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원로들의 원론과 지혜

아침에 전철을 타고 오면서 경향신문의 김우창 칼럼을 읽었다. 최근 정부 고위 공직의 인사문제와 관련한 여러 말썽들을 되짚어보는 글인데, 공감하는 바가 많아서 옮겨놓는다(나는 왜 '원로들의 원론'에 자꾸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일까? 벌써 원로급 나이인가?). 칼럼의 제목이 '인사와 정책의 목표'이며, 그 부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할 것인가'이다.

경향신문(06. 08. 17) [시대의 흐름에 서서] 인사와 정책의 목표

-최근에 나라 안을 크게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일의 하나는 고위 관직의 인사문제이다. 보통 시민들에게는 이것은 왜 이렇게 시끄러워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학생이 서울대학에 합격했는가 못했는가 하는 것은 본인이나 부모 또는 친척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전체적으로 그 선발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일 것이다. 이 공정성에 대한 관심에는 그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규범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또 대학의 기능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가 들어있다. 보통 시민들이 특정 개인의 합격 여부에 초연해지는 것은 넓게 해석하여 대학이 해야 하는 일을 알고 그 필요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고위 공직자나 정부 산하의 단체들의 간부 임명에는 그들이 맡은 일이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어떤 일에는 어떤 사람이 임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싸우는 소리가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직자 인사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임명 후보자의 과거행적이거나 임명권자와의 친소 관계다. 후보자의 자격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인물의 자격 요건이란 대체로 여러 전문 분야에서 그가 얻어낸 사회적 명예의 집적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과거의 행적을 문제 삼는 것은 이것을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삶의 자취 전부보다 맡아야 할 일에 관계된 부분이다. 후보자가 신뢰할 만한 인격의 소유자인가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의 요건에 부차적인 것이고 최고 감독자의 감독 능력으로 조절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친소가 문제되는 것은 적어도 임명권자의 관점에서는 이 신뢰의 문제에 관계된다 할 수 있다. 쌓아 놓은 사회적인 명예만이 자격 요건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다분히 보수적인 관점에서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해야 될 일이 전적으로 새로운 일이라고 한다면 쌓아 온 명예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자격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이 경우에 임명권자와의 친소가 중요한 요인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만이 알아보는 일과 일의 요건과 일의 담당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이 적어도 민주주의의 체제하에서 또는 국민적 동의를 필요로 하는 공공의 광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 일은 공적인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은 어떤 사적인 의도의 수행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심을 일으킬 것이다.

-지난번의 선거 결과는 정부가 하려는 일들이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았거나 긍정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었다. 그런데 정부 자체도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일에 어떤 자격자가 필요하다는 말보다도 권력 투쟁이다, 고유권한이다, 하는 해석이나 주장이 나오는 것은 공직자 인사에 참조의 척도로서 일이 중요치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집을 어떻게 짓겠다는 생각이 분명하면 목공을 고르는 데 시끄러운 싸움이 벌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정부나 집권층에 정치적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의 정부는 다른 어떤 정부보다도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생각하는 바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고 또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채로 수행되는 정책은 현실적 결과물을 통하여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요즘 또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다른 일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이다. 이것은 정부가 내걸고 추진하려는 정책의 설득력 없는 추상성을 잘 드러내준다. 원칙으로 따진다면 주권국가가 군대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주와 독립은 국제적 힘의 놀이의 희생물로서 식민지, 분단, 제국주의 등을 경험한 한국인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이에 비추어 작통권 회수는 민족 정서에 즉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정책 과제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복합적인 요인의 균형으로 유지되는 한반도의 평화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것은 신중한 고려를 요하는 문제이다.

-또 필요한 것은 작통권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이다. 평화 균형의 유지보다도 자주권 확보를 선택하여야 할 급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작통권의 환수는 정당하다. (물론 강력한 군사력이 국가주권의 핵심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깊은 고려가 필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당장에 큰 문제가 노정되는 것이 아닌 작통권 회수를 지금 정부의 주요 과제로 삼아야 옳은가? 같은 의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다.

-사실 FTA가 한국민의 삶에 무엇을 가져올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일반 국민만이 아니라 협상을 시작한 정부도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 하필이면 연구도 설득도 별로 없는 지금의 시점에 이 협정의 문제를 들고 나온 정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얼마 전 우리는 한·미동맹에 이는 불협화를 완화하는 방안으로 FTA 협상을 시작했다는 설명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작통권 문제도 다른 의도를 숨긴 것인가? 그것은 혹시 집권층의 국내 정치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궁리해낸 정치 전략인가? 그 전략이 적대적 대결을 불러일으켜 지지세력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모든 것을 정치 전략화하는 일이다. 물론 정치에 등장하는 모든 정책 목표는 전략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전략적 사고도 국리민복에 이어지는 것이 있고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목표에 이용되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끝내 이것을 구별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숨은 전략의 일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정치에 목표의 설정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좋은 목표가 그에 따르는 모든 부작용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배를 운항하는 데에는 옛날이라면 별의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가리키는 것만으로써 운항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또 정치에 목표가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의 큰 목표에는 상징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 있고 현실적인 것이 있다. 자유나 평등 또는 우애와 같은 전통적 민주주의의 목표는 추상적인 큰 목표이면서 모든 사람의 일상적 삶에서 정부 정책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구체적인 현실 속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지금까지 참여정부는 추상적인 목표에 집착하고 그로써 국민을 동원하고자 한 감이 있다. 8월15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조순 전 부총리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중소기업 부진, 자영업자 몰락, 청년실업 증가, 상습적 파업, 양극화 심화…철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종교…화목 없는 사회, 내실 없는 문화, 방향 없는 교육”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무엇인가?(*조순 전 부총리의 칼럼은 아래 옮겨놓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각이 있다면, 누구에게 무엇을 맡길 것인가는 조금 더 쉬워질 것이고 맡을 일이 분명한 자리들에 대한 지나치게 시끄러운 논란은 사라질 것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한겨레(06. 08. 15) ‘선진화’ 구호의 허실

-모두들 선진국이 되고자 한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구별이 없다. 학계도 역시 같다. ‘선진화’ 구호가 한국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선진화는 좋지만, 선진화 구호에는 문제가 있다. 사실, 한국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선진국 아닌가. 정보통신(IT) 분야에서는 세계 최강국이 됐다. 반도체·휴대전화·자동차·철강 등에서는 세계 굴지의 대기업을 두고 있다. 조선에서는 세계 최대 수주국이 됐다.

-소비를 보아도 선진국 수준이다. 인구 대비 자동차 수, 국토 면적 대비 고속도로의 길이, 모두 세계적이다. 미국·중국에서는 한국인의 부동산 투자가 성행하고, 세계 도처에 한국 관광객이 넘치고 있다.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는 돈 많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는 될 것이다.

-남들이 선진국이라 하는데도, 정작 이 나라에서는, 선진화 구호가 요란한 연유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 왠지 허전하여 중심이 잡히지 않고, 나라의 기본이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중소기업 부진, 자영업자 몰락, 청년실업 증가, 상습적 파업, 양극화 심화 등, 이 나라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심각하다. 거기에다가 철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종교 등의 간디의 말에, 화목 없는 사회, 내실 없는 문화, 방향 없는 교육 등을 추가하면, 선진화 구호가 저절로 나온다. 나라가 이런 기본 문제를 안고 있는 한, 선진국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 이런 기본 문제를 갖추는 데는 선진화 구호는 소용이 없다. 선진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미국과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인데, 이 나라들의 현재 모습에서 과연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입만 열면 미국·일본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두 나라의 현재 거시경제 운영이나 미시경제 운영을 모방하면 우리도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지금 세계에는 선진국/후진국의 구별이 급격히 흐려지고 있다. 선진국 중에 잘 안 되는 나라가 많고 후진국 중에 제대로 되는 나라도 많다. 잘 되는 나라가 있다면,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다 우리의 모범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남미는 불과 몇 해 동안에 많이 달라졌다. 브라질은 지난 4년 동안 재정적자를 완전히 해소했다. 인플레도 없어지고 경상수지도 크게 개선됐다. 브라질만이 아니라, 스페인 계통의 남미 주요국들도 이제 인플레는 한자릿수로 되고, 재정적자도 크게 줄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됐는가. 따지고 보면 별것이 아니다. 9·11 이후,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자활의 길을 추진한 결과다. 남의 모델이나 이론을 탈피하여, 각기 나름대로 나라의 기본을 찾은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한국 사람들이 과연 진지하게 자기 나라의 기본을 닦아서 나라의 앞날을 타개할 의지가 있느냐다. 선후진을 가릴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편견 없이 이해하고, 그들의 경험을 거울삼아 나라를 좋게 만들 겸허한 자세가 있는가? 있다면, 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는가? 선진화를 외치지만 그 내용은 무엇이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방법은 무엇인가? 선진화의 내용은 기본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정화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 방법은 실사구시밖에 없다. 겉치레를 버리고 실천을 통해 기본을 닦아야 한다. 단 한 가지만이라도.(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06.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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