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영수(듀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 말의 어느날. 선배의 소개로 PC통신에 올라왔던 듀나의 단편을 처음 접했다. 〈태평양 횡단특급〉에 수록되기도 했던 무궁동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여운 때문인지 듀나의 글들을 읽다보면 뭔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번 작품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게임안에 갇힌 NPC마냥 시스템안에서 각자의 몫에 따라 주어진 일을 반복한다. 자신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정해놓은 일을 정해진 시간동안 수행할 뿐이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진출한다고 해도 스스로의 추진력을 갖지 못 하고 여전히 다른 누군가가 정해놓는 길위에서 움직일 뿐이다. 사회비판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여기에서 기득권층의 음모나 부조리한 관습 같은 걸 끄집어 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선도 악도 자비나 구원따위도 없다. 갑갑한 일상과 모든 차원을 막아놓은 벽들만 있을 뿐이다.

그속에서 종종 작은 틈새를 발견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틈새를 찢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간다고 해서 행복의 유토피아나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잔인한 진실앞에서 무력함을 깨달을 뿐이다.

그러나가 문득 그 점에 주목하게 된다.

거기에 벽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의 삶을 반복하며 자신이 특정한 시스템이나 견고한 벽안에 갇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 한다. 벽을 깨닫는 순간 거기에서부터 좌절이 시작된다.

시스템에서 달아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 보거나(호텔),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챙길 것은 챙기고 물러나거나(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소유권), 시스템에 적응해 살아 남거나(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결국 누구도 절대적인 종말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디북)

저 너머로 떠날 준비가 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어 줘야겠지.

좌절할 준비는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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