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오늘. 나는 그해 갓 입학한 87학번 1학년이었다.

87년은 벽두부터 전조가 심상치 않았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해 죽고 또 그 사실을

경찰이 은폐한 것이 밝혀지면서 난리가 난 데다 살인마 전두환이 4월에 '호헌선언'으로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세상은 뒤숭숭했다. 불온한 공기로 팽창된 열기가  임계점을 향하고 있었다.

 

26년 전 오늘 아침도 그랬다. 신입생부터 늦게까지 학교 다니던 79학번 선배까지

정문으로 모여 스크럼을 짰다. 뭔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 가슴은 두근거리고

아직 쏘지도 않은 최루탄 냄새가 코에 매캐하게 느껴졌다.

 

86 선배는 신입생인 우리를 모아 놓고 만약 대열이 흩어지면 모일 2차 집결지를 알려주며

만약 경찰에 잡히면 꼭 신입생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날 밤 우리 과에서 일곱명이 체포되었는데 내가 첫번 째였다.

걸음도 느린데다 어리버리했으니 당연했다.

 

거리에서 사복 체포조에게 1차로 두들겨 맞고  버스로 끌려가 2차로 맞고 경찰서에서 또 맞았다.

나중에 조사하던 경찰에게 부운 얼굴로 나는 신입생이라고 했다가 더 맞았다.

어린놈의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선다고.

뭐 그런 시절이었다.  

 

사흘있다 나와보니 불은 점점 더 크게 타오르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이한열 열사가 죽었다.

 

 

뭐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다들 안다. 6.29선언이 나오고 다들 승리에 취해 그게

기만 전술이란 걸 몰랐고 전국적으로 노동자 투쟁이 일어났고 그해 대선은 졌다.

往事無非一夢間 이라더니 한바탕 꿈같다.

 

 

열아홉살이었던 내가 사십대 중반의 중년이 되는 시간 동안 어찌되었든 사이사이에

갈짓자에 후진을 했어도 우리 사회와 역사는 그러저럭, 꾸역꾸역 발전했다.

 

알량하나마 절차적 민주주의도. 언론 사상 출판 집회의 자유도, 고문받지 않을 권리도

어설프나마 복지 인프라도 틀은 만들어졌다.

 

그걸 '진보'라고 부르지 말고 '개량'이고 '체제와의 타협이자 순응과 순치'라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는 성마른 소리로 일갈하더라마는 그래도 허망한 자위일지언정

나는  '역사의 진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온데는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될 두 사람,

박종철과 이한열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이들의 엄마, 아부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87년 유월 이전의 우리 한국 사회가 어땠냐고 ?

 

시민을 학살한 도살자가 다스리는 나라,  

물고문과 전기 고문과 성고문, 불법 도청과 불법 민간인 사찰,

언론 검열과 사상 통제가 일상화된 나라..

밤과 새벽이면 사람들이 사라져서 돌아 오지 않는 나라..

 

우리는 그런 나라를 '문명 국가'라고 부르나 ?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의 명복을 빈다.

오늘의 우리는 그들에게 빚졌다.

 

잊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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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6-1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참 무섭습니다. 벌써 26년 전이군요.
저는 그때 대학3학년, 무슨 정신에 학교 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알케 2013-06-11 13:17   좋아요 0 | URL
제 아들 놈은 뭔 동학전쟁 이야기 듣듯이 들어요. -.-;;
뭥미 하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