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어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요시다 슈이치를 읽는 일은 위험하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애써 외면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그의 책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볼 수 밖에 없는 이상한 중독성을 발휘하는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내게 그런 작가다. 마치 커피나 콜라의 카페인이 몸에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카페인의 중독 작용에 의해 마실 수밖에 없듯이. 차갑다는 표현도, 무섭다는 표현도 '중독적'이라는 표현보다 강렬하지 않다. 파란 물 위에 떠있는 검은 열대어의 이미지는 마치 그 강렬한 중독에의 섬뜩한 상징 같다.

다이스케는 마미와 그녀의 아이, 그리고 이복동생 미쓰오와 함께 산다. 미성년의 어린 여자애를 아무 거리낌없이 탐하면서도 같이 사는 마미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는 다이스케. 하루종일 열대어만을 바라보고 있는 미쓰오. 같이 살고 있지만 의미없어 보이는 관계들. 별 다를 것 없는 일상. 다이스케는 여행을 계획하지만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다. 다이스케가 건축 현장에 건축주의 어린 딸과 함께 있다가 불을 내고 미쓰오가 여행 가려고 모아 두었던 돈을 들고 집을 나가면서 일상에 숨어 있던 위험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두번째 이야기. 남자는 여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가 이유없이 여자에게 통조림의 콩을 던지고 여자는 화가 나서 집을 나간다. 남자는 여자를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의 여자를 유혹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가할 수 있는 최대치의 폭력.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비인간성의 극한. 그런 무서움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무서움들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남자에게 조금 화가 났다가 이내 적응이 된다. 요시다 슈이치의 인물들에 감정 이입을 하려고 하는 건 위험하다. 그의 소설을 무사히 읽어내려 가려면 적당한 거리, 조금은 냉담해진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휴가를 맞아 민박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닛타. 주인장의 아내를 유혹하려 하는 것 같지만 도쿄로 와서는 느닷없이 내려주고 돌아가라고 말한다. 일주일 후를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의미가 없다. 기다림, 약속, 기억이라는 건 요시다 슈이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무관심, 망각, 무심함이 가장 철저하게 드러나는 것이 그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말이죠. 누가 기다려주는 게 질색이에요. 애인과 만나기로 했는데 일 때문에 늦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삼십 분쯤 지나 버려서 이제는 없겠지 생각하고 가보면 거기에 그냥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뭐랄까, 소름이 끼친다니까요. 원래 같으면 감격해야 할 텐데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라도 소름이 끼쳐버리거든요." 227쪽

쓸쓸함의 원형 같은 것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요시다 슈이치. 너무 쓸쓸해서 못 견디겠을 때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하는 그. 나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 무섭다고 말하지만 그 무서움은 내게도 이미 익숙한 것이라는 사실이 나는 더 무섭게 느껴진다. 요시다 슈이치를 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작품들을 다시 들춰 보게 되는 것은 그런 무서움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그런 차가움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쓸쓸해서 못 견딜 것 같은, 그런 일상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일상과 서늘한 관계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차가운 시선. 그런 차가운 중독. 나는 그 차가운 중독을 거부할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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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4-09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탄이 나오는 리뷰에요.
님의 리뷰를 거부할 힘이 없어요...

ALINE 2005-04-10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