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코난 - 베이커 가의 망령>을 기를 쓰고 보려 한 이
     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연애시대>의 원작자인 
     노자와  히사시가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는 사실 때문이었
     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셜록 홈즈와 잭 더 리퍼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었죠.
     
     결과는요?  둘 다 조금씩은 실망스러운 느낌입니다. 노자와 
     히사시는  우리에겐  <연애시대>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파선의 마리스>로 에도가와 란포 상도 수상했고, 미
     스테리적  복선이 깔린 <잠자는 숲>과 수사물인 <얼음의 세
     계>의  작가이니 추리물 자체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명탐정 코난>의 세계에 대해
     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죠. <베이커 가의 망령>은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중 6번째 작품이자 노자와 히사시
     가  각본을  쓴 유일한 작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1기부터 
     9기까지,  6기 극장판인 <베이커 가의 망령>을 제외한 나머
     지  각본은 후루우치 카즈나리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입니
     다. (10편과 11편은 카시와바라 히사시 각본) 즉 다시 말하
     자면  <베이커  가의 망령>은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중에 
     이질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실제로  <베이커 가의 망령>은 가상현실이라는 SF적 소재를 
     가져온 반면, 전통적인 탐정물, 특히 <명탐정 코난>의 가장 
     핵심적인 장르 컨벤션이라 할 수 있는 범인 찾기와 트릭 풀
     기에 인색한 편입니다.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범인
     을  모르는 살인은 딱 한 건 벌어지는데, 그나마 시시한 트
     릭을  사용한  시시한 동기의 살인이죠. 특히 동기의 경우, 
     얼마나  시시했던지 애들 만화영화를 감동하며 몰입해서 보
     고 있던 제가 다 실망할 정도였으니까요. 
     
     #.
     
     <명탐정  코난>의  가장  기초적인 컨벤션이라 할 수 있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놀라운 트릭'과 '알리바이와 증거, 그
     리고  범인  찾기'를 무시한 채, 노자와 히사시는 가상현실 
     상의 모험담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특히 가상현실
     의  아이디어는 아주 좋아요. 셜록 홈즈와 잭 더 리퍼의 대
     결이라니! 이것은 셜로키언들이 부딪치는 가장 근본적인 문
     제 중의 하나란 말입니다! 
     
     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무엇일까요? 만약 신이 존재
     한다면  왜 이 세상에 불행도 함께 존재하는가, 입니다. 신
     이  전지전능하다면 당연히 불행도 없앨 수 있을테고,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불행도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했을테니까요. 
     
     셜로키언이란  어떤  자들입니까? 신적인 존재 셜록 홈즈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코난 도일은 그저 그 신의 행적을 기록
     한  사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
     에게 '믿지 않는 자들'은 비웃음을 가득 물고 질문합니다; 
     
     "대체 너희들의 '셜록 홈즈 님'이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 전
     능한  명탐정이었다면, 어째서 동시대에 활동한 잔혹무도한 
     살인마   잭   더   리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했는가?"
     
     라고 말이죠. 
     
     #. 
     
     하지만 더더욱 아쉽게도 <베이커 가의 망령>에서 셜록 홈즈
     는 딱 두 장면에 등장하며, 왓슨은 사진으로만 등장합니다. 
     외려 세바스천 모런 대령이나 모리어티 교수의 비중이 훨씬 
     큰  편이죠.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노자와 히사시가 분명 
     셜록학(學)을  상당히 연구한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홈즈가 아이린 애들러에 대해 갖는 감정을 단순한 연애감정
     으로 치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 영화에, 홈즈
     의 일생에 거친 복잡다단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린 애들러에 대
     해  그런 식으로 표현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
     를  본 아이들 중에 나중에 셜로키언이 되어서 배신감을 느
     끼는  아이가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과연 누가 장담하겠습니
     까? 
     
     #.
     
     하지만 <베이커 가의 망령>에서 노자와 히사시가 무시한 것
     은  단순히  아이린 애들러의 캐릭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좀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한 채 <베이
     커  가의 망령>을 <명탐정 코난> 시리즈에서 이질적인 존재
     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 노자와 히사시는 <명탐정 코난>과 <소년탐정 김전일>이 
     기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틀을 무시합니다. 바로 '소년 
     탐정'이란 서브 장르 말이죠. 
     
     #. 
     
     많은  사람들이 <명탐정 코난>에 등장하는 소년탐정단을 보
     면서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즈를 연상합니다. (혹은 연
     상하도록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즈는 홈즈의 잔심부름을 하는 거리의 아
     이들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거나 조사
     하는 일따윈 없었죠. 항상 홈즈의 지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심부름의  댓가로 돈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식    명칭도    없었던)   그네들이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즈'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은 오
     직  그들이  셜록 홈즈라는 역사상 최고의 탐정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오히려  <명탐정 코난>에 등장하는 소년탐정단은 에리히 케
     스트너의 <에밀과 탐정들> - 예, 소설 본문보다 "저는 원래 
     남태평양의 식인종 소녀 페터질리에 대한 이야기를 쓸 예정
     이었고, 심지어 3장까지 써놓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는 지금 우리집 식탁 밑 받침대로 쓰이고 있습니다"라고 고
     백하는  작가후기가 훨씬 더 유명한 그 소설 말입니다 - 에 
     등장하는 소년들에 더 가깝습니다. 우연찮게 사건과 마주치
     고,  평범한 소년들이 팀 플레이로 협동해서 사건을 해결한
     다는 점에서 말이죠. 이런 소년탐정단의 전통은, 물론 시리
     즈가 발전함에 따라 공식적인 경찰사건을 다루기도 하지만, 
     보통은 동네에서 벌어진 기괴한 일들 - 갑자기 사라진 고양
     이라던지,  이웃과 친하지 않은 괴노파의 과거 - 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완벽하게 장르화되어 
     '매거크  탐정단' 시리즈와 같은 어린이 시리즈의 성공으로 
     이어집니다만, 이 이야기는 잠깐 '하디 보이즈'까지 이야기 
     하고 이어서 하기로 하죠. 
     
     #. 
     
     '소년탐정단'의  원형이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즈와 <에
     밀과  탐정들>의 소년들이라면, 김전일, 신이치와 하쯔토리
     처럼 학생 신분을 가지고 실제 사건조사에 참여하여 경찰조
     차  깜짝  놀랄 추리를 펼쳐내는 '소년탐정'의 등장은 훨씬 
     더  화려했습니다.  이 '고교생 탐정'의 원형은 전세계적인 
     스타,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과 대결을 펼쳤고, 뤼팽을 잡으
     러  등장한 셜록 홈즈를 따돌렸으니까요. 심지어 등장한 작
     품도 모리스 르블랑의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기암성>이었습
     니다. 
     
     이쯤되면 아시겠죠? 예, 그 소년탐정의 이름은 이지도르 보
     트를레(Isidore Beautrelet)입니다. 


 이지도르 브트를레의 혜성같은 등장을 알린 바로 그 소설!
아르센 뤼팽 전집 3 - 기암성
6점

     
     #. 
     
     이지도르의  등장은 여러모로 김전일이나 쿠도 신이치와 비
     슷합니다.  장송 드 사일리 고등학교 수사학급(1902년 전까
     지  프랑스  고등학교의 최고학급)의 기숙학생인 수재이자, 
     학교에서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 실력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
     던 이지도르는 봄방학 중에 우연히 "앙브뤼메지 사건"에 흥
     미를  느껴  신문기자로 변장하고 수사현장을 찾게 됩니다. 
     물론  어설픈 변장은 곧 경찰관에게 들키고 말지만, 가니말 
     경감도  깜짝  놀랄만한 추리를 해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죠.  심지어 그 이전에도 그의 추리실력은 재야에서 정평이 
     나  있었고,  경찰들과 협조하면서 뤼팽의 행적을 쫓는다는 
     점까지 많은 부분에서 후기의 소년탐정들은 그에게 빚을 지
     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합니다. 
     
     #. 
     
     "이보시오, 형사반장! 당신이 있을 곳은 바로 여기라오! 내 
     장담하건대  무슈 이지도르 보트를레가 하는 말은 귀기울일 
     가치가  있어요...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 소년의 관찰력은 
     가히  신기의 수준이어서, 학교 내에서는 가니말 경감과 대
     등할  뿐 아니라, 저 멀리 셜록 홈즈와도 충분히 비교될 만
     한 명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오."
     
     - <기암성> 중 피욜 씨의 대사
     
     #.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뤼팽 시리즈 중 셜록 홈즈는 세 
     작품에 등장합니다. <두 개의 탑>, <기암성>, 그리고 <뤼팽
     과 홈즈의 대결>이죠. 하지만 그 세 작품에서 한 번도 홈즈
     는 뤼팽을 검거하지 못했고(가니말 경감도 뤼팽을 한 번 체
     포했었는데!),  코난 도일은 그것에 대해 몹시 기분나빠 했
     었다고 전해집니다. 모리스 르블랑은 의도적으로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대신 헐록 쇼움즈(Herlock Sholmes)라는 
     이름을 사용했구요. 때문에 셜로키언들은 뤼팽 같은 날건달
     과  홈즈가 대결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이지도
     르 같은 초심자 탐정에게 추리로 밀린 적도 없다고 믿고 있
     구요. 셜록 홈즈의 숙적은 오로지 모리어티 교수 뿐입니다. 
     
     #.
     
     이지도르 보트를레는 기암성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쳐보임으
     로써  프랑스  전역의 스타로 떠오르게 됩니다. (역시 쿠도 
     신이치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소년의 활약은 
     거기까지입니다. 이후 모리스 르블랑의 어떤 소설에도 등장
     하지  않고, 아마 학교로 돌아가서 시험공부나 하면서 살았
     겠죠. 
     
     사실  이지도르의 등장은 추리소설계에 꽤 신선한 사건이었
     습니다.  이지도르는  '원로 탐정'들이 가지고 있는 냉정한 
     분석 대신 사춘기 소년다운 감정으로 사건에 접근했습니다. 
     때문에  셜록  홈즈가 끝까지 뤼팽을 뒤쫓는데도 그를 도와 
     검거를  돕지 않고 심정적으로 뤼팽을 응원하면서 사건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합니다. 동시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민
     한  사춘기 소년이야말로 닳고 닳은 원로 탐정들에 비해 뤼
     팽이  상대하기에 까다로운 상대가 아닐 수 없었죠. 하지만 
     모리스 르블랑은 뤼팽이나 가니말 경감 같은 캐릭터만큼 그
     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나면, 기암성 
     같은  작가적  역량을 맘껏 발휘한 작품에서 엄청난 활약을 
     벌이게  만들어 놓고 이후로는 한 번도 활용하지 않았을 리 
     없죠. 도리어 이런 '소년 탐정'을 가지고 재미를 본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 
     
     에드워드 스트레이트마이어라는 이름은 추리 문학계에 전혀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꽤 재미있는 존재이자, 
     이후의 추리문학계, 심지어는 대중문화계 전반에 대단한 영
     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정말 재
     미있는 것은 실제 미국인들조차 에드워드 스트레이트마이어
     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스트레이트마이어는 1890년부터 소년독자들을 위
     한  연재물이나 펄프 픽션을 쓰던 싸구려 작가입니다. 대단
     한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독창적인 이야기꾼도 아니
     었죠.  여느 펄프픽션 작가들처럼 대중문화와 유행, 그리고 
     독자들의 유행에 민감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1905년에 이루어집니다. 그는 스
     트레이트마이어  신디케이트라는 회사를 세우고, 직접 책을 
     쓰는 대신 수많은 유령작가들을 고용해서 자기가 만들어 낸 
     간단한  줄거리에 맞추어 대신 소설을 쓰게 시켰습니다. 그
     는  작가한테서  받은 원고를 자기 식으로 편집해서 다양한 
     필명들로  출판했고,  대신 작가들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원고료를 일시불로 지급 받았구요.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하디 보이스, 예, 일
     명 <용감한 형제>와 <낸시 드류> 시리즈입니다.
     
     #. 
     
     천재적인  작가이진 않았지만, 천재적인 장사꾼이었던 스트
     레이트 마이어는 1926년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을 했습
     니다. 당시에 문학계에는 추리소설이 한참 유행이었거든요. 
     어른들이  좋아한다면 아이들에게도 추리소설을 유행시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겠죠. 거기에 아주 아주 비즈니스적
     인 아이디어를 덧붙인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추리소설이라면, 당연히 눈높이를 맞추어 소
     년 소녀 탐정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 말이죠. 
     
     #. 
     
     <용감한  형제>의  아이디어는 전형적인 소년용 모험물입니
     다.  아버지를 탐정으로 둔 두 형제가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사건에  휩쓸리고 그 사건을 놀라운 추리력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프랭클린 딕슨이란 필명을 사용해서 발표된 
     이 소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읽은 것도 국
     민학교 때 한 출판사에서 아이들을 꼬시기 위해 '탐정 무전
     기'와  '탐정  쌍안경'을 사은품으로 내놓은 <용감한 형제> 
     시리즈  10권 세트였죠. (10권에 25,000원이었는데 당시 그
     걸 사기 위해서 부모님을 석 달 동안 졸라댔던 기억이 납니
     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KBS에서는 <용감한 형제>의 TV드라
     마를 함께 방영했습니다. 후에 <베이워치>에 출연하게 되는 
     파커  스티븐슨이 프랭크 역할로, 그리고 레이프 가렛과 함
     께  80년대의 청춘스타였던 꽃미남 가수 겸 배우 숀 캐시디
     가  조  역할로  출연했었죠.  재미있게도  제가  "Surfin' 
     U.S.A"를  처음 들었던 건 비치보이스가 아니라 <용감한 형
     제>에서  숀 캐시디가 시청자 서비스로 부르는 노래 때문이
     었습니다. (전 그때 숀 캐시디가 가수인 줄도 모르고 "조는 
     추리만  잘하는 게 아니라 노래도 엄청 잘 해!"라고 감동했
     었죠)
     
     <용감한 형제>가 성공을 거두자 에드워드 스트레이트마이어
     는 틴에이지 걸들을 위해서도 비슷한 캐릭터를 하나 만들었
     는데, 그녀가 바로 낸시 드류입니다. 역시 범죄에 휩쓸리기 
     쉬운  변호사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귀여운 10대 소녀 탐정
     이죠. 역시 별로 독창적이지 못한 캐릭터이긴 합니다만, 낸
     시  드류는 소녀 탐정의 대명사일 뿐더러 나름 초기 페미니
     스트들의 연구과제로도 각광을 받았었죠. 그녀가 가장 최근
     에 등장하는 극장판 영화는 2007년에 제작되었고, 인터넷을 
     뒤지면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재미있는 편은 아
     닙니다.  엠마 로버츠는 예쁘긴 합니다만 18살 치고는 너무 
     어려보이는데 화장은 또 진하더군요. 
     
     #.
     
     에드워드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유산은 크게 두 가지 부분에
     서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커다란 방향은 현
     재 헐리우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스트레이트마이어 
     의  '스토리의 공장식 생산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이구요. (이것이 이현세나 박봉성, 김성모의 유산이 아니라
     는 점에 놀라시는 분은 없겠죠? 그래도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작품은 박봉성 씨처럼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도 나오진 않았
     답니다) 
     
     다른  하나는 이후 수많은 '소년탐정'들의 출현을 가져왔다
     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매거크 탐정단> 시리즈 같
     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그리고 이런 류의 소년탐정물의 전
     통이  최근  추리물의 전통이 깊은 일본에서 꽃피우고 있는 
     것이 바로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와 <명탐정 코난> 시리즈
     인 것이죠. 
     
     #. 
     
     대부분의 독자들이 남학생들로 이루어진 소년지에서 추리물
     을 연재하게 되면, 당연히 그들이 동일시 할 수 있는 '소년
     탐정'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김전일(사실은  긴다이치 하지메)과 명탐정 코난(혹은 쿠도 
     신이치)이라는  인물들이죠.  이들은 재미있게도 앞서 말한 
     '소년탐정'으로서의  특징과 장르 컨벤션을 지키면서, 동시
     에 자신만의 컨벤션을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일단 '소년탐정'의 캐릭터에는 '지적인 우수성'을 보증해줄
     만한 것들이 필요합니다. 이지도르는 파리의 수재들만이 다
     니는 학교의 기숙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많은 작가들
     은 그것보다 '혈연'에서 그 우수성의 증거를 많이 찾죠. 하
     디  보이스의  아버지가 명탐정이라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
     다. 쿠도 신이치의 아버지도 천재적인 추리 작가이죠. 하지
     만 무엇보다 크게 '먹어주는' 것은 바로 긴다이치 하지메의 
     경우입니다. 
     
     긴다이치 쿄우스케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작가 요코미조 세
     이지가 창조해낸, 일본의 국민탐정이라 불릴 정도의 유명한 
     등장인물입니다.  소년답지 않은 김전일의 천재적인 추리력
     은  "명탐정 쿄우스케의 손자이니까"라는 한 마디로 압축해 
     버릴  수 있을만큼 강력한 설정이죠. 이를테면 "루팡 3세는 
     아르센 뤼팽의 아들이다"와 같은 일본 만화 전통의 설정 말
     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마기 세이마루 일당이 이 
     설정을 아무 허락없이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쿄우스
     케  시리즈  중에는 손자는커녕 아들이 있다는 얘기도 없구
     요. <소년탐정 김전일>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실제 요코미
     조 세이지의 유족들과 법정공방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혈연관계로 소년탐정들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은  제법  효과적인 장치로 보입니다. 한참 감정이입하던 
     소년들이  "근데  나도 학교에서 꽤 공부를 잘하는 편인데, 
     왜 이렇게 추리능력이 떨어지지?"라는 물음이 들 때면 부모 
     탓을 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 
     
     반면  일본의 코믹스로 이러한 '소년탐정'의 전통이 이어지
     면서  한  가지 덧붙여진 것은 바로 '트릭'과 '알리바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사실 일본의 추리물들은 시리즈를 
     만들  때 트릭메이커를 따로 둘 정도로 트릭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인데, 이것이 소년탐정물에 덧씌워지면서 김전일의 
     경우처럼 '실제 세계에선 불가능하고 단순히 탐정이 풀어주
     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트릭
     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소년탐정물의 
     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실제 세계에서의 범죄는 복잡한 트릭같은 것이 필요없
     을  정도로  훨씬 단순합니다. 대신 좀 더 강력하고 추악할 
     뿐이죠. 이를테면 김전일 같은 천재 소년 탐정들이 100명이 
     있다한들  삼성 특검에서 과연 무엇을 밝혀 낼 수 있겠습니
     까?  트릭을 아무리 풀어봤자 권력과 금력으로 덮으면 끝인
     데요. 
     
     소년탐정들의  세계에서  범죄란 논리와 수수께끼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상대하는 범죄자는 뤼팽처
     럼 예의를 목숨처럼 챙기는 '괴도 신사'이거나 아니면 트릭
     과 알리바이를 깨뜨려 버리면 순순히 죄를 자백하는 천사표 
     범죄자들  뿐이죠.  적어도 강력한 운동화로 축구공을 차서 
     맞으면  기절할  정도의  비현실적인 약골들이거나 말이죠. 
     '예의와  상식이 파괴된' 하드보일드한 범죄세계에 필립 말
     로우나  샘 스페이드 대신 하디 보이스나 낸시 드류를 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금력과 권력과 배신과 음모가 추악하
     게  얽혀있는 범죄는 소년탐정들의 세계엔 존재하지 않습니
     다.  만약에 그렇다면 툭하면 잘난 척하며 사건에 끼어드는 
     김전일은  백 번도 넘게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쿠도 신이치
     는 약을 먹는 대신 권총을 머리에 맞았을 것이구요. 
     
     #. 
     
     물론 최근 라이언 존슨이란 친구가 <브릭>이란 영화를 만들
     면서 <말타의 매> 식의 누아르를 멋지게 하이스쿨 버전으로 
     번안하는  데 성공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소
     년탐정' 공식에 걸맞는 재치있는 유머들로 가득하죠. 
     
     #. 
     
     하지만 그런 예의와 상식이 지켜지는 한, 소년 탐정들은 셜
     록  홈즈나 아케치 경감에 뒤지지 않는, 진정한 명탐정들일 
     것입니다.  상식과 논리에 대해서는 소년 탐정이나 원로 탐
     정이나  별다른 차이를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선입견에 사
     로잡힌  닳고 닳은 수사관들보다 훨씬 더 명쾌한 추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소년 탐정들이 가지는 
     매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구요. 
     
     최근  "너희  같은 애들이 뭘 안다고 그래?"라는 말을 자주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논리와 상식은 
     명쾌한  소년의 눈에도 잘 보이는 것이라구요. 그리고 그것
     이 소년탐정들이 각광받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것
     이  소년들에게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래?"라고 말해야 할
     만한  문제라면, 그것은 그 문제가 논리와 상식에서 어긋난 
     비합리적이고 추악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소
     년탐정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
     가 나서는 방법 밖에 없죠. 그들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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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가
     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  굳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성장담이고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십대에 PC통
     신을 경험했고,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어쩌면 나
     는 익명의 인간과 인간이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친구와 연인
     으로  발전해갈  수 있음을 알게 된 첫 세대일지도 모른다. 
     온라인은  언제나 부당하게 폄하돼 왔다. 그것은 일회성의, 
     익명의, 무책임한 그리고 심지어는 부도덕한 공간으로 치부
     되었다.  뭐,  전혀 터무니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는 바로 그 '쓰레기' 위에서 자라
     났다.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논쟁을 벌였다. 
     
     - 김영하, <퀴즈쇼> 작가의 말 중에서
     
     #. 
     
     때로는  소설 본문보다 서문이나 작가의 말이 훨씬 더 멋진 
     소설이  있다. 이를테면 최인훈의 <화두>는 본문이 아닌 서
     문이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에 예문으로 나올 정도로, 본문
     보다 서문이 멋진 소설이다.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
     만  <화두>의 본문은 무척 지루하다) 김영하의 <퀴즈쇼>는? 
     본문도  멋지지만  '작가의 말'은 더더욱 멋지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PC통신이라는 공간을 통해 전화선으로 소통하
     던  인간들. <접속>이라는 영화로 주목 받았으되, 연애라는 
     작은  틀 안에 갇혀버림으로써 정작 그 소통의 중요성은 폄
     하되어  왔던 그 공간이 키운 아이들... 뒷표지에 적혀있는 
     "그들의 20대에 바치는 소설"이라는 말을 읽었을 때부터 이
     미 나는 감동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 
     
     많은  아이들이 <접속> 이후로, 자연스럽게 '여자를 꼬시는 
     공간'이나 '작업을 걸 수 있는 공간'으로 사이버 월드를 받
     아들여  왔지만,  정작 그 시대를 관통해 왔던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낯선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어려움
     을 겪고 내가 겉돌고 있을 때, 정작 나와 마음 통하는 이야
     기를 나눌 사람들은 파란색 채팅창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영화의 이야기를 하며, 때론 무라카미 
     하루키와  왕가위에 대해서 떠들고, 밤을 새우며 결국 서로
     에 대해 얼굴도 모르면서 나누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그
     러면서  언젠가는  저 아이와 커피숍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더 깊고 멋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꿈꾸던 환타지, 때
     론  밖에서 누군가에게 짜증나고 화가 나는 일을 당했을 때 
     전화비가 나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그 아이를 기다렸던 시간들...
     
     내 남은 평생을 지배할 안타까운 첫사랑을 PC통신에서 만났
     고,  아직도 고맙고 미안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첫번째 연인
     도  PC통신에서 만난 사람으로서, 느끼는 첫번째 감동은 김
     영하라는 작가가 얼마나 '그 시대의 우리들'에 대해서 정확
     히 알고 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 
     
     김영하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미장센에 있어서 의외의 예리
     함을  갖춘 작가이다. 이를테면 비행청소년들을 그린 <비상
     구>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도로를 질주
     할  때 그들의 카스테레오에선 젝스키스의 <기사도>가 흘러
     나온다.  문단의 누구도, 그 어떤 평론가도 그 점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지만 김영하의 예리한 감각이 가장 빛나는 곳이 
     바로  그러한 지점이다. "폭주 뛸 때는 누가 뭐래도 젝스키
     스,  <로드파이터>는 너무 직접적이고(사실 소설 발표 당시 
     미발매곡), <폼생폼사>는 조금 가볍지, 역시 <기사도>가 가
     장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젝스키스
     의  <기사도>  때문에 평가를 받는 작가는 흔치 않지만, 난 
     그 점 때문에 김영하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시대의 공기를 감각적으로 파악해 내는 작가"라
     고. 
     
     <퀴즈쇼>  역시 당시 시대의 공기와, 무엇보다 당시에 꿈꾸
     던 청춘들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묘사한 장면과 문장들로 가
     득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대해 한석주 군과 휴대폰 배터리
     가 닳도록 얘기를 나눌 때 지적한 것처럼(서른 하나 평생에 
     남자랑 통화하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본 건 처음이다) '벽 
     속의 요정'이란(물론 대화명이다) 인물 자체가 90년대에 파
     란 화면을 보며 PC통신으로 소통하던 세대의 가장 광범위한 
     판타지이다. 재치있는 말솜씨(정확히는 채팅솜씨)와 얕지만 
     광범위한  교양(퀴즈방으로 대변되는), 그리고 우리가 항상 
     채팅의  상대를  대상으로 꿈꾸어왔던 남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일반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나 (유독) 우리의 눈에만 
     보이는 귀여움과 미모. 
     
     그리고 무엇보다.
     
     #. 
     
     "저는 얼마 전까지 태어난 곳에서 쭈욱 살아왔거든요. 그래
     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요.  그런데 아니더라구요. 다시 반복되는 것은 없는 것 같
     아요.  퀴즈방에서  처음 지원 씨 만났을 때 정말 좋았거든
     요. 그런데 그 느낌, 그 감정은 다시 되살안 날 수 없는 거
     잖아요. 벌써 지나가버린 거죠. 오늘도 이대로 지나가 버리
     면 영원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거에요."
     
     - 김영하, <퀴즈쇼>
     
     #.
     
     라는 말에,
     
     #. 
      
     "우리 말 놓을까요?"
     
     "왜 갑자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민수 씨가 한 말을 반 말로 다시 듣고 싶어서
     요."
     
     - 김영하, <퀴즈쇼>
     
     #.
     
     라고 말해주는 여자. 
     
     #. 
     
     채팅의  위대함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대화가 무의미
     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조용히 파란 화면 위
     로 스크롤 되어 올라간다는 것이고, 그것이 더더욱 좋은 점
     은  육성으로  들으면 유치하고 낯 부끄러울 이야기도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아아, 나는 이 
     뛰는 가슴과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너에게 타이핑하여 전달
     해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했고, 그 말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오래동안 너를 기다렸으며, 자연스럽게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돌려가며 꺼내야 
     했었던가. 가까스로 꺼낸 나의 수줍은 고백에 땀 흘리는 이
     모티콘으로 답하는 너와 점점 위쪽으로 스크롤 되어 올라가
     는 내 고백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 위에 너의 찡그린 얼굴
     을 겹치던 스무 살 무렵의 시간들... 사진과 이미지도 없고 
     동영상도 없고, 음성채팅과 화상캠도 없었으되, 훨씬 더 진
     솔했고 가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시절. 
     
     #. 
     
     고백하자면 현실은 김영하의 <퀴즈쇼>와는 많이 달랐다. 내
     가  진심을 털어놓고 고백한다고, 그것을 반대편의 저 아이
     가 꼭 진지하게 받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 그냥 
     저 파란 화면은 일상에서 벗어나 잠깐씩 들리는 놀이공간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어렵게 이야기한 나의 속사정은 스카
     이러브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나눈 시시한 농담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파란 화면이 구원이라 믿었고, 현실에 
     오고 가는 저 무표정한 인간보다 그녀가 타이핑한 이모티콘
     이  훨씬 더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이모티콘이란 결
     국 부호의 조합일 뿐임을 인정해야 했으니까. 
     
     #.
     
     하지만,  아아  -  김영하는 어쩌면 우리를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그는 우리가 꿈꾸었던 모든 것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보여준다. 우리를 이해해주는 파란 화면 속의 귀엽고 
     어여쁘고  (심지어는) 부유한 연인, 우리의 무용한 퀴즈 지
     식들이  유용을 거쳐, 무협지적 경쟁의 중요한 무공으로 취
     급되는 세계까지. 현실에선 가져보지 못했지만, 그 모든 것
     이 이루어진 <퀴즈쇼>의 세계는 90년대의 PC통신과 파란 화
     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매혹의 공간이
     다.
     
     #. 
     
     무턱대고  자신을  열어젖히고, 너도 열어달라고 떼를 쓰던 
     소년에게 현실의 자신의 연인을 밝히던 여자는 이렇게 말했
     었다;
     
     "그 사람을 만난 것도 널 만난 것보다 나중이었고, 그 사람
     보다 네가 나를 더 잘 알 거야."

 

     
     그  이후에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기억 
     못하는  것일지도. 어쨌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파란
     화면 위에 우리가 나눠왔던 이야기는 그냥 심심풀이였을까. 
     그건 그냥 나우누리 서버 어딘가에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소
     모품이었을까.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을  털어놓고는, 그것은 그냥 아무 의미도 아니었다고 이야
     기하는 사람에게 대꾸하는 법을, 그때 난 배우지 못했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김영하의 <퀴즈쇼>에는 그런 
     일 따윈 없다. 원래 그때 내가 알았고, 꿈꾸던 세상은 김영
     하의  <퀴즈쇼>같아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난  활자  속에서 그때 내가 꿈꾸었던 세상을 본다. 그래서 
     결국, <퀴즈쇼>는 일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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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린다 1
히무로 사에코 지음, 김완 옮김 / 길찾기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
     
     해피 엔딩 영원히 간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
     
     아주 어릴 적부터 옛날 얘기 읽다
     고개 갸우뚱 했었지
     
     그 이후로 그들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단 마지막
     
     신데렐라 결혼 일 년만에 성격 차이로 헤어져
     평생 혼자 살았을지도 몰라
     
     시비 걸자는 건 아니지만 혹시 둘이 만난 것이
     일생 후회되는 일일지도 몰라
     
     삶은 길고 그렇게 쉽지도 않고
     언제나 또 다른 반전
     
     - 이적, <해피 엔딩>
     
     #.
     
     "도쿄에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욕조에서 
     자는 사람이야."
     
     화려한  조명으로  밤에 찬란하게 빛나던 코오치 성(城), 그리고 
     수많은 멜로드라마에서 계속해서 인용되었던 지하철 역에서의 애
     절한 재회와 리카코의 허리숙인 인사를 마지막 장면으로, 지브리
     에서  제작한 72분 짜리 애니메이션은 끝났다. 그리고 나를 비롯
     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무라 사에코가 쓴 두 권 짜리 소설 <바다가 들린다>는 
     그것과는 좀 많이 다른 이야기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소년기
     의  아련한 추억과 첫사랑의 재회, 그리고 오랫동안 감춰왔던 진
     심과  새로운 로맨스의 시작을 알리며 마무리 한다. 하지만 히무
     라  사에코의 소설은 잊지 않는다. 친구와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
     는  이유로 자신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여자에게 외려 무심하
     게  대하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했었던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소년
     이 대학에 진학하고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아직 성장하거나 자
     라지  않았음을, 아버지의 불륜에 대해 "엄마가 갑갑하다고 생각
     했어.  그냥 좀 참으면 될 걸, 괜히 일을 크게 만든다고"라고 중
     얼대고,  필요할  때마다 남자 아이를 곤란하게 만들던 이기적인 
     소녀는, 거절할 줄 모르고 여자에게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소년
     을  끝까지 이용하며 힘들게 할 것임을. 삶은 길고, 그렇게 쉽지
     도  않고, 영화처럼 그 순간의 해피 엔딩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
     
     "이건 새로운 사실이었다. 난 여자애들은 원하는 걸 정확하게 알
     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모든 걸 알고 계획이 있다고... 
     그런데 그들도 몰랐나 보다. 어쩌면 우리만큼 혼란스러웠는지 모
     른다."
     
     - [Wonder Years] Season 2. Episode 5
     
     #. 
     
     그래, 원래 소년기의 감정이란 혼란스러운 것이다. 소녀여, 우리
     들은  그랬다.  하얀 피부와 너의 싱그러움을 동경하면서도 외려 
     낯설다는  이유로 피하려 했었고,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너에 대
     한 애틋한 감정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넌 내 친구
     가 마음에 두었다는 이유로 피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너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피
     하고 싶어했다. 
     
     소년들은  그렇다. 모든 것이 두렵고, 알 수 없는 일들은 미뤄두
     고  싶어하며, 확신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행
     동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너희들은 빠르게 변해간
     다. 어쩌면 바다 건너의 소녀들도 내가 만나고 겪은 이들과 조금
     도  다르지 않은지. 우린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너희들에게 
     다가갈 수 없이 "그저 의논상대로 고착되어버린" 사람이 된 적도 
     있고, "부르면 달려오는 남자"로 취급받은 적도 있다. 심지어는 
     
     기가 죽어있는 모습보다 째려보는 것이 리카코 답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을만큼 너희에게 조련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너희는 끊임없이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혼돈스러웠다. 그래, 우린 너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고 믿었었지만, 너희 역시 혼돈스러웠을지도 모른다.
     
     #.
     
     그래서  그랬겠지. 나와, 대학의 선배와, 그리고 그 유부남 사이
     를 왔다갔다 하는 것도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서였겠지. 그러면서
     도  끊임없이 어른인 척 나에게는 충고하길 원했겠지. 그렇게 너
     는  그  남자와 그 가족에게 상처받고, 그 선배는 너에게 상처받
     고, 나는 또 다른 이에게 상처받고...
     
     차라리  다행인 것은, 그런 상처가 문제라면 아직까지 내가 너에
     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남아있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살의 
     소년에겐  청춘과 열정만은 남아돌 정도로 충분히 남아 있고, 우
     린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어떠한 보답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네가  부를 때마다 달려가곤 했었다. 때로는 우리의 진실한 친구 
     중 한 명이 
     
     "여자한테  부르면 오는 남자로 찍히면 남자 쪽이 지는 거야. 난 
     고등학교 때 진 이후로 아직도 만회 못 했다니까."
     
     라고 충고해 주어도 말이다. 모리타키는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
     던가. 
     
     "응,  부르면  달려오는 만만한 남자라고 생각한데도 말야. 이럴 
     때 내게 기대줘서 기뻤어."
     
     라고.
     
     #. 
     
     그 혼돈스러운 날들, 우리에겐 충분히 낭비할 수 있는 젊음과 청
     춘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너에게 바친 그 날들의 댓가로 아무 것
     도  돌려받지 못했음이 한스럽지만 - 부탁인데 그날의 추억이니, 
     하는 개소리는 하지 말도록. 네가 필요한 것은 도쿄에 갈 여행자
     금을 빌리는 것 뿐이었지 않았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그 
     청춘은 낭비될 것 뿐이었다면, 욕할 수 있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
     야기 몇 개 쯤은 확실하게 얻을 수 있었지. 내 평생 기타를 잡고 
     노래를 만들 몇 가지 사연과. 
     
     히무로  사에코의  소설에서 리카코는 "보고 싶은 사람이 도쿄에 
     있는데  그 남자는 욕조에서 자는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기억하지조차 못했다. 그녀에게 그저 모
     리사키는 "부르면 오는 만만한 남자"였을 뿐이고, 모리사키는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오가며 그런 병신짓을 하는 혼
     돈스러운 소년일 뿐이었다. 
     
     삶은  길고,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처럼 쉽지도 않았다. 그리고 확
     실한  해피엔딩도 없다. 리카코와 여전히 데이트를 하지만, 리카
     코는  여전히 상처받은 소녀 노릇을 하며 이기적으로 모리사키를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해내는 순간, 모리사키는 
     필요없게  되고 그녀는 다시 영악한 여자로 변해갈 것이다. 지브
     리의  애니메이션은  딱 좋은 곳에서 끝났다. 하지만 모리사키와 
     리카코의 삶은 계속 된다. 소설이 끝난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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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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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심장을 쏴라]나 [7년의 밤]을 아직 읽지 못했다. 그러므로, [28]은 내가 처음 읽는 정유정의 소설인 셈이다. 사실 읽기 전에 꽤 기대가 많았다. 그녀의 전작인 [7년의 밤]은 천명관의 [고래]와 함께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꼽은 '2000년대 가장 재미있는 소설' 중 한 편이었다. 그리고 [28]은 [7년의 밤]을 쓴 그녀가 또 한 번 수 년간의 준비기간을 통해 내놓은 신작이었고,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재난소설'이기도 했다. 전작인 [7년의 밤]에서도 보여준(그러나 역시 난 아직 보지못한)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절묘하게 줄타기 하는 솜씨와, 동시에 수없이 많은 퇴고를 거쳐 치밀하게 엮어놓은 구성과 정밀하게 가다듬은 문장들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처음 독서를 시작하고 느낀 것은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문장을 가다듬고 가다듬어서 수식어가 최대한 절제되어 있고 문장들이 건조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건 코맥 맥카시나 데니스 루헤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염병이 시작되고 사건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는 초반에 비해 훨씬 잘 읽히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드는 느낌은 문장과 문장 간의 '점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글들이 읽다. 점도가 높아 끈적끈적대는 문장.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늘어진 엿가락처럼, 더럽게 표현하자면 늘어진 가래침처럼 끈덕이며 붙어 있어, 한 문장을 읽고 나면 끊지 못하고 다음 문장, 다음 문장을, 또 다음 문단, 다음 문단을 계속해서 읽게 된다. 그런데 정유정의 문장은 그런 끈적임이 거의 없다. 너무 정제하고 정제해서 맑아지기는 했는데, 그러다보니 맛조차 없어져서 목넘김 없이 넘기게 되는 물맛이랄까. 

아, 물론 익히 들어온 바와 같이 이게 구상과 자료조사에 대단한 노력을 들였다는 것은 알겠다. 실제 소설을 읽어보면, 사실 자료조사에 쓰인 데이터들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수끼리는 아는 법이니까. 정유정은 자신이 만들어 낸 '화양'이라는 가상도시를 완벽하게 틀어쥐고 그 안에 지옥도를 펼쳐 놓는다. 조사한 자료들을 따옴표 없이 직접 인용하면서 난 체 하는 것은 사실 하수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 지옥도를 묘사하기까지 몇 번이고 많은 밑그림을 그리고 지웠는지는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인물간의 관계들도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고심해서 만들어 냈는지도 알겠다. 아마 [28]을 쓰는 그녀의 방의 벽은 포스트잇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어 낸 관계들의 끝은 그닥 정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인간성의 밑바닥을 긁어내는 듯한 지옥도라는 상황에 던져진 탓인지 정유정의 인물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활동이나 최후도 그닥 임팩트 있지 않고, 보살펴주던 개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수의사의 모습도 그닥 숭고해 보이지 않으며, 한 때는 적이었다가 연인이 된 남자의 마지막을 보는 여자의 슬픔도 그닥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고 있는 '대학살'의 밤도 그닥 마찬가지다. 정제되어 건조한 문장으로 묘사하는 그런 모습들엔 뭔가 있어야 할 점도가 빠져 있다. 

뜬금없이, 얼마 전 읽었던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가 생각났다. [종말의 바보]는 미국의 대통령이 '8년 후에 지구에 거대한 소행성이 떨어져서 지구가 멸망합니다'라는 뉴스를 전한 뒤 5년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엔 혼란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내 자리를 잡고 저마다 자신들의 일상을 소소하게 지켜내면서 3년 후의 종말을 기다린다. 집나간 딸과 화해를 하고,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빌려보고, 때론 종말을 함께 할 남자친구를 찾아보기도 하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아무리 그래도 종말이 3년 후인데!) 참 일본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종말이 다가오면 대형수퍼마켓을 약탈하고, 모터사이클을 탄 스킨헤드가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미국적이라면 [종말의 바보]는 일본적인 이야기가 아니겠느냐고. 

근데 솔직히 [28]이 보여주는 지옥도는 한국적인 종말의 이야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김이환의 [절망의 구]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적인 정서보다는 뭔가 더 유니버설한 컨벤션에 기대고 있는 느낌이랄까. 

사실 [28]은 건조한 문체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영미권의 장르문학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동해'의 존재가 그러한데, '동해'는 (나름 어린 시절의 학대를 이유로 제시하긴 하지만) 서양의 스릴러 소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상으로 보인다. 또한 이 소설의 어느 누구도 '한국적인 정서'의 이유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설사 한국적인 정서라고 해도 그것은 '타워' 등의 재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차원적인 모티프에 한정되어 있다. 

나는 [28]이 한국문단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르겠다. 다만 종종 느끼는 점인데, 순수문학계에 있는 작가가 장르적인 소설을 썼을 때, 그 장르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평가하려는 분위기가 나는 못내 신경쓰인다. [28]은, 그냥 평범한 장르소설이다. 전염병을 다룬 재난 소설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그런 장르적인 기능 하에서 작동한다. 물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카뮈의 [페스트]나 코넬료의 [눈 먼자들의 도시]도 장르소설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면 대답하겠다. 이 안의 인물들은 장르적인 기능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그 와중에 정유정은 (내가 들었던 그녀의 명성과는 달리) 잘 짜인 장르소설을 만드는 것에는 많이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인물들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하기도 하고, 때론 너무 멍청하게 행동하며, 때론 너무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자신에게 걸맞은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채. 그리고 죽어야할 타이밍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악마가 되어야 할 박동해는 너무 빨리 죽고, 한기준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 헤맨다. 김윤주는 필요에 따라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고, 이는 나수진도 마찬가지다)

장르적으로 실패하면 보통 순수문학 작가는 이제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도망쳐 비평적 실패를 보충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28]은 그냥 장르소설이다. 장르의 실패는 깨끗하게 장르 내에서 인정하는 것이 옳다. 

난 아직 [7년의 밤]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명성은 익히 들었다. 그녀가 써낸 [7년의 밤]이라는 스릴러는 부디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도망칠 필요없는 진짜 장르문학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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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cool 2013-09-0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7년의 밤'을 읽기 전에 써놨던 글이며, 지금은 '7년의 밤'을 읽은 후입니다. '7년의 밤'은 두말할 필요없는 수작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에 짧게 쓴 바 있으나, 정식 리뷰로 등록하기에는 너무 짧은 글이라 이곳에선 생략합니다.
 
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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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꾸준히 사고, 또 읽는 사람이라면 대충 깨닫고 있을 것이다. 책의 띠지나 뒷표지에 적힌 출판사 관계자의 과장된 문구는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는 것을. 책의 띠지만 보면, 출판되는 모든 책은 내 삶의 폐부를 찌르는 엄청난 깨달음을 담고 있거나,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흥미진진한 내용들만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세상엔 띠지의 휘황찬란한 찬사를 감당할 수 있는 책보다 그러지 못한 책이 훨씬 더 많다. 

  쉽게 예를 들자면 - 죄송하지만 -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같은 경우, 작가가 3년 동안 300권의 논문을 조사하며 내놓은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를 사용했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솔직한 심정은 '이딴 걸 쓰는 데 3년이나 걸렸다면, 웬만하면 작가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시는 게..' 였다. 
 
   각설하고.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의 뒷표지를 보면 '집필기간 10년! 치밀한 구성과 압도적인 스토리 텔링으로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 걸작'이라는 홍보문구가 달려있다. 책을 다 읽고 난 이후, 지금 생각해보면 요코야마 히데오에겐 참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지만, 그땐 제일 먼저 이응준의 저 소설에 당한 사기가 생각났었다. "선수끼리 왜 이래, 추리소설 한 편을 10년 동안 썼다고? 이봐 히가시노 게이고는 1년에 10권도 쓰더라." 이런 생각도 했었고. 그렇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은 조금 호들갑스러운 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근래 보기 드문 경찰소설(추리소설이 아니다)의 걸작이고, 이 정도의 소설이라면 충분히 10년 정도의 시간을 성실하게 집필에 할애하면 써야 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성실하게 잘 쓰여졌을 뿐더러, 독자를 완벽하게 거머쥐고 가는 소설이다. 

  아무래도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룬 추리소설이라면, 그 첫머리에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FBI라는 연방수사국을 제외하면, 각 경찰조직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조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무래도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를 에드 멕베인의 소설에 비견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적어도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접근한다는 지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둘을 완전히 다른 소설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특한 일본의 경찰조직이다. 

  '춤추는 대수사선', '파트너', '케이조쿠'를 비롯한, 일본의 수많은 경찰 추리드라마를 즐기는 이에게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캐리어'라는 단어인데, 이는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시험 1종 합격자 중 경찰직에 배속되어 경부보로 임명된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그들은 고속승진이 보장되고 진급에 제약이 없는 위치로, 보통 도쿄대 법학부 같은 명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현장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이나 현실을 모르고 범죄수사보다 자신의 출세에만 눈이 먼 관료 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젊은 나이에 높은 계급에 오르면서 지휘권을 가지지만, 동시에 현장경험이 많고 계급은 낮은 논캐리어들과 많은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 역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고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그렇게 그려진다) 

  잠깐. 다시 뒷표지 이야기로 돌아가자. 

  검은숲의 편집자가 정리한 뒷표지의 줄거리는 이렇게 쓰여있다; "14년 전 미제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일명 '64'.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시효만료 1년을 앞둔 지금 사건을 마무리하겠다고 나서지만 유족은 청장의 방문을 거절한다. 경찰 홍보실의 미카미는 유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64'의 담당형사들을 찾아가고, 사건 후 퇴직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된 동료를 보면서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던 중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 소개를 보면, 이 줄거리 소개가 얼마나 큰 트릭인지 깨달을 것이다. 거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쓰인 텍스트 트릭에 버금갈 정도의 완벽한 트릭이다. 왜 그러냐면.

  일단 줄거리만 보면, 독자는 당연히 '64'가 14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두 개의 유괴사건의 범인을 잡는 추리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두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만, 추리물의 방식은 아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그 두 유괴사건은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689페이지에서 끝난다. 초반에 주인공이자 화자 역할을 하는 미카미의 이야기가 세팅되고, 14년 전 벌어진 유괴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80페이지 언저리에서 나온다. 자 이제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에 대해 사람들이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은 300페이지 근처에 가서 밝혀진다.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바로 벌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벌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아서 범인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정리된다. 심지어 탐정의 추리도,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거의 없다! 

  그럼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두 개의 유괴사건 없이 이 책의 남은 내용 - 그러니까 64가 첫 소개되는 80페이지부터 두 번째 모방 유괴사건이 일어나는 4백 페이지 넘는 공간 - 은 어떻게 채워진 것인가! 줄거리 소개에 담긴 내용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대한 분량을 어떻게 채웠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추리물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700페이지에 가까운 이 두꺼운 소설은 무슨 재미로 읽을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중간에 담겨진 내용은 두 개의 유괴 사건보다 훨씬 더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지방경찰서 내의 캐리어와 논캐리어 간의 갈등, 본청과 지방경찰 간의 조직에서 발생하는 갈등, 또한 경찰과 언론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경찰서를 배경으로 한 [하얀 거탑]을 만든다. [64] 내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유괴범과 두뇌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경무부와 형사부가 서로의 배에 칼을 하나씩 삼켜두고 두뇌싸움을 벌이고, 경찰 홍보부와 지방지 기자들이 음모와 배신으로 반목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엎치락 뒷치락 하는 사건의 전개는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형사부에서 밀려나 홍보부에 자리잡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미카미를 비롯한 홍보부의 인물들, 경무부의 간부들, 형사부의 형사들, 기자들까지 모든 캐릭터가 살아있고, 그들이 부딪치는 모습에 넋을 잃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64의 범인이 궁금하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요코야마 히데오는 64를 허투루 다르지는 않는다. 이 사건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64의 망령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캐리어 출신들은 64를 이용해 경찰서를 장악하려 하고, 반면 형사들은 64로 인해 발생한 커다란 함정에 버거워 하며 그들에 맞선다. 그렇게 인물들을 따라가며 독자 역시 허우적 대고 있노라면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끝내려고 하지?"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벌어지는데, 이쯤 되면 독자 역시 소설 내내 기자와 경무부와 형사부에 치이며 완전히 지쳐버린 미카미의 심정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미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이는데, 책은 200페이지가 채 남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끝내지? 어떻게 끝내지? 하며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고 나면 약간은 허무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결말과 만나게 되는데, 다소 그곳에서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뭐 그 정도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밌게 600페이지 이상을 읽고 난 후다. 

  다 읽고 난 후 뒷표지를 다시 본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이란 호들갑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니, 일본 전체 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릴 정도의 위대한 소설이 지구상에 존재하긴 할까. 뭐, '선수끼리' 그 정도의 과장은 접어주고 읽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소설을 쓰려면 성실하게 써도 10년 정도 걸릴 수 있다는 것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아마 다 써놓고도 두 번 정도 다시 썼을 것이다. 경찰조직과 주변의 인물과 사건을 묘사하는 데 들인 정성과 노력은 단 100페이지만 읽어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작가가 경찰생활을 따로 해본 것도 아니니, 모든 것은 취재와 조사의 결과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하게 잘 살아 있는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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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ple 2015-04-29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64를 모방한 사건은 대체 언제 일어나는 거지?!`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