이 해야 하는 일을 알고 그 필요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고위 공직자나 정부 산하의 단체들의 간부 임명에는 그들이 맡은 일이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어떤 일에는 어떤 사람이 임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싸우는 소리가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직자 인사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임명 후보자의 과거행적이거나 임명권자와의 친소 관계다. 후보자의 자격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인물의 자격 요건이란 대체로 여러 전문 분야에서 그가 얻어낸 사회적 명예의 집적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과거의 행적을 문제 삼는 것은 이것을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삶의 자취 전부보다 맡아야 할 일에 관계된 부분이다. 후보자가 신뢰할 만한 인격의 소유자인가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의 요건에 부차적인 것이고 최고 감독자의 감독 능력으로 조절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친소가 문제되는 것은 적어도 임명권자의 관점에서는 이 신뢰의 문제에 관계된다 할 수 있다. 쌓아 놓은 사회적인 명예만이 자격 요건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다분히 보수적인 관점에서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해야 될 일이 전적으로 새로운 일이라고 한다면 쌓아 온 명예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자격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이 경우에 임명권자와의 친소가 중요한 요인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만이 알아보는 일과 일의 요건과 일의 담당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이 적어도 민주주의의 체제하에서 또는 국민적 동의를 필요로 하는 공공의 광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 일은 공적인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은 어떤 사적인 의도의 수행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심을 일으킬 것이다.

-지난번의 선거 결과는 정부가 하려는 일들이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았거나 긍정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었다. 그런데 정부 자체도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일에 어떤 자격자가 필요하다는 말보다도 권력 투쟁이다, 고유권한이다, 하는 해석이나 주장이 나오는 것은 공직자 인사에 참조의 척도로서 일이 중요치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집을 어떻게 짓겠다는 생각이 분명하면 목공을 고르는 데 시끄러운 싸움이 벌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정부나 집권층에 정치적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의 정부는 다른 어떤 정부보다도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생각하는 바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고 또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채로 수행되는 정책은 현실적 결과물을 통하여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요즘 또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다른 일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이다. 이것은 정부가 내걸고 추진하려는 정책의 설득력 없는 추상성을 잘 드러내준다. 원칙으로 따진다면 주권국가가 군대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주와 독립은 국제적 힘의 놀이의 희생물로서 식민지, 분단, 제국주의 등을 경험한 한국인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이에 비추어 작통권 회수는 민족 정서에 즉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정책 과제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복합적인 요인의 균형으로 유지되는 한반도의 평화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것은 신중한 고려를 요하는 문제이다.

-또 필요한 것은 작통권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이다. 평화 균형의 유지보다도 자주권 확보를 선택하여야 할 급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작통권의 환수는 정당하다. (물론 강력한 군사력이 국가주권의 핵심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깊은 고려가 필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당장에 큰 문제가 노정되는 것이 아닌 작통권 회수를 지금 정부의 주요 과제로 삼아야 옳은가? 같은 의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다.

-사실 FTA가 한국민의 삶에 무엇을 가져올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일반 국민만이 아니라 협상을 시작한 정부도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 하필이면 연구도 설득도 별로 없는 지금의 시점에 이 협정의 문제를 들고 나온 정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얼마 전 우리는 한·미동맹에 이는 불협화를 완화하는 방안으로 FTA 협상을 시작했다는 설명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작통권 문제도 다른 의도를 숨긴 것인가? 그것은 혹시 집권층의 국내 정치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궁리해낸 정치 전략인가? 그 전략이 적대적 대결을 불러일으켜 지지세력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모든 것을 정치 전략화하는 일이다. 물론 정치에 등장하는 모든 정책 목표는 전략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전략적 사고도 국리민복에 이어지는 것이 있고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목표에 이용되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끝내 이것을 구별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숨은 전략의 일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정치에 목표의 설정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좋은 목표가 그에 따르는 모든 부작용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배를 운항하는 데에는 옛날이라면 별의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가리키는 것만으로써 운항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또 정치에 목표가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의 큰 목표에는 상징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 있고 현실적인 것이 있다. 자유나 평등 또는 우애와 같은 전통적 민주주의의 목표는 추상적인 큰 목표이면서 모든 사람의 일상적 삶에서 정부 정책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구체적인 현실 속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지금까지 참여정부는 추상적인 목표에 집착하고 그로써 국민을 동원하고자 한 감이 있다. 8월15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조순 전 부총리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중소기업 부진, 자영업자 몰락, 청년실업 증가, 상습적 파업, 양극화 심화…철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종교…화목 없는 사회, 내실 없는 문화, 방향 없는 교육”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무엇인가?(*조순 전 부총리의 칼럼은 아래 옮겨놓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각이 있다면, 누구에게 무엇을 맡길 것인가는 조금 더 쉬워질 것이고 맡을 일이 분명한 자리들에 대한 지나치게 시끄러운 논란은 사라질 것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한겨레(06. 08. 15) ‘선진화’ 구호의 허실

-모두들 선진국이 되고자 한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구별이 없다. 학계도 역시 같다. ‘선진화’ 구호가 한국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선진화는 좋지만, 선진화 구호에는 문제가 있다. 사실, 한국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선진국 아닌가. 정보통신(IT) 분야에서는 세계 최강국이 됐다. 반도체·휴대전화·자동차·철강 등에서는 세계 굴지의 대기업을 두고 있다. 조선에서는 세계 최대 수주국이 됐다.

-소비를 보아도 선진국 수준이다. 인구 대비 자동차 수, 국토 면적 대비 고속도로의 길이, 모두 세계적이다. 미국·중국에서는 한국인의 부동산 투자가 성행하고, 세계 도처에 한국 관광객이 넘치고 있다.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는 돈 많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는 될 것이다.

-남들이 선진국이라 하는데도, 정작 이 나라에서는, 선진화 구호가 요란한 연유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 왠지 허전하여 중심이 잡히지 않고, 나라의 기본이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중소기업 부진, 자영업자 몰락, 청년실업 증가, 상습적 파업, 양극화 심화 등, 이 나라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심각하다. 거기에다가 철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종교 등의 간디의 말에, 화목 없는 사회, 내실 없는 문화, 방향 없는 교육 등을 추가하면, 선진화 구호가 저절로 나온다. 나라가 이런 기본 문제를 안고 있는 한, 선진국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 이런 기본 문제를 갖추는 데는 선진화 구호는 소용이 없다. 선진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미국과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인데, 이 나라들의 현재 모습에서 과연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입만 열면 미국·일본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두 나라의 현재 거시경제 운영이나 미시경제 운영을 모방하면 우리도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지금 세계에는 선진국/후진국의 구별이 급격히 흐려지고 있다. 선진국 중에 잘 안 되는 나라가 많고 후진국 중에 제대로 되는 나라도 많다. 잘 되는 나라가 있다면,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다 우리의 모범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남미는 불과 몇 해 동안에 많이 달라졌다. 브라질은 지난 4년 동안 재정적자를 완전히 해소했다. 인플레도 없어지고 경상수지도 크게 개선됐다. 브라질만이 아니라, 스페인 계통의 남미 주요국들도 이제 인플레는 한자릿수로 되고, 재정적자도 크게 줄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됐는가. 따지고 보면 별것이 아니다. 9·11 이후,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자활의 길을 추진한 결과다. 남의 모델이나 이론을 탈피하여, 각기 나름대로 나라의 기본을 찾은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한국 사람들이 과연 진지하게 자기 나라의 기본을 닦아서 나라의 앞날을 타개할 의지가 있느냐다. 선후진을 가릴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편견 없이 이해하고, 그들의 경험을 거울삼아 나라를 좋게 만들 겸허한 자세가 있는가? 있다면, 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는가? 선진화를 외치지만 그 내용은 무엇이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방법은 무엇인가? 선진화의 내용은 기본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정화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 방법은 실사구시밖에 없다. 겉치레를 버리고 실천을 통해 기본을 닦아야 한다. 단 한 가지만이라도.(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06. 08. 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스칼라피노가 보는 한반도 정세

지난번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에 이어서 미국의 가장 저명한 동아시아 학자 스칼라피노 교수의 인터뷰도 마저 옮겨놓는다. 지난달 중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국제정세가 요동치던 때에도 스칼라피노는 평양을 방문중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인터뷰 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지명도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지만, 스칼라피노의 책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은 <미국: 북한관계 전망>(1995)이라는 팜플렛 한권뿐이다. 그는 책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학자이다). 

문화일보(06. 08. 16) ‘민족끼리’는 매우 비현실적

-광복 61주년을 맞은 한반도는 아직도 혼란 의 소용돌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북한의 국제적 고립은 깊 어졌고 남북한 관계도 험난하다. 특히 지난해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과 해방전후사에 대한 논쟁 이후 한국내에서 이념적 논쟁의 골이 깊게 파인 상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란과 한·미동맹에 대한 이견, 북한 동정여론과 반미감정의 고조 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한국현대사와 동북아 연구의 석학인 로버트 스칼라피노(87·미 캘 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분교·정치학) 명예교수로부터 광복61주년 한국의 현좌표에 대해 들어보았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박정희시대 국내에서 금기사항이던 한국공산 주의운동과 북한 연구로 1970년대부터 한국 학생운동권과 진보진영의 신망을 받아온 인물이며, 여전히 한반도 문제에 대해 전향 적인 입장을 가진 미국내의 대표적 지한파 학자다. 지난 7월 북 한의 미사일 발사 당시를 비롯, 모두 5차례 북한을 방문할 만큼 북한에서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스칼라피노 교수 인터뷰는 8월 초순 1시간 가량의 전화통화로 이뤄졌다.

―북한 미사일 발사 당시 당신은 평양을 방문 중이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어떻게 평가하나.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우선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북한 내부 의사결정과정에서 군부의 결정권이 다른 목소리보다 더 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는 하나가 아니고 복합적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미사일 발 사는 북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더 큰 국제적 고립을 초래한 실 수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서 보듯이 심지어 중국과 러 시아로부터도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다.”

―지난해 이후 한국내에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 ’논란이 뜨겁다.‘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과거 386세대를 비롯 한 한국내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책이지만 한국내 지식인 일각에서는 한국 정통성의 토대를 부인하고 있다 고 우려한다. 예컨대 김일성은 ‘반일운동의 전설’을 북한정권 의기초로 주장해왔지만 한국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이승만, 이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박정희가 정권을 이어왔다는 사실 에 대한 논란이다.

매우 낭만적이지만 유효하지는 않은 인식이다. 북한 정권의 기초에 대해서 보자면 김일성은 소규모 게릴라부대를 이끌다 소련 국경으로 밀려갔다. 광복 직후 김일성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북한 정권도 미국과 소련간 대립의 산물이다. 광복후 소련이 북한지역에 들어온 직후를 보면 비공산주의자(민 족주의 지도자)들이 북한지역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는 한반도 신탁통치 방안이 불가능해지자 1946년부터 김일성 정 권을 세웠다. 김일성 정권 수립에는 소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48년 당시 북한에서 소련은 지배력을 확립한 뒤 소련군을 철수했다.”

―일본군 장교 전력을 지닌 박정희와 어쨌든 소규모 게릴라라도 이끌었던 김일성에 대해서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어떻게 평가하 나.

박정희는 확실히 일본군에서 훈련받은 배경이 있다. 그는 또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민주주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정책 면에서 그는 옳았다. 그는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드는 큰 성공을 이끌었다. 반면에 김일성은 어떤 의미에서 민족주의 자이고 독립적이고 통일된 한국을 건설하려고 했지만 그의 정책은 훌륭하지 못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덜 발전한 사회로 만들었으며 북한을 폐쇄적인 곳으로 전락시켰다. ”

―한국내에서는 얼마전에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싼 논란까지 있었다. 맥아더 논란을 어떻게 생각하나.

“맥아더 장군이라고 실수나 잘못이 없었겠나. 하지만 이데올로 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라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한국전 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반도 전체는 부산까지 김일성이 장악 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최근 한국내 주요논쟁의 핵심은 ‘민족이냐 동맹이냐’로 좁힐 수 있을 것 같다. 이 쟁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내에서 북한에 대한 동정론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민족주의 감정 자체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커지고 있다. 경제적 파워가 커지고 민족주의적 감정이 고조되 면서 반미 정서도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남북회담에서 ‘북한의 선군정치 때문에 남한 이 덕을 보았다’고 북한 관리가 주장하는 것 등을 듣고서 새로운 의문도 갖게 됐을 것이다.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남북의 체제는 금방 통일되기 매우 어렵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나 짧은 기간내의 통일은 남한에 정치·경제적 재앙이 될 것이다(*얼마전 고은 시인도 급진적인 통일을 지지하던 쪽에서 장기적인 통일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끼리’라는 말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 으로는 1인체제밖에 경험하지 않은 북한 주민들이 아직도 일부 취약한 남한의 민주주의체제에 끼어들게 되면 남한은 물론이고 이웃 국가들도 간접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한국은 남북경 협과 사회문화적 교류를 해나가면서 중국, 미국과 함께 대북정책을 조율해가는 것이 좋다. 중국, 일본 등과의 역사적 관계를 감안하면 한국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 이용하는 것이 도움 이될 것이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민들이나 정부가 북한의 가난한 형제들, 피폐한 이웃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한국정부가 북한 의 미사일 발사 이후 인도적 지원을 중지하겠다고 밝혔듯이 햇볕정책은 쉬운 정책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좀 더 복합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당근과 채찍 정책이 함께 사용돼야 한다. 특히 북핵문제는 검증 절차가 매우 중요한 만큼 그런 검증 등을 기준으로 당근과 채찍이 사용돼야 한다.”

 

 

 



―한국에서는 자주외교론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한·미관계는 어떤 기조에서 봐야 하나.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 만 중국은 지금 세계적 파워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도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은 주변국과 골고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겠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 중국, 일본에 의해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멀리 있고 침 략위협이 없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미 FTA에 대한 반대론이 거세다. 심지어 한국이 미국의 경제적 속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는데.

“농업문제 등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양국간의 경제관계는 건강하고 양국관계에서 핵심적이 다. 한·미 FTA는 양국의 경제적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스칼라피노가 전하는 ‘미사일 발사 직후 평양’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북한이 지금 국제사회의 여론을 무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최고 동맹인 중국의 말까지 거역하는 것을 보면 북의 이런 태도가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들은 미사일 발사로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하 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7월초 북한이 미사일 발사시험을 할 당시 평양에 있었던 그는 북한이 (최고후원자인 중국의 지원 등을 감안하면) 일정한 시기에는반드시 자기상황을 살펴보지 않 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칼라피노 교수 일행은 평양에 도착한 지 몇시간 뒤에 미사일 발사가 있었고 일행은 영국 BBC방송을 통해 그 소식을 알았다. 발사 이후인 6일 스칼라피노 교수 일행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을 만났다. 일행 중 1명이 “‘미사일 발사가 한국 노무현 대통령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다. 그는 이미 지방선거에서 (입지가) 약화됐다. 이번 발사는 햇볕정책을 더욱 위기에 처하게 하고 이것은 북한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 부상은 “지금 형들이 동생에게 ‘그런 일을 하지 마라’고 말하는 식이지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다”며 “핵무기들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추가 발사 가능성에 대해 스칼라피노 교수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국이 할 일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공격은 한반도와 동북아에 큰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평양에는 지난번 방문 때보다는 차량이 다소 늘었지만 여전히 길이 막히는 법이 없었다. 빌딩도 새로 서고 시민들의 옷도 매우 단순했다. 북한은 가난한 나라이고 외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였다”고 전했다.(최형두 기자)

동아일보(06. 07. 15) 스칼라피노 교수 “北 정책조율도 안된채 미사일 발사한듯”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평양∼베이징(北京)∼도쿄(東京) 여행은 그 일정만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5일 오전 3시 32분 북한이 첫 미사일을 발사하기 불과 5시간 전 그는 평양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 세계가 숨을 죽이며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던 3일 동안(4∼7일)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내 동아시아 연구의 최고 권위자. 미국 학계는 물론 정계에서 차지해 온 그의 위상을 감안하면 이번 평양 방문을 단순한 ‘연구 여행’으로 넘겨 버리기 어렵다.

=11일 일본 미야기(宮城) 현의 온천마을 자오(藏王)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일본 국제연수교류재단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동북아 안보를 주제로 한 세미나였다. 일본 중국의 전문가들과 피터 벡 국제위기감시기구(ICG) 동북아사무소장 등이 참석했다. 분임 토의 사이사이 스칼라피노 교수를 만나 그의 평양 여행기를 들어 봤다.

―방북은 어떻게 이뤄진 건가.

“미국에서 방북하는 인사들의 채널은 유엔 주재 한성렬 북한대표부 대사다. 그에게 한번 방문해 보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고 북한 외무성이 이를 허락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평양 숙소에서 여장을 푼 뒤 베이징발 BBC방송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는 지난해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을 맡고 있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와 함께 방북을 추진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한 적이 있다. 이번 방북은 그때 계획의 연장이었다. 다만 그레그 전 대사는 동행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미사일 문제에 대해 김계관 부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는 주권의 문제이며 군사적 훈련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미 간 미사일 모라토리엄(발사 유예) 협정은 유효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매우 상반된 이야기도 들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원하고 6자회담의 진전도 바란다고 했다.”

=미사일 발사에 관한 김 부상의 얘기는 다음 날 외무성 대변인이 발표한 내용과 대동소이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당일 오전 김 부상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 등을 면담했다. 그는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장시간 동안 그들과 면담했고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고 전했다. 미사일 문제도 김 부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미사일 발사 직후 북한 표정은 어땠나.

보통 사람들은 정보가 없는 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북한 외무성도 미사일 발사를 사전에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발사 5시간 전 나와 일행의 방북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왜 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고 보는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벼랑 끝 정책일 수도 있고, 이란과 이라크에 쏠린 세계의 관심을 북한 쪽으로 모으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또는 선군(先軍) 정책의 하나일 수도 있다. 정답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최근 북한에서 나오고 있는 상반된 메시지들에 대해 당혹스러움(perplexed)마저 느끼고 있다. 정책이 조율돼 나온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다. 북한 권력층 내의 불안정성(instability)을 느낀다.

=혹시 김정일 정권의 붕괴 조짐 같은 것을 느꼈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가 지난해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왔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틀 뒤인 13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을 만나 “어떻게든 북한의 붕괴를 저지하면서 정책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도 북한이 붕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1980년대 외상을 지낸 아베 장관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사망)와 교분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선대와의 인연 때문만이 아니라 평양 베이징 방문을 마친 직후 바로 차기 총리 ‘0 순위’로 꼽히는 아베 장관을 그가 만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야기 현 세미나에서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문제도 피랍 일본인 처리 방식처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02년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피랍 일본인 문제 해결을 촉구하자 김 위원장이 ‘아랫사람’들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인정한 것처럼 위조지폐 문제도 그런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가 수집한 증거를 북한에 주고 북한 당국이 자체 조사하도록 한 뒤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자는 얘기다.

=혹시 북한 측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전하는 메시지인가 싶어 “북한의 자체적 위조지폐 조사 방안을 놓고 평양 당국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스칼라피노 교수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이 제안이 제시된다면 수용하길 바란다”고 여운을 남겼다.

=도쿄의 한 외교소식통은 “스칼라피노 교수가 국무부에 방북 보고서를 내지는 않겠지만 주일 미국대사관에 들러 김계관 부상 등과의 면담 내용을 전해 주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만약 북한이 뭔가 메시지를 전했다면 그런 경로를 통해 전달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스칼라피노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도 그렇지만 최근의 한반도 정세를 두고 한국 사회는 심각한 이념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한반도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류 정책(contact policy)은 지속돼야 하지만 결코 (북한의 실체에 대해) 나이브(naive)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은 너무나 다른 곳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임을 알아야 한다.” ‘나이브’하다는 그의 말은 아마추어적이라거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김정안 기자)



▼스칼라피노 교수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국 내 동아시아 문제의 최고 권위자로 불려 왔다. 반 세기가 넘는 그의 학술 및 연구 활동 때문이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특히 한국인들에게 ‘코뮤니즘 인 코리아(Communism in Korea)’의 공저자로 유명하다.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2년 발간한 이 책은 14년 뒤인 1986년 한국에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돌베개 인문과학신서)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그는 1948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교수로, 1990년부터는 이 대학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총 38권의 저서와 500여 편의 논문을 냈다. 대부분이 중국 한국 일본에 관한 것이고, 이 대학에 동아시아연구소를 설립한 사람도 스칼라피노 교수다. 그의 80세 생일 때 로버트 버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총장은 “스칼라피노 교수는 우리 대학뿐 아니라 미국 학계의 큰 자산”이라며 “그는 특히 아시아의 중요성에 눈을 뜬 미국 전후 세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한미 양국 대통령에게 지역 현안을 브리핑할 만큼 정책 결정 과정에도 깊이 개입했다. 미국 대통령 3명의 동아시아 정책 고문 역할 외에도 동아시아 여러 나라 정책 담당자의 조언자로도 활동했다. 그가 1959년 미 상원에 제출한 한국보고서를 통해 5·16군사정변을 예견한 일은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지난해 한 언론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이 동북아의 균형자가 되려면 선결 조건으로 “한국 내에서 정치적 성숙, 경제성장의 지속을 이뤄내야 한다”며 “멀리 있어 침략 위협이 없는 미국과 전략적 동맹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1989년 첫 방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했다.(김정안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