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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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형님이 말씀하신다!
"가난해서 못한다고? 그럼 공짜로 살아!"
기똥차게 재미있는 반란을 일으키며 공짜로 살아가는 법이라, 제목부터 기똥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방법은 이제 스스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대는 바뀌었고, 사회구조는 갈수록 덜 유쾌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속은척 타협하고 살던대로 살다가는, 생명연장의 꿈은 이룰수 있을지 몰라도, 신나게 살기는 쉽지 않다.

사실, 가난뱅이 기술이랍시고, '집 얻는 법, 밥값절약, 옷구하기' 등의 방법은 무척 궁상맞은데가 있다. 때론 누군가가 나의 노숙생활로 불편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설정에 맞춰진 경제관념 등이라 조금은 비현실적이기도, 상당히 엉뚱하기도 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마츠모토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자치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스스로 조직하라는 거다. 가난뱅이들은 특히나 혼자살 수 없다!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타야 가장 돈을 아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자유로운 미디어를 만들 수 있고, 거리를 휩쓰는 무적의 대작전을 펼칠 수 있는 거지!

자. 이제 우리 모여서, 가난뱅이 회의를 하자.
생각만해도 멋진 일들을 꾸준히 해온 마츠모토! 절로 형님소리가 난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만큼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까?

반란이란, 축제란 어디 멀리 가서 참여하고 오는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해내는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함께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동료들을 찾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놀더라도 이렇게 더 넓은 곳으로 접속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그 어디라도 신나는 놀이터가 될 것이다.

비록 흉내는 내지 못할 지언정, "나도 뭔가 하고 싶은데요!" 그 자세로,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 함께 역습을 꿈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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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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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 위해서
꿈. 어쩌면 꿈이라는 말은 조금 거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열망, 바람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외딴 방 하나를 가지고 있다. 외딴방은 잠시, 꿈꾸는 동안 머무는 곳이다. 때로는 외딴방에 있기 때문에 꿈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 사진사가 되고 싶었던 외사촌. 외딴방 밖에서 보이는 그들은 그저 모여 있는 익명의 무리지만, 외딴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 개인은 우주를 품고 있는 숭고한 존재들이다. 꿈을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숭고하기 때문이다.

그가 소설을 써 보는게 어떻겠냐는 말 대신 시를 써보는게 어떻겠느냐고 했으면, 나는 시인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랬었다. 나는 꿈이 필요했었다.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해서, 큰 오빠의 가발을 담담하게 빗질하기 위해서, 공장 굴뚝의 연기도 참아낼 수 있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시골에서, 이제껏 살아온 방식으로 그렇게 어른이 될 수도 있었다. 외딴방에 살게 되는 인물들은 기존에 머물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 속으로 뛰어들고자 외딴방에 기거하게 된다. 새로운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 놓인 그 외딴방을 거쳐야만 한다.

나 역시 대학시절, 머물렀던 나의 작은방, 그 외딴방이 떠올랐다. 어제나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했을 때야 겨우 잠들곤 했던 곳. 종이위에 연필로 긁적이고, 몸을 긁적이고, 그 좁은 방에서 흘러가는 내 시간을 긁적이던 지난날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잠잠히 떠올랐다.


다른 삶을 꿈꾸는 자들의 외딴방
집과 학교의 거리가 멀었던 나는 학교 앞 고시원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나, 어떻게든 달라지고 싶었던 나......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은 별로 없었던 나. 그런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 스스로에게 좀더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내 통장을 털어서까지 고집을 피워 집밖으로 나온 것은 그만큼 그때의 나는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뛰어들기 직전의 일 년이었고, 공부할 수 있는 일 년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열여섯의...... 그 소녀처럼.

정말 좁은 방, 겨우 두 발을 책장 서랍에 넣어야 바로 누울 수 있었던 나의 방. <외딴방>속 작가의 시간과 공간과 나의 외딴방은 물론 너무도 다르겠지만, 열망으로 가득 찬, 지금보다 어린 내가 머물렀던 좁은 방을 추억했을 때 환기되는 감상은, 저자의 외딴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늘 열망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던 나, 외딴방에 갇혀 있는 게 싫어 늦도록 방밖에서 헤매던 나, 하루빨리 더 떳떳한 모습으로 외딴방을 벗어나고자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스물 네 살의 내가, 거기 있었다.

<외딴방>을 열자, 그때 그 방의 문, 301호실의 좁은 고시원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가장 마음에 들고 내 사정에 꼭 맞는 외딴방을 구하러 다니던 기억, 그 외딴방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설렘. 첫날, 한 달, 백일을 달력 위에 표시하며 이 공간속에서 불어나는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던 시간들. 잊고 있던 기억의 포문이 열렸다. 그랬기에 열여섯의, 그 소녀가 머물렀던 외딴방, 느꼈던 외딴방이 내게 촉각적으로, 후각적으로,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열망이 끌어 넘치는 좁은 방
두 소녀의 열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곳, 좁은 외딴방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훅, 느껴졌다. 지금이 여름이기 때문일까. 연탄불의 온기로 뎁혀지고 있는 방, 옴짝거릴 때마다 서로의 팔을 스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누워있는 외사촌, 오빠 둘, 그리고 나. 그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돌아누운 등, 웅크리고 있는 작은 몸, 그들이 누운 맨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제각각의 열망들이 천장까지 닿았으리라. 누가 뒤만 봐주면, 정말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을 큰오빠. 맏이란 이유로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천형을 어깨에 맨 큰오빠. 그를 보며, 왜 난 그의 누이가 아니었을까 미안한 마음을 갖는 나, 작가를 꿈꾸는 나, 그저 그렇게 풀어냄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나, 어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외사촌, 자신의 운명도 버거운데 시대의 운명과 맞서고 있는 작은오빠. 인생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선뜻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그들의 밤이, 느껴진다. 마음이 금세, 눅눅해진다.

외딴방은 과거, 기억 속에 있다. 그 기억, 내 마음 속에 저 스스로 외딴방이 되어 머무는 상처 같은 기억이다. 소설 속 신 작가에게 외딴방은 그러한 존재다. 외딴방에 창을 뚫고 신 작가는 들여다본다. 그가 쓴 글이 외딴방에 문을 낸다. 사람들이 두드린다. 옛 친구 하계숙이, 큰오빠가, 잡지사의 기자들이. 결국 이 소설은 신 작가가 외딴방에 달린 문을 여는 과정이다.    

외딴방으로 걸어 들어간 건 열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그 사 년의 삶과 나는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하고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억은 잊혀짐으로 도피할 수 있다. 상처도 시간으로 덮고 모른 척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아마 내 발등을 찍은 쇠스랑처럼, 우물 속에 던져놓은 쇠스랑처럼 시도 때도 없이 오늘의 나를 불러낼 것이다. 그것을 건져내지 않으면,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가만히 멈춰 서서 마음의 진동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함께 울어줄 수 있게 될지도
나는 본다. 얼마나 소소한 것들이 한 소녀의 시간에 흔적을 남겼는지. 소녀 신경숙의 세계와 부딪치는 역사적 사건들, 음악과 영화, 사람들. 말들. 그것들이 소녀 신경숙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순간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작은 멍이 들게 한다. 그녀가 겨우 입 밖으로 뱉어낸 희재 언니와의 일. 열여섯의 소녀 자신이 아니고서는 결코 짐작하지 못할 그 슬픔과 상처. 이해할 수도 대처할 수도 없었던 소녀를 본다.

신경숙 특유의 감수성 넘치는 문장이 내 소매를, 옷깃을 서서히 적셔간다. 한쪽 팔꿈치를 적시는가 싶더니 어느새 깊숙한 마음까지 젖어간다. 열여섯의 신경숙, 그녀의 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의 이야기를 읽는 듯 함께 얕은 한숨을 내뱉고, 노조 이웃들의 고초에는 함께 입술을 앙다물기도 한다.

<외딴방>은 열여섯의 소녀의 상처를 보고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의 상처를 위로받는 책이다. 동시에 이웃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짐작해보고 함께 아파하고 위로해보는, 그런 이야기다. 아직도 이 세계 속에는 외딴방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물리적인, 심리적인 외딴방을 갖고 있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누구나 우리는, 열여섯의 나,가 된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결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나의 슬픔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소녀를 통해, 누군가 우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슬픔을 겪기도 한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이제 이웃의 그 슬픔을 공감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마땅치 않은 위로의 말을 해주기보다는 함께 울어줄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외딴방에 작은 온기를 느끼다
<외딴방>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우리는 느낄 것이다. 처음 내 외딴방을 발견했을 때, 이 책을 처음 봤을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조금은 달라져있다는 것을. 내 마음이 가 닿을 수 있는 범위가 조금은 더 넓고 깊어져있음을. 그리고 한때 열망이 들끓던 나의 차가운 외딴방에 작은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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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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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복판에서 길을 묻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저서에서 지금 대한민국에 듫끓는 얽히고 섥힌 문제들을 몇가지 큰 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건국절논란, 간첩논란, 공사의 지대가 되어버린 강산, 민영화문제, 정국을 뒤흔드는 괴담, 사교육에서 지난 촛불의 의미까지- 한홍구는 꼼꼼하게 그리고 지금의 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제를 족집게처럼 풀어, 특유의 시원시원하고 명쾌한 어투로 강의를 펼친다.  

 한홍구가 꼽은 대한민국의 문제들은 사실, 이미 여러번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오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열거하고 있는 몇가지 주제들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단순히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는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고질병이 어디서 기원하였는가, 근현대사적 지식과 역사를 통해 심도있는 분석 및 대안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때 해야할 일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데에서 기원하고 있다. 한홍구가 전작에 걸쳐 가장 목소리높여 꼽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난 과거에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점이다. 현재 사회를 뚜렷히 나누고 있는 (극단적인) 진보/보수의 문제도 여기서부터 기원한다. 어느 나라나 진보와 보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들이 친미극우로 달라붙으면서, 거기서 대통령을 비롯 정치적 실세가 이어져오면서 사상적 대립의 골이 깊어진 것이다. 친일파 청산 실패와 더불어 한 궤를 이루고 있는 문제는 남북이 갈라지고, 이때까지 분단된 정국으로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적 현실이다. 진보주의자가 좌빨, 빨갱이라는 언어에 포섭되어 그야말로 보수/진보의 개념은 자의적으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치우친 언사를 자랑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이 중도 혹은 진보적이라고 착각하는 매체나 인사들의 기원 역시 이쯤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친일파들이 잡게 된 전쟁 이후의 한국정치는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그들의 안간힘과 순전히 개인적 이익만을 위한 정치적 행보로 한국사회 고질병을 유발하기에 이른다. 진보쪽 인사들을 껏하면 "너 빨갱이지?"식으로 몰아붙여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처단하고, 강남 땅을 그때부터 일구기 시작했으며, 헌법은 콧방귀로 날리고 간첩 등을 운운하며 괴담을 양산하기에 이른다.  

잠시 생각해보자. 위 단락은 전쟁 초기 친일파들의 정치행보를 요약한 것인데, 어쩐지 쓰면서도 낯설지 않는 정국이다. 가끔씩 잊혀질만하면 등장하는 (의심스러운) 간첩소식, 무턱대고 DDOS의 배후를 북한으로 짚어버리는 난감한 정부, 남아나지 않을정도로 토목공사질을 일삼는 현정국, 쉴새없이 교체되고 일렁이는 사회 괴담까지- 올해들어 참 많이 들은 관용구(?), 역사후퇴의 증거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민주화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 '역시' 다른 정권과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일, 안타까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부가 의의가 있는 것은, 적어도 이제까지 한국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이 민주적으로 해결, 발전되는 방향으로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과거청산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인혁당사건이 무죄로 판명되었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나름의 노력으로 그동안의 정국에 비해 한걸음 나아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헌데 그 모든 것들이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인권위원장은 사퇴하기에 이르렀고, 정권 교체후 뉴스에서 과거청산위 소식이나, 인권위 등의 (좋은의미의) 소식은 들은 바가 없다. 게다가 건국절 논란으로 지금의 헌법을 완전히 부정하려는 시도까지 서슴치 않는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그때와 같아지거나 더한 상태다.    

이 책에는 우리가 그저 문제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실제론 어떤 모양이고 그 심각성은 얼마나 큰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곳곳에 놀랍고 어처구니 없는 일 투성이지만, 여기서 감탄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한홍구는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어찌되었건 정권은 다시 바뀌게 되어있다. 우리가 현재 한국사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우리의 할 일을 알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알아야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얘기해도 얘기해도 들어주지 않는 국민의 목소리가 괴담까지 이르는 현 상황을 정부가 하루빨리 인식하고 부디 자만을 내려놓고 겸손해져야하는 것이 첫째라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켜만 볼 일이 아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꾸기 위해서는 분명 국민된 우리에게도 할 일이 있다. 이 책이 그 모색할 동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알고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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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태엽 오렌지 - A Clockwork Orang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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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들어 본 서른 편 가량의 영화를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많은 영화들이 이미지가 되어 머리를 스쳤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컷처럼 넘어가는데, 유독 한 영화의 잔상이 오래 남았다. 

 바로, <시계태엽오렌지>다.   



굳이 방금 순간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보고 난 이후 문득문득 내게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떠오르곤 했다. 분명히 다른 영화였다. 내 기억속에서도 꽤 오래 정착해있는 걸 보니,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인상적인 영화였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영화의 이해'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고심하며 말씀하셨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이걸 수업시간에 틀어도 될지 모르겠다며, 좀더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더랬다. 그리고 결국 선정성의 이유로 관람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를 꼭 너희들과 함께 보고 싶었다"는 말.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랜지>는 문학으로 따지면 고전으로 칠 법한 영화다. 당시에도 충격적인 영상으로 런던에서도 상영금지처분을 받는 등 화제가 되었고, 미래를 예견하는 줄거리나, 독특한 화면구성, 편집 등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영화다. 즉, 필독도서마냥 필수관람해야 하는 영화 리스트로 오래 품고 있었던 영화란 것이다. 

허나 DVD 위에 그려진 말콤 맥도웰의, 익살맞지 못해 괴기스럽기까지한 미소는 선뜻 영화와의 만남을 허락치 않았다. 어쩐지 그랬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름 영화 볼 수 있는 최적의 준비를 갖추고 이 영화를 만났다.  


영화 관련 서적에서 매번 수록되어 있는 첫 장면 이미지. 음란한 밀크바에 앉아, 반쪽만 긴 눈썹을 붙인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말콤 멕도웰의 모습. 아직도 생생하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장면 장면의 이미지가 강렬하고 굉장히 세련되었다. 소품이나 배경 하나하나 신경쓴 흔적이 역력하다. 

미래의 런던을 상징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집 디자인, 의상들의 기이한 디자인(낯설지만 점차 익숙해지는), 강렬한 원색- 영화 속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들은 알렉스와 그 친구들의 어긋난 행동을 더 부각시킨다. 이들은 파괴자고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어찌보면, 현대 런던은 모던을 상징하고,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알렉스와 친구들의 행동은 참으로 구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은 용납될 수가 없다. 미래, 현대의 사회는 이들 조차도 심플하고, 깔끔하게 통제하고자 한다. 현대가 원시적인 것을 다룰 때 주로 쓰는 무기는 과학이다. 발달된 과학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개인의 성향 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영화는 다양한 문제를 던져주는 영화다. 이를테면, 과연 과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의 본성, 성향 (소위 신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의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약물이나 신경치료를 넘어서 이제는 유전자를 통해 '타고난 것'까지 조작해보려는 지금의 시도는 스탠리큐브릭 상상력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 영화가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내가 갑자기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당시 메모해 둔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 나 역시 화면 속에 보이는 폭력과 선정적인 것들에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에서 폭력성은 쾌감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알렉스는 이유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그는 마치 그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알렉스가 저지르는 대부분의 폭력, 혹은 상징이 성적인 것과 연관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가장 본질적인 쾌락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서히 관객들을 자극한다.  

첫 장면부터 난무하는 폭력성에 누구든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빈번히 자주 보여주는 폭력의 모습에 점차 관객의 자극은 익숙해져간다. 불쾌감의 정도는 낮아지고, 온전히 하나의 자극이 된다. 폭력이 폭력이라는 불편한 이름을 버리고 온전히 그 행위 자체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야말로 폭력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없이 저지르는 숱한 폭력들을 지켜보라. 쾌감의 자극과 비슷한 자극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유있이 저지르는 응징은 합당하고 통쾌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폭력 행사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내면에는 폭력이 본능처럼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교육이나 사회화에 의해 절제된 폭력성 말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이 시대에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이 난무하는게 아닐까.  

폭력적인 사회에서 폭력성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심각한 약자가 되는 일이다. 교화된 알렉스는 늑대의 사회에서 양이 되어 버린다. 폭력적인 것만 보면 구토와 경기를 일으키는 '치료'를 받은 알렉스는 보복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쏟아지는 폭력 앞에 그저 당할 수 밖에 없다. 

이전의 악한 알렉스에게 당했던 피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선량했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한 것일까? 감옥에서 알렉스가 나오자, 이전에 그에게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복을 가한다. 그때의 표정을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알렉스의 고통을 즐기며 끔찍한  미소를 지어댄다. 그들은 모두 이전의 악한 알렉스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그저 내면의 폭력성이 잘 교육되었는가, 절제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뿐이다.   



원시적인 폭력성을 휘두르는 알렉스는 처벌을 받고, 치료를 받는다. 허나, 나름의 이유있이, 사연있이 저지르는 그들의 폭력은 합당성을 띠게 되고, 법 안에서 수용이 된다. 심지어 알렉스가 가장 싫어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자살을 유도하는 등 고문에 가까운 폭력성을 내비치는데도, 그들은 이유와 목적-실험이라든지 보복이라든지-을 지녔으므로 떳떳하게 자행된다. 그런 폭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은 경찰과 박사 등 고위 관리직이다. 

요즘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살펴보자. 아홉시 뉴스, 사회면에 나올법한 범죄들은 요란하고 어지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들은 사회 안에서 재단되고 응징된다. 이런 알렉스적인 폭력도 두려운 일이지만, 사회라는 틀 내에서, 그 틀에 딱 맞게, 혹은 틀을 이용해서 저지르는 폭력성도 못지않게 끔찍한 일이다. 정치가, 법조인, 방송인 등 소위 배운 사람, 아는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들.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치명적으로 괴롭히는 폭력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향해 자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을 응시하는 영화<시계태엽오렌지>는 이때문에라도 의미있고,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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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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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의 강점은 상상력과 뻔뻔스러울 정도로 시치미 떼는 환상성이 아닐까. 나는 일본소설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일본문체의 특징인지, 번역 때문인지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내겐 늘 심심하게만 다가온다. 허세스러운 수식어 문장, 어려운 문장도 질색이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문체는 너무나도 큰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가 꼽는 아름다운 문장은 단연 김연수의 문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줄기차게 읽어대는 유일한 일본소설이 있으니, 그것은 전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제목도 단번에 알 수 없는- 용의자 X의 헌신이다. (제목은 읽고나면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용의자...X의... 헌신) 
히가시고의 책을 좋아하는 까닭은, 재미있는 이야기, 놀랍도록 풍부한 그의 지식과 관심사 등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언제나 휴머니즘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추리소설 작가가!!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담겨있는 그의 소설은 어떤 이야기든지 좋다. 그리고 늘 어떤 이야기든지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게 써낸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추리 소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놀라운 추리와 전개였다. 너무나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탓에 영화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편 나온 히가시노 원작의 영화들이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 영화.  



*잘 만들었다. 책을 봐도 내용을 알아도 재미있다. 심지어는 한번 보고 또 보고싶다. 책 내용을 잊었을 만큼 오래되기도 했지만, 그때의 충격과 감상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른다. 역시 굉장하다. 무엇보다 캐스팅이 훌륭하다. 유카와 역의 후쿠야마 마사히루도 훈훈한 외모로 스크린을 빛내주지만, 단연 이시가미 역의 츠츠미 신이치의 열연이 돋보인다. 히키코모리같은 캐릭터의 이시가미가 영화속에서 분명히 매력을 갖고 있을 때, 관객의 편으로 만들었을 때 모든 사건과 결말이 합당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매력있다.  



*문제를 내는 천재 수학자와 문제를 푸는 천재 물리학자의 대결. 이 설정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영화는 뿐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이라는 이성의 영역과 사랑이라는 감성의 영역을 치밀하게 대결시켜놓은 영화이기도 하다. 과연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풀수 있을까. 이제껏 숫자과 논리로 점철되었던 두 남자는 사건을 통해 사랑이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보고자 한다. 

* 단순히 추리 사건을 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히가시노는 문제를 내는 사람을 등장시켜 더 치밀한 갈등상황을 유발한다. 물론 거기에는 탄탄한 논리가 뒷받침되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게다가 고정관념을 이용해, 누구나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 사건을 만들어 낸다. 기하문제인듯 보이지만 함수 문제인 것- 관객들 역시 모두 기하문제를 상상하다가 통쾌한 반전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를 보고 나서 "대체 사랑이 뭘까"라는 질문을-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와 같은 질문을 읇조리게 한 점이다. 용의자 X의 처절한 헌신 뿐 아니라 각 인물들 주변에 포진해있는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삶의 한줄기 희망같은 그 사랑이, 그 사람이 이해되는 것이다.   

* 책을 다시 읽어야 겠다.  

* 그 훌륭한 두뇌를, 이런데 쓸 수밖에 없었다니.  

 늘 뉴스를 보며 드는 그 생각. 여러 사람에게 해주고 싶었던 그 말,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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