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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처럼
공선옥 외 지음 / 풀빛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총 8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진 책입니다. 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광주 민주화 항쟁을 조명해보고 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단순히 『한국현대사산책』의 서술적인 사실전개 형태 (물론 과격한 표현도 종종 보이지만,) 로만 접하는 것과 우리 주변 이웃의 이야기로 들어보는 것은 분명 느낌도 틀렸습니다.
당시 5.18 이라는 사건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던 진짜 피해자들의 입장과 그 진짜 피해자들의 주변 인물들, 그리고 가해자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제2의 피해자가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제2의 피해자는 진압 명령을 받았던 공수부대원들"
총 8편 중 2편의 소설. 『얼굴』, 『십오방 이야기』는 실제 5.18 당시 공수부대원 출신으로 시민 학살에 가담했던 인물들이 그 과격한 폭력성을 표출한 이후 얻게 된 정신적 수치심 속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단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위 두 소설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여지껏 우리들은 단순히 5.18 당시 실질적인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았지요. 하지만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고 '데모가담인물은 불순 분자이고 때려죽일 놈들이다' 라고 훈육받아야만 했던 군대 하부 계층 구조의 군인들 또한 당시 민간 시민들 학살로 인해 제2의 피해자의 입장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굴』에서 주인공은 일반병으로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된 후, 원치않은 군생활에 원치않은 진압작전에 투입되게 됩니다. 제대 후, 시작한 사회 생활에서도 주인공은 공수부대원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사회적 비난을 두려워하게 되고, 심지어 민주화 항쟁을 기록했던 당시 영상 자료는 모조리 구해다가 자신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는지 찾아보게 되고 이런 행동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됩니다.
『십오방 이야기』는 민주화 항쟁 당시 데모로 구속되 수감된 운동권 학생 출신 태원과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던 만수가 교도소 15번 방에 함께 투옥되어 전개되는 일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둘 사이의 갈등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없으나 시민군이었던 자신의 동생을 자신의 소대장이 쏴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마는 만수는 당시 광주 사태의 시민군에 대해 알수 없는 증오심을 가지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사랑하는 동생 만수를 시민군들의 모습에 투영시키며 그들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온전히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는 이유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던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모습 속에서 저는 일종의 '체념' 의 심리를 발견했습니다. 집권층과 반발하는 국민들 사이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형국인 진압군들의 입장에서는, 대신 처리하라고 등을 떠미는 상부의 모습과 건너편에 보이는 친구들과 동생, 형, 누나,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 사이에서 '될대로 되라' 식의 포기와 체념 끝에 극단적 폭력성을 보였을지도 모르니까요.
진압의 효율성을 위해 진압군들에게 술을 먹이고 나서 진압시켰다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기록을 보며, 집단적 최루 상태에 빠진 인간의 잔악성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번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도 집단적 최루 상태에서 깨어나고 나서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라고 느끼는 순간, 그들도 유악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그리고 실질적인 피해자 못지 않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런 부끄러움과 수치심 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애시당초 낫다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원치않게 진압작전에 투입되어 이후 큰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군인들은 오히려 실질적인 피해자들 못지 않게 그들도 가엾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은 군 생활을 경험합니다. 저 또한 군 생활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내가 당시 공수부대원이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투영시켜 봅니다. 상상하기 힘들겠지요. 시대의 피해자의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광주 민주화 항쟁의 역사는 덮여지지 않고 끊임없이 진실 추구와 다양한 시각에서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당시 가해자의 입장에서 제2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또한 피해자의 측면에서 재평가 될 여지는 남겨놓는 것이 어떨까요?
"극단적인 폭력성은 너와 나를 구분 지으려고 한다."
책 끝부분 해설에 보면 광주 문제를 '상관있는 놈' 과 '끊이 맺어진 상관 없는 놈' 으로 구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은 언제나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고 우리 안의 범주에 들지 않으리라는 생각 또한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경험한 극단적 폭력성, 잔학성, 대량 학살 등을 통해 개인적인 내면세계가 황폐화되고 파괴되어버리는 이야기를 소설 8편을 통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영혼』에서는 민주화 항쟁 당시 군인들의 살육을 멈추게 하려다 구타 당해 청력을 잃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모습을 잃지 않는 장인하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무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10대 소녀의 입장에서 그 소녀의 영혼이 황폐화되어 버리는 내용을 묘사한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그리고 자신 때문에 친구가 진압 군인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고 자책하고 끝내 정신병원에 입원해버린 한 친구를 바라보는 다른 친구들의 감정을 묘사한 『봄날』, 진압 마지막날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이유로 전남도청을 신부님과 함께 빠져나온 요셉의 자책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 『밤길』이 또한 그것입니다.
이렇게 광주 민주화 항쟁과 무자비한 진압은 당시 죽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친족들, 그리고 그 주변의 흔히 우리가 '관계' 라는 이름으로 부딪히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곧 우리이고, 우리가 곧 그들일 수 있습니다. 무자비한 탄압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들은 모두 남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그들의 일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지요. 그것이 지금도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해 이야기하기 힘든 부분일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험을 하고 난 이들은 어느 순간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당한 사람은 불쌍하고 가엾으나 어쨌든 그들 속에 나는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확인하고 선을 긋고 싶어합니다.
역사의 풍파 속에서 나는 언제나 비껴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크고 작은 비관적 사건들은 소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 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공감 능력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 우리의 일 말입니다.
자신만큼은 예외일 것이다 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예외인 일이 일어나게 되면 더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고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라는 생각에 더 큰 이유없는 분노심과 고통 이상의 고통을 스스로 수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가 아니라 '나라고 왜 예외일까' 라는 말처럼 그런 생각 속에서 살게 될 때 우리는 더 큰 개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공감능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