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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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이 〈시간의 역사〉를 처음 집필할 당시 방정식이 하나 들어갈 때마다 판매부수가 반으로 줄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방정식 없이 〈시간의 역사〉가 쓰여진 평행우주에서는 두 배로 책이 많이 팔렸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우리 우주의 〈시간의 역사〉에는 방정식이 들어갔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형사 실프와 평행우주의 인생들〉은 과학소설도 아니고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교양서적도 아닌 주제에 방정식들을 박아넣었다. 뿐만 아니라 평행우주나 끈이론 같은 최신 물리이론과 관련 용어들을 마구 쏟아낸다. 이러다 판매부수가 반토막 나는 정도가 아니라 0으로 수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학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간단 명료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길 좋아한다. 그들은 우주가 궁극의 방정식으로 설명되길 원한다. 그런 관점에서 비록 방정식을 사용해도 이 책은 그다지 효율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수많은 평행우주를 떠돌아 다니는 것처럼 이야기는 확장되고 문장은 뒤엉킨다.

추리소설이고 살인사건이 나오지만 대개 그렇듯 범인은 "이 안에" 있었고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물들의 불완전하고 불안한 심리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각종 물리 용어와 개념과 방정식들. 등장인물 중에 물리학자가 둘이나 있기도 하지만 이 재료들은 그들이 사는 우주, 각각의 인생과 그 상관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방정식과 물리개념을 이용한 심리묘사가 이토록 절묘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작가의 발상과 기교에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의 재료들을 빌려쓰고 있지만 이 책의 주된 내용이 누구의 이론이 옳은가의 과학적 증명인 건 아니다. 매력적인 이론임에도 증명할 수 없다는 맹점을 지닌 평행우주 이론에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우리의 삶을 빗댄 그냥 소설일 뿐이다. 인간이란 우주의 관찰자이면서 우주의 일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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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영수(듀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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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의 어느날. 선배의 소개로 PC통신에 올라왔던 듀나의 단편을 처음 접했다. 〈태평양 횡단특급〉에 수록되기도 했던 무궁동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여운 때문인지 듀나의 글들을 읽다보면 뭔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번 작품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게임안에 갇힌 NPC마냥 시스템안에서 각자의 몫에 따라 주어진 일을 반복한다. 자신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정해놓은 일을 정해진 시간동안 수행할 뿐이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진출한다고 해도 스스로의 추진력을 갖지 못 하고 여전히 다른 누군가가 정해놓는 길위에서 움직일 뿐이다. 사회비판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여기에서 기득권층의 음모나 부조리한 관습 같은 걸 끄집어 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선도 악도 자비나 구원따위도 없다. 갑갑한 일상과 모든 차원을 막아놓은 벽들만 있을 뿐이다.

그속에서 종종 작은 틈새를 발견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틈새를 찢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간다고 해서 행복의 유토피아나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잔인한 진실앞에서 무력함을 깨달을 뿐이다.

그러나가 문득 그 점에 주목하게 된다.

거기에 벽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의 삶을 반복하며 자신이 특정한 시스템이나 견고한 벽안에 갇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 한다. 벽을 깨닫는 순간 거기에서부터 좌절이 시작된다.

시스템에서 달아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 보거나(호텔),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챙길 것은 챙기고 물러나거나(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소유권), 시스템에 적응해 살아 남거나(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결국 누구도 절대적인 종말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디북)

저 너머로 떠날 준비가 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어 줘야겠지.

좌절할 준비는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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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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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보다보면 미래의 진화한 인류 혹은 지구인보다 진보한 외계인의 모습으로 뇌가 발달해 머리만 열라 큰 생물들이 등장하곤 한다. 현대인들이 뇌라는 기관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에서 우월성을 찾기 때문일 거다. 그에 비해 이 책에서 백만년 후의 인류는 쓸데없이 큰 뇌는 쪼그라들고 새로운 환경에 멋지게 적응한 생물들로 그려진다.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유령이라는 점도 그렇고, 시종일관 인간의 커다란 뇌를 비꼬는 문장들은 마치 과학과 인류 지식의 진보를 비웃는 듯 보이기도 한다. 백만년이라는 시간을 오가며 중구난방으로 내용이 끊어지는 감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 나름의 과학적 시각으로 일관되게 끌어가고 있다. 치명적인 유전병들이 다음 세대에 전해질 확율은 반반이며, 이 또한 자연 선택에 의해 도태될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유용한 기관은 발달하고 불필요한 기관은 퇴화된다.

자연 선택. 얼마나 잔머리를 잘 굴리고 얼마나 남을 잘 속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연" 환경에 잘 적응하느냐가 종의 생존을 결정한다.

순식간에 수많은 생명을 전멸시키고 지구를 두 쪽 낼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고, 세계 경제를 파탄 낼 정도의 탐욕에 찌들어 남을 속이기에 급급한 인간의 뇌가 과연 인류라는 종의 생존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전쟁 때문이든, 환경 파괴 때문이든, 인류가 이러다 자멸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기 하게 만든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 뿐이라면 본문의 내용처럼 그것은 도태 되어야 할 쓸데없이 크기만 한 기관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발하고 발랄한 발상을 끄집어 낸 것도 커트 보네거트라는 인간의 뇌였다. 뇌에도 종류가 여러가지이니까 커다란 뇌가 정말 자기 파괴적이고 불필요한 지를 확인하려면 좀더 실험이 필요할 것 같다. 한... 백만 년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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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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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은 조금 힘겹게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커트 보네거트 스타일에 슬슬 적응이 되는 것인지 〈고양이 요람〉은 의외로 술술 읽혔다. 작가 특유의 유머와 위트가 돋보이는 문장들을 보며 계속 키득거리게 되더라지. 그러면서도 어쩐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미묘한 기분이라니.

이야기에는 두 명의 성자(?)가 등장한다. 과학 발전에 기여한 천재 과학자 펠릭스 호니커 박사, 그리고 허무주의 사이비 종교를 만든 보코논. 노벨상 수상자에 모두가 떠받드는 과학자이지만 핵무기를 만들었고 정작 인간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호니커 박사. 독보적인 사상으로 허무와 절망에 빠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결국 종말에 이른 종교 지도자.

과학과 종교. 현대 인류 문명은 이 두 기둥위에 쌓아올렸다고 할 수 있으리라. 둘 다 진리를 추구하고,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기여한다고 떠벌인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핵폭탄 같은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어 학살을 자행하고 신의 이름을 팔아 사람들을 현혹해 분쟁을 조장한다. 과학도 종교도 그 자체로 악한 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들이지. 과학과 종교,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들의 위선과 탐욕을 향한 비아냥이 이 책을 꽉꽉 채우고 있다.

실뜨기 놀이를 의미하는 영어 고양이 요람(Cat’s Cradle)을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한 것부터가 과학과 종교 어느쪽의 관점에서 봐도 재미있다. 방정식 마냥 단어의 표면만 보고 정작 인간을 이해하지 못 했던 과학자, 두툼한 경전을 쓰고 많은 신자들이 그의 말씀을 떠받들지만 모든 종교는 거짓이라고 외치는 사이비 교주. 겉은 번지르하지만 인간들이 추구하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약한지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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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와 죽고 싶은 광대 - Extreme Novel
노무라 미즈키 지음, 최고은 옮김, 타케오카 미호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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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미즈키의 문학소녀 시리즈 중 첫번째. 이 시리즈는 인간실격, 폭풍의 언덕 등 고전 문학을 모티브로 하는 라이트노벨이라고 들었다. 과연 라이트노벨로 포장된 일본 젊은이들의 고전읽기는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에서 책을 펼쳤다.

문학소녀와 죽고 싶은 광대는 일본의 대표적 문학작품 중 하나인 〈인간실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밖에도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작품들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부터 미야자와 겐지까지 여러 문호와 그들의 온갖 작품들이 언급된다.

〈인간실격〉을 읽고 그 문장에 빠져든 청춘들, 고뇌속에서 몸부림치다 파멸로 내달린 요조의 모습은 코노하이면서 슈지이면서 다자이 오사무이면서 독자이기도 하다. 이야기속 주인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자기 인생을 비춰보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의 힘이리라.

이 책은 어디까지나 "라이트"노벨이다. 나름 잘 생겼으면서 숙맥인 남학생부터 귀여운 척 하면서 툭하면 넘어지는 여학생까지 만화와 라이트노벨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여기에 적당한 학원로맨스와 미스터리 요소들이 가미되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와 〈인간실격〉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분석은 상당한 수준으로 보였으나 그런 쪽의 지식이 없다고 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오히려 라이트노벨의 캐릭터성과 서술방식에 익숙하지 않다면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나또한 여기에 언급되는 문학작품들을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그런 걸 모른다고 해서 못 읽을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해당 작품들을 - 최소한 주된 모티브가 되는 작품만이라도 - 미리 읽고 문학소녀를 읽는다면 느낌이 다를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이든 후든 관련 작품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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