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멍하니 보고 있는거다. 저 멀리 아득한 하늘만 -
언제부터 였는지. 나는 이렇게 습관처럼 벤치에 앉아 먼 곳만 바라본다. 그리고 어느새 이것은 내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늘 지내는, 소란스런 병동에서 빠져나와 어둑어둑 해가 저물때까지 이러고 있자면 나는 많은 생각을 하곤한다. 하지만 나의 많은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같은. 한가지 물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왜... 왜 도대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지...
마치 내 머릿속 모든 것이 실수로 눌려진 단한번 클릭으로 허무하게 삭제된 듯이. 그 속엔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가면 무언가라도 떠올리며 기억해 낼 거라고 늘 그렇게 스스로 위로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내 위로에만 그칠뿐... 시간이 갈수록 내안의 혼돈 속의 두려움만 더 커져가기만 할 뿐이다. 두렵다... 너무나 - 그리고 오늘도 그래서 두렵다.
오른손 끝부터 어깨 맨 위에까지 하얀 붕대로 칭칭감은 손을 안고, 하얀 병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한명 씩, 또는 몇 명 씩 내 병실에 자주 찾아오곤 한다..하지만 난 아무도 기억해 내지 못했고 - 못한다. 교수님이랍시고 찾아오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사람도 한 번 왔었고... 또 자주 찾아와서 얼굴을 익힌 한두명이 있기도 하다. 오늘은 처음보는 어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한 명 나를 찾아와서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하다가 자신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나에게 무척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 김은하 - 너 정말 나 기억 못하는 거야..? ”
“ ...저기... ”
“ 그럼 말이지... ” 그녀가 살짝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게 묻는다.
“ 너 - 혹시 성민이는 기억하니? 나성민이...? ”
“ 나성민? ”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지막 말은 늘 이런 질문이었다.
너 나성민이라는 앨 기억 하느냐고...기억은 나지 않지만 왠지 낯익은 이름인 듯 했다. 그냥 사람들은 나와 친한 사람이었다고만 하곤 내게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은 해주지 않았다. 가끔은 궁금했다. 그와내가 어떤 사이었는지... 또 그가 누군지...
하지만 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나보다. 아직까지 나성민이라는 자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온 적이 없었으니까...
“ 어쨌든 말이지... 너 딴사람보다 나를 제일 먼저 기억해 내야돼... 알겠어..?
한달... 전만해도 너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단 말야...하나두 기억 안나지..? “
그녀가 빈정대듯 말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 으응... 그런데 - 너 이름이 ... ”
“ 야... 정말 서운하네... 할수 없지.. 나 가신이다...성가신! 이으이구... ”
“ 그럼 말이지... 니가 나랑 제일 친한 친구라서 물어보는 건데...말야... ”
“ 뭔데...? 말해봐 -- ”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성민... 말야... 나성민이란 사람 얘기좀 해줄래..? 그리고 학교 얘기도 - ”
“ 좋아...하는 사람 ??? ”
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듯 황당한 미소를 벙벙하게 띄었다.
“ 그래... 어, 네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선물도 많이 줬던 것 같아...니가...그리고 - ”
“ 그런데... 그 앤 날 좋아했었어..? ”
마치 남의 사랑얘기를 경청하는 기분으로 쑥쓰러움을 뒤로 하고 나는 내 궁금증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풀어나가기로 했다.
“ .....그,글세... 그거야 난 모르지... 걔가 아무도 없는데서 너랑 데이트 했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아직 성민이에 대해.. 아무도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
“ 으응... 그리고 또 궁금한게 있는데... 내 사고 말야... 좀 자세하게 모르니.. ”
가신은 최대한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뭔진 모르지만 많이 감추는 듯
했다. 또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 저... 은하야... ”
“ 너 - 뭔가 숨기고 있구나... ? ” 내 말에 가신은 힐끔 놀라 돌아보곤 말을 이었다.
“ 내말 잘들어... 은하야 - 니 일은 정말 운이 없어서 일어난 사고였어... 그래... 산에서 미끌어
진 것 뿐이지... 그런데 그때 성민이가 네 옆에 있었어...그래, 그런데 그 바보같은 녀석은
자기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어, 원래... 맘이 약한 녀석이긴 해...
... 뭐랄까... 암튼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전부야.그래서 성민이가 네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야... 아직은 나도 뭐라 할말이 없어, 잘 모르기도 하고... 미안 “
그 정도는 은하 자신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얘기였다. 모두 이랬다. 마치 짜여진 대본을
읽는 듯 같은 말만 해주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궁금한게 너무나 많았다.
그 남자는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데 왜 그 자는 자책을 하고 있는지...
“ 그래... 너도 - 모르는 구나 - ”
순간 맥빠진 내 얼굴을 그녀가 보곤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
띠리리리 --- 띠리리리 ---
“ 여보세요... ”
인빈은 그녀의 수화기를 홱 낚아채듯이 잡았다.
“ 인빈이니..? 으응... 저기 나야... ”
“ 나? 아하~ 선혁 선배... 네...무슨 일이세요..? ”
늘 그랬다. 그녀의 말투는 ...
누가 들으면 조금 퉁명스럽다고 생각될지도 모를 말투지만 그녀로썬 반갑게 맞은 말투였다.
상대방이 조금 머뭇거리는 듯 했다. 인빈은 그저 의아해 할 뿐이었다.
“ 왜요... 선배... 무슨일있어요..? ”
“ 저기.. 오늘 - 나... ”
“ 아이 참... 사람 답답하게 ,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해요.. 나 끊어 버려...”
“ 인빈아... 성민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 ”
인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혁이 마치 무언가를 툭 뱉어내듯 말을 했다.
잠시 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인빈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멍하니 눈동자를 굴려댔다.
무슨말을 해야하나... 뭐라고 표현을 할까 찾는 듯이 -
“ 듣고 있지... 인 - ”
“ 네,네... 잘 듣고 있어요... 하지만 제겐 그다지 별로 유익한 정본 아니네요... ”
그녀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했다. 선혁이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 그,그래.. 저기 인빈아 - 이번 그 사고로... 니가 좀 화나 있는 것 다 이해하는데 ... ”
“ 아뇨 - 선배...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녜요...
전 그저 자기 맘대로 떠나간 사람을 애써 찾을 필요가 있나 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
인빈이 엄지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었다.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다.
“ 암튼.. 선배 - 미안해요... 하지만 전 이제 그 무책임한 남자한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선배... 정말 - 미안해요... “
* * *
거친 벨소리에 성민은 짜증난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 누구세요..! 누군데 남의 지입--- 엇... ” 성민이 놀래서는 뒤로 주춤했다.
자신의 앞에 선혁이 떡하니 서있었다.
믿을수 없었다. 어떻게 ... 알았지..? 여기 ---
“ 놀랬니..?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연락이라도 하면 너 또 도망갈 것 뻔한데, 뭐...
들어가도 될까..? “
그는 태연히 굳어있는 성민을 무시한채 거실로 들어갔다. 성민은 마치 도독질 하다 걸린
표정을 하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잠그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 여긴 너희집 별장이니..? ”
선혁이 테라스로 환히 비치는 밖을 내다보며 낮은 어조로 물었다.
“ 아뇨 - 오피스텔...하나 얻었습니다... ”
“ 그래... 여기서 사니까 어때..? 사람도 안만나고 좋지..? ”
그가 빈정대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이어지지 않았다.
선혁은 몇번이고 이를 악물고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난 저녀석을 달래러 온거지 벌하러
온게 아니다... 참자,..참자... 하지만 자꾸만 ,,, 그를 보면 주먹이 먼저 올라갈 것만 같았다.
“ 말 많이 안할게... 돌아와라... 니 자리 얼른 찾아... "
" 아뇨.. 선배... 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전 여기서... "
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선혁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돌아가지 않겠다... 돌아가지 않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성민에게 선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니.. 여기로 혼자 빠져 나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도망친다고 뭐 달라지니? 너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은 왜 안하니!!! 너 그런 자식이었어..? “
“ 돌아가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저한테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구요..."
성민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너... 은하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해..? 은하... 몸만 다친게 아냐... 그애...그애.. ”
그의 말에 성민이 흠짓 놀란 눈으로 선혁을 바라보았다.
“ 그애... 사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해... 나도, 교수님도... 대학 생활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은하... 부분 기억상실증이래... 그래... 지금 - 은하가... “
그가 털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 선배...
선배... 내가 그런거죠...
그애 - 내가 그렇게 만든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