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핀치에 몰려있던 일 하나 끝내고 늘어져서 한 이십 몇 년만에
<돈까밀로와 패포네>를 읽으며 울다가 웃다가 했다.
87년 무렵인가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나에게 교문 앞에서
여자 동기가 뜬금없이 건네주던 책.
여러 권의 시리즈와 다양한 판본 중에 어떤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돈까밀로 신부와 뻬포네 읍장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 동기는 다음 학기에 휴학하곤 어디론가 가버렸다. 왜 ?)
초등학교 3학년 중퇴 학력을 가진 공산당원과 주먹이 앞서는
우파 신부의 대결은 무시무시하게 시작해서 화해로 끝난다.
어떤 에피소드는 눈물겹고 어떤 이야기는 빵 터진다.
책 여기저기에 땅, 공동체,인간, 이해, 존중, 관용, 존경, 배려..와 같은
동화같은 가치들이 정색하지 않은 얼굴로 숨겨져 있다.
사려깊고 진중하지만 재치있는 '말하는 에수님'과 '마리아'님까지..
나이들어서 읽으니 패포네읍장은 뭘 더하고 뭘 빼면
태백산맥의 전사 하대치를 닮았구나.
우직함과 결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따뜻함...
눈물때문에 뿌연 활자로 읽히던 태백산맥의 마지막 장.
아..염상진의 무덤앞에서 결의를 다지던 하대치..
"대장님, 지가 왔구만이라. 하대치여라. 대장님, 대장님이 먼첨 가셔뿔고,
지가 살아남어 이리 될 줄 몰랐구만이라. 지가 대장님 앞에 면목이 옶구만요.
그려도 대장님이사 다 아시제라. 지가 요리 살아 있는 것이 그간에 총알 피해댕김서
드럽게 살아남은 것이 아니란 거 말이제라. 대장님, 편안허니 먼첨 가시씨요.
지도 대장님헌테 배운 대로 당당허니 싸우다가 대장님 따라 깨끔허게 갈 것잉께요.
대장님, 근디 지가 남치기 역사투쟁얼 허고 죽기 전에 똑 한 가지 허고 잡은 일이 있구만이라.
지 맘대로 혀뿔기 전에 대장님헌테 먼첨 말씸디릴라고라.
고것이 먼고 하니, 지가 할아부지헌테 받은 이름얼 지 손자눔헌테 넴게줄라고라.
요 말을 죽기 전에 아들헌테 전허고 죽을랑마요.
대장님, 우리전 아직 심이 남아 있구만요.
끝꺼정 용맹시럽게 싸울팅께 걱정 마시씨요.
블랙 코미디같은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가카 치하에서 살다보니
오늘 아침엔 패포네 읍장밑에서 공산당원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걱정마시씨요. 끝꺼정 용맹시럽게 싸울팅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