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중한 블록버스터급 작품이다. 산투스는 우리가 가장 깊이 자리 잡은 편견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도록’ 요청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아래로부터 바라보고, ‘보편성’을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미국 사회학자)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지음

안태환 · 양은미 · 박경은 옮김|536쪽|25,000원|신국판(152*225)

출간일 2025년 2월 25일|ISBN 979-11-89333-90-4 [93300]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사상사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

남의 인식론을 재조명하다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대표 저서인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선 정의』가 번역·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지식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남반구의 다양한 인식론을 복원하고자 한다. 또한, 사회적 부정의와 인식론적 억압의 문제를 깊이 탐구하며,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 저자 산투스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학자, 법학자, 비판이론가이다. 그는 서구 근대성이 유일한 보편적 진리를 제공한다는 믿음을 해체하며, 다양한 지역과 문화에서 축적된 지식을 재평가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인식론 살해(epistemicide)’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지식 체계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비서구적 지식과 문화를 배제하고 억압해 온 과정을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대안적 인식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책 전반에 걸친 핵심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산투스는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아득한 심연을 만든 근거는 바로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다. 특히 산투스는 환유적 이성과 예견적 이성이 심연을 만든 주범임을 폭로하고 있다. 이 책은 ‘인지적 부정의(cognitive injustice)’라는 개념을 탐구한다. 이는 전 세계인이 삶을 영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다양한 인식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현상을 의미한다. 전 지구적 사회적 부정의는 전 지구적 인지적 부정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은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를 위한 투쟁이기도 해야 한다.

산투스는 서구의 지배가 오랫동안 글로벌 사우스(남반구)의 기존 지식과 지혜를 철저히 주변화시켜 왔다고 말한다. 기존의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은 비서구권의 실천을 설명하지 못했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인식론적 다양성을 회복하고 존중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남의 인식론』은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형태의 세계시민주의를 제안한다. 이 서발턴적,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는 시장 중심적 탐욕과 개인주의의 논리를 넘어 공존, 연대, 그리고 생명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추구한다.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이자 지식인-행동가, 산투스

산투스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법학자, 비판적 이론가이다. 특히 인지적 정의/부정의와 글로벌 사우스의 인식론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투스는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비판하고, 남의 인식론(Epistemologies of the South) 개념을 제안한바, 프랑크푸르트학파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비판이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는 사회 운동, 탈식민주의 연구, 법과 민주주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투스는 사회학, 법학, 정치철학을 아우르는 연구를 해왔다.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산토스의 연구 분야를 넘나드는 통찰력은 실로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WSF)의 주요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활동하며, 신자유주의와 서구중심적 세계 질서에 맞서는 글로벌 대안 운동을 지지했다. 세계사회포럼은 2000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산투스는 최근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이 제시하고 있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 철학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룬다.

현재 포르투갈 코임브라 대학교(University of Coimbra)의 명예교수이며, 미국과 브라질을 포함한 여러 국제 대학에서도 연구 및 강의를 해왔다. 그는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중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과 이 책의 후속편인 『인지적 제국의 종말(The End of the Cognitive Empire)』이다. 이 책들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북의 인식론에 맞서는 남의 인식론

산투스는 이 책에서 세 가지 기본 전제를 제시한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

첫째, 산투스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정의한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고 한다. 서구 근대성의 논리는 모든 지식을 서구적 틀 안에서 해석하려 했지만, 세계에는 다양한 방식의 사고와 해석이 존재한다. 서구중심적 인식론은 전 지구적 사고의 일부에 불과하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cognitive justice)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도 존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서구 식민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결합하여 비서구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제해 왔으며, 이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사회적 평등과 해방이 불가능하다.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이 책은 서구 근대성이 유지되어 온 방식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산투스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institutionalized harmful li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서구가 민주주의, 법치, 인권 등의 개념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불평등과 억압을 유지해 온 방식을 분석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대량 소비를 강요하고, 법치라는 이름으로 불법적 약탈이 이루어지며,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강박적 소비를 조장하는 현실 등이다. 우리 현대 세계를 관통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이 만연해 있는 독특한 방식과 강도를 고려할 때, 부정의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억압의 극복 가능성은 오직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초점이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 이론을 서구중심 비판 전통과 가장 잘 구분 짓는 지점이다.

셋째, 그렇다면 프랑크푸르트학파 등 서구중심 비판 전통은, 우리 시대의 해방적 투쟁들을 설명해 내는 데 성공했는가? 산투스는 서구적 해방 담론이 여전히 부르주아적 사고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이제 해방적 변화는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의 문법과 각본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기존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예: 프랑크푸르트학파, 마르크스주의)은 비서구적 현실을 적절히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자신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적 사고와 사회적 부정의의 인지적 차원을 억누르는 동일한 인식론적 토대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서구적 이해와 변혁 전망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은 스스로를 대상을 함께 알아가고 이해하고 촉진하고 공유하고 나란히 걷는 것보다는, 대상에 대해 알고 설명하고 인도하는 데 있어 탁월한 전위 이론으로 여긴다. 산투스에 따르면, 이제 새로운 해방의 길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비서구적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산투스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남의 인식론’을 제안한다. 이는 단순히 서구중심적 사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아 온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지식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남의 인식론과 대안적 지식 체계:

부재의 사회학, 출현의 사회학, 상호문화적 번역

산투스가 본격적으로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그리기 위해, 먼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심연적 사고(abyssal thinking)’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서구중심의 인식론이 세계를 특정한 경계로 나누고, 그 경계 바깥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서구 사회는 법과 민주주의를 강조하지만, 서구의 식민지에서는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이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사회적 배제를 초래한다.

산투스는 기존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 상호문화적 번역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단일한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고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하는, 남의 인식론의 윤곽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부재의 사회학(Sociology of Absences)’은, 서구 근대성이 지식과 실천을 분류하고 관련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를 매기면서, 비서구의 가치관과 문화를 억압하여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출현의 사회학(Sociology of Emergences)’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안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다. 즉, 서구 근대성이 지나치게 미래를 강조하며 현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해 온 것에 반대하며, 현재를 확장하고 미래를 수축하여 현재에 보다 가깝게 만듦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전망 속에서 미래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그는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이 어떻게 지식의 생태학상호문화적 번역 둘 다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는지 탐색한다. 그는 지식의 생태학을 먼저 제안하는데, 이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이 상호번역될 수 있는 다원적이고 상호연결적인 방식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억압된 지식과 실천들을 재발견하고, 탈식민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서구의 일직선적 진보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그에 대한 비서구적 대안의 제시다. 바로 이것이 산투스가 글로벌 노스보다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산투스는 결론에 다가가면서 상호문화적 번역을 다루는데, 이는 서구중심적 일반이론들의 토대를 이루는 추상적 보편주의와 문화들 간의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관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서 구상하는 것이다.

지식인-행동가를 위한 비극적 낙관주의

이 책의 마지막에서 산투스는 ‘비극적 낙관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억압적 체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체제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적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더 나은 선택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 급진적 비판이론이 가진 지나친 낙관주의와 지나친 비관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산투스는 단순한 혁명적 사고를 넘어,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며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급진적 비관주의도 급진적 희망도 아닌, 비극적 낙관주의에 흠뻑 적셔져 있다. 어떤 것도 비억압적 대안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제거할 만큼 억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중 어떤 대안도 어떻게든 그 자신이 억압과 혼동되거나 뒤섞일 위험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거나 설득력 있지는 못하다.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노예 상태라면 굳이 노예라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자유라면 헌법과 인권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의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짐을 더 지기 쉽게 만들 방법을 반쯤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인간들의 조건이다.”(산투스, 서문 중에서)

산투스가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 의지와 비전을 버리지 않는 태도는 사뭇 인상적이다. 그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라는 말처럼, 진정한 변화와 그것을 위한 실천은 필연적으로 어렵고 희귀하다(미니페스토, 51쪽). 아울러, 우리의 특별한 적, 즉 우리가 맞서야 할 가장 강력한 적이 우리 안에 자리한 나태함과 무기력이라는 그의 지적이 주는 울림 또한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이 책은 서구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지식 체계를 탐색하고 싶은 연구자, 비서구적 지식과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모색하는 행동가, 그리고 인식론 살해와 인지적 부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산투스는 그들을 지식인-행동가로 불렀다. 그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산투스는 인식론적 살해, 심연적 선, 부재의 사회학, 출현의 사회학, 상호문화적 번역 등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그리는 다양한 방법론과 개념들을 제안한다.

책 형식의 파괴도 눈에 띈다. 이 책은 대위법 방식으로 제시된 서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대위란 좋은 삶/부엔 비비르(buen vivir)를 향한 상상된 매니페스토(manifesto)와, 모더니즘적 선언문들에 깔려 있는 장대한 목적에 도전하고자 명명된 미니페스토(minifesto) 사이의 대위를 말한다. 매니페스토는 산투스가 수년간 함께 활동해 온 다양한 사회 운동의 상상된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미니페스토는 저자 자신의 응답을 제시한다. 바로, 급진주의가 불가능한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의 한계를 강조한다. 이 대위법적 구조를 가장 잘 시각화하기 위해 매니페스토는 짝수 페이지에, 미니페스토는 홀수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다.

추천의 글

“이 책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중한 블록버스터급 작품이다. 산투스는 우리가 가장 깊이 자리 잡은 편견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도록’ 요청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아래로부터 바라보고, ‘보편성’을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미국 사회학자)

“북반구는 여전히 서구인가? 그리고 과거의 서구는 여전히 단순한 ‘북’일 뿐인가? 이것은 단순한 지정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적 질문이며, 실천, 학문, 경험, 정동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환경이 형성될 것이다. 이 책은 독창적이며 시의적절한 비판을 담고 있다. 산토스의 연구 분야를 넘나드는 통찰력은 실로 인상적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프랑스 철학자)

“『남반구의 인식론』은 오늘날 우리의 상호문화적, 초문화적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긴장에 대한 빛나는 증언이다.”

― 발렌틴 Y. 무딤베(듀크대학교 문학 교수)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세계 사회사상가 중 한 명인 산토스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거대한 지적 도전의 장으로 바라본다. 그는 호세 마르티의 사상을 따라, 이 시대가 ‘누에스트라 아메리카(Nuestra América)의 세기’이며, 이곳이 가장 강력한 ‘반란적, 대항헤게모니적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라고 본다.”

― 라켈 소사 엘리사가(사회학자, 역사학자, 활동가)

“이 책은 세계사회포럼을 ‘지식의 세계포럼’으로 확장한 것과 같다. 급진적 민주주의적 열정과 철학, 과학, 예술, 정치에 대한 방대한 학식을 바탕으로 논증된 저작이다.”

― 괴란 테르보른(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지은이 및 옮긴이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코임브라대학교(포르투갈)의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자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캠퍼스의 저명한 법학자이다. 또한 코임브라대학교의 사회연구센터 소장이며 세계화, 법사회학과 국가사회학, 인식론, 사회 운동, 세계사회포럼과 같은 주제에 관해 광범위한 집필 및 출판 활동을 해왔다. 지금까지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멕시코 과학기술상(2010), 법과사회학회의 칼벤 주니어 상(2011)을 받았다. 영어로 출간된 그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는 The Rise of the Global Left: the World Social Forum and Beyond(Zed Books, 2006)와 Law and Globalization from below: Towards a Cosmopolitan Legality(공동 편자: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 2005)가 있다.

옮긴이

안태환 2022년 11월에 갈무리 출판사에서 포르투갈의 사회학자인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Pensar el estado y la sociedad: desafios actuales)』을 번역했다. 이 책은 볼리비아의 급진적 변혁의 중요성을 원주민 운동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일반 공동 연구에 참여했고 페미니즘 운동단체인 《일다》, 《프레시안》, 《레디앙》 등에 기고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 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양은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의 HK연구교수이다. 저서로는 『아마존의 길』(공저), 『파울루 프레이리, 삶을 바꿔야 진짜 교육이야』(단독) 등이 있고, 역서로는 História de Dokdo: Uma Leitura Ecologista(공역)(원서: 『생태로 읽는 독도 이야기』, 국립생태원)가 있다.

박경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의 HK 연구교수이다. 역서로는 스페인어로 번역한 Hotel de gérmenes (『여기는 세균호텔』)이 있으며, 저서로는 『라틴아메리카 생태 위기와 부엔비비르』(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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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와 날머리] 정길수 교주본 『남원고사: 남원의 옛 노래 김춘향전』 서문과 해설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버전이 있습니다. 바로 『남원고사』입니다. 이번에 정길수(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남원고사』 교주본을 소개합니다. 단순히 「춘향전」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니라, 그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죠.

- 『남원고사』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남원고사』는 원래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책이 프랑스로 넘어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대에야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죠. 명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본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 『남원고사』 속 춘향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은 한없이 정숙하고, 도령을 향한 사랑 하나로 모든 시련을 견디는 인물로 그려지죠. 하지만 『남원고사』의 춘향은 조금 다릅니다. 도도하고 똑 부러지며, 상황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머리를 써서 해결하고, 필요하면 아양도 떨고, 때로는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죠. 기존의 조신한 여성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혜를 가진 춘향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 『남원고사』가 특별한 이유

『남원고사』는 「춘향전」 중에서도 가장 긴 이야기로, 무려 8만 5천 자에 달합니다. 다른 판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죠. 이 책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몽룡과 김춘향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모습도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남원고사』는 인간의 본성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 사랑의 계약 문서, 훼손된 사랑일까?

『남원고사』에서 가장 독특한 설정 중 하나는 바로 '불망기(不忘記)'입니다. 쉽게 말해, 춘향이 이도령에게 사랑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써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죠. 사랑이라는 게 보통 순수한 감정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원고사』에서는 사랑도 일종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증명할 문서가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이 설정은 현대적 관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사랑이란 감정뿐만 아니라 신뢰와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니까요.

- 『남원고사』의 인간관: 밤 잔 원수 없다

이 작품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절대적인 선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변학도조차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다소 우스꽝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단순히 착하거나 나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남원고사』가 단순한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걸 뜻합니다.

- 『남원고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번 정길수 교수님의 교주본은 단순히 『남원고사』의 원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2,371개의 주석과 200여 개의 교정을 추가하여 『남원고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춘향전』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분들에게, 『남원고사』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춘향의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과 인간 군상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순간, 『남원고사』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매력의 『남원고사』를 읽고 나면, 올해도 5월에 찾아올 남원 춘향제를 가보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정길수 교주본 『남원고사: 남원의 옛 노래 김춘향전』의 들머리(서문)와 날머리(해설)를 통해 먼저 접해 보시죠. 들머리는 텍스트로, 날머리는 이미지 파일로 올립니다.

서문

한국 고전소설사를 공부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어언 30년 전 일이다. 그 뒤로 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 왔지만 아직 못 읽어 본 작품이 많고 소설사의 흐름은 여전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다. 불과 2년 전 『남원고사』를 정독하기 전까지 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춘향전」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다. 「열녀춘향수절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완판 84장본’과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춘향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춘향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남원고사』의 면모, 인간을 보는 독특한 서술자의 시선을 읽고서야 이 작품의 진가를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춘향전」은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 온 고전소설 작품이다. 그런데 「춘향전」이라고 해서 다 같은 「춘향전」이 아니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인 점은 모두 같지만 적어도 수십 종의 버전에서 인물 설정, 에피소드 출입, 서사 전개에 영향을 주는 디테일의 차이가 확인된다. 대중의 끊임없는 사랑과 함께 기존의 「춘향전」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면서 적극적인 독자의 개작이 수행된 결과 이렇게 미세한 차이를 지닌 다수의 「춘향전」 이본(異本)이 탄생했다. 미세한 설정 변화가 작품의 전체적인 색깔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어 「춘향전」이 어떤 작품이라고 하려면 내가 본 「춘향전」이 어떤 버전인지부터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춘향과 「춘향전」에 대한 해석의 혼란은 대개 이본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남원고사』는 초기 버전에 가까운 면모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춘향전」의 대표 버전이다.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이 프랑스 파리로 옮겨 가 있다가 1970년대에 뒤늦게 그 소재가 알려지면서 즉시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나는 가장 생기발랄한 ‘야성’(野性)을 지닌 ‘김춘향’의 형상, 풍성한 디테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웃들, 곧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아닌 인간 군상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서술자의 시선이 좋아 『남원고사』를 「춘향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남원고사』 이후에도 「춘향전」은 수많은 변개를 거치며 유동했거니와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춘향전」의 최고봉은 얼마든 다른 버전의 「춘향전」으로 바뀔 수 있다. ‘내가 본 「춘향전」’이 저마다 다르고 독자마다 취향에 맞는 「춘향전」을 고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춘향전」의 매력이다. 연구자는 물론 고전에 큰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춘향전」, 그중에서도 『남원고사』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세한 학술 주석을 붙여 굳이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을 내는 데에도 많은 분들의 배려와 도움이 있었다. 김동욱·김태준·설성경 세 분 선생과 이윤석 선생의 『남원고사』 주석 연구를 길잡이로 삼아 기존의 성과를 보완하는 교주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23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작품 일부를 강독하면서, 혼자 읽었다면 미처 살피지 못했을 여러 문제를 우리 뛰어난 학생들 덕분에 차분히 검토할 수 있었다. 곽보미 군과 이은채 군이 출판 과정에서 원고의 오류를 여럿 바로잡아 주었다. 선생님과 선배 동학들, 흔쾌히 출판을 맡아 주시고 최선의 지원을 해 주신 알렙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 오늘도 여전히 혼자 연구실에 앉아 이런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4년 6월

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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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발견] 『남원고사』, 춘향전의 숨겨진 보물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버전이 있습니다. 바로 『남원고사』입니다. 이번에 정길수(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남원고사』 교주본을 소개합니다. 단순히 「춘향전」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니라, 그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죠.

- 『남원고사』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남원고사』는 원래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책이 프랑스로 넘어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대에야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죠. 명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본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 『남원고사』 속 춘향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은 한없이 정숙하고, 도령을 향한 사랑 하나로 모든 시련을 견디는 인물로 그려지죠. 하지만 『남원고사』의 춘향은 조금 다릅니다. 도도하고 똑 부러지며, 상황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머리를 써서 해결하고, 필요하면 아양도 떨고, 때로는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죠. 기존의 조신한 여성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혜를 가진 춘향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 『남원고사』가 특별한 이유

『남원고사』는 「춘향전」 중에서도 가장 긴 이야기로, 무려 8만 5천 자에 달합니다. 다른 판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죠. 이 책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몽룡과 김춘향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모습도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남원고사』는 인간의 본성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 사랑의 계약 문서, 훼손된 사랑일까?

『남원고사』에서 가장 독특한 설정 중 하나는 바로 '불망기(不忘記)'입니다. 쉽게 말해, 춘향이 이도령에게 사랑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써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죠. 사랑이라는 게 보통 순수한 감정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원고사』에서는 사랑도 일종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증명할 문서가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이 설정은 현대적 관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사랑이란 감정뿐만 아니라 신뢰와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니까요.


- 『남원고사』의 인간관: 밤 잔 원수 없다

이 작품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절대적인 선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변학도조차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다소 우스꽝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단순히 착하거나 나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남원고사』가 단순한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걸 뜻합니다.


- 『남원고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번 정길수 교수님의 교주본은 단순히 『남원고사』의 원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2,371개의 주석과 200여 개의 교정을 추가하여 『남원고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춘향전』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분들에게, 『남원고사』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춘향의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과 인간 군상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순간, 『남원고사』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매력의 『남원고사』를 읽고 나면, 올해도 5월에 찾아올 남원 춘향제를 가보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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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발견] 『남원고사』, 춘향전의 숨겨진 보물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버전이 있습니다. 바로 『남원고사』입니다. 이번에 정길수(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남원고사』 교주본을 소개합니다. 단순히 「춘향전」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니라, 그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죠.

- 『남원고사』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남원고사』는 원래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책이 프랑스로 넘어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대에야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죠. 명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본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 『남원고사』 속 춘향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은 한없이 정숙하고, 도령을 향한 사랑 하나로 모든 시련을 견디는 인물로 그려지죠. 하지만 『남원고사』의 춘향은 조금 다릅니다. 도도하고 똑 부러지며, 상황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머리를 써서 해결하고, 필요하면 아양도 떨고, 때로는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죠. 기존의 조신한 여성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혜를 가진 춘향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 『남원고사』가 특별한 이유

『남원고사』는 「춘향전」 중에서도 가장 긴 이야기로, 무려 8만 5천 자에 달합니다. 다른 판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죠. 이 책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몽룡과 김춘향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모습도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남원고사』는 인간의 본성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 사랑의 계약 문서, 훼손된 사랑일까?

『남원고사』에서 가장 독특한 설정 중 하나는 바로 '불망기(不忘記)'입니다. 쉽게 말해, 춘향이 이도령에게 사랑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써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죠. 사랑이라는 게 보통 순수한 감정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원고사』에서는 사랑도 일종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증명할 문서가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이 설정은 현대적 관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사랑이란 감정뿐만 아니라 신뢰와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니까요.

- 『남원고사』의 인간관: 밤 잔 원수 없다

이 작품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절대적인 선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변학도조차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다소 우스꽝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단순히 착하거나 나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남원고사』가 단순한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걸 뜻합니다.

- 『남원고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번 정길수 교수님의 교주본은 단순히 『남원고사』의 원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2,371개의 주석과 200여 개의 교정을 추가하여 『남원고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춘향전』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분들에게, 『남원고사』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춘향의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과 인간 군상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순간, 『남원고사』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매력의 『남원고사』를 읽고 나면, 올해도 5월에 찾아올 남원 춘향제를 가보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정길수 교주 |500쪽|25,000원|신국판(152*225)

출간일 2024년 6월 30일|ISBN 979-11-89333-81-2 [93810]

분야 : 문학 > 한국문학 > 근대문학

문학 > 문학사 > 소설사

역사사 > 한국문화사 > 한국문학사

■ 간략 소개

한국 고전소설의 걸작 『남원고사』를 정밀하게 독해하고 「춘향전」 해석의 폭과 깊이를 더하다.

「춘향전」의 결정판, 『남원고사』를 교주하다

서울대 국문학과 정길수 교수가 펴낸 『남원고사』는 국내 연구자로서는 네 번째로 학술 주석을 붙인 교주본이다. 『남원고사』는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이 프랑스 파리로 옮겨 가 있다가 1970년대에 뒤늦게 알려지면서 즉시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춘향전」의 수많은 버전 중 『남원고사』는 생기발랄한 춘향 캐릭터와 서사 구성의 일관성을 지닌다. 그래서 「춘향전」의 초기 버전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정길수 교수는 가장 생기발랄한 ‘야성’(野性)을 지닌 ‘김춘향’의 형상, 풍성한 디테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웃들, 곧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아닌 인간 군상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서술자의 시선이 좋아 『남원고사』를 「춘향전」의 최고봉이라고 말한다.

연구자는 물론 고전에 큰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춘향전」, 그중에서도 『남원고사』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세한 학술 주석(2,371개의 주석, 200여 개에 달하는 교정)을 붙여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정길수 교주 『남원고사』는 프랑스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INALCO) 소장 필사본(5책, 『춘향전사본선집 1』, 명지대출판부, 1977 영인; 김진영 외 편저, 『춘향전 전집 5』, 박이정, 1997)을 저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남원고사』 계열에 속하는 『춘향전』 동양문고본(향목동 세책본: 『춘향전 전집 5』)과 최남선의 『고본 춘향전』(신문관, 1913)을 참고하여 저본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기존의 모든 주석서, 즉 1970년대 김동욱·김태준·설성경 교수의 『춘향전 비교연구』(삼영사, 1979)와 이윤석 교수의 『남원고사 원전 비평』(보고사, 2009),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남원고사』(서울대출판부, 2016)를 참조하면서 주석을 대폭 추가하고 기존 주석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았다.

『남원고사』 학술 주석의 역사

『남원고사』를 읽는 일은 한문소설을 정밀하게 독해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작품 곳곳에 삽입된 한시나 한문 전고(典故)를 파악하는 것은 연구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여하면 거의 해결 가능하지만, 오늘날 그 시대의 우리말과 속어, 속담, 당대의 풍속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이 때문에 자세한 주석서가 필요한데, 최초의 교주본이라 할 최남선의 『고본 춘향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남원고사』 주석의 역사는 한국 고전소설을 통틀어 가장 긴 편에 속한다.

최남선의 『고본 춘향전』은 『남원고사』의 개작본으로, ‘허두가’(虛頭歌)라고 부르는 『남원고사』 서두의 노래를 새로 창작한 노래로 바꾸고, 중국의 지명과 인물 고사를 조선 것으로 바꾸었으며, 외설적인 장면이나 표현을 모두 제거한 것이어서 『남원고사』의 온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고본 춘향전』은 이처럼 『남원고사』의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것도 아니고, 오늘날의 원전 주석에 해당하는 풀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남원고사』 주석의 선구적인 성과이다. 본격적인 『남원고사』 주석 작업은 1970년대 김동욱·김태준·설성경 교수의 『춘향전 비교연구』에서 시작되어 이윤석 교수의 『남원고사 원전 비평』과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남원고사』에 이르렀다.

정길수 교수는 이 책에서 『고본 춘향전』을 비롯하여 가장 상세한 주석을 담은 『남원고사 원전 비평』 등 기존의 모든 주석서를 참조하면서 지금까지 의미와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던 미상 구절에 대한 주석을 대폭 추가하고 기존 주석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구가 적지 않고, 혹 지나친 억측으로 기존의 올바른 주석을 오히려 해친 결과에 이르지 않았는지 조심스러운 바 있다. 정길수 교수는 잘못을 계속 수정하며 한국 고전소설의 걸작 『남원고사』를 정밀하게 독해하고 「춘향전」 해석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바탕이 되는 자료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

『남원고사』, 「춘향전」의 가장 초기 버전이자 대표 버전

춘향이라고 하면 우리는 ‘성춘향’을 떠올리지만 ‘김춘향’도 있다. 이도령이 책방에 갇혀 사는 양반댁 도련님으로 설정된 버전이 있는가 하면 어린 나이에 기생집을 드나들며 기생 상대하는 법을 터득한 난봉꾼 캐릭터로 등장하는 버전도 있다. 모든 버전이 이몽룡과 춘향의 사랑을 테마로 삼아 큰 틀에서 대동소이한 스토리를 가진 「춘향전」이지만, 각각의 버전마다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남원고사』(南原古詞: 남원의 옛 노래)는 「춘향전」의 초기 버전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춘향전」의 대표 버전이다. 1860년대 서울 종로의 누동(樓洞: 다락골)에서 필사되어 서울의 세책가(貰冊家: 도서대여점)에 있던 책이 지금은 프랑스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INALCO)에 있다. 1970년대에 『춘향전사본선집 1』(명지대출판부, 1977)로 영인 출판되었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으로 지목되어 왔다.

『남원고사』는 1823년부터 186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총 5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2·3책은 1864년, 제4·5책은 1869년에 필사되었다. 1860년대에 유통된 책이지만 현재 전하는 「춘향전」 여러 버전 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춘향전」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버전인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가 1906년 무렵에, 신소설 작가 이해조의 『옥중화』(獄中花)가 1912년에 출판된 점, 널리 유통된 이 두 버전과 『남원고사』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 점까지 고려하면 「춘향전」의 초기 버전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남원고사』를 통해 「춘향전」의 원형(原型)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남원고사』 계통의 이본인 일본 동양문고 소장본, 육당 최남선이 1913년 신문관에서 간행한 『고본 춘향전』이 모두 『남원고사』를 변개한 버전이고, 전주의 ‘완판본’과 함께 시장을 양분했던 ‘경판 30장본’ 등 서울의 ‘경판본’은 『남원고사』의 축약 버전에 해당한다.

『남원고사』의 글자 수는 대략 한글 8만 5천 자로,「춘향전」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에 해당해서 ‘완판 84장본’의 두 배 분량에 이른다. 「춘향전」의 원형, 또는 『남원고사』보다 이른 시기에 성립된 초기 버전에 비해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진 결과다. 『남원고사』에서 대폭 확장된 부분은 대개 서사 진행과 크게 관계 없는 소소한 장면의 확대에 해당한다. 때로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시가를 대량 삽입하고, 때로는 리얼리티에 손상을 줄 정도의 장황한 나열식 대화가 이어진다.

『남원고사』는 ‘사랑의 약속’에 관한 소설이다

『남원고사』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의 약속’을 지켰는가, 특히 춘향의 입장에서 사랑 앞에 놓인 달콤한 유혹과 모진 시련을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서 있다. 대단원의 도정에서 만난 인간 군상과 세태는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오싹하다. 그러나 동정을 보내기도 하고 차갑거나 음험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던 주변 사람들은 평소 매몰차고 교만하다 여겨 왔던 춘향의 집념, 사랑을 향한 일념에 차츰 공감하며 한편이 되어 갔다. 그리하여 『남원고사』는 성스럽기도 속되기도 한, 순수하기도 교활하기도 한 인간 존재의 양면에 대한 냉정하고 따뜻한 시선, 실리에 따라 표변하는 세태까지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시선 아래 ‘그럼에도’ 인간의 어떤 마음과 태도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가 묻고 답하는 소설이 되었다.

『남원고사』의 김춘향은 한국 고전소설사에 처음 등장한 독특한 인간형

『남원고사』의 김춘향은 어떤 인물형일까? 작품 곳곳에는 김춘향에 관한 등장인물의 평가가 이어진다. 이에 따르면, 춘향의 성품은 매몰차고 교만하다. 춘향은 본래 도도한 성품에다 부사 아들의 세력까지 끼고는 안하무인으로 관속들을 무시하는, 매우 고약한 ‘아이년’이다. 춘향에 대한 주변 인물의 평가는 완판 84장본을 비롯한 후대 버전에서 정반대로 바뀐다.

김춘향은 위기에 처하면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에게 아양을 부리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으며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들의 마음을 금세 돌리는 법을 아는 능수능란한 여성이다. 얄밉다면 얄미운 캐릭터이나 영악하면서도 깜찍한 정도지 밉살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허판수의 해몽 에피소드까지 보고 나면 『남원고사』의 김춘향은 한국 고전소설사에 처음 등장한 독특한 인간형이라는 점이 좀 더 뚜렷이 드러난다.

앞선 시대 소설의 청순가련형 여주인공과도 다르고, 대쪽같은 지조의 직선적인 여주인공과도 다르며, 교묘한 수단을 부리는 대담무쌍한 악녀와도 다른, 사랑스러우면서도 능수능란한 임기응변으로 상대를 제압해서 자기 뜻을 관철시킬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

『남원고사』의 인간관: 밤 잔 원수 없다

『남원고사』의 인간관은 ‘밤 잔 원수 없다’는 최패두의 말, 곧 ‘밤 잔 원수 없고 날 샌 은혜 없다’라는 속담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하는 춘향도, 매정한 춘향에 앙심을 품고 심술을 부리려다 오히려 자신들의 매정함을 후회하는 두 패두도, 춘향을 향한 욕정과 동정심을 동시에 지닌 허판수와 왈자들도, 신관 사또 ‘변악도’의 눈에 들고 싶어 한껏 치장을 하고 나이를 속이거나 거지 행색의 어사를 푸대접하는 기생도, 오직 눈앞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세태에 가장 충실한 월매도, ‘밤 잔 원수 없는’ 『남원고사』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선악을 넘어 이들 모두 현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물, 영악한 얌체 같지만 사랑스러운 깜찍함이 있고, 사납고 거칠어 보이지만 어수룩하고 순박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 매몰찬 마음과 정다운 마음, 이기적인 마음과 이타적인 마음, 엉큼한 마음과 아끼는 마음, 못난 마음과 잘난 마음을 동시에 가진 존재들이다.

『남원고사』의 작자는 시종 유머러스한 필치로 평범한 인간 군상의 이중적 면모와 함께 그들 하나하나가 가진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며 때로는 거룩함의 편에, 때로는 비속함의 편에 서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천하의 악인이어야 할 변악도조차 종반부로 향할수록 그 악행이 부각됨에도 작품 전편에 걸쳐 밉지 않은 구석이 있는 코믹한 인물로 그려진 데서 이 세상에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남원고사』 특유의 시선이 확인된다. 선인 집단과 악인 집단의 치열한 대결 속에 두 진영 사이에는 그 어떤 중간지대도 있을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는 후대 ‘완판 84장본’과 비교할 때 『남원고사』는 중간지대, 또는 회색지대에 속한 인물 군상에 관한 기록으로 기억될 만하다.

『남원고사』의 세계에는 ‘규범적 당위에 충실한 인간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정직하고 행실이 바른 도덕군자와 요조숙녀는 물론 전형적인 선인이나 의인 캐릭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 춘향과 이몽룡을 포함하여 『남원고사』의 모든 등장인물은 규범적 시각에서 볼 때 나름의 결함을 지닌 존재여서 언제든 타인의 시선 앞에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계약 문서, 훼손된 사랑일까?

『남원고사』의 세계, 19세기 중반 ‘세사난측’(世事難測)의 시대에 살던 김춘향은 첫 만남에서 이몽룡을 평생의 남자라고 확신하자마자 불망기를 요구하고, 훗날 계약이 파기된다면 이 문서를 증거 자료로 삼아 소송을 걸겠다고 했다. 춘향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이몽룡은 기꺼이 문서를 써 주며 정실로는 맞이하지 못 해도 소실로 맞아 백년해로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사랑에 계약 문서가 등장했으니, 애정소설의 전통에서 보자면 사랑의 ‘완전무결한 진실성’에 균열이 생긴 ‘훼손된 사랑’이다. 그러나 설령 출발점은 사또 자제의 위세를 빌려 기생을 불러 보고, 콧대 높은 기생으로서 권력자의 소실이 되어 호사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할지라도 사랑의 진실성과 순수성이 과정으로 입증되는 것이라면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또한 진실하고 순수하다.

춘향과 이몽룡은 모든 시련을 거쳐 마침내 사랑의 약속을 지켰다. 이몽룡은 당초의 약속을 묵묵히 이행했다. 서울로 간 이도령은 “은근히 저[춘향]를 위한 정이 가슴에 못이 되고 오장(五臟)에 불이 되어” 오직 춘향과 백년해로하겠다는 일념으로 과거 공부를 했고, 마침내 남원으로 돌아와 옥중의 춘향을 만났다. 춘향은 오매불망 구원해 주기를 바라던 이몽룡이 패가하여 걸식하는 신세가 된 것을 보고 절망했다. 암행어사 출도 후에 춘향은 옥에서 풀려나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몽룡은 춘향을 “즉시 내려가 붙들고 싶으나” 정체를 감추고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했다. 가혹한 ‘최후 시험’이다. 하지만, 춘향은 최후의 시험에 이르기까지 끝내 목숨을 걸고 사랑의 약속을 지킴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의기 있고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었다.

지은이 정길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고전소설을 공부해 왔고, 동아시아 소설 비교 연구로 공부 영역을 넓혀 가려 한다.

저서 『구운몽 다시 읽기』, 『17세기 한국소설사』, 역서 『구운몽』, 『선가귀감』,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논문 「전쟁, 영웅, 이념」, 「춘향전 인간학」, 「<남원고사>, 혹은 ‘경계인’의 <춘향전>」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불과 2년 전 『남원고사』를 정독하기 전까지 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춘향전」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다. 「열녀춘향수절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완판 84장본’과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춘향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춘향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남원고사』의 면모, 인간을 보는 독특한 서술자의 시선을 읽고서야 이 작품의 진가를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남원고사』는 초기 버전에 가까운 면모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춘향전」의 대표 버전이다.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이 프랑스 파리로 옮겨 가 있다가 1970년대에 뒤늦게 그 소재가 알려지면서 즉시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나는 가장 생기발랄한 ‘야성’(野性)을 지닌 ‘김춘향’의 형상, 풍성한 디테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웃들, 곧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아닌 인간 군상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서술자의 시선이 좋아 『남원고사』를 「춘향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4-5쪽)

이 세상에 매우 이상하고 신통하고 거룩하고 기특하고 패려(悖戾)하고 맹랑하고 희한한 일이 있것다. 전라도 남원(南原) 부사(府使) 이등 사또 도임시(到任時)에 자제 이도령이 연광(光)이 16세라, 얼굴은 진유자(陳孺子)요, 풍채는 두목지(杜牧之)라, 문장은 이태백(李太白)이요, 필법은 왕희지(王羲之)라. 사또 사랑이 태과(太過)하여 도임 초에 책방(冊房)에 기생(妓生) 수청(守廳) 들이자 하니 색(色)에 상할까 염려하고, 통인(通引) 수청 넣자 하니 용의(容儀) 골까 염려하여 관속(官屬)에게 분부하되 (23-24쪽)

“소녀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춘향이요, 나이는 이팔이로소이다.”

이도령 이르는 말이

“신통하다! 네 나이 이팔이라 하니, 나의 사사 십육(四四十六)과 정동갑(正同甲)이로고나.”

또 묻되

“생월생시(生月生時)는 어느 때니?”

춘향이 대답하되

“하사월(夏四月) 초팔일(初八日) 축시(丑時)로소이다.”

“어허, 공교하다! 눈 무섭다! 방자야, 네가 아까 수군수군하더니 내나와 생일을 다 일러바쳤나 보고나. 그렇지 않으면 이럴 일이 있느냐? 대저 신통기이하다, 다 맞아 오다가 똑 시(時)만 틀렸으니! 나 해산할 제 불수산(佛手散)을 급히 달여 거꾸로 먹었더면 사주 동갑(四柱同甲)될 뻔했다. 어찌 반갑지 않으며,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72쪽)

이도령은 춘향을 “여중군자(女中君子)며 화중일색(花中一色)”이라 보아 정실부인으로는 맞지 못하나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했고, 춘향은 처음부터 이도령을 “만고영걸”(萬古英傑)이라 여겨 인연 맺을 마음을 품었으나 이도령이 변심하지 않고 백년해로하리라는 서약서, 곧 ‘불망기’(忘記)를 받아낸 뒤에야 마음을 허락했다. 순정하고 고결한 사랑과 ‘불망기’는 잘 어울리지 않고, 따라서 한국 고전소설의 전통에서도 ‘사랑의 계약’이라는 설정은 낯선 것이지만, 기생 여주인공이 사랑의 한 축으로 등장하면서 독특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475쪽)

김춘향은 애당초 이도령의 정실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도령이 출세하고 요조숙녀를 정실로 맞은 다음 자신을 잊지 말고 소실로 삼아 평생을 함께한다면 사랑의 약속은 지켜지는 것이다. 이도령은 기생 춘향을 정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았다. 소실로 삼아 백년해로하겠다는 약속을 굳게 했을 뿐이다. 춘향은 이별 앞에 목숨을 끊어도 좋다고 했고, 이도령은 변치 않는 자신의 마음을 믿으라고 했다. 『남원고사』는 이처럼 사랑의 서약 장면을 「춘향전」 어떤 버전보다도 길게 확대한바, ‘사랑의 약속’에 관한 소설이라 할 만하다. (476-477쪽)

본격적인 『남원고사』 주석 작업은 1970년대 김동욱·김태준·설성경 세 분 선생의 『춘향전 비교연구』(삼영사, 1979)에서 시작되어 이윤석 교수의 『남원고사 원전 비평』(보고사, 2009)과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남원고사』(서울대출판부, 2016)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는 『고본 춘향전』을 비롯하여 가장 상세한 주석을 담은 『남원고사 원전 비평』 등 기존의 모든 주석서를 참조하면서 지금까지 의미와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던 미상 구절에 대한 주석을 대폭 추가하고 기존 주석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구가 적지 않고, 혹 지나친 억측으로 기존의 올바른 주석을 오히려 해친 결과에 이르지 않았는지 조심스러운 바 있다. 잘못을 계속 수정하며 한국 고전소설의 걸작 『남원고사』를 정밀하게 독해하고 「춘향전」 해석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바탕이 되는 자료로 만들어 가고 싶다. (488-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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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발견]

《서울리뷰오브북스》 봄호 편집마감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다음 특집 주제는 ‘시의성 있게’ ‘헌법의 순간’으로 정했습니다. 출간 주기가 3개월인 계간지가 매번 시사/이슈에 대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지난 겨울호는 시의에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책이 나오자마자 비상 계엄 사태, 그리고 그로 인한 탄핵 정국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만화라는 소우주”에 스며들어 보는 것은 한번쯤 권할 일이 아니었나 쉽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준비했지만, 빅이슈에 파묻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 “만화-책-큐레이션”을 다시 소개해 드립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 16호(2024년 겨울호)의 특집 주제는 ‘만화라는 소우주’이다. “허구한 날 책은 안 읽고 만화나 본다”며 한소리 들었던 어린 시절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보통의 책’에 비해 만화를 낮추어 보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은 철 지난 것이 된 지 오래다. 책의 세계가 우주라면 만화는 그 자체로 소우주를 이루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만화라는 광활한 소우주를 유영하며, 네 편의 만화를 만나 본다. 만화가 선우훈은 최근 드라마화되며 더욱 화제를 모았던 서이레·나몬의 『정년이』를, 출판 및 시각예술 기획자 한윤아는 최성민의 첫 장편만화 『좁은 방』을, 편집자 김미래는 아마존 베스트셀러 그래픽노블 작가 앨리슨 벡델의 『초인적 힘의 비밀』을, 소설가 김화진은 2023년 일본 만화대상 2위를 차지한 『아카네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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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만화나 본다”며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던 어린 시절 추억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보통의 책에 비해 만화를 낮추어 보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일이다. (……) 책의 세계가 우주라면 만화는 그 자체로 소우주를 이루었다. 글자가 아닌 그림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고 해서 혹은 종이책이 아니라 인터넷에 올라온다는 형식을 이유로 책의 우주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 (……) 《서울리뷰오브북스》는 16호 특집 리뷰로 ‘만화라는 소우주’를 준비했다.

―유정훈 「편집실에서」, 2-3쪽

『정년이』는 최근 여성 서사로 분류되는 작품들 중에서도 다양한 면에서 여성 서사의 본질을 충실히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의 관점, 관계, 성취뿐 아니라 ‘여성국극’이라는 실제로 존재했던 여성들의 역사를 소재로 삼고 있다.

(……) 여성국극이라는 소재를 다룬 『정년이』는 극 중 인물들의 여성 서사일 뿐 아니라, 여성들이 한때 향유했던 문화적 장을 세밀하게 그려 내고, 스스로 다시금 그러한 장을 창출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선우훈 「재밌지 않니?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 16-18쪽

결론적으로, 다예의 환상 서사 전략은 실패한다. 이 실패의 서사는 도처에 널려 있다. (……) 다예의 서사는 순정만화의 ‘남주’를 통해 그리는 판타지, 아이돌 가수를 향한 사랑과 비슷한 면이 있다. 만약 그것이 현실의 성적 상징계를 전도시키고 위반하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면, 판타지를 통해 소유하고자 했던 꽃미남 오빠들의 좁은 방을 열어젖히는 순간, 다예는 환상을 불능으로 만드는 진짜 가부장적 실체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다예에게 유예의 시간이 실패의 문턱으로 재확인되는 순간인 것인지,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한윤아 「‘좁은 방’에 침잠하는 시간」, 45쪽

『초인적 힘의 비밀』은 보디빌딩부터 피트니스, 아웃도어 스포츠, 주짓수와 같은 아시아 무술, 요가와 같은 치유성 수련의 대중적인 유행을 연대순으로 훑으며, 자신이 거친 시대와 시대에 맞게 형성해 나간 자기의 몸을 보고하는 책이다. (……) 흥미롭게도, 사실은 더한층 만화답게도, 이 책은 유행하는 스포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진화하는 스포츠웨어에 깊이 감사하며, 시대별 스포츠에 푹 몸을 담그며 살아온 덕에, 몸의 변화, 즉 노화와 질병, 에이징커브를 맞으며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아마추어 스포츠인의 그야말로 끝 모르는 열정을 보여 준다. 평생에 걸친 신체적 건강에 관한 열정, 영혼 담는 바구니의 단련이라는 열정을.

―김미래 「비밀 누설하기」, 53쪽

나는 아카네 모르게 아카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속삭인다. 나도. 나도 수많은 이야기를 배울 거야. 이야기를 친구라고 믿는 아카네를 친구로 믿으며 나는 힘을 낸다. 어떤 시기를 그만두고 어떤 시기를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그럴 때 어떤 이야기는 계속되어 가는 와중이라는 사실까지 포함하여 좋다. 아카네에게 라쿠고인 것이 나에게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김화진 「그만두는 일, 시작하는 일, 소설가의 일」, 74쪽

결국 이들은 스스로 신체적 존엄성을 내던지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 또한 동료 시민에게 기존의 권리 체계가 정당한지 논의해 보자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이자 같은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으로서 지닌 존엄성을 증명해 보인다. 기어가는 몸짓에 권리 주장이 체현된 이러한 장면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동정이 아니라 숭고다. (……) 이렇게 포체투지는 기어가는 행위의 의미가 단지 동정의 몸짓에만 국한되던 기존 시선을 깨트리고 정치적 주체의 숭고한 몸짓으로 이를 전용하는 전복적 행위가 된다.

―김도형 「전장연 시위라는 사건」, 101-102쪽

무위의 시간은 저자에게 일터와 도시라는 기존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심의 장을 열어젖힌다. 따라서 무위는 어떤 완결이 아닌, 하나의 전환이자 접속이다. 그것은 비유컨대 우리의 관심과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쏟을 수 있게 돕는 키이다. 우리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탈 수도 있고, 또 전혀 낯선 장소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참다운 나/너를 찾을지도 모른다.

―이두은 「무위의 계보학」, 124쪽

디지털 기술 시대의 인쇄술과 소량 제작 방식은 책을 훨씬 쉽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이제는 누구나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저자가 될 수 있고 소규모 출판도 가능해졌다. 그 결과 세상에는 작고 다양한 목소리가 많아졌다. 지역의 목소리가 선명해지고 감춰져 있던 장면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야말로 책의 미래이자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가능성 아닐까.

―정재완 「싱가포르에서 가져온 책 세 종」, 137쪽

50대의 마스다 미리는 『누구나의 일생』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리텔링’한다.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두렵지만 꿈꿔 볼 만한 미래에 대해 말하던 ‘30대의 마스다 미리 자신’을 저성장과 코로나로 점철된 ‘2020년대’에 데려다 놓는다. 그것이 만화 작가의 일이라는 듯. 시대와 호흡하는 게 작가의 일이라는 듯. 나는 독자이자 편집자로서 마스다 미리의 『누구나의 일생』을 그렇게 읽었고, 이 작품은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만화 대상에서 단편상을 수상했다. 나는 예술과 만화 그 어디쯤에 다시 선 기분이 든다.

―고미영 「20세기 말 순정만화 잡지 독자가 지금을 호흡하는 이야기」, 149쪽

K-의료는 이미 ‘값싼 의료’가 아니다. (……) 이 점에서 우리는 이미 남들만큼 쓰고 남들만큼의 성과만 내는 단계에 와 있다. 의료비 지출이 매우 빠르게 늘었기 때문이다. 의료비 지출 총액을 계속 늘릴 수는 없으니 덜 필요한 의료에서 더 필요한 의료로 돈을 옮겨 와야 한다. ‘뒤틀린’ K-의료의 전체적인 재조정,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이동진 「기자의 눈으로 본 K-의료의 정치경제학」, 159쪽

폭염은 자연 현상이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공공성이 무너진 곳에서 재난으로 드러난다. 즉, 폭염은 자연 재난인 동시에 사회적 재난이기도 하다. (……) 인간이 일으키는 폭염은 결국 인간의 손길만이 해결할 수 있다. 폭염 대응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감수성이 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즉 폭염이 우리 수준을 드러낼 것이다.

―조천호 「불타는 폭염에서 불타는 야망으로」, 172-174쪽

현실에 없는 ‘중간의 아이’를 기준으로 가르치는 교실에서 학습 격차가 커질수록 교육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올해 봄 교실에서 내가 느꼈던 막막함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학습 격차는 한 사람의 교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그렇다고 교사를 갑자기 대규모로 훈련해서 학교에 배치할 수도 없다. 이때 교사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도구가 맞춤형 학습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다.

―정은진 「모두가 다르게 배우는 하나의 교실을 위해」, 182-183쪽

이름만 ‘횡행’한다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현재 그의 학술적 위상에 비해서는 스펜서의 이름이 매우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상 자체를 광범위하게 보급시킨 데에 그의 영향은 매우 컸다. 앞에 언급한 대로 스펜서에 가장 열광했던 미국과 일본의 경우는 사회진화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근대 사회를 구축한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일본의 사회진화론 수용은 일본 국내에 그치지 않고 이후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도형 「이상적인 사회로의 진화, 아니 진보에 대한 지적 탐색」, 199쪽

책 한 권을 끝내고 나면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진 것처럼 허전하고 마음이 한 번 몸살을 앓는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오로지 텍스트에 빠져 저자의 의중을 헤아리려고 집중한 노력으로 연애를 했다면, 아마 그 어떤 연애도 성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마감 과정의 치열함에 진이 빠져 “아휴, 이제 번역 그만해야지”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출판사에서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같이 작업하실래요?”라는 메일이 오면 매번 넘어간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즐거움. 그 중독적인 매력. 그래서 나는 오늘 밤도 노트북 앞에 앉아, 영어사전을 띄운다.

―박누리 「옮기는 이의 말」, 229쪽

작가는 일생 동안 단 한 권의 책을 쓴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어쩌면 독자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한다. 아닌 척해도,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내면의 눈으로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을 떠서 텍스트를 읽는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눈을 감아야 보이는 암흑 속 빛에 기대어 일생 동안 오독한다. 그렇다면 수없이 많은 책을 읽지만, 우리가 일평생 읽는 것은 결국 단 한 권의 책일지도 모르리라. 단 한 권의 책. 내가 쓰기 원하고, 또 읽기 원하는.

―백수린 「단 한 권의 책」,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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