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스칼라피노가 보는 한반도 정세
지난번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에 이어서 미국의 가장 저명한 동아시아 학자 스칼라피노 교수의 인터뷰도 마저 옮겨놓는다. 지난달 중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국제정세가 요동치던 때에도 스칼라피노는 평양을 방문중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인터뷰 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지명도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지만, 스칼라피노의 책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은 <미국: 북한관계 전망>(1995)이라는 팜플렛 한권뿐이다. 그는 책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학자이다).
문화일보(06. 08. 16) ‘민족끼리’는 매우 비현실적
-광복 61주년을 맞은 한반도는 아직도 혼란 의 소용돌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북한의 국제적 고립은 깊 어졌고 남북한 관계도 험난하다. 특히 지난해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과 해방전후사에 대한 논쟁 이후 한국내에서 이념적 논쟁의 골이 깊게 파인 상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란과 한·미동맹에 대한 이견, 북한 동정여론과 반미감정의 고조 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한국현대사와 동북아 연구의 석학인 로버트 스칼라피노(87·미 캘 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분교·정치학) 명예교수로부터 광복61주년 한국의 현좌표에 대해 들어보았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박정희시대 국내에서 금기사항이던 한국공산 주의운동과 북한 연구로 1970년대부터 한국 학생운동권과 진보진영의 신망을 받아온 인물이며, 여전히 한반도 문제에 대해 전향 적인 입장을 가진 미국내의 대표적 지한파 학자다. 지난 7월 북 한의 미사일 발사 당시를 비롯, 모두 5차례 북한을 방문할 만큼 북한에서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스칼라피노 교수 인터뷰는 8월 초순 1시간 가량의 전화통화로 이뤄졌다.
―북한 미사일 발사 당시 당신은 평양을 방문 중이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어떻게 평가하나.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우선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북한 내부 의사결정과정에서 군부의 결정권이 다른 목소리보다 더 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는 하나가 아니고 복합적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미사일 발 사는 북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더 큰 국제적 고립을 초래한 실 수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서 보듯이 심지어 중국과 러 시아로부터도 지원을 받기 어려워졌다.”
―지난해 이후 한국내에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 ’논란이 뜨겁다.‘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과거 386세대를 비롯 한 한국내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책이지만 한국내 지식인 일각에서는 한국 정통성의 토대를 부인하고 있다 고 우려한다. 예컨대 김일성은 ‘반일운동의 전설’을 북한정권 의기초로 주장해왔지만 한국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이승만, 이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박정희가 정권을 이어왔다는 사실 에 대한 논란이다.
“매우 낭만적이지만 유효하지는 않은 인식이다. 북한 정권의 기초에 대해서 보자면 김일성은 소규모 게릴라부대를 이끌다 소련 국경으로 밀려갔다. 광복 직후 김일성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북한 정권도 미국과 소련간 대립의 산물이다. 광복후 소련이 북한지역에 들어온 직후를 보면 비공산주의자(민 족주의 지도자)들이 북한지역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는 한반도 신탁통치 방안이 불가능해지자 1946년부터 김일성 정 권을 세웠다. 김일성 정권 수립에는 소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48년 당시 북한에서 소련은 지배력을 확립한 뒤 소련군을 철수했다.”
―일본군 장교 전력을 지닌 박정희와 어쨌든 소규모 게릴라라도 이끌었던 김일성에 대해서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어떻게 평가하 나.
“박정희는 확실히 일본군에서 훈련받은 배경이 있다. 그는 또 정치적으로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민주주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정책 면에서 그는 옳았다. 그는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드는 큰 성공을 이끌었다. 반면에 김일성은 어떤 의미에서 민족주의 자이고 독립적이고 통일된 한국을 건설하려고 했지만 그의 정책은 훌륭하지 못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덜 발전한 사회로 만들었으며 북한을 폐쇄적인 곳으로 전락시켰다. ”
―한국내에서는 얼마전에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싼 논란까지 있었다. 맥아더 논란을 어떻게 생각하나.
“맥아더 장군이라고 실수나 잘못이 없었겠나. 하지만 이데올로 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라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한국전 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반도 전체는 부산까지 김일성이 장악 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최근 한국내 주요논쟁의 핵심은 ‘민족이냐 동맹이냐’로 좁힐 수 있을 것 같다. 이 쟁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내에서 북한에 대한 동정론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민족주의 감정 자체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커지고 있다. 경제적 파워가 커지고 민족주의적 감정이 고조되 면서 반미 정서도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남북회담에서 ‘북한의 선군정치 때문에 남한 이 덕을 보았다’고 북한 관리가 주장하는 것 등을 듣고서 새로운 의문도 갖게 됐을 것이다.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남북의 체제는 금방 통일되기 매우 어렵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나 짧은 기간내의 통일은 남한에 정치·경제적 재앙이 될 것이다(*얼마전 고은 시인도 급진적인 통일을 지지하던 쪽에서 장기적인 통일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끼리’라는 말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정치적 으로는 1인체제밖에 경험하지 않은 북한 주민들이 아직도 일부 취약한 남한의 민주주의체제에 끼어들게 되면 남한은 물론이고 이웃 국가들도 간접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한국은 남북경 협과 사회문화적 교류를 해나가면서 중국, 미국과 함께 대북정책을 조율해가는 것이 좋다. 중국, 일본 등과의 역사적 관계를 감안하면 한국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 이용하는 것이 도움 이될 것이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민들이나 정부가 북한의 가난한 형제들, 피폐한 이웃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한국정부가 북한 의 미사일 발사 이후 인도적 지원을 중지하겠다고 밝혔듯이 햇볕정책은 쉬운 정책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좀 더 복합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당근과 채찍 정책이 함께 사용돼야 한다. 특히 북핵문제는 검증 절차가 매우 중요한 만큼 그런 검증 등을 기준으로 당근과 채찍이 사용돼야 한다.”
―한국에서는 자주외교론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한·미관계는 어떤 기조에서 봐야 하나.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 만 중국은 지금 세계적 파워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도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은 주변국과 골고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겠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 중국, 일본에 의해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멀리 있고 침 략위협이 없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미 FTA에 대한 반대론이 거세다. 심지어 한국이 미국의 경제적 속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는데.
“농업문제 등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양국간의 경제관계는 건강하고 양국관계에서 핵심적이 다. 한·미 FTA는 양국의 경제적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스칼라피노가 전하는 ‘미사일 발사 직후 평양’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북한이 지금 국제사회의 여론을 무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최고 동맹인 중국의 말까지 거역하는 것을 보면 북의 이런 태도가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들은 미사일 발사로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하 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7월초 북한이 미사일 발사시험을 할 당시 평양에 있었던 그는 북한이 (최고후원자인 중국의 지원 등을 감안하면) 일정한 시기에는반드시 자기상황을 살펴보지 않 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칼라피노 교수 일행은 평양에 도착한 지 몇시간 뒤에 미사일 발사가 있었고 일행은 영국 BBC방송을 통해 그 소식을 알았다. 발사 이후인 6일 스칼라피노 교수 일행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을 만났다. 일행 중 1명이 “‘미사일 발사가 한국 노무현 대통령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다. 그는 이미 지방선거에서 (입지가) 약화됐다. 이번 발사는 햇볕정책을 더욱 위기에 처하게 하고 이것은 북한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 부상은 “지금 형들이 동생에게 ‘그런 일을 하지 마라’고 말하는 식이지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다”며 “핵무기들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추가 발사 가능성에 대해 스칼라피노 교수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국이 할 일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공격은 한반도와 동북아에 큰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평양에는 지난번 방문 때보다는 차량이 다소 늘었지만 여전히 길이 막히는 법이 없었다. 빌딩도 새로 서고 시민들의 옷도 매우 단순했다. 북한은 가난한 나라이고 외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였다”고 전했다.(최형두 기자)
동아일보(06. 07. 15) 스칼라피노 교수 “北 정책조율도 안된채 미사일 발사한듯”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평양∼베이징(北京)∼도쿄(東京) 여행은 그 일정만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5일 오전 3시 32분 북한이 첫 미사일을 발사하기 불과 5시간 전 그는 평양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 세계가 숨을 죽이며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던 3일 동안(4∼7일)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내 동아시아 연구의 최고 권위자. 미국 학계는 물론 정계에서 차지해 온 그의 위상을 감안하면 이번 평양 방문을 단순한 ‘연구 여행’으로 넘겨 버리기 어렵다.
=11일 일본 미야기(宮城) 현의 온천마을 자오(藏王)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일본 국제연수교류재단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동북아 안보를 주제로 한 세미나였다. 일본 중국의 전문가들과 피터 벡 국제위기감시기구(ICG) 동북아사무소장 등이 참석했다. 분임 토의 사이사이 스칼라피노 교수를 만나 그의 평양 여행기를 들어 봤다.
―방북은 어떻게 이뤄진 건가.
“미국에서 방북하는 인사들의 채널은 유엔 주재 한성렬 북한대표부 대사다. 그에게 한번 방문해 보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고 북한 외무성이 이를 허락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평양 숙소에서 여장을 푼 뒤 베이징발 BBC방송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는 지난해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을 맡고 있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와 함께 방북을 추진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한 적이 있다. 이번 방북은 그때 계획의 연장이었다. 다만 그레그 전 대사는 동행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미사일 문제에 대해 김계관 부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는 주권의 문제이며 군사적 훈련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미 간 미사일 모라토리엄(발사 유예) 협정은 유효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매우 상반된 이야기도 들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원하고 6자회담의 진전도 바란다고 했다.”
=미사일 발사에 관한 김 부상의 얘기는 다음 날 외무성 대변인이 발표한 내용과 대동소이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당일 오전 김 부상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 등을 면담했다. 그는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장시간 동안 그들과 면담했고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고 전했다. 미사일 문제도 김 부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미사일 발사 직후 북한 표정은 어땠나.
“보통 사람들은 정보가 없는 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북한 외무성도 미사일 발사를 사전에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발사 5시간 전 나와 일행의 방북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왜 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고 보는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벼랑 끝 정책일 수도 있고, 이란과 이라크에 쏠린 세계의 관심을 북한 쪽으로 모으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또는 선군(先軍) 정책의 하나일 수도 있다. 정답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최근 북한에서 나오고 있는 상반된 메시지들에 대해 당혹스러움(perplexed)마저 느끼고 있다. 정책이 조율돼 나온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다. 북한 권력층 내의 불안정성(instability)을 느낀다.”
=혹시 김정일 정권의 붕괴 조짐 같은 것을 느꼈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가 지난해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왔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틀 뒤인 13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을 만나 “어떻게든 북한의 붕괴를 저지하면서 정책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도 북한이 붕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1980년대 외상을 지낸 아베 장관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사망)와 교분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선대와의 인연 때문만이 아니라 평양 베이징 방문을 마친 직후 바로 차기 총리 ‘0 순위’로 꼽히는 아베 장관을 그가 만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야기 현 세미나에서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문제도 피랍 일본인 처리 방식처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02년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피랍 일본인 문제 해결을 촉구하자 김 위원장이 ‘아랫사람’들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인정한 것처럼 위조지폐 문제도 그런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가 수집한 증거를 북한에 주고 북한 당국이 자체 조사하도록 한 뒤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자는 얘기다.
=혹시 북한 측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전하는 메시지인가 싶어 “북한의 자체적 위조지폐 조사 방안을 놓고 평양 당국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스칼라피노 교수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이 제안이 제시된다면 수용하길 바란다”고 여운을 남겼다.
=도쿄의 한 외교소식통은 “스칼라피노 교수가 국무부에 방북 보고서를 내지는 않겠지만 주일 미국대사관에 들러 김계관 부상 등과의 면담 내용을 전해 주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만약 북한이 뭔가 메시지를 전했다면 그런 경로를 통해 전달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스칼라피노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도 그렇지만 최근의 한반도 정세를 두고 한국 사회는 심각한 이념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한반도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류 정책(contact policy)은 지속돼야 하지만 결코 (북한의 실체에 대해) 나이브(naive)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은 너무나 다른 곳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임을 알아야 한다.” ‘나이브’하다는 그의 말은 아마추어적이라거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김정안 기자)
▼스칼라피노 교수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국 내 동아시아 문제의 최고 권위자로 불려 왔다. 반 세기가 넘는 그의 학술 및 연구 활동 때문이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특히 한국인들에게 ‘코뮤니즘 인 코리아(Communism in Korea)’의 공저자로 유명하다.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2년 발간한 이 책은 14년 뒤인 1986년 한국에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돌베개 인문과학신서)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그는 1948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교수로, 1990년부터는 이 대학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총 38권의 저서와 500여 편의 논문을 냈다. 대부분이 중국 한국 일본에 관한 것이고, 이 대학에 동아시아연구소를 설립한 사람도 스칼라피노 교수다. 그의 80세 생일 때 로버트 버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총장은 “스칼라피노 교수는 우리 대학뿐 아니라 미국 학계의 큰 자산”이라며 “그는 특히 아시아의 중요성에 눈을 뜬 미국 전후 세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한미 양국 대통령에게 지역 현안을 브리핑할 만큼 정책 결정 과정에도 깊이 개입했다. 미국 대통령 3명의 동아시아 정책 고문 역할 외에도 동아시아 여러 나라 정책 담당자의 조언자로도 활동했다. 그가 1959년 미 상원에 제출한 한국보고서를 통해 5·16군사정변을 예견한 일은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지난해 한 언론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이 동북아의 균형자가 되려면 선결 조건으로 “한국 내에서 정치적 성숙, 경제성장의 지속을 이뤄내야 한다”며 “멀리 있어 침략 위협이 없는 미국과 전략적 동맹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1989년 첫 방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했다.(김정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