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태엽 오렌지 - A Clockwork Orang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올해 들어 본 서른 편 가량의 영화를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많은 영화들이 이미지가 되어 머리를 스쳤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컷처럼 넘어가는데, 유독 한 영화의 잔상이 오래 남았다. 

 바로, <시계태엽오렌지>다.   



굳이 방금 순간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보고 난 이후 문득문득 내게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떠오르곤 했다. 분명히 다른 영화였다. 내 기억속에서도 꽤 오래 정착해있는 걸 보니,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인상적인 영화였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영화의 이해'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고심하며 말씀하셨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이걸 수업시간에 틀어도 될지 모르겠다며, 좀더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더랬다. 그리고 결국 선정성의 이유로 관람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를 꼭 너희들과 함께 보고 싶었다"는 말.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랜지>는 문학으로 따지면 고전으로 칠 법한 영화다. 당시에도 충격적인 영상으로 런던에서도 상영금지처분을 받는 등 화제가 되었고, 미래를 예견하는 줄거리나, 독특한 화면구성, 편집 등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영화다. 즉, 필독도서마냥 필수관람해야 하는 영화 리스트로 오래 품고 있었던 영화란 것이다. 

허나 DVD 위에 그려진 말콤 맥도웰의, 익살맞지 못해 괴기스럽기까지한 미소는 선뜻 영화와의 만남을 허락치 않았다. 어쩐지 그랬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름 영화 볼 수 있는 최적의 준비를 갖추고 이 영화를 만났다.  


영화 관련 서적에서 매번 수록되어 있는 첫 장면 이미지. 음란한 밀크바에 앉아, 반쪽만 긴 눈썹을 붙인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말콤 멕도웰의 모습. 아직도 생생하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장면 장면의 이미지가 강렬하고 굉장히 세련되었다. 소품이나 배경 하나하나 신경쓴 흔적이 역력하다. 

미래의 런던을 상징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집 디자인, 의상들의 기이한 디자인(낯설지만 점차 익숙해지는), 강렬한 원색- 영화 속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들은 알렉스와 그 친구들의 어긋난 행동을 더 부각시킨다. 이들은 파괴자고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어찌보면, 현대 런던은 모던을 상징하고,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알렉스와 친구들의 행동은 참으로 구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은 용납될 수가 없다. 미래, 현대의 사회는 이들 조차도 심플하고, 깔끔하게 통제하고자 한다. 현대가 원시적인 것을 다룰 때 주로 쓰는 무기는 과학이다. 발달된 과학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개인의 성향 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영화는 다양한 문제를 던져주는 영화다. 이를테면, 과연 과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의 본성, 성향 (소위 신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의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약물이나 신경치료를 넘어서 이제는 유전자를 통해 '타고난 것'까지 조작해보려는 지금의 시도는 스탠리큐브릭 상상력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 영화가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내가 갑자기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당시 메모해 둔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 나 역시 화면 속에 보이는 폭력과 선정적인 것들에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에서 폭력성은 쾌감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알렉스는 이유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그는 마치 그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알렉스가 저지르는 대부분의 폭력, 혹은 상징이 성적인 것과 연관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가장 본질적인 쾌락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서히 관객들을 자극한다.  

첫 장면부터 난무하는 폭력성에 누구든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빈번히 자주 보여주는 폭력의 모습에 점차 관객의 자극은 익숙해져간다. 불쾌감의 정도는 낮아지고, 온전히 하나의 자극이 된다. 폭력이 폭력이라는 불편한 이름을 버리고 온전히 그 행위 자체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야말로 폭력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없이 저지르는 숱한 폭력들을 지켜보라. 쾌감의 자극과 비슷한 자극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유있이 저지르는 응징은 합당하고 통쾌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폭력 행사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내면에는 폭력이 본능처럼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교육이나 사회화에 의해 절제된 폭력성 말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이 시대에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이 난무하는게 아닐까.  

폭력적인 사회에서 폭력성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심각한 약자가 되는 일이다. 교화된 알렉스는 늑대의 사회에서 양이 되어 버린다. 폭력적인 것만 보면 구토와 경기를 일으키는 '치료'를 받은 알렉스는 보복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쏟아지는 폭력 앞에 그저 당할 수 밖에 없다. 

이전의 악한 알렉스에게 당했던 피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선량했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한 것일까? 감옥에서 알렉스가 나오자, 이전에 그에게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복을 가한다. 그때의 표정을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알렉스의 고통을 즐기며 끔찍한  미소를 지어댄다. 그들은 모두 이전의 악한 알렉스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그저 내면의 폭력성이 잘 교육되었는가, 절제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뿐이다.   



원시적인 폭력성을 휘두르는 알렉스는 처벌을 받고, 치료를 받는다. 허나, 나름의 이유있이, 사연있이 저지르는 그들의 폭력은 합당성을 띠게 되고, 법 안에서 수용이 된다. 심지어 알렉스가 가장 싫어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자살을 유도하는 등 고문에 가까운 폭력성을 내비치는데도, 그들은 이유와 목적-실험이라든지 보복이라든지-을 지녔으므로 떳떳하게 자행된다. 그런 폭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은 경찰과 박사 등 고위 관리직이다. 

요즘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살펴보자. 아홉시 뉴스, 사회면에 나올법한 범죄들은 요란하고 어지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들은 사회 안에서 재단되고 응징된다. 이런 알렉스적인 폭력도 두려운 일이지만, 사회라는 틀 내에서, 그 틀에 딱 맞게, 혹은 틀을 이용해서 저지르는 폭력성도 못지않게 끔찍한 일이다. 정치가, 법조인, 방송인 등 소위 배운 사람, 아는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들.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치명적으로 괴롭히는 폭력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향해 자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을 응시하는 영화<시계태엽오렌지>는 이때문에라도 의미있고,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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