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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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 위해서
꿈. 어쩌면 꿈이라는 말은 조금 거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열망, 바람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외딴 방 하나를 가지고 있다. 외딴방은 잠시, 꿈꾸는 동안 머무는 곳이다. 때로는 외딴방에 있기 때문에 꿈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 사진사가 되고 싶었던 외사촌. 외딴방 밖에서 보이는 그들은 그저 모여 있는 익명의 무리지만, 외딴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 개인은 우주를 품고 있는 숭고한 존재들이다. 꿈을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숭고하기 때문이다.

그가 소설을 써 보는게 어떻겠냐는 말 대신 시를 써보는게 어떻겠느냐고 했으면, 나는 시인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랬었다. 나는 꿈이 필요했었다.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해서, 큰 오빠의 가발을 담담하게 빗질하기 위해서, 공장 굴뚝의 연기도 참아낼 수 있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시골에서, 이제껏 살아온 방식으로 그렇게 어른이 될 수도 있었다. 외딴방에 살게 되는 인물들은 기존에 머물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 속으로 뛰어들고자 외딴방에 기거하게 된다. 새로운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 놓인 그 외딴방을 거쳐야만 한다.

나 역시 대학시절, 머물렀던 나의 작은방, 그 외딴방이 떠올랐다. 어제나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했을 때야 겨우 잠들곤 했던 곳. 종이위에 연필로 긁적이고, 몸을 긁적이고, 그 좁은 방에서 흘러가는 내 시간을 긁적이던 지난날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잠잠히 떠올랐다.


다른 삶을 꿈꾸는 자들의 외딴방
집과 학교의 거리가 멀었던 나는 학교 앞 고시원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나, 어떻게든 달라지고 싶었던 나......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은 별로 없었던 나. 그런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 스스로에게 좀더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내 통장을 털어서까지 고집을 피워 집밖으로 나온 것은 그만큼 그때의 나는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뛰어들기 직전의 일 년이었고, 공부할 수 있는 일 년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열여섯의...... 그 소녀처럼.

정말 좁은 방, 겨우 두 발을 책장 서랍에 넣어야 바로 누울 수 있었던 나의 방. <외딴방>속 작가의 시간과 공간과 나의 외딴방은 물론 너무도 다르겠지만, 열망으로 가득 찬, 지금보다 어린 내가 머물렀던 좁은 방을 추억했을 때 환기되는 감상은, 저자의 외딴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늘 열망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던 나, 외딴방에 갇혀 있는 게 싫어 늦도록 방밖에서 헤매던 나, 하루빨리 더 떳떳한 모습으로 외딴방을 벗어나고자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스물 네 살의 내가, 거기 있었다.

<외딴방>을 열자, 그때 그 방의 문, 301호실의 좁은 고시원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가장 마음에 들고 내 사정에 꼭 맞는 외딴방을 구하러 다니던 기억, 그 외딴방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설렘. 첫날, 한 달, 백일을 달력 위에 표시하며 이 공간속에서 불어나는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던 시간들. 잊고 있던 기억의 포문이 열렸다. 그랬기에 열여섯의, 그 소녀가 머물렀던 외딴방, 느꼈던 외딴방이 내게 촉각적으로, 후각적으로,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열망이 끌어 넘치는 좁은 방
두 소녀의 열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곳, 좁은 외딴방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훅, 느껴졌다. 지금이 여름이기 때문일까. 연탄불의 온기로 뎁혀지고 있는 방, 옴짝거릴 때마다 서로의 팔을 스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누워있는 외사촌, 오빠 둘, 그리고 나. 그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돌아누운 등, 웅크리고 있는 작은 몸, 그들이 누운 맨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제각각의 열망들이 천장까지 닿았으리라. 누가 뒤만 봐주면, 정말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을 큰오빠. 맏이란 이유로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천형을 어깨에 맨 큰오빠. 그를 보며, 왜 난 그의 누이가 아니었을까 미안한 마음을 갖는 나, 작가를 꿈꾸는 나, 그저 그렇게 풀어냄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나, 어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외사촌, 자신의 운명도 버거운데 시대의 운명과 맞서고 있는 작은오빠. 인생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선뜻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그들의 밤이, 느껴진다. 마음이 금세, 눅눅해진다.

외딴방은 과거, 기억 속에 있다. 그 기억, 내 마음 속에 저 스스로 외딴방이 되어 머무는 상처 같은 기억이다. 소설 속 신 작가에게 외딴방은 그러한 존재다. 외딴방에 창을 뚫고 신 작가는 들여다본다. 그가 쓴 글이 외딴방에 문을 낸다. 사람들이 두드린다. 옛 친구 하계숙이, 큰오빠가, 잡지사의 기자들이. 결국 이 소설은 신 작가가 외딴방에 달린 문을 여는 과정이다.    

외딴방으로 걸어 들어간 건 열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그 사 년의 삶과 나는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하고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억은 잊혀짐으로 도피할 수 있다. 상처도 시간으로 덮고 모른 척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아마 내 발등을 찍은 쇠스랑처럼, 우물 속에 던져놓은 쇠스랑처럼 시도 때도 없이 오늘의 나를 불러낼 것이다. 그것을 건져내지 않으면,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가만히 멈춰 서서 마음의 진동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함께 울어줄 수 있게 될지도
나는 본다. 얼마나 소소한 것들이 한 소녀의 시간에 흔적을 남겼는지. 소녀 신경숙의 세계와 부딪치는 역사적 사건들, 음악과 영화, 사람들. 말들. 그것들이 소녀 신경숙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순간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작은 멍이 들게 한다. 그녀가 겨우 입 밖으로 뱉어낸 희재 언니와의 일. 열여섯의 소녀 자신이 아니고서는 결코 짐작하지 못할 그 슬픔과 상처. 이해할 수도 대처할 수도 없었던 소녀를 본다.

신경숙 특유의 감수성 넘치는 문장이 내 소매를, 옷깃을 서서히 적셔간다. 한쪽 팔꿈치를 적시는가 싶더니 어느새 깊숙한 마음까지 젖어간다. 열여섯의 신경숙, 그녀의 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의 이야기를 읽는 듯 함께 얕은 한숨을 내뱉고, 노조 이웃들의 고초에는 함께 입술을 앙다물기도 한다.

<외딴방>은 열여섯의 소녀의 상처를 보고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의 상처를 위로받는 책이다. 동시에 이웃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짐작해보고 함께 아파하고 위로해보는, 그런 이야기다. 아직도 이 세계 속에는 외딴방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물리적인, 심리적인 외딴방을 갖고 있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누구나 우리는, 열여섯의 나,가 된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결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나의 슬픔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소녀를 통해, 누군가 우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슬픔을 겪기도 한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이제 이웃의 그 슬픔을 공감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마땅치 않은 위로의 말을 해주기보다는 함께 울어줄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외딴방에 작은 온기를 느끼다
<외딴방>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우리는 느낄 것이다. 처음 내 외딴방을 발견했을 때, 이 책을 처음 봤을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조금은 달라져있다는 것을. 내 마음이 가 닿을 수 있는 범위가 조금은 더 넓고 깊어져있음을. 그리고 한때 열망이 들끓던 나의 차가운 외딴방에 작은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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