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덕일 씨가 지난 1997년에 출간한 책으로서 일본의 식민사관으로 조선이 망할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당파싸움에 있었다는 무조건적인 비판시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위해 저술한 내용이다. 다른 방식으로 본다고 해서, 꼭 당파싸움이 좋았던 것이었다 가 아닌,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좋고 나쁨을 적절히 분석해보자는 취지이기도 하다.
시대는 조선 시대 선조부터 정조 사후까지를 서술하고 있으며, 붕당의 현실과 진행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이리저리 얽히고 설키었던 이야기들을 차례로 풀어놓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이미 우리들이 우연찮게 일단 부딪히며 경험했던 조선시대 당쟁 사회를 다룬 책들을 아우르는, 일종의 「개론서」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중기-후기 로 이어지는 당쟁에 대해 관심 있으며, 시대 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좋은 도움이 될 듯 싶다.
1. '반대만을 위한 반대' 만 있다.
저자는 당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임진왜란의 예를 들더라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서인은 임진왜란을 예측해냈고, 서인의 영수 (엄밀히 말하자면 아니지만,) 율곡 이이는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로 재직 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한편, 동인에서 북인(강경파)과 남인(온건파)으로 나뉘었을 시, 남인에는 서애 류성룡 등 조선 시대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재상들이 즐비해 임진왜란 전쟁 당시 행정적인 측면에서 국난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노력했으며 북인은 강경파답게 의병장 출신들이 많았고, 실제 전장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긍정적인 측면은 이렇지만 300여년이 넘는 조선 시대 당쟁은 부정적인 측면 또한 강했다.
이는 '반대만을 위한 반대' 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백년 간 조선을 괴롭히고, 결국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당쟁은 아주 하찮은 감정싸움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조전랑' 이라는 특수한 인사담당 직위를 두고 심의겸이 그 직위에 추천된 김효원을 적절치 못한 인사행정이다 라고 한 비판에서부터인데, 책을 보며 내내 현대 정치판의 모습이 머릿 속에 투영되는 느낌이었다. 아마 저자가 전하고 싶은 무언의 메세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나 율곡 이이는 조정의 화합과 중재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한 정치가였으나 그 또한 당쟁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도 경험하게 된다. 둘로 분열된 조선의 집권층은 성리학이라는 중국의 학문을 신성시여기며 실리보다는 명분에 강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명분 속에서 서로가 다르다는 아주 작은 차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둘로 분열된 그 집권층들은 서로가 서로를 또 다시 나누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정책 상의 이유로, 후계자의 선정 이유로, 정권이 교체되는 이유로, 소위 말 그대로 서로간의 암투로 인해 죽고 죽이는 것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다.
국익이 아니라, 당리당략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되는 모습을 책 속에서 무한정 보게 될 때의 슬픔이란!!
여기서 매우 흥미로웠던 사실은 당쟁의 주요원인. 서로가 죽이고 살리며 권력에 집착했던 이유 중의 하나를 저자 이덕일 선생님은 '토지' 로 꼽았다. 태조 이성계의 개국, 세조의 왕위찬탈, 그리고 중종반정 등을 통해 공신들에게는 많은 토지를 세습할 수 있도록 허가되는데, 이런 폐단은 특정 계층의 배만 불리우게 되고 실제 농민들은 소작농 내지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 때 실시된 직전법이나 성종 때 관직으로 인한 토지 세습 금지법을 내놓은 것은 이러한 폐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정치 이외에 농업, 상공업을 천시했던 양반 사대부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무조건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 뿐이었다. 한정된 자리에서 서로가 주어진 파이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것도 당쟁의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초기 소수였던 양반층이 시대를 거듭할수록, 여러 전쟁, 시대변화를 겪으며 그 수가 늘어나게 것도 당쟁을 치열하게 만든 하나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폐허가 되버려 경제적으로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옹립해야 한다며 당리당략, 명분만을 좇아 비밀리에 인목대비를 찾아가는 영의정 유영경의 모습 속에서.
그는 분명 당시 조선 시대 정치의 수장의 자리에 있었다.
저자 이덕일 선생님은 현 시대의 지지층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역사를 통해 보여주는 듯 싶다.
2.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가 없는 이상한 사회
조선시대에서 사대부는 특권층이었다. 게다가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군역이다. 물론 양반 사대부는 국가 부역에도 동원되지 않는 특권 계층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군역은 백성들이 진 납부의 의무 중에 가장 큰 부담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양반 사대부가 얻은 특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특혜가 주어지면 사람은 방탕해지고 해이해 지게 된다. 가장 많이 쥐고 있는 자가 가장 적게 내놓는 사회. 바로 당시 조선사회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실천되지 않는 사회의 반감이 극단적으로 폭발한 것은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감히 피난 중인 임금이 타신 어가를 멈춰 세우는 민중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자신들을 쥐어짜고, 자신들의 위에서 군림하던 이들 또한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아니, 더 구질구질한 년놈들이었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은 분노했다.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는 자가 결코 우리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피부로서 깨달은 순간이었다.
또한 율곡 이이가 두 당의 합당과 중재를 이루기 위해, 최초 붕당의 원인을 제공한 심의겸과 김효원의 외직을 청했을 때 선조는 그 방법이 옳다고 여겨 심의겸은 경기도 개성유수로, 김효원은 함경도 경흥부사로 파견보내지만, 동인들은 김효원의 함경도 경흥부사 파견에 대해, "경흥은 오랑캐 땅과 가까워서 선비가 기거할 곳이 아닙니다" 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 상소 내용에서 보더라도 당시 사대부들이 얼마나 특권 의식에 젖어 체면만을 내세웠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사대부들의 특권 의식은 대동법 정책 시 태도를 보면 더 확실해진다. 납부의 의무를 단일화해서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실시하려고 했던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실행되는데 100여년이나 걸렸다. 대동법이 당연히 효율적인 정책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바로 양반 사대부 지주층들의 단순한 반대 때문이었다.
어느 사회, 어느 문화에서나 가진 자는 더 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제적 신분제도 또한 존재하고 있다.
3.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선
군약신강. - 군주의 힘은 약하고 신하의 힘은 강하다. - 라는 뜻의 사자성어는 특히 조선 후기를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명분을 중요시 여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리더쉽이 약해져 간 이유를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최초 서자 출신의 조선 왕 선조’
선조는 최초 서자 출신 왕이었다. 후사가 없던 명종이 총애했던 조카였던 선조는 즉위 후 자신이 서얼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큰 콤플렉스를 가진다. 신하들이 자신의 아들 중 그것도 서자 중에서도 둘째 출신인 광해군을 지목하는 것에 정색했었던 왕이기도 하다. 또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광해군 대신, 전란 이후 얻은 어린 왕비로부터 얻은 적자. 영창대군에 눈이 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컴플렉스가 자신의 아들 영창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었다는 것. 그리고 당쟁을 더 이끌었다는 것, 저자 이덕일 선생님이 선조에 대해 '주관이 뚜렷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리더쉽의 케이스' 라고 사례를 드는 이유다.
출신이 좋지 않았던. 그리고 주관조차 뚜렷하지 않았던 군주 속에서 당쟁이 시작되었다.
‘권력을 약속받은 인조’
서인들에게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인조가 '선택된다'. 인조는 자신이 왕에 오르기 위해 사대부들에게 권력의 반을 내놓는 도박을 실시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도박이었다.
사실 서인들에게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 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선택에서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인조가 권력욕에 쿠데타를 일으킨 반정에 참여한 것이나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인해 자신의 재임기간 내내 치욕과 수치 속에서 세월을 보낸 점, 그리고 서인들과 결탁해 자신의 큰 아들 소현세자, 맏며느리 세자빈, 손자인 세손까지 죽여버린 점을 보면 얼마나 고집이 세고 권력에 눈이 멀었었는지 알게 된다.
인조와 서인은 결코 노선이 같지는 않았다. 인조는 단지 왕이 되기를 원했고, 서인들은 그런 인조를 이용해 정권을 다시 잡기만을 희망했다. 일종의 타협이었고, 자신들이 보는 노선에 교집합이 형성된 것 뿐이다. 인조반정과 인조의 27년의 재임기간으로 인해 서인들이 집권층으로 단단히 뿌리내리게 된다. 인조의 '인' 자가 어질 인(仁) 이라는 것 또한 참으로 역설적이다.
‘예측 못했던 절대군주(?)의 등장. 숙종’
인조가 행해놓은 사대부들의 권력이양 치세(?) 덕분에 효종과 그의 아들 현종은 사대부들과의 타협과 호통 속에서 스트레스를 꽤나 받게 된다. 이덕일 선생님의 또 다른 저서.『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만 보더라도 효종과 현종이 사대부들과의 힘겨루기. 더 정확히 말해서 명분싸움이라는 얼마나 소비적인 싸움만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효종의 아들 숙종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군주 스타일이었다. 그는 어쩌면 현대 시대의 박정희나 전두환 대통령과 같은 군주였을지도 모른다. 천성 자체가 강단이 있었고, 전혀 나약한 타입이 아니였다. 그는 또한 타고난 당쟁가였고 준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소위 싸이코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자시절, 송시열과 그 일파들이 자신의 아버지 현종과 벌이는 논쟁 속에서 "내가 후에 왕이 된다면 송시열이란 자를 죽이겠다." 라고 엄포를 놓을 만큼 담도 컸고, 그 파벌싸움 속에서 자신 스스로 느낀 바도 컸을 것이다. 또한 각종 환국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권층을 바꿔버리는 과단성도 보였다. 실제로 송시열을 귀향보내다가 마음이 바뀌어 귀향가는 도중에 사약을 내려 버리는 모습에서, 당쟁에 뼈가 굵은 사대부 사이에서도 숙종이라는 군주가 절대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다 라고 느낀바가 컸을 것이다.
어쩌면 선조 이후 조선시대 후기 왕들 중에서는 절대 왕권을 유지하며 자신의 왕권을 후회없이 휘두른 유일한 군주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숙종의 절대왕권 또한 각 당파끼리의 싸움을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아 당파 간의 갈등의 골은 더 커지게 된다.
‘개혁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을지도 모를 영조와 정조’
조선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와 그의 손자 정조는 시기를 빨리 타고 났어야 할 왕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당파싸움으로 인해 왕권이 약해진 상태에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더욱 현명하게 대처했을런지도 모른다.
사실 정조 이후, 한 가문의 세도정치로 들어가기 전까지 영.정조시대가 가장 당파싸움이 치열했고 왕권도 약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는 현명한 군주였다. 개인적으로는 영조가 자신의 왕권의 안위를 자신의 아들의 죽음과 맞바꾼 것이라고 보였고, 또 그것은 영조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보인다. 더 나은 조선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라고.
정조는 그런 시대 속에서 조선의 마지막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였다. 세자 시절 당쟁에 의해 죽을 고비를 세 차례나 넘기면서도 자신의 뜻을 피력시키기 위해 절대 강압적인 방법이 아닌 합리적인 군주의 표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정조가 조선시대 최대 전성기였다는 세종 시절에 태어났었다면 어떤 치세를 펼쳤을 지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