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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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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의 한국 문단은 김훈의 [칼의 노래]로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을 맞았다. 2003년의 한국문단엔 박민규라는 괴물 같은 신예가 [지구영웅전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믿을 수 없는 데뷔작을 들고 (차마 얘기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진부한 레토릭을 빌려 말하자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2004년에 또 천명관의 [고래]가 발표 되었다. 마치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포수'라던 최기문이 등장하고, 그 다음해에 다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포수'인 진갑용이 등장했는데, 또 그 다음 해에 홍성흔이 등장한 90년대 중후반의 프로야구 같다고 할까? 그것은 신인 등장의 법칙이었다. 

꾸준히 한국 소설의 흐름을 따라 잡아왔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천명관의 소설을, 그것도 [고래]를 아직 읽지 않았다고 고해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맹세컨대 대충 김훈과 김영하와 김연수와 박민규와 김애란 정도만 챙겨주면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것에 그닥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가끔 김중혁과 이기호와 박형서까지 언급해 주면 어느 정도 양식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최제훈 정도까지 챙기면 '아니 그런 것까지 읽으세요?'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기에, 그 흐름 바깥에서 등장한 천명관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허세와 겉핥기의 법칙이었다. 

뒤늦게 읽어본 [고래]에 대해선, 내가 구태여 이야기 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지점을 지적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울 정도. 혹자는 예술의 위대함은 수많은 해석을 가능케 하는 '모호함'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고래]는 여러 모로 해석의 여지가 적은 작품이다. 읽을 때 처음 느껴지는 가장 강렬한 느낌은 당연히 마르케스를 비롯한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한국적 번안과 보르헤스의 영향이다. 물론 변사의 어투를 차용한 문체라든지, 전래동화를 연상시키는 서술방식 등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을 쓰겠다'는 의도에서 바라봤을 때, 먼저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소설을 한국식으로 번안하겠다는 의지가 존재하고 나서, 그 이후에 실천적 방법론으로 변사적 문체라든지 전래동화적 서술방식을 끌어들였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한때 소설을 써보았던 동업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지레짐작의 법칙이었다. 

한국의 소설은 80년대에 이미 조세희의 '난.쏘.공'의 성공을 시작으로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그 전통을 세웠다. 한국 소설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현실에 기반한 리얼리즘이 메인스트림을 형성했으며, 이문열이나 고원정, 이승우 등이 어느 정도 우화적인 세계로 도망치면서 문학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와중에도 그 우화의 핵심은 정치적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하루키 열풍이 몰아치고, 그것이 다시 하루키를 따라 피츠제랄드 등의 영미문학의 감수성을 세례받은 젊은 작가 세대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문학의 전통은 완벽하게 기존의 리얼리즘과 단절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고독과 감성을 이야기하는 단계로 전환하게 된다. 80년대의 메인스트림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박경리의 소설과 하루키의 등장 이후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 김중혁의 소설들이 같은 전통에서 쭉 이어져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세대가 90년대에 극심한 단절을 겪었던 것처럼, 소설 역시 그러하다. 90년대 후반 이후에 등장한 젊은 한국 소설가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80년대의 한국소설보다는 20년대 재즈 제너레이션 시대의 영미소설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미문학의 전통에 더 기대어 있는 듯 보인다. 

그 와중에 등단 이전의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특이하게도) 한국문학도, 영미문학도 아닌 보르헤스를 흉내낸 습작들을 한두 편 씩 써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천명관의 [고래]를 이야기 해보기에 앞서 한 번 흥미롭게 바라보아야 할 지점이다. 실제로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의 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접한 보르헤스의 소설과 마르케스의 세계에 적잖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중 작가를 지망하는 많은 이들은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했었다. 그것은 습작의 법칙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때론 발표와 출판으로 이어지기도 했었는데, 등단한 작가 중 대표적인 경우로는 김연수의 단편집 [스무 살]에 수록된 소설들이 그러하고, 정식 등단을 거치지 않은 작가로는 이적의 [지문사냥꾼]이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지는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명관의 [고래]는 이러한 시도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 앞서의 단순한 시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강력한 무게감을 가진다. 그것은 이 소설이 문학동네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과 완성도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3대에 이르는 가족사를 정리하며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을 움직이면서도 숨막히는 흡인력으로 독자를 몰고 가는 힘은 가히 명불허전이다. 더군다나 이야기 전개가 간결하거나 절정을 향해 직선으로 돌파하는 진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성과는 더 놀랍다. 이야기는 - 전래동화적 구성에 걸맞게 - 때로는 시간을 건너뛰기도 하고, 때로는 곁가지로 새기도 하며, 때로는 한없이 먼길을 구성지게 돌아가기도 하는데도 그 호흡이나 흐름에는 한 줌의 흐트러짐도 없이 독자를 몰고 간다. 이는 숨쉴 틈 없이 떠들어 대는 변사의 너스레처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에 있을 것이다. 천명관 작가 스스로도 본인은 소설을 쓸 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고래]의 이야기의 분량이 그러하다. 447페이지라는 것이 한 권의 소설로는 결코 적은 분량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고래]가 다루고 있는 서사의 양 - 3대에 얽힌 가족사와 그에 얽힌 수십 명의 이야기 - 에 비하자면, 사실 엄청나게 압축된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스토리를 가지고 [토지] 정도의 분량의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고래]의 이야기는 경제적인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낭비'에 가까운데, 낭비도 그냥 낭비가 아니라 거의 90년대 거품경제의 극점에 서있는 오렌지족 급의 과소비다. 핵심에서 한없이 벗어나 있어서 쳐내야 할 이야기조차도 만연체로 길게 길게 늘어지는데, 그러한 '장황함'이 단점보다는 외려 재미를 준다. 하드보일드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고 질주하는 경제적인 여행이라면, 천명관의 [고래]는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다시 경상도로, 다시 남해의 섬으로, 통영으로 조선팔도를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가는 유람의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가 여타의 비슷한 시도들과 구분되면서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지점은, 보통 이러한 류의 작품들의 빠지게 되는 가장 큰 함정인, 집중력을 잃고 이야기와 서사와 문체에 스스로 함몰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돌아 온갖 것들을 보고 즐기고 맛보며 왔는데도, 클라이맥스에 이른 이야기는 독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저격한다. 절정까지 지치게 만들지 않은 것이다. 춘희의 아이가 죽고, 춘희가 정신을 잃은 채 쌓아놓은 벽돌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인 감동은, 앞의 혼돈스런 여행에도 전혀 지치지 않은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그대로 간직하게 한다. 그것이 [고래]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지점인데, 이것은 앞의 너스레와 서사가 사방팔방으로 튀면서도 정서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작품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작가에게 어려운 일인데, 그것은 이러한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듯 - 이를테면, 액션과 드라마와 서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절묘하게 균형을 지키면서 놓지 않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를 들 수 있겠다 - 작가의 역량보다는 절묘한 우연과 행운에 의해, 즉 '예술의 신이 굽어 살피셔서 점지하신' 작품에만 찾아오는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기 보다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놀란과 천명관은 그리고 그러한 하늘의 간택을 받았고. 그리고 불행히도 대부분의 예술가는 그러한 행운을 보통은 생에 한 번 밖에 누리지 못한다. 만약 두 번 이상 그러한 행운이 계속 된다면 그때는 그것이 하늘의 점지가 아니라 본인의 역량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천명관이나 놀란 모두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로또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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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포스트, 1663 - 보급판 세트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 

     범죄 방법이 다양해지면서, 범죄 수사가 과학화 되면서, 범죄의 동기가 다양해지면서, 무엇보다도 조지 오웰이 말한 '영국식 살인의 쇠락Decline of English Murder'과 함께 클래식 추리물은 갈 곳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추리방식은 과학적인 척 했지만, 상당부분 잘못된 방식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런 방식에 의해 수많은 추리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탐정들은 그저 전설로만 남아야 했다. 현대문명의 놀라운 발전은 범죄 역시도 현대화 시켰고, 현대화 된 범죄는 일개 탐정의 추리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해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주구장창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만 써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명탐정은 이미 식상한 아이템이었고, 독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범죄와 수사를 원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이러한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함과 동시에, 그런 고민에서 한 단계를 뛰어넘기까지 한 걸작이었다. 빅토리아 시대가 흔하다면, 아예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과학 수사나 현대화 된 범죄도 없었고, 조금 단순하고 어리석은 범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명석한 명탐정의 두뇌는 더욱 빛났다. 

  뿐만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는 추리소설 안에 신학과 기호학, 논리학과 수사학 같은 철학과 인문학의 문제들을 버무려 놓았고, 그러므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 추리소설이 단순한 펄프 픽션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인 활동이 빚어낸 결과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게 맞기도 하고) 그리고 자신이 이 추리소설을 읽는 독서활동이 지적인 과시 활동으로 여길 수 있게 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은, 추리소설이지만 몹시 현학적이다. 실제로 번역가 이윤기 씨가 친절하게 달아 놓은 주석 없이 그 책을 읽는 것은 그리 즐겁거나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한글로 되어 있는 책은 좀 낫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라틴어를 혼용해서 쓰고 있는데, 그나마 한국어에선 라틴어와 한국어의 구별이 너무나도 쉽지만, 영어권 국가에선 라틴어와 자신의 국어가 비슷한 알파벳 체계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못내 저주스러울 거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도 마찬가지지만, 때론 어떤 단어는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구분가지 않을 정도라니. 

  #.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현학적인 동시에 현란하다면, 다행히도 [핑거포스트 1663]이라고 번역된, 이안 포스트의 [The instance of Fingerpost](이하 핑거포스트)는 현란하기만 하다. (일부러 원제를 밝힌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원서로 읽었기 때문... 이라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핑거포스트, 1663]이라는 번역제가 상당히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1663이라는 년도가 아예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으나, 그것이 제목의 자리를 차지할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거니와, 아무리 읽어봐도 그것이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핑거포스트' - 손가락 모양의 이정표를 가리키는 단어로, 여기서는 진실을 직시하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Instance'을 의미하고 있다 - 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그냥 '핑거포스트'라고 번역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인스턴스 오브 핑거포스트'라는 원제를 그대로 써야 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들처럼 '내 소설을 읽으려면 최소한 이것 이것 이것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실제로 에코는 자신의 소설을 읽기 위해선 초반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장미의 이름]의 첫 백 페이지는 일부러 지루하게 썼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안 피어스는 그에 비해 훨씬 친절하게도 초반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하며,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한 설명에도 꽤 정성을 들이는 편이다. 

  물론 [장미의 이름]이 그러하듯, 이안 피어스의 [핑거포스트]도 역사 추리물의 형식을 빌려, 신학과 철학을 논하며 독자들의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안 피어스는 움베르토 에코처럼 라틴어를 혼용하거나, 장황하게 수도원 미사의 순서를 설명하는 것으로 독자를 시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독자는 자신이 작가가 짜놓은 촘촘한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 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그 거미줄은 한 줄로만 짜여진 것이 아니라, 굉장히 다양하고 현란한 방식으로 짜여진 것이다. 이안 피어스는 크롬웰 공화정부터 왕정 복고 직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역사 추리소설 안에, 성경을부터 시작해서 중세 영문학과 현대영문학, 심지어 펄프 픽션의 장르까지를 아우르는 다양한 텍스트적 테크닉을 뿌려놓는다. 조금 천박하게 비유하자면, 노래 한 곡을 부르면서 모창을 하는데 그 안에 현인과 남인수부터 로이킴까지 들어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 

  [핑거포스트]는 처음엔 시치미를 뚝 떼고, 한 이탈리아 여행자의 수기처럼 시작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첫 챕터이다. 첫 챕터 앞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의 인용문과 함께 '시장의 우상'이란 제목이 붙어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자는 여행을 하다가 여러 사건을 겪고 (여느 추리소설처럼) 미스테리한 밀실 살인사건에 마주하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아무도 탐정 역할을 하지 않는다. 창작인물인 이 이탈리아 여행자는 물론이고, 당시 영국에 실존했던 철학자 존 로크, 과학자 보일, 의사 로어 등 역사책에서 보았던 똑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전부 어리석거나 괴팍하게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여느 추리소설들이 또 다 그러하듯이) 당대의 경찰조직에 의해 (누명을 쓴 것임에 분명한) 인물이 체포된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교수형을 당하고 죽는다. 

  당황해서 책장을 넘기면, 두 번째 챕터에도 역시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의 한 부분이 인용되어 있고, '동굴의 우상'이란 제목이 붙어있다. 그리고 나면 이번엔 전 챕터에서 등장했던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본 기록이 계속된다. 그제야 이것이 우리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보았던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을 다룬 플롯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베이컨의 4개의 우상이 각 챕터의 제목인 것도 이해가 된다. 이안 피어스는 아마 각자의 편견이 가지는 관점의 차이를 기술함으로써 진실에 다가가는 플롯을 짜놓았으리라. 물론 그러한 예상은 맞다. 하지만 세 번째 챕터에 넘어가면 또 다른 깨달음이 기다린다. 

  #. 

  세번째 챕터의 제목은 [극장의 우상]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독자는 애초에 첫번째 챕터에서 발생했던 밀실 살인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에서 밀려났음을 느낄 것이다. 첫 챕터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장미의 이름]과 같은 역사추리소설처럼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엔 당시의 과학실험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다루며,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과학수사에 대해서도 짚을 것처럼 시작했으나, 앞에서도 밝혔다시피 탐정조차 없는 기괴한 추리물의 결말처럼 맺고 말았다. 그리고 넘어간 두 번째 챕터의 장르는 전혀 다른 중세 시대의 기사도 환상문학이다. 두 번째 챕터의 화자는 아버지를 잃고, 그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 먼 모험을 떠나며 마녀와 괴물들을 만난다. 

  그리고 세 번째 챕터로 넘어오면, 이번엔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복잡한 음모가 얽힌 스파이물 혹은 하드보일드 누아르물이 펼쳐진다. 어찌 보면 이것은 존 르 까레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제임스 엘로이 같기도 하다. 공화정과 왕정복고 사이의 정치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온갖 정보와 음모가 펼쳐지면서 첫 번째 챕터의 살인사건, 두 번째 챕터의 누명을 쓴 아버지에 관한 사건이 모두 거대한 음모의 일부분임을 밝힌다. 

  #. 

  그리고 네 번째 챕터가 바로 '핑거포스트', 즉 진실을 직시하는 순간이다. 마지막 챕터의 화자가 마침내 앞의 세 개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사건에 대한 진실을 정리하는데, 마지막 챕터의 장르는 추리물도, 스파이물도, 환상문학도 아니라 다름 아닌 '성경'이다. 그러면서 독자는 또 한 번 깨닫는다. 베이컨의 '4개의 우상'은 그저 맥거핀이었음을. 이안 피어스는 어쩌면 처음부터 4복음서의 구성 역시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신학을 조금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4복음서에서 앞의 3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한다. 바라보는 관점이 같다는 뜻이다. 그럼 마지막의 '요한복음'은 바라보는 시점이 다르다는 뜻일까? 맞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읽다가 생기는 의문들이 요한복음에서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신학을 공부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 얘기는 아니고. 참고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미스테리에 대한 이야기는 김성일의 [성경과의 만남]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그가 이 미스테리를 해결하기 위해 쓴 [제국과 천국]을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4복음서 역시 예수의 탄생과 행적, 죽음, 부활에 대해 4명의 화자가 각자 자기 입장에서 서술한 이야기가 아닌가!

  #.

  출판사의 보도자료는, 이 소설에 대해 '내란과 혁명, 공화정의 실험으로 점철된 17세기 영국을 무대로,  과학·의학·신학·인식론을 종횡무진 오가며, ‘왕권’과 ‘의회주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 ‘연역’과 ‘귀납’이 충돌하던 시대, ‘종교적 억압’과 ‘인간의 이성’이 충돌하던 세기를 치밀하게 그려낸다. ‘살인사건’이라는 미스터리는 ‘왕정복고를 둘러싼 세기적 음모’라는 역사적 진실에 닿아 있고, 역사적 진실은 인간 존재의 진리에 닿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소설의 형식 역시 다양한 지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성경적 구성, 중세적 환상문학, 근대적 추리물에 심지어 현대적인 펄프 픽션까지 아우르는 서술의 장르적 실험은, 왕정과 공화정이 혼재했고, 구신학과 신학문이 대결하였으며, 중세적 인간형과 근대적 인간형이 혼재하며 충돌했던 당시의 시대상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이 정도로 격조 높은 혼재가 이루어졌던 작품은 태평소와 스래쉬 메탈이 공존했던 '하여가' 정도 밖에 없었다... 라는 말은 물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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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또라이이거나, 배우가 또라이이거나, 영화가 또라이이거나.
상식 밖에서 생각하는 또라이들의 기상천외한 영화 리스트.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제이 앤 사일런트 밥
케빈 스미스 외 감독, 케빈 스미스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2년 11월
22,000원 → 19,500원(11%할인) / 마일리지 200원(1% 적립)
2004년 05월 05일에 저장
품절
항상 조연의 위치에 있었던 제이와 사일런트 밥이 전면에 등장한 케빈 스미스의 역작.
또라이 영화의 박스오피스 1위 점령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

근데 <도그마>는 DVD 안 나왔나 보네.
채널 69- [초특가판]
이정국 감독, 신현준 외 출연 / SRE (새롬 엔터테인먼트) / 2000년 7월
9,900원 → 2,900원(71%할인) / 마일리지 30원(1% 적립)
2004년 05월 05일에 저장
품절
사실 한국 또라이영화의 전통의 선봉에는 <미지왕>과 <일팔일팔>이 있지만,
DVD를 구할 수 없는 관계로 아쉬운대로 채널 69으로 대체했다.
또라이 스피릿에 있어선 다소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상업영화의 틀에 자리잡은
또라이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영화.
쥬랜더 S.E.- [할인행사]
벤 스틸러 감독, 벤 스틸러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4월
6,600원 → 6,100원(8%할인) / 마일리지 70원(1% 적립)
2004년 05월 05일에 저장
품절
벤 스틸러와 오언 윌슨이라는 짝패의 최고의 호흡. 이 영화를 보며 웃지 못한다면,
당신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섀넌 도허티의 몰랫츠 CE
케빈 스미스 감독, 제이슨 리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4년 3월
25,300원 → 8,000원(68%할인) / 마일리지 80원(1% 적립)
2004년 05월 05일에 저장
품절
케빈 스미스는 이 영화를 영리한(smart) '포키스'처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포키스의 멍청이들보다 100배는 더 멍청하다. 케빈 스미스는 '점원들'에서 자신이 또라이임을 커밍아웃했지만, 몰랫츠에서 그것은 확대재생산되었다. 일부에선 케빈 스미스 최악의 작품으로 꼽지만, 그러기에 이 작품은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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