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ㅣ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그다지 활발한 시장이라고는 못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종종 드라마CD가 제작 된다. 거의 매달 그것들을 구입해 듣곤 하는 것은 이제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나의 즐거운 취미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다.
최근의 드라마CD 시장은 라디오가 대세이던 20세기 중반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내가 즐겨 듣곤 하는 드라마CD의 주구매층은 20대 전후의 젊은 세대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영상물에 익숙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때로 드라마CD를 "듣는 만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만화라는 건 그림인데 드라마CD는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소리, 즉, 청각으로 만화를 본다? 언뜻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소리로 만화를 즐긴다.
말하자면, 모델을 안 보고 목소리만 듣고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피암보는 "듣는 만화"를 보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디오드라마로 만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적절한 소재다.
즐겨 듣는 드라마CD 중에 <더 자라(The Jara)>라는 시리즈물이 있다. 내용의 대부분은 단순히 성우가 1부터 200까지 숫자를 세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 남자 주인공은 가상의 여성을 상대로 대화를 한다. 여성의 목소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이 여성이 누구인지, 남자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전적으로 듣는 이의 상상에 달렸다. 이 여성은 듣는 이 자신일 수도 있고 혹은 또다른 가상의 존재일 수도 있다. 청자는 자유롭게 자신만의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얼굴 없는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우리의 주인공 피암보도 뭐가 현실이고 뭐가 환상인지 모르는 모호한 세계로 점점 빠져간다. 샤르부크 부인이 들려주는 신비한 이야기들, 도시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사건들, 마약, 살인, 음모, 질투... 이런 것들이 뒤섞여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피암보 자신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드라마CD가 끝나면 잠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듯이, 피암보도 결국은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어지럽게 널려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아 들어가며 진실을 드러내 보인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은 그렇게 잘 연출된 공연처럼 모든 요소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더 자라>의 목소리 없는 여주인공처럼 적당한 여백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부분은 독자가 취향대로 채우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된다.
피암보나 다른 화가들이 샤르부크 부인의 외모를 정확히 묘사하려고 혈안이 되는 게 솔직히 좀 답답했다. 샤르부크 부인, 아니, 루시어가 진정 원했던 게 자신의 얼굴을 점 하나 털 하나까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었을까. 루시어가 자기 생각을 설명해도 물론 피암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 했지만.
다음 주면 또 한 편의 새로운 드라마CD가 발매될 예정이다. 이번엔 또 어떤 환상을 보여줄지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